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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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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검은칼날
작품등록일 :
2021.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2.07.05 16:00
연재수 :
1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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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5
글자수 :
58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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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5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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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그림 그리는 소년

DUMMY

다음날, 승호와 남매는 파주를 떠났다.

마을사람들은 그들을 배웅했고, 묘지기는 임진나루까지 따라왔다.

그들은 거기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반대편 나루에 도착하자 사공이 말을 끌어내려주었다.

명희는 말에 올라 반대편을 바라보았고, 묘지기는 멀리서도 명희가 보는 것을 느꼈는지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명희는 돌아가라는 손짓을 했다.

동희는 명희가 손짓하는 곳을 바라보다 묘지기가 인사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래서 돌아가라는 손짓을 했지만, 그래도 묘지기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승호도 남매가 손짓하는 반대편 나루를 바라보았고, 묘지기는 연신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명희가 그냥 가자고 했고, 남매와 승호는 임진나루를 등지고 출발했다. 명희가 얼마 후 다시 뒤를 돌아보았고, 다시 묘지기에게 돌아가라는 손짓을 했다.

동희와 승호도 명희의 손짓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고, 묘지기는 그제야 절을 하고 나서 자리를 떴다.


남매는 조랑말이 끄는 수레의 속도에 맞춰 말을 천천히 몰았다.

청교역에 이르렀다. 이곳에 있었다는 고려시대의 개국사(開國寺)는 터만 남아 있었다. 그 터에는 장명등(長明燈) 하나만 남아 있었다. 봄볕이 어루만진 석등(石燈)은 따뜻한 느낌은 주었지만, 십 척이 훨씬 넘는 높이는 위압감을 풍겼다. 석등의 규모만으로도 개국사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송도까지 오 리밖에 남지 않았고, 송도의 나성과 보정문(保正門)이 눈에 들어오는 거리였다.

거기에서 사 리를 가자 보정문을 앞에 두고 오른쪽으로 샛길이 있었다. 오르막길 위에 작은 정자가 있었고, 거기서 조금 올라가 건너편에는 주막이 있었다. 주막 뒤로는 작은 언덕이 있었고, 언덕 앞에는 어떤 건물도 없었다.

“여긴 것 같아요.” 승호가 오른쪽 샛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뭐야? 인가도 없는 샛길이잖아. 여기가 확실히 맞는 거야? 성안으로 들어 가야하는 것 아니야?” 명희가 물었다.

“아니에요. 여기가 맞아요. 보정문에서 일 리 정도 앞에 있는 샛길이라고 하셨어요. 마침 정자도 있고 주막도 있는 것을 보니 틀림없어요. 인가는 저 언덕을 넘어가면 있을 거예요.” 승호가 변양호에게 들은 말을 옮겼다.

“승호가 제대로 들었겠지. 어쨌든 가보자. 갔다가 아니면 저 정자에서 쉬어 가면 되잖아.” 동희가 명희를 나무라듯 말했다.

“쉴 만큼 달리지도 않았는데, 쉬긴 뭘 쉬어.” 명희는 반박하며 정자로 말을 몰았다.

승호는 조랑말을 끌고 동희는 말을 타고 명희의 뒤를 따랐다. 승호는 앞서가서 명희가 말에서 내리는 걸 도우려고 했다.

그러나 명희는 이미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말도 묶어놓지 않고 정자로 뛰어올라갔다.

정자에는 누더기를 걸친 소년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소년의 뺨은 홀쭉했고 며칠 동안 피죽도 못 먹은 것 같은 몰골이었다. 소년은 인기척을 느끼고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소년의 앞에는 가로로 길게 펼쳐놓은 화선지가 있었다. 너덜너덜한 오른쪽 소매 밖으로 가는 손목이 화선지 위를 움직였다. 가는 손목은 금방 부러질 것 같았지만 붓질에는 힘이 넘쳤다.

정자의 바닥 여기저기에는 물기가 마른 붓질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먹물이 아니었다. 벼루 옆에 떠놓은 맹물일 것이다. 연습하면서 먹이며 종이를 아끼려고 한 것 같았다.

명희는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소년의 옆으로 다가갔다.

소년은 돌아보지도 않고 그리는 것에 열중했다. 목탄으로 소묘를 해놓은 화선지 위를 붓이 경쾌하게 힘차고 달렸다. 그러다 붓을 옆으로 비스듬히 뉘어 재빨리 들면서 끌어당겼다. 화강암의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소부벽준(小斧劈皴)을 구사했다. 굳센 바위 표면이 마치 도끼로 찍어낸 자국 같았다.

명희는 어린나이에도 원숙한 경지에 이른 것 같은 소년의 붓질에 감탄했다.

또한 그림의 구도도 독특했다. 시점을 한 곳에 둔 일점투시법을 사용했다. 일점투시법 때문에 그림 자체가 사실적으로 보이기는 했다.

명희는 아버지가 북경 천주당에서 선물 받았다는 서양 에칭화를 떠올렸다.

소년의 그림은 서양그림의 시점을 취했다. 조선과 중국의 산수화는 대체로 실경이 아니라 화가의 이상을 표현한 그림이다. 그 풍경은 화가의 머릿속에서 관념적으로만 존재하는 이상향이다. 또한 실경을 그렸다고 해도 다점투시법을 사용하여 여러 경치를 한 화면에 그려 넣으려고 했기에 서양화와는 달랐다.

명희는 둘의 우열을 가리지 않았다. 서양화는 사실적으로 풍경을 옮겨놓으려 한 것이고, 산수화는 아예 자연을 그대로 옮길 수 있다고 전제하지 않은 그림이었다.

명희는 이 소년이 서양화를 본 적이 있는지 궁금했다.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은 자기 또래의 소년이 어디서 그림을 배웠고, 벌써 어떻게 이런 수준에 이르렀는가하는 것이었다.

명희는 고개를 들어 정자 앞쪽에 펼쳐진 산을 바라보았다.

송도의 진산인 송악산(松嶽山)이다. 바로 그 산이 화선지 위에 있었다.

“얘, 앞에 있는 저 산 그리는 거야?” 명희가 물었다. 소년은 어려 보이는 데다 차림새도 허름하여 하대를 했다.

“보면 몰라.” 소년이 공격적인 말투로 대꾸했다.

“아니···” 명희는 대꾸하지 않고 말을 삼켰다. 소년의 퉁명스러움에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소년에게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소년은 자신의 그림에만 열중하느라고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사이에 승호가 말을 묶어놓고 동희와 함께 정자로 올라왔다.

동희는 제멋대로인 동생을 나무라려다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소년을 발견하고 입을 다물었다.

소년은 승호와 동희를 힐끗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명희는 동희에게 다가오라고 손짓을 했고, 동희는 소년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거기로 다가갔다.

“이런 그림 처음 보지 않아?” 명희가 목소리를 낮춰 동희에게 물었다.

“그러게, 시점이 서양그림과 비슷한데.”

“그렇지. 나도 그 생각을 했다니까. 나보다도 어려 보이는데 서울서 거들먹거리는 화원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동희는 고개를 끄떡이고 허리를 굽혀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소년은 붓을 입으로 빨았고, 동희는 그 동작이 몽당붓의 붓끝을 세우기 위해서임을 알아차렸다. 뭉뚝한 붓끝으로 세밀한 선을 그려내는 게 신기했다.

소년은 그림을 그렸고, 남매는 그림을 보았다.

“얘, 너 혹시 한 화원님 댁 아니?” 한참 동안 그림 그리던 것을 보던 명희가 물었다.

소년은 자신에게 묻는 말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냥 그림만 계속 그렸다.

“얘, 너 한 화원님 아냐고?” 명희가 이번에는 소리를 높여 물었다.

“한 화원이 나야. 그런데 날 왜 찾아?” 소년이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

“그림 좀 그리면 개나 소나 화원이냐?” 명희가 목소리를 높여 비꼬았다. 자신을 무시하는 소년에게 쌓였던 화를 토해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소년이 이미 일류 화원들의 수준에 근접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류 화원들이라고 해도 지금 소년의 나이에 이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으리라.

“계집애가 버릇없이, 쯧쯧.” 소년은 혀를 차며 붓을 벼루 위에 걸쳐놓았다.

“야 인마! 감히 계집애라니. 나이도 어린놈이···”

“싸가지 없는 년이 어디서 행패야. 성안에서 찾을 사람 있으면 거기나 가봐. 여기 정자에는 뭐한다고 왔어?”

“이 정자가 네 거야. 우리가 여기서 쉬겠다는데 네가 뭔 상관이야.”

“그래 잘 쉬어라.” 소년은 한 마디 내뱉고는 화구를 챙기기 시작했다.

동희는 유치하게 말싸움하는 명희를 흘겨보았다.

그 사이에 소년은 이미 화구를 다 챙기고 화선지를 말았다.

“그냥 가려고? 그림 더 안 그려?” 명희는 아쉬워하며 물었다. 말투에 묻어나는 아쉬움을 묻어버리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동안 많은 그림을 보았지만, 그림 그리는 모습은 처음으로 보았다. 그래서 소년을 붙잡고 그림 그리는 걸 더 보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사과부터 해야 했기에 그만두었다.

그 때 소년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서 정자를 나섰다.

“저놈 그림은 잘 그리는데 성질은 더럽네.” 명희가 무안해서 혼잣말을 했다.

“너만 하겠냐? 놀러 나온 것도 아닌데 아무한테나 시비 좀 걸지 마.” 동희가 핀잔을 줬다.

“도련님, 근데 여기가 맞는 것 같아요.” 승호는 명희가 동희에게 욕을 더 먹을까봐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고는 자신에게 시선을 주는 남매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어르신께서 여기 정자가 있다고 하셨고, 오르막길에 주막이 있다고 하셨어요. 저기 있는 주막이 아마 그 주막인 것 같아요.”

남매는 승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맞는 것 같아요. 우선 제가 주막에 가서 물어보고 올게요. 어쩌면 이사 가셨을지 모른다고 하셨는데··· 어쨌든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승호는 말을 마치고 주막으로 달려갔다.


승호가 주막에 다녀온 후, 남매는 승호를 따라 소년이 올라간 언덕으로 향했다. 말은 타지 않고 고삐를 끌며 걸었다.

언덕위에 오르자 내리막길 아래 인가가 보였다. 그 인가는 다 허물어져가는 초가삼간이었다.

승호와 남매는 다시 거기로 향했고, 사립문 앞에 멈추었다.


“이놈아, 이걸 그림이라고 그렸냐?” 집안에서 쉰 목소리로 호통 치는 소리가 났다.

“이게 그림이 아니면 그럼 뭡니까?” 정자에서 그림을 그리던 소년의 목소리였다.

“이놈이 버르장머리 없이 말대꾸는······ 이놈아!” 기력이 없는 호통소리는 끝이 갈라졌다.

“마음에 안 드시면 찢어버릴게요.”

“아니야, 이놈아, 그냥 둬.”

그 때 안에서 뺨맞는 소리가 들려왔다.

승호와 남매가 놀라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 또 다시 뺨맞는 소리가 들렸다.

“저,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여기가 한 화원님, 한현 어르신 댁입니까?” 승호가 집안에다 소리 높여 물었다.

명희는 승호에게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일시에 집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저기, 변 역관 댁에서 왔습니다.” 승호가 다시 집안에서 소리쳤다.

잠시 후 초췌한 몰골의 중년 사내가 앉아서 방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승호와 남매 그리고 마필에게 번갈아 눈길을 주었다. 그렇게 남매를 주시하다가 반가운 눈길을 보냈다.

“너희가 동희와 명희냐? 양호 형님은 잘 계시냐? 그래 어떻게 찾아왔어? 고생했지?” 그가 연이어 물었다.

“예, 예.” 동희와 명희는 함께 대답을 하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우선 들어와라. 들어와서 이야기하자.” 한현이 반기며 말했다. “네 놈은 나가 있어라. 에이 못난 놈.” 한현은 소년을 방에서 내쫓았다.

소년은 잘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방을 나섰다. 이 때 방으로 들어가던 명희와 눈이 마주쳤다.

“네가 한 화원이 맞기는 맞구나. 몰라 봐서 미안하네.” 명희는 작은 목소리로 소년을 비꼬았다.

동희는 명희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고는 돌아보는 동생에게 눈을 부라렸다.

한현은 명희의 말을 못 들은 것 같았다.

소년은 명희의 말에 대꾸 없이 밖으로 나오다가 승호를 보았다. 그의 앞을 그냥 지나가려다 두 개의 궤를 실은 수레의 빈 공간에 걸터앉았다.

“승호야, 아버지 편지 좀 가져와.” 동희가 방문을 열고 소리쳤다.

“예!” 승호가 대답했다. 그러고는 봇짐에서 변양호의 편지를 꺼내 방으로 걸어갔다.

열린 방문 사이로 홀아비냄새와 확 풍겼다. 변변한 세간도 없는 방바닥에는 소년의 그림이 너부러져 있었다.

동희는 무표정하게 한현을 바라고 있었고, 명희는 불편한 기색을 억지로 감추고 있었다.

승호가 동희에게 편지를 건넸고, 동희는 그 편지를 한현에게 건네고는 승호에게 나가 있으라고 했다.

한현은 변양호의 편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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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그림에 미친 사람들 22.01.08 303 7 12쪽
19 금지옥엽 22.01.07 309 9 11쪽
18 집 떠나와 22.01.06 297 7 14쪽
» 그림 그리는 소년 22.01.05 308 7 12쪽
16 성묘 22.01.04 334 7 15쪽
15 공개수사 22.01.03 349 7 13쪽
14 왕세제 책봉 22.01.02 353 6 13쪽
13 역관 +1 22.01.01 409 8 13쪽
12 종로 괘서 21.12.31 380 8 12쪽
11 그림 거간꾼 21.12.30 386 9 15쪽
10 고수들의 대국 21.12.29 395 10 12쪽
9 진화루 21.12.28 423 10 13쪽
8 포도군관 21.12.27 440 11 13쪽
7 역관가문의 후손 +1 21.12.26 608 9 12쪽
6 비공개수사 +2 21.12.25 503 10 12쪽
5 광통교 화방 +1 21.12.24 567 11 13쪽
4 내기바둑 +1 21.12.23 629 13 13쪽
3 명문대가의 얼자 +2 21.12.22 775 23 14쪽
2 해산 +1 21.12.21 994 24 13쪽
1 서소문 괘서(掛書) +10 21.12.20 1,930 4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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