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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rinn 님의 서재입니다.

이색 콤플렉스 (블루 - 레드)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전쟁·밀리터리

완결

Yourinn
작품등록일 :
2023.07.11 15:54
최근연재일 :
2023.08.28 18:12
연재수 :
36 회
조회수 :
1,413
추천수 :
4
글자수 :
171,436

작성
23.08.25 17:22
조회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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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허무한 몰락 / 물리학적 귀결

DUMMY

<허무한 몰락>


간만에 강소장의 집을 찾은 회장님은 단단히 화가 난 얼굴로

상의 안주머니에서 흰 봉투 하나를 꺼내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괜찮습니다. 회장님.”

“이 사람이.”

자신에게까지 무슨 체면치레냐는 듯, 회장님은 짜증을 냈다.


그리고 그런 속내에는 이런 일이 있으면

누구보다 먼저 자신을 찾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섭섭함이 내재되어 있었다.


보나마나 김반장 짓이다.

그렇게 회장님께는 말씀드리지 말라고 일렀건만,

하여튼 그놈의 주둥아리는 알아줘야 했다.


“어떻게 마련한 건데 그래. 길거리에라도 나앉을 참인가.”


한 평생 회사에 기여한 것으로 그나마 잘 마무리되었던

회장님과의 인연에 또 그렇게 아쉬움을 남기게 되었다.


“이 사람아, 사업이 그렇게 마음대로 된다든가.

미리 나하고 의논이라도 좀 했었어야지...”

그렇게 만류했는데도 불구하고 회사를 그만 둔 것 때문에 미안한 점도 있었지만,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 회장님께 기대는 것도 이제 그만 두고 싶었다.



당시 예전만큼 경기가 좋지 않은 관계로

직장마다 명예 퇴직자란 허울 좋은 감투를 씌워

쫓겨났던 원로들이 많이 늘었던 바,

이들을 노리는 퇴직금 전문 사기꾼들이 득세하고 있던 판이었다.


원래부터가 꽉 막힌데다

오랜 세월 동안 겪은 일이라고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장 일이었고,

상대하는 사람이라고는 자신에게 다들 고분고분한 부하 직원들과 거래처 밖에 없었던 강소장은

그런 사기꾼들에게 가장 좋은 먹잇감이었다.


뻔지르르하고 교활하기 짝이 없는 사기꾼들에게

세상 물정 모르고 영낙없이 걸려든 강소장은

퇴직금을 다 날려 버린 후 얼마 안 되는 돈을 수습하지 못해

하마터면 어렵게 마련한 집까지 경매로 넘어갈 판이었다.


돈을 빌려 줄 데는 많은데, 돈 빌릴 데는 마땅찮은 법이다.

답답하다 못해 김반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급한 대로 어떻게 융통해 보려 했던 것이

결국 회장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다.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그래.”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휘하의 많은 공원들을 호령할 때는 전혀 무관한 줄로만 알았건만,

이제 자신 역시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무기력한 늙은이로 전락한 모습이다.


“내가 어디 관리직이라도 좀 알아봐줘?”

“아닙니다. 회장님. 제가 어떻게 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찾아와 이전과 다름없이 생각해 주는 것만 해도 회장님은 할 만큼 하셨다.

더 이상 의존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다.


“정이 어려우면 혼자서 그러지 말고, 나한테 이야기 해.”

“예. 회장님.”

회장님도 강소장의 그런 심정을 이해하는지

더 이상 언급을 않았지만 마음이 편하실 리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군 시절 한때 거느렸던 부하들 중 한 명일뿐이었던 자신과

애써 다시 인연을 맺으면서까지 좋은 결말을 보고자 했던

회장님의 인간적인 배려를 저버린 것만 같아

강소장 또한 면목이 없었다.


그냥 퇴직금으로 노후나 적당히 보내며

한 번씩 찾아뵙고 소주나 했으면 그러지 않았을건만,

공연히 자신 때문에 회장님에게까지 노년에 부담을 주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애는 언제 만나볼 건가.”

그런데 회장님의 심기가 불편한 이유에는

단지 자신의 만류를 뿌리치더니 결국 이 지경이 되었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그 애라니요.”

“아, 누구긴 누구야. 자네 아들이지.

내 자네 집안일이라 웬만하면 모른 척하려고 그랬는데 이젠 안 되겠네.”


회장님도 자신의 아들이 집을 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다 알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아들 자랑 그렇게 하더니, 진짜 다시 안 보려고 그래.

애비라는 사람이 되어 가지고...”

그러나 아무리 회장님이라 해도

그 문제에서만큼은 순순히 고집을 꺾을 강소장이 아니었다.


“전 그런 빨갱이 짓이나 하는 놈, 잊은 지 오랩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많은 것이 변했건만

도무지 손톱만큼도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정을 알기에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고 있었으나,

이제는 그야말로 짜증이 날 지경이다.


“참 내, 지금 도대체 때가 어느 땐데 아직도 그러고 있나!”

회장님은 부자간에 완전 남이라도 된 것처럼 그러고 있다는 문제에

오히려 더 화가 나는 듯 언성을 높였다.


“자네 아들, 지금 한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회사에서

자리 잡고 일 잘 하고 있다네.

이 사람아, 벌써 부장이야.”


생각지도 않게 아들이 이미 남들처럼 번듯한 직장 생활을,

그것도 굴지의 대기업에서 중견급 간부로 근무하고 있다는

회장님의 말씀에 강소장은 갑자기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말이야...”

회장님은 아들에 대해 더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정도에서 그치셨다.


“여하튼 지금 자네 상황이 어떤지나 아는가.

고집 피우지 말고 빨리 만나 보기나 해.”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자신의 뜻을 거역하고

그렇게 떠난 일을 여전히 용인할 수 없었던 강소장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묵묵부답이자,

그 고집을 겪어봐서 잘 알고 있었던 회장님은

이번에는 확실히 못을 박아두려는 듯 했다.


“이번에도 또 내 말 안 들었다간 알아서 하게.

이 사람아, 피보다 물이 진하다던가!”



<물리학적 귀결>


아들은 언제부터인가 회장님과 연락을 주고받은 듯하다.

씨알도 먹히지 않을 자신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나마 말이 통하는 회장님께 언질을 준 것으로 보였다.


회장님도 사정을 알고 적당히 때를 보았으나

강소장이 저 지경이 된 상황에서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명령도, 회사에 계속 있으라는 만류도 뿌리쳤지만

지금은 회장님 말씀을 거역하기가 어려웠다.


인간관계에서 돈이 주는 위력은

다른 무엇보다 더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겨우 회장님의 도움으로 길거리에 나 앉을 위기까지 모면했는데,

돈만 받고는 그럴 수 없는 문제였다.


기세등등하던 시절이면 몰랐으나

이젠 그야말로 이빨이 완전히 빠져

잇몸까지 상할 지경의 호랑이 신세였던 강영감은

겨우 고집을 꺾고 그것도 회장님의 부탁 때문에 마지 못하는 형식으로,

그러나 결코 그 놈을 용서치는 않는다는 점은 변함없다는 차원으로

아들을 한 번 집에 들여 놓기로 했다.



아들이 도착할 즈음 대문만 열어 둔 채,

집을 나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강영감은 거실 바닥에 몸을 꼿꼿이 세우고

이곳에 발을 들여 놓든 말든 상관없다는 투로 돌아 앉아 있었다.


“아버님, 그 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네가 여기는 어쩐 일이냐.”


실로 한참 만에 찾은 아들이 공손히 절을 올렸건만,

강영감은 무슨 일이냐는 듯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으며 돌아보지도 않았다.



“회장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괜찮다고 하셨는데 빌려주신 돈은 제가 갚았습니다.”

그깟 돈 몇 푼에 순순히 마음이 풀어질 강영감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돈을 갚았다고는 하니

일단 그 부분에 대해서 언급을 하긴 해야 했다.


“어험. 뭐 그러지 않아도 내가 다 알아서 할 텐데,

뭐 하여튼 잘 했다.

우리 집안이라고 마냥 회장님 신세만 지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니.”


여전히 더 볼 일 남았냐는 투였으나, 아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아버님, 여기 저희 집사람입니다.”

기척이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인 것 같아

보나마나 한 패거리로 빨갱이 짓이나 해대던

그 잘난 친구 녀석들이 함께 응원이라도 온 줄로만 알았다.


옆에서 괜히 거들기라도 하면 대신 물고를 내줄까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때서야 마지못해 강영감은 돌아앉았다.


“아버님, 진즉에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너무 늦어 죄송합니다.”

갑자기 단정한 차림새의 한 낯선 젊은 아낙네가 며느리라며

공손히 절을 올리자 예상치 못한 상황에 강영감은 다소 떨떠름했다.


그냥 형식적으로 집안에 한 번 들여놓고는 그대로 내칠 생각이었으나

막상 이렇게 되니 그럴 수도 없는 문제였다.


“어험. 이렇게 못난 자식을 건사해 주시니 참으로 고맙소이다. 험.”

처음 보는 며느리 앞에서 부자간에 티격태격하는 것도 집안 망신이었고,

어쨌거나 명색이 시아버지인데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어야 했다.



집안에서 보태준 것도 전혀 없었건만,

며느리는 참하고 반듯해 보였다.

빨갱이 짓을 하든 무슨 짓을 하든

하여튼 아들놈은 처신만큼은 제대로 하였을 것이니

괜찮은 아내를 만난 듯하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며느리의 옆에 아직 네 살이나 다섯 살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

초롱초롱한 아이들 둘이 한복을 예쁘게 차려입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얘들아, 이 분이 바로 너희들 할아버지시란다.

어서 할아버지께 인사드려야지.”



그러자 올망졸망한 눈으로

뭐가 그리 불만인지 불퉁하기 짝이 없이 앉아 있는

영감님 한 분이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던 귀여운 아이들이

큰 절을 서툴게 올리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절 받으세요.”


미리 예행연습을 했는지

조그마한 아이들이 두 팔을 크게 가로젓더니

손을 바닥에 짚고는 무릎까지 꿇은 채로 고개를 숙이며

제법 큰 절을 흉내 내는듯한 모습이 바로 눈 앞에 펼쳐지자,


그때까지 손톱만큼도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굳어있기만 하던

강영감의 얼굴에 어느덧 훈훈한 미소가 비춰지기 시작했다.



“그래, 이 녀석들아. 내가 너희들 할애비되는 사람이란다.”


실로 오랜만에 강영감에게 드리워진 미소가 좀처럼 가시지 않을 것만 같았다.



-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사실은 물리학적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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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색깔 공방 23.08.28 24 0 9쪽
» 허무한 몰락 / 물리학적 귀결 23.08.25 22 0 10쪽
34 시대의 기수 / 부조화 23.08.24 19 0 14쪽
33 인연 23.08.23 18 0 12쪽
32 마지막 명령 / 뜻밖의 해후 23.08.22 21 0 10쪽
31 지옥으로부터의 귀환 / 경련 23.08.21 25 0 12쪽
30 고군분투 / 현기증 23.08.18 20 0 11쪽
29 개운치 못한 승리 / 끝나지 않은 전투 23.08.17 19 0 10쪽
28 격전 / 생과 사 23.08.16 23 0 11쪽
27 사지를 향해 23.08.15 24 0 13쪽
26 밥과 옷 / 전쟁 23.08.14 22 0 11쪽
25 길 위의 대화 23.08.10 22 0 11쪽
24 신고식 23.08.09 24 0 9쪽
23 노인과 환영 / 에프엠과 꼴통 23.08.08 24 0 13쪽
22 제2편 레드(‘극’자 돌림): 꼰대들의 월례 행사 / 여러 노선의 문제 23.08.07 25 0 10쪽
21 진로 문제 / 중참 23.08.04 24 0 8쪽
20 빛과 소금 23.08.03 26 0 8쪽
19 그때 그 사람 / 소시민 23.08.02 27 0 10쪽
18 현상과 본질 23.08.01 26 0 10쪽
17 훈장 23.07.31 25 0 8쪽
16 퇴보 / 파국 이후 23.07.28 25 0 9쪽
15 팔일무 23.07.27 28 0 7쪽
14 새로운 희망 / 디데이(D-Day) 전야 23.07.26 30 0 11쪽
13 협의회 사람 / 창조적 상속 23.07.25 28 0 13쪽
12 돌아온 기득권자 / 또다시 갈라진 세상 23.07.24 29 0 10쪽
11 그리고 그 그늘 23.07.22 31 0 10쪽
10 투쟁과 연대의 나날들 / 영광 23.07.21 38 0 10쪽
9 인간의 권리 23.07.20 34 0 9쪽
8 분노의 지게차 / 더 센 패거리들 23.07.19 45 1 9쪽
7 홍콩 느와르와 현실 한국 / 양들의 반란 23.07.18 46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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