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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칼날 님의 서재입니다.

그림과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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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검은칼날
작품등록일 :
2021.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2.07.05 16:00
연재수 :
110 회
조회수 :
25,618
추천수 :
565
글자수 :
581,056

작성
22.01.07 14:00
조회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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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글자
11쪽

금지옥엽

DUMMY

남매와 승호 그리고 준은 중노미가 치워놓고 온 집으로 향했다.

“이게 집이야? 여기 어떻게 살아?” 집에 도착한 명희가 또 투덜거렸다.

“여기도 집이라고. 집이 아니면 뭐야? 작년까지 사람 살던 집이라고.” 준이 발끈했다.

“넌 가만있으라고. 난 싫다고. 너희 아버진 뭐하신 거야? 우리 아버지 오셨다가셨다며, 이게 뭐냐고?”

“삼촌 오실 때마다 잘해주셨지만······ 나도 우리아버지 뭐하시는지 모른다고······ 그래도 여기 사람 사는 집이야.”

“그래, 그럼 너나 여기 살아.”

“그만하고 들어와.” 동희가 목소리를 낮춰 엄중하게 말했다.

“근데, 너 왜 집에 안 가?” 명희가 오빠에게 핀잔을 듣자 준에게 화를 냈다.

“응?”

“바로 앞이잖아. 왜 안 가냐고?”

“나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돼? 그림 좀 보여줘.”

“안 돼! 싫어, 싫다고!” 명희가 소리쳤다.

“그래, 알았어.” 준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너 어디 가?” 명희가 말했다.

“괜찮아. 여기 있어도 돼.” 동희가 명희에게 눈을 부라리며 준에게 말했다.

준은 동희의 만류에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방을 나갔다.

“쟤 뭐야?” 명희는 준의 단호한 반응에 당황했다.

“그림 좀 보여주면 어때서 그래.” 동희가 명희를 노려보며 말했다.

“싫어, 쟤는 왠지 마음에 안 들어. 쟤네 아버지도 그렇고······” 명희는 일부러 고집을 부렸다.

“너 그러는 거 아니야! 불평 그만하라고!” 동희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동희는 어차피 집을 떠나 고생을 해야 한다면 처음부터 어려운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불확실한 앞날에 괜히 어설픈 희망을 갖기보다는 현실을 대면하겠다고 결심했다. 이 결심을 곱씹으며 서울을 떠나 여기까지 왔다. 말괄량이 동생도 그러길 바랐다. 그렇지 않으면 엄하게 꾸짖으려고 했다.

명희는 토라져 입을 닫았고, 승호는 멀뚱멀뚱 천장만 쳐다보았다.


개성에 온지 하루가 지났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여명이 방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승호가 뒤척이며 오락가락 하던 잠을 깨기 위해 눈을 비볐다. 난생처음 동희와 같은 방에서 잤다. 두 개밖에 없는 방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동희도 불편했는지 잠들기 전까지 한참을 뒤척였다. 그래도 지금은 여행의 피로감 때문에 잘 자고 있었다.

그래서 승호는 몸을 일으키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잠자리의 불편함에 여행의 피로감이 더해졌다. 하지만 잠기운을 떨쳐내야 했다. 당장 오늘 아침부터 명희의 시중을 들어야했다. 어젯밤 이걸 걱정하다가 잠이 들었다.


변 역관은 딸을 어려서부터 금지옥엽으로 키웠다. 처가 죽은 후에는 더했다. 금지옥엽이란 말도 그의 딸 사랑에는 뭔가 부족해 보였다.

명희는 다른 금지옥엽과는 다르게 안하무인은 아니었지만, 모든 금지옥엽과 마찬가지로 불편함을 잘 참지 못했다.

나는 지금껏 노비란 이름으로 살아왔지만 주인 수발을 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동희의 글동무로 살아오면서 그와 한어 공부를 같이 했을 뿐이었다. 물론 그와 같이 공부하고 놀러 다닐 땐 이것저것 시중을 들었다. 하지만 그가 세수하고 옷을 입고 밥을 먹고 하는 것들은 다른 노비가 시중을 들었다.

동희는 서울을 떠나면서 자신의 일은 자신이 처리하려고 했고 명희도 그러려고 했지만 둘 다 뭔가 어설펐다. 그래서 내가 남매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몰랐다.

난 이제 내가 노비가 아니란 걸 알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더 철저하게 노비로서 남매를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어쩌면 형과 오빠의 마음 같기도 했다.

개성으로 한 화원을 찾아올 때, 동희와 명희의 시중을 들어줄 노비들이 있을 줄 알았다. 변 역관은 개성으로 한 화원을 찾아가라고 했을 뿐 자세한 얘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한 화원이 왜 개성으로 옮겨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변 역관과 사귀었다면 도화서 출신 화원일 것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도화서 출신의 화원이 초가삼간에 살줄은 몰랐다. 도화서 출신이란 경력만 있으면, 송도에 사는 부유한 양반들의 초상화만 그려줘도 나라가 주는 녹보다 더 많은 그림 값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 화원이 노름하러 갈 거라는 주모의 말이 생각나 걱정이었다. 그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는 아직까지 이 초가삼간에 오지 않았다. 밤새도록 노름판에 있었을 것이고, 지금도 노름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승호는 잠은 떨쳤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건넌방에서 명희가 일어나는 소리를 들었다. 이 때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동희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준이 어깨의 물동이를 짊어지고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도련님, 이런 건 제가 해야 하는데······” 승호는 준의 물동이를 받아들며 말을 끌었다.

“아니, 괜찮아.” 준은 승호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다음부터는 저한테 시키세요. 그런데 화원님은요?”

“나도 몰라. 성 안에 계시겠지?”

“그래요?” 승호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승호야, 세숫물 좀 떠줘” 명희가 방문을 열고 말했다.

“일어나셨어요. 금방 떠 드릴게요.”

승호는 물동이를 들고 부엌으로 달려가 낡은 대야를 찾아 물을 부었다. 그 대야를 들고 마당에 나오자 건넌방 문은 닫혀 있었다.

어느새 동희는 방에서 나와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승호는 대야를 들고서 명희를 불렀고, 명희는 그걸 방으로 달라고 해서 받아들고는 방문을 닫았다. 밖으로 씻는 소리도 들렸고 움직이는 소리도 들렸다. 다 씻은 명희는 방문을 열고 나와 대야에 든 물을 마당에다 뿌려 버렸다.

동희가 다가와 대야를 뺏어들고는 부엌으로 향했고, 승호는 멍하니 바라보다 외쳤다.

“도련님, 제가 떠다드릴게요.”

“아니, 됐어.”

승호가 부엌으로 달려가려고 할 때 동희는 대야에 물을 받아들고 나왔다. 대야를 툇마루에 올리고 씻었다. 대충 씻고 나서 소매로 물기를 닦아냈다.

승호는 멍하니 서 있다가 수건이라도 가져다줘야 했다는 걸 겨우 깨달았다.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어색한 몸짓으로 대야를 들어주려고 했다.

“승호야, 앞으로는 일일이 챙길 필요 없어. 너도 씻어.” 동희가 세숫물을 마당에 뿌리고 나서 대야를 승호에게 건넸다.

승호는 고개를 숙여 대야를 받아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서울을 떠나며 자신보다 남매를 잘 챙기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지금은 답답하기만 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승호는 부엌에서 대충 씻고 대야를 들고 나와 세숫물을 마당에 뿌렸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동희가 승호가 다 씻고 나자 툇마루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넷은 함께 주막으로 향했다.


명희는 밥을 먹고 돌아오다 집 앞 나무에 메어둔 자신의 말의 목을 두드렸다.

준도 명희를 따라 동희가 타고 온 말의 목을 두드렸다.

“야! 함부로 건드리자 마!” 명희가 소리쳤다.

“왜?” 준이 깜짝 놀라 손을 떼었다.

“너, 다친다고······” 명희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끌었다. 그러고는 준과 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얘 가만있네. 성질 괄괄한데······” 이번에는 오빠를 보며 말을 끌었다.

“그러게.” 동희가 말을 받으며 자신의 말의 목을 두드렸다.

“왜 그런데? 내가 아침에 물 떠주고 쓰다듬어 줄 때도 얌전했는데, 뭐가 문제야?” 준이 물었다.

“그랬어? 잘했어. 이놈이 원래 낯가림이 심하거든. 성질부릴까봐 소리친 거야.” 동희가 명희를 두둔하며 말했다.

“그래요? 어젯저녁 꼴 베다 먹일 때도 얌전했는데.”

“그래? 네가 잘 챙겨주니까 마음에 들었나보다.” 동희는 준에게 미소를 띠며 말했다.

“오빠, 오늘은 성 안을 좀 둘러보고 내일은 박연폭포에 가보자.” 명희가 말을 돌렸다.

“그러자. 준아, 네가 안내해줄 거지?” 동희는 명희에게 동의하면서 준에게 물었다.

“난 남아서 승호가 빌려준 족자 좀 베껴 그릴게. 다녀들와.” 준이 대꾸했다.

“승호야, 쟤 족자 빌려줬어?” 명희가 물었다.

“예, 어르신이 주신 제 족자요.” 승호가 대답했다.

“그래? 그럼 궤짝 열쇠도 내줘. 오빠 괜찮지?” 명희가 말하며 동희를 바라보자 동희는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응? 그림 보여준다고···” 준이 물었다.

“그럼, 한 화원님께서 어제부터 보고 싶다고 하셨잖아.” 명희가 말하자 동희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남매와 승호가 집을 나섰다.

준은 혼자 남아서 자물쇠를 풀어준 궤짝을 열었다. 눈이 핑 돌았다. 이런 그림을 한 번에 볼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평생을 거쳐 어쩌다 한 번씩만 볼 수 있었을 보물들이었다. 궤짝 안에는 그런 보물들로 가득했다.

아버지가 말한 도화서에도 이런 보물이 다 갖춰져 있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특히나 중국 그림들은 도화서에도 없었을 것이다.

준은 숨이 막혔다. 땀이 흘렀다. 웃통을 벗었다. 그림을 베껴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배우면서 이렇게 좋은 그림을 베껴 그려본 적이 없었다. 모사가 그림을 배우는 첫걸음이지만, 아버지는 좋은 그림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좋은 그림을 보면 어떻게든 베껴 그리고자 했다.

준은 평생 다시없을 기회를 잡았고, 그림을 베껴 그리기 시작했다.


해질녘, 승호와 남매는 돌아왔다.

“오빠, 쟤 미쳤나봐.” 명희는 방문을 열었다가 금세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왜?” 동희가 방문을 열며 물었다. 그러다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승호야, 이리 와서 얘 옷 좀 입혀.”

“예? 예.” 승호는 방안으로 들어가며 외쳤다. 방문을 열었다. 탁한 열기가 훅 끼쳤다. 땀 냄새와 싸구려 개먹 냄새가 섞여 풍겼다. 욕지기가 치받쳤다.

동희가 땀범벅이 된 벌거벗은 준을 뒤에서 안고 있었다.

“이거 놔봐, 그림 좀 그리게.” 준이 소리쳤다.

“그만 그려!” 이렇게 말하면서도 동희는 준을 놓아주었다. 아니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버둥거리는 힘이 말 같았다.

동희의 팔에서 풀려난 준은 다시 벽에다 그림을 그렸다.

승호는 방안에 널브러진 화선지를 뒤지며 준의 옷을 찾았다. 준의 바지를 챙겨들고 망설였다. 광인을 힘으로 제압할 수 있겠지만, 허락 없이 할 수는 없었다.

“잠깐 놔둬. 우선 그림 다 그릴 때까지 그냥 놔둬. 쟤 못 말린다. 뭔 힘이 그렇게 센지······” 동희가 목소리를 낮춰 승호에게 말했다.

“오빠, 쟤 뭐해?” 명희가 밖에서 소리쳤다.

“그림 그려. 잠깐 기다리라고.”

“미친 놈, 왜 벌거벗고 그려.”

“내가 아냐? 너도 그림이라면 미치잖아.”

“그래도 그렇지. 아직 옷 안 입었어?”

“기다려봐. 지금은 못 말릴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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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그림에 미친 사람들 22.01.08 303 7 12쪽
» 금지옥엽 22.01.07 309 9 11쪽
18 집 떠나와 22.01.06 297 7 14쪽
17 그림 그리는 소년 22.01.05 307 7 12쪽
16 성묘 22.01.04 334 7 15쪽
15 공개수사 22.01.03 349 7 13쪽
14 왕세제 책봉 22.01.02 353 6 13쪽
13 역관 +1 22.01.01 409 8 13쪽
12 종로 괘서 21.12.31 380 8 12쪽
11 그림 거간꾼 21.12.30 386 9 15쪽
10 고수들의 대국 21.12.29 395 10 12쪽
9 진화루 21.12.28 423 10 13쪽
8 포도군관 21.12.27 440 11 13쪽
7 역관가문의 후손 +1 21.12.26 608 9 12쪽
6 비공개수사 +2 21.12.25 503 10 12쪽
5 광통교 화방 +1 21.12.24 567 11 13쪽
4 내기바둑 +1 21.12.23 629 13 13쪽
3 명문대가의 얼자 +2 21.12.22 775 23 14쪽
2 해산 +1 21.12.21 994 24 13쪽
1 서소문 괘서(掛書) +10 21.12.20 1,929 4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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