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대화
<길 위의 대화>
“그 녀석 단단히 취했구만..”
“예. 대대장님, 저 친구 오늘 관사에서 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들은 의외로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이 아닌가.
“아, 이 사람아. 애한테 뭘 그렇게 술을 먹여..”
“아니, 대대장님께서 저보다 더 그러셔놓고 뭘 그러세요.”
“허허.. 내가 그랬나.”
힘들더라도 무슨 일이든 합당한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만 충실하면 무탈한 경우 문제는 단순해진다.
그런 차원에서 대대장은 지나고 보니 그렇게 어려운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었건만
일정 기간이 지나자 오히려 대하기가 편한 상관이란 기분까지 들기 시작했고,
골치 아팠던 본부 중대 일도 어느 정도 단련이 되어서인지
아니면 무디게 되어서인지 그다지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또한 여유가 생긴 후 가만히 돌아보니
대대장은 단지 꽉 막히고 융통성 없는 사람만은 아니었다.
일단 부대를 제대로 유지하는 것에는 추상같았지만,
그것만 지켜지면 그 외의 부대원들의 다른 문제들은 별 상관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피곤에 지친 자신이 낚시터에서 코를 골며 낮잠을 자도
별 상관없을 정도로 관대하기까지 했다.
사실 낚시를 함께 하는 것도 본인의 수발을 들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서열이 높거나 복무 기간이 많은 간부들을 상대하며
부대 전반을 뒤치다꺼리해야 하는 본부 중대장이란 직책을 감안해
눈에 보이지 않게 힘을 실어주려는 차원이었던 것 같았다.
신임 본부 중대장이 대대장과 둘이서만 낚시를 간다는 사실은
대대 내에서 알게 모르게 적당한 힘의 안배가 되었고,
그것은 꼭 김대위에게 특혜를 베풀어서가 아니라
다른 여러 전투 중대들을 받쳐 주는 역할을 하는
본부 중대가 휘둘리지 않고 잘 관리되어야 전체 대대가 잘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부대 지휘에서만큼은 치밀하게 머리가 돌아가는 것으로 보아
대대장은 천생 군인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었던 바,
그렇게 부대 일밖에 머리를 쓰지 않으니
다른 일은 영 시원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왜 이전 본부 중대장이 그렇게 고생 고생하면서도
다른 부대로 발령받은 것을 아쉬워하며
대대장 밑에서 더 있고 싶어 하는지를 이해할만 했고,
자신 역시 한 번씩 마지못해 끌려가다시피 했던 낚시터에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자진해서 따라 나서곤 했다.
“근데 말이야 김대위, 이제부터 자네도 마음의 준비를 좀 해 놓아야 할게야.”
“예. 대대장님.”
강상병은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잠시 전의 유쾌한 분위기와는 달리 두 사람에게는 뭔가 엄중한 기운이 느껴졌고,
지프차의 엔진소리와 도로를 스치는 소리 외에 한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대대장님, 근데 이런 말씀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뭔데 그러나.”
“그게 저···.”
어떤 일인지 김대위는 말하기가 상당히 조심스러운 것 같았다.
“이번 전쟁은... 말입니다.”
“아, 이번 전쟁이 왜.”
김대위는 여전히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 듯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뭐가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어허, 이 사람.”
그러자 김대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가는 듯
대대장은 서둘러 말을 가로막았다.
“위에서 명령하면 무조건 따르는 게 군인이야. 다른 생각은 말게.”
“예. 대대장님.”
대대장의 말을 따르는 듯했으나
김대위는 여전히 자신이 갖고 있던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느낌이었고,
에둘러 김대위의 말을 가로막았던 대대장 역시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었는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김대위 자네. 4 19 때는 뭐했는가?”
“예?”
김대위는 대대장의 뜬금없는 질문에 적잖이 당황하는 것 같았다.
“괜찮아 나한테 솔직히 말해 봐.”
“아. 네. 그게 뭐..”
갑자기 말을 더듬거리는 모양새가 나이로 미루어 보면
필시 그때 김대위는 대학생 신분이었을 것이고,
대대장도 대충 짐작가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그 때 자네 같은 대위 시절이었는데 계엄령이 떨어져 시내까지 갔었다네.”
“예.”
“혹시나 일이 더 잘못되지나 않을까 조마조마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구만 그래.”
잠든 척하면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긴 했지만,
강상병은 오늘 갑자기 중대장에 의해 1호차 운전병이라는 새로운 보직이 맡겨진 것부터 시작해서
지금의 대화까지 좀처럼 와 닿지 않았다.
“김대위, 자네 군 생활 계속 해 볼 생각은 없는가?”
대대장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김대위가 간부사관 후보생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야 뭐..”
간부사관 후보생이란 정식 군사학교 과정을 밟은 것이 아니라
군에서 실시하는 일종의 자격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을
단기간의 훈련과정을 통해 장교로 선발하는 제도를 말한다.
군 조직 내에서 어떻게 보면 직계가 아니라 방계라 할 수 있었고,
따라서 처음부터 평생 몸담을 곳으로 군대를 생각하기보다는
대부분 이왕 군 생활을 할 바에야
사병보다 훨씬 대우가 나은 장교로 가자는
취지를 가진 정도의 사람들이 지원하고 있었다.
간혹 뜻하지 않게 이곳에 애착을 가지고 장기 근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정규 육사 출신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그와 같은 외인 부류의 장교들은 점점 더 곁가지로 밀릴 것이 뻔했기에,
김대위 역시 사회로 나갔을 때 군에서의 복무가
어느 정도 경력으로 인정되는 정도로만 만족할 뿐 크게 미련이 없었다.
그리고 김대위라는 사람 자체가 그렇게 야심이 있는 사람이 또한 아니었다.
“그래도 이 사람아, 한 번 생각 좀 해 보게.”
대대장도 그런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내심 김대위 같은 사람이 군에 좀 남아 줬으면 하는 바람인 것 같았다.
그런데 대대장의 그런 바람에 대한 김대위의 응답이 조금 의외였다.
“만약에 제가 군 생활 계속하면...
대대장님께서 저 좀 거두어 주시겠습니까?”
“뭐?”
“그러면 제 능력 닿는 대로 한 번 끝까지 해 보겠습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다소 뜬금없을 수 있었으나,
김대위는 전혀 빈말이 아닌 듯 진지해 보였다.
“허허. 이 사람...”
입에 발린 소리 같은 것은 전혀 통할 것 같지 않던 대대장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 이 사람아, 나 같은... 뭐라 그러더라.
맞아, 꼴통이지. 꼴통.
아, 나 같은 꼴통 밑에 있는 게 뭐가 좋다고 그래.”
대대장도 자신이 ‘꼴통’인 것을 알고는 있었던 모양이다.
김대위는 부하들이 쉬쉬하며 몰래 부르는
자신의 별명까지 대대장이 이미 알고 있었으며,
바로 그 당사자가 스스로를 수긍하듯이
직접 입에 올리는 것을 듣고 나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대대장님, 저도 그렇지만, 저 친구는 꼭 좀 거두어 주십시요.”
“아니, 저 녀석은 또 왜?”
“군대가 그렇게 좋은지,
벌써부터 하사관 지원할 거라고 준비가 한창이랍니다.”
대대장은 곯아떨어진 척하고 있는 강상병을 백미러를 통해 잠시 보았다.
“오, 우리 대대에 별난 놈이 하나 있다더구만,
바로 그 놈이 저 놈이야?”
“예. 대대장님도 아시고 계셨습니까.”
강상병은 대대장의 귀에까지 자신이 알려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럼. 근데 저 녀석 군대가 뭐가 좋다고 그래?
병들이야 제일 고달픈 곳이 여기 아닌가.”
“예. 그래서 제가 좀 알아보았더니 전쟁통에 부모님을 잃은 것 같습니다.”
“음... 그랬구만.”
대대장은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 잃고 제 딴에는 그 동안 고생이 많았던 모양이구만 그래.”
“예. 그래도 나쁜 길로 빠지지 않은 걸 보니,
저 친구 심성은 참 착해 보입니다.”
대대장도 오늘 낚시터에서 강상병을 처음 보았을 때
누가 봐도 그렇게 나쁜 녀석은 아니라는 인상을 받긴 했었다.
강상병의 입대 전 이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잠시나마 유쾌했던 두 사람의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는 듯 했다.
“이 손바닥만한 나라에 무슨 난리가 또 이렇게 많아 가지고...
다들 참, 고생들이 말이 아니구만 그래.”
대대장이 속력을 내기 위해 기어를 바꾸자
관사로 향하는 지프차의 엔진소리가 부르릉거리며 심하게 진동했다.
강상병은 전쟁 고아였다.
강상병의 부모가 어느 편에 의해서,
그러니까 인민을 해방하러 온 사람들의 총탄에 의해서인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사람들의 총탄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우방을 지원하고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사람들의 융단폭격에 의해서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여하튼 1950년 여름에 개시되어 3년 동안이나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졌던
그 참혹한 전쟁으로 인해 강상병은 부모를 잃었다.
그리고 그런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지도,
전혀 적절히 대응하지도 못한 국가는
그 때문에 오만가지 불운을 겪고 있던 강상병에게도
어김없이 국가를 방위하라고 입대 영장을 보냈다.
대한민국은 강상병이 입대하던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지금까지, 그러니까 전면전이 끝난 지 7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전쟁 중인 희한한 나라이다.
휴전이란 전쟁을 그만 둔다는 것이 아니라 잠시 쉰다는 의미인데
도대체 70년 이상을 쉬고 있다.
쉬어도 엄청 쉬었건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지금보다 훨씬 더디게 가고 있었던 옛 시절에도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
상호 간 아무리 돌이킬 수 없는 원한이 있다손 치더라도
일곱 번이나 강산이 변할 정도의 세월이 흘렀으면
그냥 적당히 전쟁은 없는 것으로 여기고 지내도 무방할 터인데,
여전히 쉬기 위해 그어 놓은 선에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몇 겹으로 철조망을 쳐놓고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가족과 연인을 뒤로 한 채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을
그것도 중무장을 하고서 대치 중에 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항상 전쟁이란 공포가
무의식적으로 어느 한 구석에 드리워져 있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그런 무시무시한 전쟁 중인 나라에서
인명 살상용 총기를 휴대하고 적과 대치해야 할
거대한 조직의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개인에게 실로 두려운 일이었고,
강상병 역시 어느 날 자신을 부른 그곳이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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