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Yourinn 님의 서재입니다.

이색 콤플렉스 (블루 - 레드)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전쟁·밀리터리

완결

Yourinn
작품등록일 :
2023.07.11 15:54
최근연재일 :
2023.08.28 18:12
연재수 :
36 회
조회수 :
1,412
추천수 :
4
글자수 :
171,436

작성
23.07.25 17:28
조회
27
추천
0
글자
13쪽

협의회 사람 / 창조적 상속

DUMMY

<협의회 사람>


역시 사람이다.

사람의 일인데 왜 사람이 없겠는가.

어디서나 부당한 경우가 있으면 나서는 누군가가 없을 수는 없는 문제였다.


지역연합에 몸담은 이후 지역 전체 사정에 대해 레이더급으로 파악이 가능한

후배 녀석에게서 이 쪽 하청업체 소속 사람들이 찾아와

자신들이 겪고 있는 여러 부당한 사례나 노조 설립에 관한 법적인 문제들을

그쪽 노동 상담소에 몇 번 문의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과

노조는 아니지만 그나마 하청업체 직원들의 체불 임금이라도 진정해 주는 모임 같은 것이 하나 있기는 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나서야

위원장은 이제 겨우 뭔가가 손에 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하청업체의 현장을 돌아다닐 때

공장 한쪽 구석 조그마한 가건물에 무슨 협의회라고 간판이 달려 있는 사무실이 하나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곳일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간판에 적혀진 협의회의 이름부터가 도무지 현장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라

그때는 별다른 생각 없이 지나쳤었던 것 같다.

정식 노조가 아니라고 하니 달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으나

도저히 그대로만 있을 수 없었던 위원장은

누군가와 한 번 터놓고 이야기라도 해 볼 참으로 그곳을 찾았다.



다들 경계하는 분위기를 알고 있었기에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그곳에 들어서니

예전에 자신과 후배가 맨 처음 노조를 시작했을 때의 모습을 다시 보는 것만 같았다.

2~3평 남짓한 가건물 안에 달랑 책상 두세 개에 전화기 한 대.

다른 것이 있다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중고인 것 같은 PC라도 이전보다는 성능이 좋아 보였다는 것뿐이었다.

지금 자신들의 위풍당당하고도 화려한 노조 건물과 대비해 보니 미안한 감정까지 들 정도였다.


그러나 더욱 다른 것이 있다면 그곳에 있던 사람이었다.

그때도 역시 거의 비슷하게 변변찮은 시설에 비록 후배 녀석과 단둘이었지만,

당시 무엇보다 활력이 넘쳐흐르고 있었던 자신들과는 달리

그곳에 있던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사람은 하청업체 직원들 마냥 피곤하고 어두워보였다.



“원청에서 오셨소이까.”

차림새가 하청 직원은 아닌 것 같아 보였던 모양이다.

“예. 그렇습니다.”

이제는 원청이란 말이 낯설지 않았다.


“원청에 계신 분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공장 사람들처럼 말투가 퉁명스럽지는 않았지만, 경계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노조 위원장입니다.

같은 현장에 계시는 분들이니 한 번 이야기라도 나눌까 해서 그럽니다.”



노조위원장이란 말에 뭔가 짐작이라도 한 듯 의자를 권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은 여기서 일을 보는 사람 정도로만 소개하며

그다지 밝히고 싶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말씀 들었습니다. 위원장님.

요즘 현장에 많이 들르신다고 하던데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일단 상대가 대화라도 하려는 태도였기에

위원장은 왜 이곳은 노조가 없는지부터 좀 따지고 들며,

그 동안 목격했던 얼토당토않았던 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되짚어 보았다.


일단 상대에게 터놓고 말이라도 하니 조금 속이 후련했지만

그 사람의 반응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게 위원장님과 무슨 상관입니까?”

비록 정식 노조는 아니라 하나

그나마 이곳에서 피해를 입는 사람들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만한 말이 아닌지라

가뜩이나 부당한 일을 되새기며 조금 흥분해 있던 위원장은 폭발했다.


“아니, 이것 보세요.

나는 현장 직원들을 책임지는 노조위원장입니다.

우리 현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으란 말입니까!”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않던 그 사람은 정식으로 자기 소개를 했다.

“위원장님, 저는 이곳 협의회 박사무장이라고 합니다.

정식으로 선출된 것은 아니고 임시로 여기 일을 맡고 있는데,

이렇게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위원장님 이야기는 전부터 많이 들었습니다만,

요즘 하도 원청 간부들한테 시달리다 보니

혹시나 싶어서 그랬는데 불쾌하셨다면 미안합니다.”


조금 한 말은 본심이 아님을 알 수 있었기에

흥분은 곧 가라앉았지만 짜증이 났다.

“근데 다 같은 현장 사람들끼리 왜 이렇게 말씀을 나누기가 어렵습니까?”


박사무장은 거듭 사과하면서도 여기서는 보는 눈도 있으니

퇴근 후에 따로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그리고 21세기로 접어들어 선진국을 바라보고 있다는 한국 사회에서

노조 문제를 갖고 대화하는데 무슨 이전의 지하운동처럼

노조의 다른 임직원에게조차도 절대 알리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창조적 상속>


역시 문제는 당사자와 대면해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

회사와 많이 떨어진 허름한 술집에서 박사무장과 소주까지 곁들이며

오랜 시간동안 차근히 이야기를 나누니

그때서야 위원장은 의문스러웠던 일들이 하나둘씩 풀리는 것 같았다.


물론 노조가 없거나 분규가 없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예 그럴 수 없도록 처음부터 차단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원청 쪽에서 원래부터 여러 하청업체들과 각기 1~2년간의 단기로 계약 기간을 잡아두고

혹시나 근로조건을 가지고 직원들로부터 성가신 문제가 발생하면

만료 후 재계약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니 속수무책이라는 것이었다.


겨우 한 업체에서 숱한 어려움을 뚫고 노조를 결성해 뭐라도 해보려 했더니

이번에는 하청업체 쪽에서 곧바로 폐업 조치가 이루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럼 업무가 진행이 되지 않을 것 아닙니까.”

“왠 걸요. 바로 그 하청업체 사장이 노조에 가입한 사람들만 쏙 빼버리고

금방 새 업체로 등록해서 다시 계약하더니

바로 그 다음 주에 작업을 시작해 버리더군요.”

그러니까 겉으로는 아무 이상 없이 업무가 진행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노조를 주도하던 사람들만 다들 그렇게 쫓겨났고,

거기다가 지금은 혹시 또 그런 일이 생길까봐

본사, 그러니까 원청 소속 경비대까지 동원되어 하청업체 직원들을 감사하면서

노조를 결성하려는 움직임만 보이면 온갖 회유와 협박이 오다가

그도 통하지 않으면 하청업체 사장이 아예 문제 직원을 해고해 버린다고 했다.


“그렇게 마음대로 해고하는 것도 불법 아닙니까?”

그런 것 따지지 않는다고 했다.

지역 경찰까지 출동해서 해당 직원을 회사 밖으로 쫓아내는 데 협조함은 물론,

원청에서 출입증까지 말소해 아예 회사에 들어올 수조차도 없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법정에 호소해 봤자 몇 년이나 끌 것이고

누가 봐도 명백히 부당한 경우라 한들 재판 결과도 누구 손을 들어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소속 경비대의 감시는 물론,

분위기 파악하며 적당한 쪽으로 편드는 경찰과 법원까지 동원되는 것을 보면

본사가 하청업체와 협력해 노조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 눈에 훤하게 들어왔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직 임원을 형식적인 하청업체 사장으로 내세우고

법적으로는 제3자 행세를 하면서

사실상 본사가 배후에서 노조 결성을 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다못해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는 단순 친목회 모임 정도의 지위를 가진 협의회라는 이름으로

겨우 체불 임금이나 직원들 임금 떼먹고 도주한 하청업체 사장들을 상대로 법원에 진정하는 정도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던지

그냥 지켜보고는 있지만,

다시 노조라도 결성할까봐 자신에게도 감시가 심한 관계로

이 또한 어떻게 될지 살얼음판이라는 것이다.


어쩌다가 협의회 이름조차 노동이니 권익이니 짓는 것은 엄두도 못내고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꼭 유아원의 반 이름 같은 ‘한마음’으로 했는지,

왜 이렇게 박사무장이 노조 위원장인 자신을 되도록 눈에 띄지 않은 곳에서 따로 만나려 했는지

다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잘못 걸렸다간 아무런 법적 요건도 갖추지 못한 이런 모임조차도 날아갈 판국이었던 것이다.



듣고 보니 위원장의 가슴도 답답해지는 것 같았다.

자신들이 겪었던 상황과 또 달랐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폭압적으로 밟으려는 것뿐이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이중 삼중으로 더욱 교묘하게 옭아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청업체 사람들을 힘센 원청 노조와 별개로 분리시켜 놓음은 물론,

또 각기 여러 개로 잘게 갈라 놓은 후

계약 해지, 감시, 회유와 협박, 해고와 폐업, 아무런 소득 없는 지리한 법정싸움 등등

온갖 거미줄을 쳐놓은 채 힘을 못쓰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득권자들은 훨씬 더 영악하게 돌아온다.

그리고 일상의 생계에 매몰되어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오로지 기득권을 어떻게 하면 유지하고 확산하느냐에 온갖 자원을 동원하는 그들의 기발한 생각에

그저 진땀을 흘리며 뒤따라가기 바쁘다.


우리들의 위대하신 정회장께서는 한국 자본주의가 하사하는

온갖 영예 및 탐욕과 함께 천수를 누리며 이미 작고하셨지만,

노조를 결사 탄압하던 그 투철하신 정신만큼은

상속세도 거의 안내고 승계된 2세 경영진들에게 혁혁하게 계승, 발전되고 있었다.

나아가 그 후손들께서는 정회장 시절

단순 무식 과격하게 자신들이 노조를 만드는 것을 저지하지 못한 사례를 거울삼아

더욱 창조적으로 상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대응하는 사람들의 차원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는 변함없이 연대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교활한 술수라 하더라도 뭉치기만 한다면 결국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비슷한 상황에 있는 하청업체들이 각기 따로 있는 관계로

원청에 의해 각개 격파당하기 쉬우니

이왕 노조를 할 바에야 연합해서 추진하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는 말에

박사무장도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동의를 했다.


자신들도 왜 그 생각을 하지 않았겠냐마는

노조에 관심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연합 노조를 논의해 왔으나

그것 또한 생각처럼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말에

이번에는 위원장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과는 달리 처음부터 연대가 용이하지 않도록

여러 하청업체 소속으로 사람들을 갈라놓은 것도 놓은 것이거니와,

본사가 배후에서 이중으로 견제를 하고 있음을 이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이면에 제3자로 위장해 온갖 위력을 행사하고 있는 원청이 문제였기에

하청업체를 상대로 어떠한 노조를 아무리 건설해 본들

원청에서 수를 부리면 무산될 것이 뻔했다.


직원들도 생계가 나아지는 일인데

정상적인 업체들처럼 자신들의 권익을 대변해 줄 노조가 나서주길 왜 원하지 않겠는가마는

몇 번 타격을 입고 그렇게 결론이 나니

요즘 들어 부쩍 좋지 않아지는 불경기에

그나마 하고 있는 일자리마저 쫓겨날까봐 다들 미온적이라는 것이다.


현장에 있던 하청업체 직원들이 노조위원장인 자신을 경계했던 이유도

자신들을 감시하던 본사에 막연한 반감도 반감이려거니와

그 집요한 감시와 방해를 직접 보고 들었던지라

좋든 싫든 혹 무슨 일에 연루되어 당장 생계가 걸린 직장이라도 잘못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리라.



하나둘씩 문제를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위원장의 가슴은 갈수록 답답해졌으나,

반면 그럴수록 머릿속은 오히려 더 명확하게 정리되어 가는 것 같았다.


이런 사정을 아는 누가 보아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청업체의 문제가 아니라 원청업체,

그러니까 본사 차원의 문제였다.

그렇다면 응당 본사의 현장을 책임지는 자신들이 나서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실 이들은 이미 함부로 다룰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커진

자신들과 분리시키기 위해 본사에서 단지 종이 한 장으로 농간을 부린 것일 뿐,

바로 자신들의 동료들이 되었어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또한 지금도 같은 현장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정을 알고 난 위원장이 그 자리에서

하청업체에서 노조가 결성되면 함께 연대할 것을 약속하자,

그 때서야 어둡기만 하던 박사무장의 얼굴이 조금 펴지는 것 같았다.

박사무장 역시 위원장과 마찬가지로

달리 무슨 기대가 있어서 그 자라에 나왔던 것이라기보다는,

관심이라도 가져주는 사람에게 단지 자신들의 이런 사정을 한번 토로라도 해보자는 심정뿐이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하청업체 노조 건설에도 힘닿는 데까지 지원하겠다는

원청 노조위원장의 진심어린 선언에

갑자기 박사무장의 눈빛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이색 콤플렉스 (블루 - 레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6 색깔 공방 23.08.28 24 0 9쪽
35 허무한 몰락 / 물리학적 귀결 23.08.25 21 0 10쪽
34 시대의 기수 / 부조화 23.08.24 19 0 14쪽
33 인연 23.08.23 18 0 12쪽
32 마지막 명령 / 뜻밖의 해후 23.08.22 21 0 10쪽
31 지옥으로부터의 귀환 / 경련 23.08.21 25 0 12쪽
30 고군분투 / 현기증 23.08.18 20 0 11쪽
29 개운치 못한 승리 / 끝나지 않은 전투 23.08.17 19 0 10쪽
28 격전 / 생과 사 23.08.16 23 0 11쪽
27 사지를 향해 23.08.15 24 0 13쪽
26 밥과 옷 / 전쟁 23.08.14 22 0 11쪽
25 길 위의 대화 23.08.10 22 0 11쪽
24 신고식 23.08.09 24 0 9쪽
23 노인과 환영 / 에프엠과 꼴통 23.08.08 24 0 13쪽
22 제2편 레드(‘극’자 돌림): 꼰대들의 월례 행사 / 여러 노선의 문제 23.08.07 25 0 10쪽
21 진로 문제 / 중참 23.08.04 24 0 8쪽
20 빛과 소금 23.08.03 26 0 8쪽
19 그때 그 사람 / 소시민 23.08.02 27 0 10쪽
18 현상과 본질 23.08.01 26 0 10쪽
17 훈장 23.07.31 25 0 8쪽
16 퇴보 / 파국 이후 23.07.28 25 0 9쪽
15 팔일무 23.07.27 28 0 7쪽
14 새로운 희망 / 디데이(D-Day) 전야 23.07.26 30 0 11쪽
» 협의회 사람 / 창조적 상속 23.07.25 28 0 13쪽
12 돌아온 기득권자 / 또다시 갈라진 세상 23.07.24 29 0 10쪽
11 그리고 그 그늘 23.07.22 31 0 10쪽
10 투쟁과 연대의 나날들 / 영광 23.07.21 38 0 10쪽
9 인간의 권리 23.07.20 34 0 9쪽
8 분노의 지게차 / 더 센 패거리들 23.07.19 45 1 9쪽
7 홍콩 느와르와 현실 한국 / 양들의 반란 23.07.18 46 0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