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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칼날 님의 서재입니다.

그림과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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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검은칼날
작품등록일 :
2021.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2.07.05 16:00
연재수 :
1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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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81,056

작성
22.01.0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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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여자 사진

DUMMY

하지만, 난 달그림자 월영(月影)의 요구는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그려달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진채사진’이라니.

난 그릴 자신이 없었던 게 아니다. 한 번도 여자를 그림의 대상으로 상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조선의 어떤 화원도 여자를 그리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재능을 탕진하고 싶었던 나는 결국 월영의 진채사진을 그려주었다.

진채사진을 본 이름난 다른 기녀들도 그걸 원했다. 난 거절했다.

진채사진은 한 번으로 족했다. 그건 술에 취해 그냥 휘갈기는 그림과는 달랐다. 그건 밑그림 그리는 데 하루 그리고 채색에는 적어도 사나흘이나 걸리는 작업이었다. 물론 상반신만 그렸기 때문에 작업기간은 단축됐지만, 그래도 이틀 동안은 모든 걸 다 쏟아 부어야 했다. 난 이 작업에 또 다시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기녀들은 아무리 잘 그린 산수·대나무·영모·화초라도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그녀들은 이제 자기의 그림이 갖고 싶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해의 그림자 일영(日影)이 날 불렀다. 그녀는 하늘처럼 푸른 저고리를 입고 있었고, 비녀와 장신구도 푸른 색 계열이었다.

그윽한 술 향기가 방안에 퍼졌다. 그러나 술상에는 안주가 하나밖에 없었다. 종지에 담긴 푸른 하늘이 담겨 있었다. 하늘을 담아놓은 종지가 안주를 담아놓은 그릇이었다. 그것은 안주가 아니라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진청색 안료였다. 그 때는 그게 최고급 석청인지 알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아랍에서 코발트라는 광석으로 만든 것을 청나라를 통해 수입한 것이었다.

“안 그려주실 거면 다 마셔버릴 거예요.” 그녀는 하늘을 마시려고 했다.

난 그녀가 마시려고 한 하늘로 그녀의 푸른 저고리를 그렸다.

그 후, 난 기방을 찾았지만 술을 끊고 진채사진을 그렸다. 단사(丹砂)로는 화영(花影)의 저고리를 그렸고, 주사(朱砂)로는 수영(樹影)의 저고리를 그렸고, 진사(辰砂)로는 택영(宅影)의 저고리를 그렸다. 평생 써보지 못할 비싼 안료로 그녀들 여덟 명의 저고리와 장신구를 색칠했다. 그녀들이 어디서 이런 안료를 구했는지 묻지 않았다.

난 재능을 탕진하려고 그녀들을 그렸지만, 재능을 더욱 벼려졌다. 헛웃음이 났다. 어진화사에 못 참여했기 때문에 좌절했고, 좌절해서 재능을 탕진하고자 했고, 그러다 기녀의 진채사진을 그렸고, 어진화사에 참여한 화원들보다 더 비싼 안료를 써서 그렸다.

난 그렇게 온갖 색의 안료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김흥방이 날 불렀다. 진채사진을 그려달라고 했다. 나한테 부탁할 필요가 없는 가문의 인물이 그런 부탁했다. 어진화사에 참여했던 화원들도 그가 부르면 달려갈 것이었다.

나는 그를 그렸다.

김흥방이 준비한 안료는 시험 삼아 써볼 필요가 없었다. 그건 기녀들을 그렸을 때 써봤던 최고급 안료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들을 그릴 때는 안료의 양이 적어서 아껴 썼지만 이제 안료는 충분했다. 그리고 난 연습을 하지 않고도 그걸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을 만큼 실력이 늘었다. 붓이 잘 벼려진 칼처럼 움직였다. 아쉬움이 남지 않을 만큼 잘 그렸다.

김흥방도 만족했다. 그래서 사례를 하려고 했다.

난 재물은 필요 없으니 남은 단사만 달라고 했다.

김흥방은 내게 그걸 가져가라고 하면서 어느 기방이든 술값을 치루지 말고 취하라고도 했다.


난 나흘 동안 누워만 있었다.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던 난 진이 빠져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자기가 그린 그림에 흥분했던 건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진채사진을 그릴 때 썼던 안료들의 색감과 질감이 그리웠다. 그래서 끊은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그림이 그리워 기방을 찾았다.

월영도 일영도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니, 그녀들은 자신의 그림이라도 그걸 가질 수가 없었다.

난 그래서 그녀들을 다시 그렸다. 그러고는 다른 채색은 하지 않고, 그녀들의 입술만 김흥방에게 사례로 받은 단사를 칠해 주었다.

얼마 후, 일영이 푸른 저고리를 입고 입술만 붉은 사진을 내밀었다. 그리고 기름이 엉긴 질 낮은 석청도 내밀었다. 김흥방을 그렸던 석청에 비하면 보잘 것 없지만 그녀들에게는 비싼 석청이었다. 어렵게 구했을 것이다. 그녀는 간절하게 자신의 진채사진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난 붓을 잡자 울컥했다.

그 때 기생어미가 들어왔다. 그러다 내 붓에 손을 뻗었다 빼앗지 못 하고 움츠렸다. 그러고는 붓 대신 석청이 담긴 그릇을 집어 들고 나갔다.

일영은 아무 말도 못하고 흐느낌을 삼켰다.

얼마 후 기생어미가 최고급 술을 들고 들어왔다. 술을 따르면서 사죄했다. 그러면서 다시는 딸들에게 그림을 그려주지 말라고 당부했다. 술과 안주는 걱정 말고 마시고 먹고 취하라고 했다. 이건 김흥방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누구나 잘 그릴 자신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려달라고 하지 않았다. 난 끊었던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잘 벼려진 실력은 쓸 데가 없어졌다.


얼마 후, 난 도화서에서 탄핵을 당했다. 기녀를 그렸다는 이유로 그렇게 됐다. 증거로 제출된 기녀의 진채사진은 솜씨를 인정받았지만 탄핵은 당연했다. 솜씨를 인정하는 것도 우스웠고 탄핵도 우스웠다.

기녀 그림 때문에 탄핵을 당하자 아버지가 연을 끊자고 했다.

난 변명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알았다고 했다. 나라가 그리라던 그림만 그리던 아버지를 이해했다. 나라의 눈치를 봐야하는 화원들을 이해했다.

난 그 후로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돈 한 푼 없이도 기방을 전전할 수 있었다. 탄핵을 당했지만 김흥방은 약속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러다 성 안에 있기 싫어 마포나루에 갔다. 주막에 들어가 술을 마셨다. 그냥 걸어 나가려는데 주모가 술값을 요구하며 나를 붙들었다. 난 취해서 김흥방에게 받으라며 화를 냈다. 주모는 미친놈 취급하며 화를 냈다. 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싸웠다. 손님들이 웅성대며 김흥방을 들먹이는 날 미친놈이라고 했다.

주모의 딸이 나와 말렸다. 난 자리에 앉아 술을 더 달라하며 심부름꾼을 보내 김흥방에게 다녀오라고 했다. 주모는 자리에 앉지도 못하게 했지만, 딸이 술을 내왔다.

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돌아섰다. 그녀는 매력적이었고 난 그리고 싶었다. 붓과 종이를 달라고 했다. 주모는 욕을 했지만, 어떤 손님이 붓과 종이를 내주었다. 난 그녀를 그렸다.

손님들은 조선 최고 권력자의 이름을 들먹이는 미친놈의 붓질을 바라보았다. 난 소묘도 없이 일필휘지로 그렸고, 손님들은 혀를 내두르다 그녀를 떠올렸다.

난 술잔에 먹물을 씻고 남은 단사를 꺼냈다. 붓을 씻은 술을 들이켰다. 붓끝에 단사를 조금만 찍었다. 그녀는 화장을 한 기녀들과는 달랐으니까. 입술을 칠하고 붓에 묻은 단사를 빨았다. 아주 옅은 색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입술보다 옅은 색으로 볼을 칠했다. 사진에 혈색이 돌았다.

어떤 손님들은 입을 닫았고, 어떤 손님들은 환호를 했다.

내게 붓과 종이를 내준 손님이 자신을 그려달라고 했다. 붓 끝에 남은 단사로 아직 그리지 않은 입술부터 칠했다. 그러고 나서 먹을 찍어 윤곽을 그렸다. 또 일필휘지로 그림을 완성했다.

손님들끼리 자기를 먼저 그려야한다고 싸웠다. 난 붓을 내던졌다. 붓 주인이 그림부터 챙겼다. 그러고 내가 던져버린 붓을 챙겼다. 그는 내게 인사를 하고 내 술값을 계산했다. 난 거부하며 그냥 가라고 했다. 내 술값은 김흥방이 계산한다고 했다.

손님들은 또 내가 미쳤다고 웅성거렸지만, 이제는 그림을 그려달라며 줄을 섰다. 어떤 손님이 공손히 붓을 내밀며 자신을 그려달라고 했다. 난 고개를 돌리고 술만 마셨다. 김흥방 집의 하인이 와서 술값을 계산했다. 그는 도성 안의 기방에는 다 이야기 해두었는데, 성 밖으로 나와 술을 마시냐며 내가 들을 수 있도록 투덜댔다.

난 술에 취해 주막에서 잤다.

다음 날 아침, 주모가 해장국을 내왔다. 그녀는 전 날과는 달리 상냥했다.

난 해장국을 먹으며 주막을 둘러보았다. 딸을 보고 싶었지만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난 그녀가 보고 싶어서 그렇게 나흘이 지냈으나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흘이 지난 날, 날 마뜩하지 않게 보던 주모가 고기를 구워 대접했다. 고기를 한 점 집어 들었을 때 여기 와서 술값을 계산한 김흥방 집 하인을 보았다. 그는 내 눈길을 피하고 얼른 돌아섰다.

그 날 이후로 주모는 날 극진히 대했다. 또 일하는 아줌마를 고용했다. 난 딸을 보기 위해 거기에 눌러앉았지만 그녀는 볼 수 없었다. 아마도 주막에 없는 것 같았다.

며칠 후, 난 방안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었다. 방문을 열려고 몸을 일으켰는데, 문에 손을 대기 전에 김흥방 집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문을 열며 들어오라고 했다. 그는 들어와 앉아서 나에게 개성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김흥방의 명령이었다. 내가 이걸 따르면 보상이 있으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난 우선 김흥방의 보상 내용을 들어보고 싶었다.

하인은 그녀에게 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며칠 동안 마음속에 그리던 그녀가 머뭇거리며 들어왔다. 손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는 그녀를 앞에 두고 조건 하나를 내걸었다.

‘다시는 서울에 발을 들이지 않을 것.’

난 그녀와 함께라면 서울이 아니어도 좋았다. 아니, 서울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따라 들어온 주모는 그녀는 뭐가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했다.

다음 날, 나와 그녀는 개성으로 떠났다. 우린 개성에 정착했다. 우린 서로 사랑했다. 그녀가 핏덩이 딸을 안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니, 지금도 사랑한다.


한현은 회한에 젖은 눈빛을 거두며 화첩을 덮었다.

“야, 챙겨놓아라.” 한현은 화첩을 준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예? 예, 알겠습니다.” 준이 짧게 대답했다.

“한 점도 안 남았을 줄 알았는데, 형은 어떻게 구하셨나?” 한현은 혼잣말을 내뱉으며 자리를 떴다. 뒷모습이 쓸쓸했다.


“야, 나 그 화첩 보면 안 돼?” 명희가 화첩을 집어 드는 준을 보며 말했다.

준은 고개를 끄떡이며 화첩을 명희에게 건넸다.

“아니, 너 먼저 보고 나서 줘.” 명희는 화첩을 받지 않았다.

“괜찮아, 너 먼저 봐.” 준은 화첩을 내밀었다.

“그래도······” 명희는 화첩을 받지 않으며 말했다.

“괜찮다니까, 난 이제 그림 볼 힘이 없어. 이걸 지금 또 보면 난 잠도 못 잔다.”

“응, 그래?”

“내가 지금 이 그림을 다 그릴 자신이 없다고.”

“그림을 왜 다 그려야 되는데?”

“원래 그래. 처음 본 그림은 무조건 따라 그려야 한다고. 남의 그림을 빌려 보면 언제 또 볼 수 있겠어?”

“이건 나중에도 볼 수 있잖아? 너 그래서 오늘 미친 듯이 그린 거니?”

“그런 그림은 평생 한 번밖에 아니, 평생 한 번도 볼 수 없는 그림이니까. 이제까지 좋은 그림이라고 했던 것들과는 다른 그런 그림이었으니까.”

“우리 여기 있는 동안 계속 보여줄게.”

“이젠 안 보여줘도 돼. 한 번만 따라 그리면 그대로 머릿속에 남아 있어.”

“못 믿겠는데.” 명희는 고개를 저으며 준이 내민 화첩을 받아들었다.

“나 부탁할 게 있어.” 준은 화첩을 건네며 말을 꺼냈다.

“응, 뭔데?”

“나 네가 타고 온 말 좀 타보면 안 돼?”

“안 돼!” 명희는 잘라 말했다.

“흥, 귀한 그림은 보여주면서 그까짓 말은 안 된다고?”

“너 말 타본 적 있어?”

“아니, 왜?”

“위험하단 말이야. 게다가 내 말은 고분고분하지도 않고.”

“그래?”

“그러면 내일 내가 말 타는 거 가르쳐줄게.” 명희는 준을 바라보며 친절하게 말했다.

“정말? 그러면 그림은 널 줄게.”

“그림이라니?”

“말 그림. 그려본 적은 있는데, 타보고 그리면 다를 것 같아.”

“말 그림, 정말로 주는 거지. 하하! 내일 가르쳐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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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칼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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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 사진 +2 22.01.09 299 8 12쪽
20 그림에 미친 사람들 22.01.08 304 7 12쪽
19 금지옥엽 22.01.07 310 9 11쪽
18 집 떠나와 22.01.06 298 7 14쪽
17 그림 그리는 소년 22.01.05 310 7 12쪽
16 성묘 22.01.04 336 7 15쪽
15 공개수사 22.01.03 351 7 13쪽
14 왕세제 책봉 22.01.02 356 6 13쪽
13 역관 +1 22.01.01 411 8 13쪽
12 종로 괘서 21.12.31 383 8 12쪽
11 그림 거간꾼 21.12.30 388 9 15쪽
10 고수들의 대국 21.12.29 397 10 12쪽
9 진화루 21.12.28 426 10 13쪽
8 포도군관 21.12.27 443 11 13쪽
7 역관가문의 후손 +1 21.12.26 610 9 12쪽
6 비공개수사 +2 21.12.25 506 10 12쪽
5 광통교 화방 +1 21.12.24 569 11 13쪽
4 내기바둑 +1 21.12.23 632 13 13쪽
3 명문대가의 얼자 +2 21.12.22 778 23 14쪽
2 해산 +1 21.12.21 1,001 24 13쪽
1 서소문 괘서(掛書) +10 21.12.20 1,935 4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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