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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칼날 님의 서재입니다.

그림과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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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검은칼날
작품등록일 :
2021.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2.07.0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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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8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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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진화루

DUMMY

“승호야, 뭘 좀 먹어야지.” 손돌의 처가 권했다.

‘그녀 엄마 같은 사람이다. 젖먹이 때부터 지금까지 엄마처럼 날 키웠다.’ 승호는 고마운 생각에 마지못해 죽을 한 술 떴다.

최진규 포도군관과 헤어지고 나서 또 술을 마셨다. 취해서 돌아온 후, 이틀 동안 누워 있었다. 술병이 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자신이 누군지 알고 난 다음에 밀려온 혼란스러움이 더 컸다.

그녀는 끼니때마다 밥을 챙겼고, 승호는 그 때마다 몇 술 뜨고는 상을 물렸다. 그러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을 들고 일어섰다. 궁금했겠지만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아가씨 오셨어요?” 그녀는 상을 내가다가 방문 앞에서 명희와 마주쳤다.

“승호는 밥 좀 먹었어? 어, 별로 먹지도 않았잖아.” 명희는 그녀가 내가는 상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아직도 입맛이 없나 봐요. 그럼 말씀 나누세요.” 그녀는 자리를 떴다.

명희는 열린 방문 앞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죽을 거야? 돌도 씹어 먹을 나이에 아무 것도 안 먹고, 이참에 아예 자리보전하고 계속 누워 있을래?” 명희는 눈을 흘겼다.

“아니요, 이제 일어나야지요.”

“언제?” 명희가 재차 다그쳐 물었다.

“지금 당장 일어날게요.” 승호는 가슴을 펴며 대답했다.

“오늘 진화루 같이 갈 수 있겠어? 돌쇠라는 하인 있잖아, 아침에 말 전하러 왔더라고. 오늘 오후에 오라고 하더라고. 그 집 도련님께서 너도 꼭 데려오라고 하셨대. 바둑 두려고 그러신가봐. 근데 이틀 만에 실력이 늘었을까?”

“삼년 전 조선의 국수에요. 상대가 없어서 바둑을 끊었던 최고수지요. 이틀이면 어느 정도 감을 회복했겠죠. 물론 실전감각이야 떨어져 있겠지만.”

“그래? 그렇구나.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군.”

“예.” 승호는 고개를 끄떡였다. 몸이 좀 힘들기는 했지만 김진섭과의 대결은 기대됐다.

“승호야, 근데 서울에 뭔 일 일어날 거 같지 않아? 괘서 얘기 알지?”

“예, 무슨 괘서요?”

“서소문 괘서 얘기 몰라?”

“아 예, 그거요. 듣기는 했는데······” 승호는 자세히 모른 척 말했다.

“근데 이상하잖아. 왜 범인 잡는다는 방이 안 붙는 거야? 도성 안에 소문이 파다한데 조정에서 모를 리는 없고, 또 포청에서 그걸 떼어 갔다고 하던데. 현상금 걸리면 내가 좀 잡아보려고 했는데 아쉽네.”

승호는 “풋” 헛웃음을 뱉은 후,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정색하며 말했다.

“뭐 내가 지어낸 말인가?”

“그래도요.”

“알았어. 그럼 있다 가게 준비하고 있어.” 명희는 툇마루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승호는 진검승부를 기대하며 준비를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김흥방의 집안은 삼 대째 정승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명예는 권력을 따라 왔고 남부러울 게 없었다. 대대로 쌓아온 부도 따라올 가문이 없었다. 김씨 가문의 권력과 부는 많은 서책과 서화를 모을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집안의 장서는 만 권이 넘었고 김흥방의 조부 때부터 본격적으로 모아온 서화도 셀 수가 없었다. 김흥방의 아버지는 장서각 ‘만권루(萬卷樓)’를 지어, 서책과 서화를 보관했다.

젊은 시절, 김흥방의 수집벽은 고질병과도 같았다. 마음에 드는 서화가 있으면 돈 따위는 아끼지 않았다. 돈으로 구하기 힘들 때는 권력을 이용하기도 했다.

김흥방의 수집벽은 만권루를 포화상태에 이르게 했다. 그러자 만권루에는 서책만을 수장하고, ‘진화루(珍畵樓)’를 지어 서화를 수장했다. ‘진화루’는 말 그대로 보배로운 그림만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경화세족들 중의 몇몇 집안은 수천 권이 넘는 장서를 수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글씨나 그림 그리고 고비(古碑) 탁본을 모으기도 했으나, 장서와 함께 수장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김흥방처럼 서화만을 수장하는 건물이 따로 있는 가문은 거의 없었다.

조선의 양반들은 고동서화(古董書畵)를 좋아했지만, 드러내놓고 애호가임을 자처할 수 없었다. 성리학을 정치철학으로 삼은 양반들은 완물상지(玩物喪志)라는 담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림에 깊이 빠진다는 것은 양반 자신이 내면화한 성리학을 배반하는 행위였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있지만,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는 게 양반체면이었다.

김흥방도 그래서 드러내놓고 서화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고, 진화루를 조상들의 사진을 모셔놓은 곳이라고 했다.

성리학만을 정치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에서 조상들을 기린다는 효를 이길 명분은 없었다.

그렇다고 진화루에 김씨 가문 조상들의 영정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김흥방의 서화 수집벽과 서울에 이미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김흥방은 서화 감상을 즐겼지만, 자신의 소장품을 자랑삼아 아무에게나 공개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가끔 진화루에서 측근들과 모임을 가지며 소장품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들은 서화를 보고 감탄했지만, 그림의 수준이 아니라 그걸 사 모은 부에 감탄한 것이고, 김흥방의 권력 때문에 감탄하지 않는 태도는 취할 수 없었다.


숙종 말년에 김흥방은 노론 측의 주도자로서 왕위 계승 문제에 깊이 관여했다. 그 때부터 김흥방은 정치의 진정한 맛을 알게 되었다.

서화에 대한 관심은 조금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정적인 서화 감상보다는 상황에 따라 긴박하게 대처해야 하는 정치적 역동성에 매료되었다.

당시 노론은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김흥방은 그 위기와 맞서 싸우는 자신이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만족스러울 정도로 잘 싸웠다. 그는 천길 낭떠러지위에서 외줄을 타야 했지만, 이것이 주는 긴장감을 즐겼다.

그러다 지칠 때면 진화루에 들어가 서화를 감상하며 정국을 구상했다. 이전까지 서화는 자신이 격렬하게 추구해야 했던 그 무엇이었다. 그 격렬함을 정치에 옮기고 나자 이제는 서화가 지친 자신을 위로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진화루를 그 자신이 직접 경영하기에는 정력과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성에 차지 않는 관리인을 두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김흥방의 적자 둘은 탄탄대로의 벼슬길을 달리고 있다. 둘 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 가끔 진화루에서 마주치는 김진섭을 떠올렸다.

김진섭은 어려서부터 진화루에 가서 그림을 보는 것이 즐겼다. 그런데 그곳에서 어쩌다 아버지와 마주치면 애써 피했다. 서자인 자신이 아버지가 보물처럼 여기는 서화를 본다는 게 신분에 맞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김흥방도 김진섭이 그림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김진섭이 총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벼슬길로는 끌어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김진섭에게 진화루에 마음대로 출입해도 된다고 허락했다.

아버지는 시간이 날 때면 아들에게 감식안을 길러주기 위해 서화에 대해 설명도 해주었다. 아들은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아버지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김흥방은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게 되자 김진섭에게 진화루의 관리를 맡겼다. 그리고 쉬기 위해 진화루를 찾을 때면 가끔씩 김진섭을 불렀다

이 때, 김진섭은 아버지로부터 그림에 관한 갖가지 훈련을 받았고, 김흥방은 자신의 가르침을 총명하게 이해하는 김진섭이 대견스러웠다. 김진섭의 열정 또한 김흥방을 만족시켰고, 김흥방은 아들에게서 젊은 시절 서화에 미쳤었던 자신의 모습을 보고 만족했다.

김진섭은 비록 정치는 아니지만 아버지의 소중한 사업을 이어받았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다. 그래서 진화루의 관리에 온힘을 쏟았다.

김진섭은 신분적 한계 때문에 문제만 일으키는 고위관료의 서얼들과는 달랐다. 물론 벼슬을 할 수 없는 자신의 신분적 한계에 절망했지만, 진화루의 경영이라는 아버지의 사업을 맡으면서 책임감으로 자신을 무장했다.

김진섭은 젊은 시절의 아버지처럼 갈수록 진화루의 소장품들을 풍부하게 만들었고, 김흥방은 그럴 수 있도록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승호가 진화루로 가는 길을 앞장섰고, 동희와 명희가 뒤를 따랐다. 셋은 북촌의 안국방 골목에 들어섰다.

권문세가들만 모여 사는 북촌으로 향했기 때문에, 명희는 평소에 정색을 하던 장옷을 머리에 걸쳤다.

승호는 즐비한 기와집들 사이에서 갈 곳을 몰랐다. 십육 년 동안 서울에 살았지만 처음 와보는 곳이라서 목적지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길을 헤매다 마침 지나가던 행인에게 길을 물었다.

그는 길을 알려주며 가장 큰 집을 찾으라고 했다. 그리고 별채가 복층으로 되어 있어서 밖에서도 그 건물이 보인다고 했다.

조선에서는 복층 건물을 짓지 않았기 때문에 이건 좋은 표지였다. 집밖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승호는 그런 집을 찾았다. 멀리 그런 집이 보였다. 솟을대문을 끼고 담을 돌아 걸었다. 복층 건물은 본채와는 떨어져 있었고, 대문에서 그 곳까지 한참을 걸었다. 엄청난 규모의 대가였다.

승호는 가볍게 문을 두드리며 소리 낮춰 일행이 왔음을 알렸다. 안에서는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금방 문이 열렸다.

돌쇠는 마침 기다리고 있었던 듯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고는 일행을 진화루로 안내했다.

승호는 들어온 문 대각선방향에 안채와 통하는 문을 보았다. 그 문에는 빗장이 걸려 있었다. 김진섭이 왜 바깥채로 바로 오라고 했는지 깨달았다. 대문을 통과해 본채를 거쳐 오려면, 아무리 피한다고 해도 누구도 마주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자아이까지 있는 일행은 눈에 띌 게 뻔했다.

진화루에는 들보가 여섯 개가 있었다. 그 들보에는 모두 서예 족자가 걸려 있었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입구의 반대쪽에 있었다. 들보 사이에는 주거공간에서는 볼 수 없는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통풍을 위해 이렇게 해놓은 것 같았다. 또한 천장도 일반 가옥에 비해 높았다. 이것도 환기를 위해 이렇게 해놓았을 것이다.

명희는 높은 천장과 큰 규모의 공간 때문에 위화감을 느꼈다.

아래층 중앙에는 장방형의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바둑판이 놓여 있었다. 바둑판 위에는 순장바둑을 두기 위한 돌들이 모두 제 위치에 놓여 있었다. 김진섭은 거기에 앉아 있다가 일행을 반기며 일어섰다.

“이제 왔어. 서화는 다 위에 있으니까 어서 올라가 보자.” 김진섭은 인사를 올리려는 일행에게 손을 내저으며 재촉했다.

승호와 남매는 인사를 올리려다 김진섭이 사양하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자 당황했다. 그들은 벌써 계단을 오르고 있는 김진섭을 보았다. 그래서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돌쇠는 일행과 함께 있다가 뛰어올라가며 김진섭을 앞섰다.

위층의 구조는 아래층과 흡사했다. 그런데 계단을 올라서자 중앙 벽면에 전신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초상화의 인물은 관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명희는 화면에서 뛰어나와 호통이라도 칠 것 같은 모습에 위화감을 느꼈다. 사용한 안료는 모두 최고급인 것 같았다. 특히 요대의 파란색은 푸르고 푸르렀다. 조선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급 석청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고, 아마도 청나라에서 수입한 것이리라.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으나 그럴 상황이 아니어서 아쉬웠다.


위층은 계단을 따라올라 가는 방향을 제외하고 삼 면에는 삼 단 높이의 선반이 있었다. 중앙에는 작은 탁자가 있었고, 의자는 두 개만 놓여 있었다.

선반에는 가로 두 자 세로 석 자 정도의 큰 궤가 놓여 있었다. 결이 곱고 단단한 느릅나무로 만든 고급스런 궤였다.

명희는 커다란 큰 궤를 보고 놀랐다. 자기처럼 키 작은 아이는 들어가 누울 수 있을 만큼 큰 궤였다. 집에 있는 것과 거의 같은 크기였다. 그 안에는 얼마나 많은 보물이 들어 있을까 설랬다.

김진섭은 돌쇠에게 그 중 하나를 가져오라고 했다.

돌쇠는 둘이 들기도 무거울 것 같은 궤를 혼자 들고 와서 탁자 아래에 내려놓았다.

김진섭은 열쇠꾸러미에서 열쇠 하나를 골라 자물쇠에 꽂았다.

궤의 뚜껑이 열리자 천궁 냄새가 코를 찔렀다. 좀벌레를 죽이기 위해서 넣어둔 향주머니에서 나는 냄새였다. 그러고는 서예작품과 고비탁본이 모습을 드러냈다.

“명희야, 다른 그림은 좀 있다 내줄 테니 우선 이거 보고 있어.” 김진섭이 다른 할 일이 있는 것처럼 서두르며 말했다.

“글씨 말고 그림 보여주세요.” 명희는 바둑 때문에 서두르는 것 같은 김진섭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 글씨는 별로 안 좋아해. 이 안에 있는 작품들은 여기 있는 궤 중에서 가장 귀한 건데. 그래서 일부러 이것부터 보여준 거야.”

“아니요, 글은 잘 몰라요. 귀하다고 해도 까막눈이어서 봐도 모르거든요.”

“그래? 글 안 배웠어?”

“아니요, 언문은 뗐어요. 진서야 양반들이 쓰는 글인데 감히 아녀자가 배운다는 게 예의가 아니죠.”

동희는 명희를 흘겨보았다. 천연덕스럽게 거짓말하는 모습이 못마땅했지만 끼어들지 않았다.

명희는 여섯 살 때 이미 《소학(小學)》을 뗐고, 총명하다는 자신보다 두 살이나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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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칼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1 여자 사진 +2 22.01.09 297 8 12쪽
20 그림에 미친 사람들 22.01.08 303 7 12쪽
19 금지옥엽 22.01.07 309 9 11쪽
18 집 떠나와 22.01.06 297 7 14쪽
17 그림 그리는 소년 22.01.05 308 7 12쪽
16 성묘 22.01.04 334 7 15쪽
15 공개수사 22.01.03 349 7 13쪽
14 왕세제 책봉 22.01.02 353 6 13쪽
13 역관 +1 22.01.01 409 8 13쪽
12 종로 괘서 21.12.31 380 8 12쪽
11 그림 거간꾼 21.12.30 386 9 15쪽
10 고수들의 대국 21.12.29 395 10 12쪽
» 진화루 21.12.28 424 10 13쪽
8 포도군관 21.12.27 440 11 13쪽
7 역관가문의 후손 +1 21.12.26 608 9 12쪽
6 비공개수사 +2 21.12.25 503 10 12쪽
5 광통교 화방 +1 21.12.24 567 11 13쪽
4 내기바둑 +1 21.12.23 630 13 13쪽
3 명문대가의 얼자 +2 21.12.22 775 23 14쪽
2 해산 +1 21.12.21 994 24 13쪽
1 서소문 괘서(掛書) +10 21.12.20 1,931 4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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