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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칼날 님의 서재입니다.

그림과 칼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무협

완결

검은칼날
작품등록일 :
2021.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2.07.05 16:00
연재수 :
1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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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8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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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5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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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비공개수사

DUMMY

남매와 승호는 광통교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손돌은 그들을 기다리다가 변양호가 승호를 찾는다고 했다.

승호는 남매를 뒤로하고 변양호를 찾았다.

“승호야, 너 오늘 아침에 만난 포도군관을 알아보았느냐?” 변양호가 물었다.

“예? 아 예, 그날 봤습니다.”

“그래, 우포청 포도군관이다. 어쨌든 앞으로 봐도 모른 척하면 될 거야. 오늘 아침 여기 온 것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괘서사건은 비공개 수사를 하겠다고 하는구나.”

“예, 알겠습니다.”

승호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붙잡고 있던 걱정을 떨쳐냈다. 그건 포도군관이 자신을 잡으러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지금 변양호의 말을 들어보니 그도 이 일에 동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변양호는 우포청 포도군관이 알려준 조정의 상황을 승호에게 말해주었다.


서소문에 괘서가 붙고 나서도 서울은 조용했다.

그 때 지경연사(知經筵事) 김동필(金東弼)은 자기 재량으로 그 괘서를 불사르게 지시했다. 그러고 범인을 잡지 못하면 이런 변괴가 잇따라 일어날 것이니 상금을 걸어 잡자고 임금에게 주청했다.

임금도 그의 의견에 동조하며, 숙종 때 연은문(延恩門) 괘서의 범인을 상금을 걸고 나서 잡으려 했지만 결국 잡지 못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사소한 원한 때문에 무고할 폐단이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상금을 걸고 잡으려다 실효가 없으면 나라의 체통만 손상하게 될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좌우포청(左右捕廳)에 비밀 수사를 지시했다.


변양호는 현재 상황을 얘기하고 나서 승호를 바라보면서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지금부터 내가 널 양자로 삼겠다.”

승호는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숨이 막히고 머릿속이 텅 비었다. 변양호가 노비인 자기를 양자처럼 대접해준 건 사실이다. 그래서 항상 고마워했다. 그래도 실제로 양자로 삼겠다는 말에서 현실감을 느낄 수 없었다.

“네가 그동안 너에게 어떻게 대했느냐?” 변양호는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인 승호를 보며 물었다.

“아버지처럼 대해주셨습니다.” 승호가 대답했다.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 형에게는 많이는 미안하지 않을 것 같구나. 고개 들고 편히 앉아라.”

승호는 ‘형’이 누군지도 뭐가 미안하지 않은지도 몰랐지만,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변양호를 바라보았다. 마주친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왠지 이런 태도를 취해야 할 것 같았다.

“형의 눈빛처럼 형형하구나.”

“예?” 승호는 자꾸 형 얘기를 꺼내는 변양호를 바라봤다.

변양호는 허공을 응시하다 십육 년 전 일을 회상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작정을 한 듯 입을 열었다.


내가 역관으로 북경에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사행단은 국경을 넘어 의주부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날 밤, 형이 날 찾아왔고, 자기 집에 같이 가자고 했다.

얼마만의 재회인가?

난 형이 뭔가 부탁할 게 있을 거란 걸 알았고, 같이 술 한 잔 할 생각으로 형을 따라 나섰다.

형은 산길로 접어들어 마음이 급한지 빠른 걸음으로 길을 재촉했다.

난 허겁지겁 뒤따랐고, 형은 미안하면서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형 형수가 많이 아프기 때문에 그러니 이해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얼마 전에 낳은 아들 얘기를 하며 웃음도 보였다. 형은 자세한 얘기는 집에 가서 하자며 달리듯 걸었다.

나는 가는 길에 뭘 물어보기도 뭣해서 말없이 따랐다.

우리는 그렇게 서둘러 집에 도착했다.

형이 방문을 열었을 때, 난 거친 숨을 다 몰아쉬기도 전에 숨이 막혔다.

참혹한 광경에 형은 숨이 막히는 게 아니라 아예 멈췄을 것이다.

형수는 이미 돌아가셨고 젖먹이는 죽은 엄마의 마른 젖을 빨며 울고 있었다.

젖먹이는 잠시 울음을 그치고 울기 시작한 우리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울면서 계속 엄마 젖을 빨았다.

난 뭘 할지 몰라 허둥대며 발만 동동 굴렀다.

형은 엄마에게서 젖먹이를 떼어내 품에 안고 달랬다. 그러나 형에게도 배고파 우는 젖먹이를 달랠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 형은 안고 있던 젖먹이에게 술상 위의 탁주를 먹였다. 배고파 우는 아기에게 줄 거라곤 그거밖에 없었다.

젖먹이는 울다 지쳤는지 그걸 몇 모금 빨아먹고는 잠이 들었다.

우리 둘 다 겨우 한숨을 돌렸다.

그제야 형은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울다 지친 형은 멍한 눈으로 잠든 아들을 바라보다가 영원히 잠든 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가슴은 가려줘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그녀의 옷섶을 여며주었다.

넋이 나가 있던 나는 멍하니 그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형은 그런 나를 보며 웃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 또 다시 미친 듯이 울었다.

슬픔이 지나쳐 미쳐버린 게 아닌가?

나는 형을 달랠 수 있는 어떤 언어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형이 무슨 말이라도 먼저 꺼내주기 바랐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답답한 시간이 하염없이 흘렀다.

“양호, 술이나 한 잔 하세. 자네 주려고 차려놓은 탁주를 내 아들이 먼저 먹었군. 허허, 미안하네.” 형은 울다가 지쳤는지 술잔을 들며 분위기를 바꾸려고 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없이 술잔을 들었다. 그러고 건배를 하려다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혼자 들이켰다.

형도 자기 혼자 술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양호, 역적의 자손으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아나? 역적이라는 당사자는 모가지가 잘리니 아무것도 모르지. 하지만 남겨진 집안사람들은 모가지라도 붙어있는 걸 위안으로 삼을 수 있을까? 그 집안은 그냥 망하는 걸세. 희망이란 건 하나도 없지.”

난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역적 집안을 회상했다.


형, 그러니까 장희수는 조선 최고의 역관 가문인 인동 장씨의 일족이었다.

큰아버지뻘 되는 장현은 인동 장씨 집안을 최고의 역관 가문으로 만드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26세에 역과에 장원급제했으며,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瀋陽)에 인질로 끌려갔을 때 통역을 맡아 청나라에 6년간 머물렀다. 귀국한 후에는 청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거부가 되었다. 숙종 때에는 사촌 동생 장형이 죽자 그의 딸 장옥정을 양육하다가 궁에 들어가게 했다. 그 후 장옥정이 숙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그는 부와 권력을 한꺼번에 움켜쥐게 되었다. 이 때 장현은 문중의 후손들을 사역원에 입학시켜 역관으로 키워냈다. 하지만 희빈 장옥정이 죽고 그녀의 오빠 장희재가 역적으로 몰려 주살된 후 인동 장씨 가문은 몰락했다.

그 후 형은 갑자기 사라졌고 오늘 갑자기 날 찾아왔다. 지금 보니 역관 명문가는 입에 풀칠하는 것조차 힘든 가문이 되어버렸다.


“서울에 있을 때는 그렇게 자랑스럽던 가문이 이젠 드러내고 말할 수 없는 가문이 돼버렸네. 여기 와서 한어 통역이나 해볼까 했는데 그것도 쉽지가 않아. 아는 사람이 없으니 자리도 없고, 여기서 필요한 통역이야 그저 흥정이나 하는 거니까 손짓발짓이라도 장사만 되면 그만이더라고. 우리가 공부했던 수준 높은 외교 한어는 필요도 없다네. 물론 이거야 자네가 사행을 다녀왔으니 더 잘 알겠지만······ 어쨌든 이도저도 안돼서 막노동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그건 힘 딸려서 일 못한다고 욕이나 먹고 쫓겨나게 되더군.”

“형, 진작 찾아와서 얘기나 하지. 내가 못 도와주겠어?”

“지금 얘기하잖아.”

하지만 형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술잔을 채워 들이켰다. 울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떴다. 눈물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난 그 형형한 눈빛 속의 깊은 처량함을 보았다.

“정말 미안한 부탁 하나만 하자.” 형은 다시 술잔을 채워 술을 마시며 말했다.

“얘기해봐.

“난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내 아들 좀 키워줘라. 엄마도 없이, 그리고 이름을 숨기고 사는 아비가 어떻게 백일 좀 지난 애를 키울 수 있겠나?”

“그래, 알았어. 형.”

황당한 제안이었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 고마워. 내가 처음 동생을 찾아간 건 이걸 사달라고 하려고 그랬지. 이걸 제값 받고 팔면 산후에 조리도 제대로 못한 처의 병은 고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 외딴곳에서 누가 이 그림의 가치를 알겠나? 그래서 자네를 찾았네.”

형은 품에서 족자를 꺼내 펼쳤다.

“서위(徐謂)!”

난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금방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형수는 죽어 누워있고 애도 겨우 잠들어 누워있는데, 겨우 서위의 그림에 혹하다니. 다행히 슬픔에 젖은 형은 나의 이런 부끄러운 흥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형은 족자를 몇 장 넘기며 날 쳐다보았다.

“이 족자, 그냥 갖게. 처음에는 팔려고 했지만 이젠 필요 없는 물건이야. 앞으로 돈이 필요할 일도 없을 것 같아. 그건 그렇고 이놈 이름은 승호라네. 잘 키워달라는 소리는 못하겠고, 그냥 목숨만이라도 부지하길 바랄 뿐······”

난 고개를 끄떡여 승낙했지만, 어떤 말로도 대답할 수는 없었다.

형은 자신이 할 말을 다한 것처럼 다시 한 번 술잔을 채워 마셨다. 같이 누워있는 아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형수를 안고 또 울기 시작했다. 형은 더 이상 나와 아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난 할 수 없이 젖먹이를 안고 일어섰다.

형은 그걸 보고 울다가 일어나 내가 두고 가려던 족자를 찔러주었다.

난 지금 내가 돈을 하나도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형수 장례는 어떻게 치룰 것인지 걱정이었다.

다음 날, 난 돈을 들고 형을 다시 찾았다.

형과 형수는 집에 없었다.

형수까지 없던 걸 보면, 형은 아예 집을 떠난 것 같았다.

난 관사로 돌아와서 그곳의 지인에게 형의 소식을 알아보라고 부탁했다. 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었으니까 내가 거기서 기다릴 수도 없었다. 공무에 메어 있는 몸이었으니까.

어쨌든 그게 형과는 마지막이었다.


“그래서 손돌에게 널 맡겼다.” 변양호는 긴 이야기를 마쳤다.

이야기를 하던 중간 감정이 북받치기도 했고, 승호의 반응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말을 끝내기 위해 모두 무시했다. 아니었다면 이 긴 이야기를 끝마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승호가 변양호의 말이 끝나자 나지막이 불렀다. 말도 배우기 전에 헤어졌으니 난생 처음 불러보는 ‘아버지’였다. 엄마도 아빠도 그리웠다.

‘어머니는 이미 돌아 가셨고, 아버지는 어디 계신 걸까? 살아계시긴 한 걸까?’

실마리조차 잡을 수 없는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변양호는 그런 승호를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그 때 손돌이 나를 따라서 사행을 갔었다. 난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고, 친구의 아이니까 잘 보살피라고 당부했었지. 손돌은 주인의 명령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네가 귀여웠는지, 자기 자식처럼 널 보살피며 서울까지 왔어. 아마도, 후자였겠지. 젖먹이인 널 안고 젖동냥을 하러다니던 손돌을 보고 난 한시름 놓았어. 형에게 양육을 허락했던 내가 미안하지 않을 정도로 손돌은 열심이었으니까.”

승호는 소리 내지 않고 ‘돌이 아저씨’를 불렀다.

변양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서울에 돌아온 후, 난 널 양자로 삼을 생각이었지만, 자식이 없던 처는 네가 누구냐고 따져 물었고, 난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뭐, 밖에서 낳아온 자식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겠지? 그래서, 어쨌든, 난 손돌에게 널 맡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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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그림에 미친 사람들 22.01.08 302 6 12쪽
19 금지옥엽 22.01.07 307 8 11쪽
18 집 떠나와 22.01.06 296 6 14쪽
17 그림 그리는 소년 22.01.05 306 6 12쪽
16 성묘 22.01.04 333 6 15쪽
15 공개수사 22.01.03 348 6 13쪽
14 왕세제 책봉 22.01.02 352 5 13쪽
13 역관 +1 22.01.01 408 7 13쪽
12 종로 괘서 21.12.31 379 7 12쪽
11 그림 거간꾼 21.12.30 385 8 15쪽
10 고수들의 대국 21.12.29 394 9 12쪽
9 진화루 21.12.28 422 9 13쪽
8 포도군관 21.12.27 439 10 13쪽
7 역관가문의 후손 +1 21.12.26 599 8 12쪽
» 비공개수사 +2 21.12.25 502 9 12쪽
5 광통교 화방 +1 21.12.24 565 10 13쪽
4 내기바둑 +1 21.12.23 628 12 13쪽
3 명문대가의 얼자 +2 21.12.22 774 22 14쪽
2 해산 +1 21.12.21 991 23 13쪽
1 서소문 괘서(掛書) +10 21.12.20 1,918 4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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