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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니노스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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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니노스
작품등록일 :
2013.09.20 23:24
최근연재일 :
2013.11.2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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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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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1.03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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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북변경의 야노슈 (8)

DUMMY

쪽문의 나무 판자 사이로 햇볕이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원래 대충 만든 문이라 그런것은 아니었고, 통짜판을 쓴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잘 끼워맞춰진 판자들 사이에 몇군데 틈이 생긴 것이 이유였다. 루푸스는 그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바람이 새거나 하는 실질적인 문제도 있지만, 미관상 좋지 않다는 이유가 더 크다. 저택의 유지 상태는 언제나 사소한 부분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한 순간, 아까 플라비우스에게 들은 말이 생각나 가슴이 서늘해졌다. 사소한 것을 놓치면 큰 것도 놓치게 된다. 플라비우스 본인이 그런 말을 할때는 시큰둥하게 들었으면서 본인도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얄궂었다. 그는 불편한 생각을 접고, 문 보수는 언제 한번 집사에게 말해둬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문을 열었다. 눈부신 햇살과 악취가 그를 덮쳤다.


루푸스가 열고 나온 문은 저택 동쪽 벽에 붙어 있는 마굿간으로 통하는 쪽문이었다. 도시 특유의 악취에 말 똥 냄새가 섞여 고약한 냄새가 풍겼지만 루푸스는 개의치 않고 주변을 둘러봤다. 마굿간은 평소보다 훨씬 분주했다. 그보다 한 발 앞서 나온 노예들이 플라비우스의 갑옷을 포함한 루푸스의 짐들을 노새에게 얹고 있었고, 루푸스가 타고 갈 말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치곤 조금 많이 분주했다. 루푸스는 그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분주하게 왔다갔다하는 노예들 사이에, 평복 차림에 검을 찬 장정 몇 명과 가죽 망토를 걸친 거한의 뒷모습이 보인다. 야노슈와 그의 병사들이었다. 그렇게 서둘렀다더니 의외로 아직 출발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루푸스는 천천히 걸어가 말을 걸어보았다.


"여기 계셨습니까."


야노슈는 철컹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봤다. 망토를 보고 예상했던대로, 어제 입고 왔던 갑옷을 그대로 차려입고 있었다. 얼굴에는 뭐가 그리도 기분 좋은지 해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허수아비들이나 지을법한 표정이었다.


"아침 식사를 망친 주범께서 오셨군."


루푸스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만 눈살을 찌푸렸다. 야노슈가 분명히 과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자님의 부하들이 제 참석을 그렇게 고대하고 있었다니 조금 쑥스럽습니다."


엘러드나 마르쿠스 같은 치들이 루푸스가 오지 않아서 기분을 잡쳤다는 생각은 하기 어려운 것이다. 오지 않으면 오지 않는대로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 먹을것에나 신경 썼을게 분명했다. 그들을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은 사실이니 루푸스가 마음대로 넘겨짚은 것일 수도 있지만, 그는 어느 정도 확신이 있었다. 그렇게 자신하는 루푸스를 본 야노슈는 고개를 저었다.


"그거 말고. 네가 어제 가둬뒀던 친구가 탄원인지 뭔지를 한다면서 찾아왔었거든. 결국 노인장 앞에 와서 넋두리를 하다 사과까지 듣고 갔었지. 못 들은게냐?"


루푸스는 표정을 관리하기가 힘들다고 느꼈다. 플라비우스의 행동이 이해됐다. 그가 얼마나 벙찐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야노슈는 웃음을 터뜨리며 루푸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뭐, 별 일은 없을거다. 넌 지금부터 며칠 동안 엘러드와 붙어다닐거니까."


이미 그 별 일을 당하고 나온 참이었지만, 야노슈에게 말해줄 이유도 없고 조금도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엘러드 말씀이십니까? 왕자님은..."


"난 여기서 직접 할 일이 있어서. 짧으면 한나절 길면 하루 정도면 끝날 것 같긴 하지만 그 시간도 아깝거든. 우리가 일 재깍 끝내고 빨리 없어져주는게 도시에도 좋겠지."


묘하게 미심쩍은 말이었다. 루푸스는 자신이 편견을 품고 있는 것일 수 있다고도 생각했지만, 어쨌든 야노슈가 플라비우스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은 확실하니 의심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게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것저것 옮길 물건들이 있어서. 우리 진영보단 도시 내에 보관하는게 나은 물건들은 가지고 오고, 도시에서 구입할 보급품들은 밖으로 옮기는거지."


그런 단순한 일을 왜 굳이 본인이 감독하겠다는건지 알 수 없었지만, 직접 물어보는 것도 적절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질문을 되삼키는 루푸스였는데, 야노슈는 그의 생각을 마치 읽기라도 한 듯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내 병사들은 용병이거든. 기강이 완전히 없는 것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신경쓰지 않을 수가 없다. 보급품 같은건 옮기다가 슬쩍할 수도 있고, 작업이 길어지면 몰래 대열을 이탈해서 민간인들한테 민폐를 끼칠 수도 있고. 바짝 긴장시켜주려면 어중간한 간부들보단 내 얼굴이 최고거든."


굉장히 합리적인 설명이었다. 루푸스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거의 동시에, 야노슈의 병사 하나가 수레를 맨 말을 끌고 왔다.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키가 껑충한 병사였다. 은은한 광택을 발하는 가죽 검대에 검을 차고 있었다. 길이가 길고 끝이 상대적으로 덜 뾰족한 야만인들의 검이었다. 칼집이나 손잡이는 아무 장식이 없었고, 폼멜은 묵직해보이는 둥근 구리 덩어리였다. 짐을 지키기 위해 찬 것일 터인데, 눈에 너무 띌거라 생각한건지 갑옷은 입지 않고 있었다. 이제보니 야노슈도 검대의 왼쪽에 검을 차고 있었다. 어제는 검대만 차고 있었고, 검은 소지하고 있지 않았었다. 그 사실을 잠시 생각해본 루푸스는 사소한 의문 하나가 풀림을 느꼈다. 야노슈는 일찍 나간다고 말해놓고 지금까지 밍기적거렸던게 아니라, 벌써 한번 진영에 갔다 온 것이리라.


"세 마리 모두 준비 끝났습니다."


병사는 역시 야만인 출신인 듯, 랑골어로 말했다. 지나가던 노예 하나가 낯선 언어에 이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더니 오만상을 찌푸리며 다시 갈 길을 갔다. 루푸스는 묘한 불쾌감을 느꼈지만, 야노슈는 그 모습을 무시하며 자신도 랑골어로 말했다.


"애초에 수레 두개로 될거라고 생각한게 잘못이었지. 출발하자."


야노슈는 루푸스에게 고개를 까닥해보였다. 인사인 듯하여, 루푸스도 목례를 해보였다.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야노슈는 저만치 가 있었다. 그의 뒤를 병사 열댓명과 각각 수레를 매고 있는 말 세 마리가 뒤따랐다.


노새 두 마리와 말의 준비가 끝나고 남문에 도착했을때도 루푸스는 야노슈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시 걷다보니 어느새 남문 검문소에 도착했다. 완전무장한 알쿠르가 말 한마리의 고삐를 잡은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사슬 갑옷을 입고, 큼지막한 뺨가리개가 달린 투구도 쓰고 있었다. 발에 신은 가죽 장화는 발등과 복사뼈에 작은 철판이 수놓아져 있었고, 방패로 보호받지 못하는 오른팔은 가재 등처럼 겹겹이 철판을 두르고 있었는데, 통짜 철을 두르면 팔을 움직일 수 없으니 그런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런 거창한 팔보호구는 본디 검투사들이나 쓰는 것으로 요즘의 북변경에서는 보기 힘든 물건이었는데, 알쿠르가 지니고 있는 것은 그가 검투사로서 치른 마지막 경기에서 사용한 물건이었다. 알쿠르 본인이 세심하게 관리한 덕에 녹 하나 없는 그 팔보호대는 생각외로 굉장히 오래된 물건인 것이다. 무기로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검대에 검은 가죽을 두른 칼집을 차고 있었다. 검은 날의 길이가 성인 남성의 팔꿈치에서 손가락 끝까지 정도 되는 길이로, 그리 긴 편은 아니었다. 자신의 키와 비슷한 길이의 창은 가죽끈을 왼쪽 어깨에 둘러 등에 매고 있었다. 나무 판자를 이어 만들고 가장자리에 쇠테를 두른 둥근 방패는 말 안장에 걸려 있었다.


알쿠르는 루푸스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뺨가리개를 턱끈으로 묶어둔 탓에 얼굴이 묘하게 좁아보였다. 그는 루푸스의 뒤에 선 말 한마리, 노새 둘과 노예 셋을 잠시 말 없이 바라보더니, 말 고삐를 잡아 당기며 활짝 열린 남문에 눈짓을 보냈다. 출발하자는 의미리라. 알쿠르와 나란히 걷는 루푸스에게 관문 안에 둘, 밖에 둘 서 있던 민병대원들이 고개를 숙였다. 루푸스는 가벼운 손짓으로 그들에게 답하며 입을 열었다.


"늘었네?"


알쿠르는 뭐가 늘었냐고 되묻지는 않았다.


"만약이란게 있으니까요. 어젯밤부터 탑에도 한번에 세명씩 배치했습니다. 입초는 모든 구역에서 두배로 늘리고, 동초는 교대 주기를 불규칙하게 바꿨죠."


현재 불침번들이 몇 조 몇 교대로 경비를 서고 있는지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예전보다 부담이 훨씬 늘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루푸스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아니 당연한 조처라고 생각했다. 플라비우스가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다행스럽기만 했다. 민병대원들이야 많이 고단해지겠지만.


남문을 나온 그의 앞에, 빈틈없이 개간된 농지가 펼쳐졌다. 도시가 위치한 언덕에서는 꽤 먼 곳까지 내다볼 수 있었다. 한때 숲으로 가득했던 구릉지대는 완전히 개간되어, 숲의 경계는 동서남북 할 것 없이 아스라히 보이는 곳까지 밀려나 있었다. 얼마 전까지 밀로 가득했던 개간지는 수확이 끝나 휑뎅그레했다. 그 모습을 보며, 루푸스는 지금이 농한기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레분툼 시민들은 말만 도시민이지, 거의 대부분이 도시 주변에 펼쳐진 농지를 경작하는 농민들이었다. 민병대원들의 대부분도 같은 상황으로, 비번인 날에는 자신의 땅을 경작하고, 서로 돌아가면서 당직자들의 밭도 관리해주고 있었다. 지금 같이 증강된 경비 태세를 농번기에 취했다가는 대번에 큰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었다. 지금이 농한기라 다행인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경작지의 한가운데에 갑자기 솟아난 마을 아닌 마을.


"생각보다 크네."


루푸스는 멈춰서며 말했다. 정말로 높은 신분이거나 급박한 상황이거나 한것도 아닌데 말을 타고 관문을 통과하는 것은, 그것이 들어오는 것이건 나가는 것이건, 도시에 대한 중대한 모욕이었다. 몇번인가 그런 관례를 무시한 적도 있지만 아침에 플라비우스에게 한 소리를 들은 루푸스는 최소한 오늘만은 관습을 지킨 것이다. 루푸스가 멈춰서자마자 말고삐를 잡은 노예가 눈치 빠르게 말안장 밑에 무릎 꿇고 엎드렸다. 루푸스는 노예의 등을 밟고 말에 올랐다. 사람을 태우는데 익숙한 녀석이라, 한번 불평하듯 푸르릉거릴 뿐 놀라거나 하진 않았다. 알쿠르는 가볍게 뛰어올라 안장에 올라타고, 놀란 말을 진정시켰다. 갑옷을 입어 몸이 무거울 터인데, 그저 대단하기만 했다.


"천오백이나 되는 군대의 숙영지치곤 작은 편입니다. 천막들이 거의 군단 수준으로 짜임새 있게 배치됐군요. 종군자들이 하나도 없는 것도 진영이 작은데 작용한 것 같고."


알쿠르는 무심하게 말하며, 천천히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루푸스가 따라오지 않자, 그는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세우고 루푸스를 돌아봤다. 루푸스는 언덕 밑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짐수레로 외곽을 빙 둘러치고, 비록 규격은 제멋대로이나 배치 자체는 최대한 일사불란하게 되어있는 천막들. 그 한가운데, 다른 천막들과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세워진 거대한 천막 둘과, 두 천막 사이의 땅에 박힌 깃발. 이 거리에선 보이지 않으나, 아마 빗금쳐진 쌍두 독수리와 회색 늑대가 그려져 있으리라. 그곳이 지금 루푸스가 갈 장소, 야노슈 군의 진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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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북변경의 야노슈 (13) 13.11.24 230 4 11쪽
14 북변경의 야노슈 (12) 13.11.23 197 4 11쪽
13 북변경의 야노슈 (11) 13.11.16 377 7 10쪽
12 북변경의 야노슈 (10) 13.11.09 218 5 13쪽
11 북변경의 야노슈 (9) +2 13.11.05 362 8 10쪽
» 북변경의 야노슈 (8) 13.11.03 195 6 12쪽
9 북변경의 야노슈 (7) 13.11.01 154 4 9쪽
8 북변경의 야노슈 (6) 13.10.17 384 6 12쪽
7 북변경의 야노슈 (5) +2 13.10.09 451 9 16쪽
6 북변경의 야노슈 (4) 13.10.06 318 7 10쪽
5 북변경의 야노슈 (3) 13.10.03 401 10 13쪽
4 북변경의 야노슈 (2) 13.10.03 369 7 9쪽
3 북변경의 야노슈 13.09.22 616 15 10쪽
2 프롤로그 2 13.09.21 514 9 11쪽
1 프롤로그 1 +2 13.09.20 656 1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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