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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검은칼날
작품등록일 :
2021.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2.07.0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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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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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2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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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왕세제 책봉

DUMMY

두 번째 사행에서 난 돈을 포기했기 때문에 역관으로서의 위상을 높였다. 그런데 난 돈을 아예 포기할 의도로 행동했지만 그렇다고 그다지 손해를 본 것도 아니었다.

사행에서 돌아와서, 수석 역관은 공적인 자리에서 나에게는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다고 칭찬했다.

그래서 난 이후의 사행에 자주 참여할 수 있었다. 사행에서 역관으로서 져야하는 금전적 손실은 항상 내가 떠맡아야 했고, 서길을 비롯한 청나라 사신들과의 뇌물 문제도 그랬다. 하지만 이게 그렇게 손해도 아니었다.

사신들은 뇌물을 먹은 만큼 편의도 봐주었다. 그래서 뇌물을 흥정하는 것보다는 그냥 넉넉하게 챙겨주는 게 속이 편했다.

특히, 서길은 탐욕스러웠기에 탐욕을 채워주면 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난 사행을 갈 때마다 인삼 팔 포 중 일곱 포에 대한 중개권과 한 포의 소유권을 뇌물로 주었다. 난 인삼 일곱 포를 그에게 맡기고 누구보다 싸게 팔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주위에서 좋은 값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누구보다도 난 항상 한 푼이라도 더 받았다. 하지만 그걸 누구에게도 자랑하지 않았다.

그 후 서길과는 친분관계를 꾸준히 유지해왔다. 별로 사귀고 싶지 않은 친구였지만 그와의 친교는 북경에서의 외교활동에도 큰 도움을 되었다.


이제는 육 년 전 서길이 나를 찾았던 그 날 밤으로 돌아가자.


그 날은 경종 이년(1722) 오월 이십오일 밤이었다.


이 때 서길이 청나라의 사신으로 서울에 왔다. 그는 조선의 노론이 주청을 응낙한 왕세제 책봉 문서를 가지고 왔다.

이건 별것 아닌 문서쪼가리일 수도 있다. 왕세제 책봉이란 것이 조선이 청나라의 비준을 받는 형식이었지만, 말 그대로 형식일 뿐이었다.

청나라 황제도 조선이 결정한 문서에 도장만 찍을 뿐이지 내정에는 간섭은 하지 않았다.

조선도 상황이 바뀌면 또 다시 문서를 꾸며서 청나라 황제에게 내밀면 됐다.

하지만 이 때 서길은 자신이 가져온 문서에서 막대한 뇌물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았다.

어쨌든 당시에 노론은 묵호룡의 고변 이후 궁지에 몰려 있던 상황이었다. 자신들이 임금으로 밀던 연잉군에게 역모사건 수사의 칼끝이 겨눠지던 때였다.

연잉군이 역모의 수괴로 처단 당한다면 노론은 재기할 수 없게 몰락할 것이다. 갑술환국 때 자신들이 무참히 처단한 남인들 꼴이 날 것이었다.

경종이 한 발만 더 내딛으면 그렇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경종은 모든 문제에 대해서 결단력이 부족했지만, 배다른 동생의 문제에 대해서는 언제나 더 그랬다.

역모사건 조사의 끝은 항상 연잉군과의 관계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역모가 성공하면 그가 임금이 될 것이니까.

그런데 그와의 관계가 드러나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경종은 항상 수사 중단을 지시했다. 이전에도 그랬고 이 때도 그랬다.

그렇다고 그냥 아예 없던 일처럼 끝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노론은 청나라 황제의 도장이 찍힌 왕세제 책봉 문서를 반전의 계기로 삼고자 했다.

경종은 그 문서를 받고도 연잉군을 처단할 수 있었다. 청나라 황제도 현직 임금에 대한 역모의 괴수를 죽었다는 것에 간섭할 수는 없었다. 연잉군을 처단하고 나서 역적을 처단했다는 문서를 새로 꾸미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경종은 머뭇거렸고, 노론은 왕세제 책봉 문서가 경종의 결단력을 혼란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했다.

서길은 이런 조선의 상황과 노론의 입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미 북경에서 조선왕조에서는 한 번도 없었던 형제 상속에 대한 노론이 밀어붙인 조선의 주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옹정은 자국의 대신들이 있는 자리에서 조선 사신에게 그 이유에 대해 물었다.

노론의 일원이었던 사신은 임금의 ‘발기불능’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는 확인된 사실이 아니었지만, 노론은 조선 팔도에 이런 소문을 악의적으로 퍼트렸다. 거짓말도 자주 하다보면 스스로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는다.

소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노론은 국왕을 모독한 것만은 분명하다.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국제적으로도 그런 것이다. 그들은 당파적 이익을 위해서 자국의 임금을 국제적으로 개망신 주는 것도 꺼릴 게 없었다.

그래서 서길은 막나가는 노론의 행태에 막나가는 액수의 뇌물을 요구해도 괜찮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변 역관, 김흥방의 수하가 날 찾아왔네.” 서길이 나를 찾은 그 날 밤 이렇게 말을 꺼냈다.

이런 상황은 내가 이미 예상한 것이기에 담담하게 고개만 끄떡이며 그의 말을 들었다.

“나는 병을 핑계 대고 자네를 찾았네. 왕세제 책봉 칙서에 대해 알려달라고 하면서 은 오천 냥이 어쩌고저쩌고 하더군.”

“그럼, 받으면 될 것이 아닙니까?”

“아니, 난 지금 조선의 상황을 좀 더 알고 싶어서 그러네.”

“이미 아실만큼 아시지 않습니까?”

“자네, 칙서의 내용이 어떨 것 같나?”

“예?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미 황제께서 윤허한 것 아닙니까?”

“그냥 그렇지만은 않다네?”

“어떻게 칙서의 구체적인 내용까지 알고 계십니까?”

“그건 알 것 없고. 음, 그대로 외워볼까?”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제까지 냉담하던 내가 관심을 보이자 그는 웃으며 시간을 끌었다.

“황제께서는 칙서에 이렇게 쓰셨네. ‘어차피 지금은 아들이 없어서 왕세제 책봉을 청했으니, 후에 좋은 일이 생겨 후사를 따로 정할 일이 생긴다면 다시 주청하라. 부자간에 왕위를 전하는 것이 나라의 일상적인 법도이고 형제가 계승하는 것은 임시 방책일 뿐이다. 왕이 병을 앓고 있으며 자식도 없으므로 부득이하게 동생을 왕세제로 책봉하게 되었다고 청하였으나, 만약 회임의 조짐이 있고 세자를 얻게 되면 반드시 다시 주청하라.’라고 말이야. 상황이 바뀌면 다시 주청하라는 것을 두 번이나 강조하셨네.”

“그렇다면 은 오천 냥이 말이나 됩니까? 김흥방의 수하에게 이런 내용을 말씀하셨습니까?”

“김흥방도 아니고 그의 수하에게 말할 필요 있나?”

“아마 김흥방이 직접 찾아갈 것 같습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왕세제 책봉은 노론에서 벌인 정치공작입니다. 주상께서 양자를 들이려 하시니 이 따위 짓을 벌인 것입니다. 후사가 없으면 동생이 아니라 양자가 그 뒤를 잇는 것이 조선의 상속법이니까요. 어쨌든 노론은 지금 궁지에 몰렸으니 열쇠는 사신님께서 쥐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서길이 말해준 칙서의 내용을 듣고 청나라 황제의 의도를 알아챘다.

그도 조선의 국내 정세가 어떻게 바뀔지 모를 것이다. 그래서 칙서에서 왕세제가 아닌 제삼자가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에 대비해둔 것이다. 어떤 상황이든 자국과의 관계를 매끄럽게 하기 위해 일종의 ‘빠져나갈 구멍’을 남겨둔 것이다.

나는 주상께서 칙서를 읽으시고 역모 수사에 있어 마음 편하게 결단을 내리길 바랐다. 아들이 생기면 세자로 삼으면 되고 왕세제 책봉은 물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날 밤, 서길이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김흥방이 날 찾아왔다.

김흥방은 나에게 서길과의 친분을 이용해 그를 매수해달라고 했다.

나는 거절했다.

서길에게 말 몇 마디 하는 것은 다 된 밥에 숟가락만 얹는 것에 다름없다.

서길은 친분보다 뇌물에 좌우되는 인간이었고, 노론은 물불 안 가리고 뇌물을 먹이기로 했기 때문에 나는 통역만 몇 마디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난 그렇고 싶지 않아서 거절했다. 애초에 왕세제 책봉은 말도 안 된다며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정부가 왕세제 책봉을 주청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했을 때, 나는 핑계 삼아 청나라에 가지 않았다.

나는 비준문서를 가져온 사신과 그걸 사려는 노론의 말들을 통역해줄 수는 없었다. 그 때 만약 노론이 정권을 잡을 것을 알았더라도 그랬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지금처럼 현직에서 밀려날 것을 알았더라도 그랬다.

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해야 하는 인간이니까. 그걸 버리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지만 난 그렇지 못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나서 후회 하는 인생을 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날 밤이 지났다.

서길은 내가 준 약간의 정보를 뇌물 액수를 올리는 데 써먹었을 것이다. 뇌물을 받고 나서 칙서를 아예 김흥방에게 넘긴 것 같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노론 쪽에서 칙서의 내용을 삭제한 후에 위조했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대로였다면 왕세제 책봉 문서를 반전의 계기로 삼으려던 노론에게는 치명타였을 것이다. 왕세제 책봉 문제는 언제든 무효화해도 된다는 내용이었으니까.

그들에게는 정치적 파산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걸린 문제였으니, 황제의 칙서 위조조차 대수일 리는 없었다.

서길은 자신이 좋은 패를 가졌음을 확신했고, 마음껏 뇌물의 판돈을 올렸다.

서길은 나를 만난 후 이틀 뒤인 오월 이십칠일 어전에서 왕세제 책봉 문서를 올렸다.

나는 이 문서가 위조되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확한 액수는 알 수 없어도 서길 엄청난 뇌물을 챙긴 건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유월 사일에는 왕세제가 된 연잉군이 직접 관소에 나가서 청나라 사신을 전송했다. 그러면서 청나라 외교 관리들에게 몰래 은 오천일백 냥을 주었다는 말이 있다. 이것 말고 서길은 혼자서 은 이만 냥을 챙겼다는 소문도 들렸다.


노론의 몰락을 바라던 나는 이를 계기로 내가 몰락했다. 아니, 목이 잘리고 재산을 몰수당한 것이 아니니까 몰락이란 표현은 과하다. 몰락이란 말은 장씨 가문인 희수 형 집안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 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역관에 임용되지 못했다.

조선에 자격증을 가진 역관들은 넘쳐났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역관이 속한 사역원을 돌아가면서 현직에 임용하는 체아직(遞兒職)으로 운영했다.

열 명 남짓한 현직을 놓고 역관들은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어야 했다. 그래서 시험도 많았다. 결국 실력이 없으면 현직에서 버틸 수 없는 구조였다.

물론 역관들은 뒤에서 봐주는 양반들의 눈치도 봐야 했다. 하지만 양반들도 실력이 없는 역관을 무턱대고 밀어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노론의 독재가 시작된 후에는 그들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견제 세력을 처단한 권력이 누구의 눈치를 보겠는가?

지금은 몰락한 서인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던 때, 나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버텼다. 중립을 지킨다는 게 쉽지 않았다. 권력은 자신의 편이 아니면 다 적으로 몰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꾸역꾸역 버틸 수 있었던 건 실력이었다. 하지만 실력도 결국 파벌을 이길 수는 없었다.


노론은 그 날 청나라 사신의 관소를 감시하다가 서길이 나를 찾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김흥방은 서길이 돌아간 후에 나를 찾았다.

그런데 서길은 나를 만나고 돌아간 후에 뇌물의 협상금액을 배의 배로 올렸다.

퇴로가 없던 노론이 엄청난 재산을 털어줬다. 이 덕분에 그들은 회생했지만 회생하고 나니 돈이 아까웠다. 그들의 재산이 그들을 살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정치적인 재능이 자신을 살렸다고 믿기 시작했다. 그들은 털린 재산을 아까워했고, 그게 나 때문이라며 나를 증오했다.

그들의 논리로 따지자면, 서길이 털어간 그들의 재산은 서길의 외교적 재능인 것이다.


이제는 연잉군이 세제에서 임금이 되었다.

그래서 노론이 정권을 잡았고 나는 현직 역관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노론은 나를 현직에서 밀려내기는 했지만, 그 때 일로 나를 걸고넘어질 수 없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이 역적이었단 걸 자인하는 것일 테니까.


그 날 밤은 지금으로부터 이미 육 년이 흘렀다.

변양호가 과거를 털어놓자 방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아버지, 잘못하신 게 없잖아요?” 명희가 침묵을 깼다. “그 따위 왕세제인지 뭔지 때문에······”

“명희야!” 변양호가 딸의 말을 자르고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명희는 분을 삭이며 씩씩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동희도 상기된 얼굴을 하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대충 짐작하고 있던 얘기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입을 통해 내막을 알게 되니 분한 생각이 들었다.

“네가 화낼 일이 아니잖니. 어쨌든 그만해라.” 변양호가 딸을 달랬다.

“아버지께서 뭔 역모를 꾸민 것도 아니잖아요.” 명희가 말했다.

“역모라니, 그런 말 함부로 입 밖에 내는 게 아니란다.” 변양호가 부드럽게 꾸짖었다. 명희가 입을 열려고 하자 손을 내저었다. “오늘은 됐다. 그만 물러가라.” 변양호가 나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동희는 동생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명희는 오빠의 손을 뿌리치고 혼자서 일어섰다. 승호도 인사를 하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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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공개수사 22.01.03 350 7 13쪽
» 왕세제 책봉 22.01.02 355 6 13쪽
13 역관 +1 22.01.01 410 8 13쪽
12 종로 괘서 21.12.31 382 8 12쪽
11 그림 거간꾼 21.12.30 387 9 15쪽
10 고수들의 대국 21.12.29 396 10 12쪽
9 진화루 21.12.28 425 10 13쪽
8 포도군관 21.12.27 442 11 13쪽
7 역관가문의 후손 +1 21.12.26 609 9 12쪽
6 비공개수사 +2 21.12.25 505 10 12쪽
5 광통교 화방 +1 21.12.24 568 11 13쪽
4 내기바둑 +1 21.12.23 631 13 13쪽
3 명문대가의 얼자 +2 21.12.22 777 23 14쪽
2 해산 +1 21.12.21 1,000 24 13쪽
1 서소문 괘서(掛書) +10 21.12.20 1,934 4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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