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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니노스 님의 서재입니다.

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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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니노스
작품등록일 :
2013.09.20 23:24
최근연재일 :
2013.11.2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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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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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17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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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북변경의 야노슈 (6)

DUMMY

루푸스는 눈을 떴다. 지도를 보다가 잠이 든 모양인지, 그는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그가 베고 잔 지도에는 침자국이 흥건했다. 그 지도는 제일 질이 좋고 보관 상태도 양호했던 물건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지만 그런다고 이미 생긴 자국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당황해하는 그의 어깨에서 무언가가 바닥으로 풀썩 떨어졌다. 이불이었다. 누가 자고 있는 그에게 덮어주고 간 모양이다. 이제보니, 끈 기억이 없는 촛불들도 모두 꺼져 있다.


알리아일까, 하고 생각한 순간 온갖 생각과 감정이 떠올랐다. 그는 새벽의 찬 공기와도 같은 결의로 그 모든 것을 하나하나 억누르고, 지워나갔다. 잠든 그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촛불을 끄고 나간 것이 알리아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의 방 앞을 지나간 노예 중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설령 알리아였어도 뭐가 어쨌단 말인가. 알리아는 노예고, 루푸스는 주인이다. 그는 자신이 어젯밤에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아직 루푸스가 제국어를 통달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 랑골어가 통하는 몇몇 노예들과 상대적으로 더 친하게 지냈던 것은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유일하게 루푸스의 또래였던 알리아와는 특별한 사이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것은 어렸으니까, 아직 신분과 계급이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때였으니까 가능한 일이었다고 루푸스는 생각했다. 실제로, 둘의 관계는 나이를 먹게되자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이후로는 데면데면한 사이로 지금껏 지내왔다. 그녀는 노예고, 루푸스는 위엄과 자비로서 그녀를 대할 뿐, 그녀의 앞에서 약한 소리를 한다던가하면 안되는 것이다. 루푸스는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는 창문으로 가, 나무로 된 덧문을 활짝 열어재꼈다. 희미한 햇빛이 방 안으로 쏟아졌다. 제멋대로 펼쳐져 있는 지도들을 원래대로 말아놓으려다, 아침 식사 후에 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옷장에서 꺼낸 편한 옷으로 갈아 입고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도 루푸스가 떨쳐버리지 못한 생각은, 어젯 밤, 눈물을 닦아준 것이 그가 아니였다는 것이었다. 상대의 눈물을 닦아준 것은 오히려 알리아였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마음 한구석이 아릿해졌지만, 그는 그것에 신경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새벽의 안뜰엔 안개가 가득했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거미줄에 맺힌 이슬들이 보석처럼 밝게 빛나고, 잠에서 깨어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안뜰에 가득했다. 루푸스는 마음이 착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안뜰을 걷는 것은 그의 심신안정에 언제나 마법 같은 효과를 발휘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그에겐 마법이 필요했다. 근 몇년간 나름 평온했던 그의 인생을 감안해보면, 어제 하루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다사다난했던 것이다. 이방인들, 군대, 연회, 잊고 싶은 과거와의 재회까지...굳이 사족을 달자면 잠도 부족했다.


"후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연회의 이방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야노슈, 엘러드, 마르쿠스, 마고, 키르낙. 그 엘레니인 행정관의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 손이 무척 컸던가. 비밀을 품고 있는 낯선 자들. 자신이 그들과 무슨 일을 해야한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자들이다. 하지만 그 꿍꿍이가 대체 무엇인가. 어젯밤에 수상한 이야기를 엿듣긴 했지만, 정작 결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 저들에게 공문서인지 뭔지가 없다는 것 정도? 거기다, 야노슈가 비록 숨기는 것은 있어도 플라비우스나 레분툼시에 뭔가 해를 끼칠 것 같지도 않았다. 마르쿠스와 엘러드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것만 봐도 그렇다. 그래도 플라비우스에게 말을 해야하는 것인가. 만약 한다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루푸스는 다시 어제의 연회를 떠올렸다. 플라비우스의 얼굴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미소가 떠오른다. 어제 플라비우스의 웃는 얼굴을 본 순간, 루푸스는 야노슈가 그에게 어떤 존재인지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플라비우스에겐 옛 친구들이 거의 남지 않았다. 그는 고향 마을도, 젊은 시절을 보낸 도시들도 모두 잃었다. 함께 민병대를 일으킨 동료들은 단 하나도 남김없이 죽었다. 야노슈와 엘러드는, 플라비우스의 빛나는 시절을 공유하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인 것이다. 괜한 말을 해서 그들을 모함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플라비우스는 단 한번도 루푸스에게 그렇게 자연스러운 미소를 보여준 적이 없는 것이다.


얼마나 답답한가.


얼마나 한심한가.


루푸스는 자신의 마음을 짓누르는 문제들이 무엇인지 아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이미 인지한 문제들을 직시하지 못할만큼 자기기만적이거나 어리석은 편도 아니었다-알리아의 건은 잠시 잊도록 한다-. 단지, 그것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을 뿐. 루푸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어느새 안개도 옅어져, 푸르른 하늘이 보인다. 답답한 마음도 안개처럼 흩어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루푸스였다.


"루푸스냐?"


등 뒤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에, 루푸스는 몸을 돌렸다. 키는 루푸스보다 한 뼘 정도 크고, 어깨도 양쪽이 각각 한 뼘씩 넓은게 아닐까 싶은 거한이었다. 야노슈였다. 그는 아무 장식 없는 흰 투니카에 반바지만 입고 있었는데, 빌려입은 물건인 듯 옷이 그의 거대한 몸에 비해 너무 작아 어떻게 터져나가지 않고 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그는 긴 갈색 머리를 한데 모아 묶어 두고 있었는데, 아마 본인이 대충 묶은 것인지 묶이지 않고 삐져나온 머리카락들이 거의 봉두난발 수준으로 뻗쳐 있었다. 어제의 화려하고 잘 정돈된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는데, 웬지 이 쪽이 평소 모습에 가까울거라고 루푸스는 생각했다. 루푸스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전하. 산책 나오신겁니까?"


루푸스는 어제 엘러드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알케트의 왕이자 산왕 전당의 주인. 무슨 말인지는 전혀 이해도 되지 않고 알 바도 아니지만, 어쨌든 왕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생각해보니 대화는 어제도 했고, 그때는 그에게 별다른 경칭을 붙인 적이 없었지만 일단 지금은 전하를 붙여주었다. 그런 격식을 엄격하게 따지는 사람 같진 않았지만, 이쪽에서 지레짐작하고 행동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 루푸스에게, 야노슈는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왕관을 쓰지 못했으니 왕이라고 하긴 부끄럽지. 왕자도 왕만큼은 아니다만 우습기 짝이 없어. 이젠 왕자 같이 행동한다던가 왕자의 생활 같은게 뭔지도 가물가물하고, 또 그 왕자의 생활이란게, 솔직히 말하자면 왕궁에서 살았을 때도 지금보다 잘 살았던건 아닌 것 같거든. 산민들은 보통 가난한게 아니니까."


그는 말을 멈추고는 씩 웃어보였다.


"그래서 한동안은 편한대로 대장이니 야노슈니 스테파누스니하는 이름으로 불러도 된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보통 사람들에겐 그게 더 불편한 것 같더라. 처음엔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됐어. 너무 옛날부터 같이 굴러서 감당이 안되는 녀석들 말고는 이젠 다들 왕자라고 하지. 이야기가 길어졌군. 내 말은, 전하보다는 왕자님이 나을 것 같다는거야."


루푸스는 어떤 것이 적절한 대답일지 잠시 고민했다.


"알겠습니다, 왕자님."


야노슈는 뭐가 우스운지 킬킬거렸다. 왕-혹은 왕자-의 위엄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갑옷 입은 모습은 그렇게 위엄 넘쳤건만. 루푸스는 거의 안타깝기까지 한 것이었다.


"끔찍하게 어색하네. 너 친구 없지?"


루푸스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가 없는게 자랑거리도 아니고 좋은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있는 사실을 부정할 것까진 없는 것이다.


"예. 어릴 적부터 친구를 사귈 기회가 없었습니다."


알리아라는 이름이 기습적으로 뇌리를 스쳤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대신 루푸스는 야노슈에게 신경을 집중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전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눈살까지 찌푸리며 나무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루푸스가 보기엔 아무 특징도 없는 나무에 불과했다. 한참 후에야 어쩌면 나무를 보고 있는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푸스도, 과거의 망령을 떠올릴 때면 저렇게 눈살을 찌푸리곤 했으니까. 꽤나 구체적인 것들을 기억하고 있는 알리아와는 달리, 루푸스의 과거는 형체 없는 그림자에 가까웠다. 부모도, 형제도 있었는지조차 애매하다. 루푸스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없었어."


잊혀진 기억 속으로 침잠해들어가던 루푸스는, 야노슈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예?"


야노슈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시선은 그대로 전나무에 고정된 채였다.


"나도 친구가 없었다고. 굉장히 오랫동안 내 목숨 하나 건사하기도 바빴지."


루푸스는 상대의 말에서 묘한 찝찝함을 느꼈다가, 그 이유를 곧 알아차렸다.


"엘러드가 있지 않았습니까?"


야노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옆얼굴만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루푸스는 그의 표정이 슬퍼 보인다고 멋대로 생각했다. 루푸스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닌지, 야노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엘러드 말이냐..."


루푸스는 야노슈의 반응이 조금 의아했다. 소년 시절부터 함께 의지하고 지금의 위치까지 같이 온 사람이 친구가 아니란 말인가. 그는 어떻게 해야 무례를 범하지 않으면서 질문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무례하건 무례하지 않건, 질문할 기회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남쪽에서부터 사그락 사그락하는 발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야노슈와 루푸스 모두 발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노예 마니우스, 어제 루푸스가 알쿠르에게 전령으로 보낸 노예였다. 그는 야노슈에게서 대략 6보쯤 떨어진 곳에서 멈춰서고, 허리를 깊이 숙이며 절했다.


"뭐냐?"


야노슈의 질문에, 마니우스는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제 주인 플라비우스가 아침 식사에 왕자님을 초대했습니다. 방에서 뵙기를 청하고 있나이다."


"방에서, 단 둘이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루푸스는 자신이 왜 배신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굳이 그 자리에 끼어야 할 이유는 없다. 루푸스의 복잡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니우스는 이제 루푸스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루푸스 도련님, 도련님께서는 왕자님의 친우분들을 접대하라고 하십니다. 남관에 식사 준비가 끝나 있으니 지금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루푸스는 야노슈의 부하들을 떠올렸다. 그들을, 주인으로서 접대하라? 도대체 플라비우스는 그에게 뭘 기대하는 것인가. 루푸스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니, 난 내 방에서 먹겠어."


마니우스가 루푸스에게 말을 할때부터 루푸스를 흥미롭다는 듯 보고 있던 야노슈는 하! 하고 뜻모를 코웃음을 쳤다. 야노슈와는 정반대로, 마니우스는 불쌍할 정도로 당혹스러워했다.


"주인님께서는..."


루푸스는 자신이 한 말에 놀랐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생각도 없었다. 마니우스가 조금 곤경에 빠지겠지만, 자신의 이름을 팔라고 말해두면 그만이다.


"내가 끝까지 우겼다고 해. 음식은 내 방으로 갖고오라고 하고. 당장."


작가의말

으아아 퇴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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