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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칼날 님의 서재입니다.

그림과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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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검은칼날
작품등록일 :
2021.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2.07.05 16:00
연재수 :
1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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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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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5
글자수 :
581,056

작성
21.12.31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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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종로 괘서

DUMMY

이월 십칠일, 어제 내린 비 때문에 거리는 질척거렸다.

비가 지난 후의 하늘은 맑았다.

달은 보름달보다 조금 이지러지긴 했지만 여전히 둥글고 밝았다.

한낮 사람들이 북적이던 운종가(雲從街)는 조용했다. 아직까지 야금(夜禁)이라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파루까지는 한 시진 정도가 남았다.


그 때, 종로의 동쪽초입에서 한 사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같은 때, 어둠 속에서 다른 한 사내가 화선지를 품에 안은 채 그에게 손짓했다.

어둠이라고는 해도 서로의 얼굴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달이 밝았다.

“김 총각 왔나?” 기다리던 사내가 물었다.

“박 노인이신가?” 김 총각이 대답은 하지 않고 물었다.

“늑대울음이 애를 끊는구먼.” 노인이라고 불리기에는 너무 앳된 젊은이가 김 총각에게 대꾸했다.

늑대울음은커녕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까치는 울지도 않고 날아갔네.” 김 총각이 대꾸했다.

까치는커녕 참새도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다.

둘은 서로 암구호를 대고 고개를 끄떡였다.

“빨리 하세.” 박 노인이라는 젊은이가 품에 안았던 종이를 김 총각에게 건넸다.

김 총각은 그것을 받아들고 벽에 붙이기 시작했다.

화선지는 이미 풀칠을 해놓아서 축축했다. 그건 괘서였다.

박 노인은 망을 보았고, 김 총각은 빠른 손놀림으로 괘서를 붙였다. 박 노인은 거칠게 숨을 내쉬었고, 김 총각은 박 노인을 돌아보았다.

박 노인을 주위를 살피고 있었으나, 긴장해서 망을 보는 게 아니라 그냥 여기저기 고개를 돌려댔다.

김 총각은 그래서는 망을 보는 의미가 없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그가 느끼는 긴장감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괘서를 붙이는 이미 빠른 손놀림에 속도를 더했다.

김 총각은 숨이 멎을 것 같은 긴장했던 그날을 떠올렸다. 저번에 서소문에 괘서를 붙이던 날이었다.


그 날 망을 봐주던 박 노인은 여유가 있었다. 그도 노인이라고 부르기에는 젊었지만, 오늘의 박 노인과 달리 대담했다. 아예 성벽에다 사다리를 세워놓고 날 기다렸다.

긴장한 난 사다리를 올라가면서 다리에 힘이 빠져 미끄러져 떨어졌다.

박 노인은 그런 날 놀리며 천천히 붙이라며 농담 몇 마디를 건넸다. 자신이 올라가서 붙여줄 수도 있는데, 내 키가 크니 높이가 다를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다리에 오르는 날 팔이 닿지 않을 때까지 붙잡아 주었다.

난 올라가서는 손을 벌벌 떨며 괘서를 붙였다. 그러고 나서 내려오면서 발을 헛디뎌 또 미끄러졌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빨리 헤어지자” 박 노인은 나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그러고는 사다리를 등에 업고 재빨리 사라졌다.

그 날은 괘서가 최대한 늦게 발견되게 하려고 계획했다면, 오늘은 당장 발견되게 하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 난 술을 마시고 나왔다. 그 날 박 노인의 농담과 재빠른 행동 그리고 담력은 그가 풍기던 술 냄새, 아니 그가 마신 술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날 난 그의 술 냄새를 뒤로하고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

그래서 난 오늘 술을 마시고 나왔고 처음에는 대담했다.

그런데 박 노인의 불안한 모습에 나도 점점 불안해졌다.

그 때 박 노인과 오늘 박 노인은 너무 달랐다.

왜 다른 사람이 나왔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야 한다는 건 알았다. 어쨌든 벽보만 붙일 뿐 조직구성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서로가 누군지 모른다면, 망보던 사람이 누구냐고 아무리 고문을 해도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진짜 모르니까.

시킨 사람이 누구냐고 고문을 하면 장담할 수는 없다. 이건 누군지 알고 있으니까.

고문을 당하면 돌아가신 아버지도 역적질했다고 무고할 수도 있다고 했다. 죽이지 않으면서 죽음을 맛보게 해준다고도 했다.

이미 죽을 각오를 했지만 고문당하기 전에 혀를 깨물고 자결할 수 있을지는 몰랐다.

망을 보기로 한 젊은 박 노인은 망을 보는 게 아니라 불안에 떨면서 도리도리를 하고 있었다.

김 총각이 벽보를 다 붙이고 돌아섰다.

포도군관이 옆에 서있었다.

그가 언제 다가왔는지 몰랐다. 망을 보던 박 노인을 어떻게 따돌렸는지도 몰랐다.

“포교다. 도망쳐.” 박 노인이 그제야 소리쳤다. 그러고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포도군관은 나는 듯 달려 박 노인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그는 박 노인이 쓰러지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고는 귀에 대고 몇 마디 말을 한 후 일으켜 세웠다.

박 노인은 포도군관에게 인사를 꾸뻑하고 달렸다.

포도군관은 박 노인이 돌아가는 걸 보고 김 총각에게 걸어갔다.

김 총각은 거기에 그냥 서 있었다. 이미 도망가려면 도망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잡힐 것이 분명하다고 여겼기에 그러지 않았다.

포도군관은 범인을 잡지 않으려는 듯 천천히 걸었다.

김 총각은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포도군관은 김 총각 앞에 서서 눈을 마주했다. 그러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남들보다 작지 않은 키였지만 상대의 큰 키 때문에 그래야 했다.

김 총각은 눈빛을 마주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포도군관은 한숨을 쉬었다.

“다 붙였으면 저쪽으로 가라.” 포도군관은 박 노인이 도망간 쪽을 가리키며, 말 한 마디를 덧붙였다. “반대쪽에서는 좀 있으면 야순하는 포졸들이 올 거야.”

김 총각은 인사를 하고 포도군관이 가리킨 방향으로 달렸다.

포도군관은 둔한 몸놀림으로 달아나는 김 총각을 지켜보았다. 김 총각의 뒷모습이 골목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러고는 반대쪽으로 빠르게 걸었다. 철릭을 휘날리며 골목으로 모습을 감췄다.

야간순찰을 하던 포졸들은 괘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종로에는 그렇게 괘서가 붙어 있었다.

파루의 종이 울리고 시전 상인들이 장사를 준비하기 전까지 그랬다.


그 날 낮, 돌쇠가 남매와 승호를 데리러 다동으로 찾아왔다. 그러면서 김진섭이 이미 주막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승호는 아파서 도저히 못 가겠다고 했다.

동희는 알았다며 집에서 쉬라고 했다.

그런데 명희가 승호를 조르며 잡아끌었다. 잠을 못 자서 피곤한 것 같기는 했지만 아파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동희는 그런 동생에게 핀잔을 먹였다.

승호는 할 수 없이 남매를 따라 나섰다.


돌쇠는 그들을 데리고 종로의 피맛골로 향했다.

종로의 대로는 고급관료들이 다녔다. 하급관리들이나 아전들은 여기서 이들과 마주치면 예를 차려야 했기 때문에 뒷골목으로 피했다. 이 피맛골이라 불리는 뒷골목에는 주막이 즐비했다.

조선의 중심 서울, 그리고 서울의 중심 종로가 술렁이고 있었다. 종로통에 들어서기 전부터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종로 입구에는 포졸들이 지나는 사람들을 검문하고 있었고, 시전은 파장 분위기였다. 포졸들은 시전 상인들을 붙잡고 이것저것 묻고 있었다.

손님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시전을 찾았다가 발길을 돌렸다. 포졸들이 늘어선 거리에 발길을 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쇠는 입구에서 검문하는 거들먹거리는 포졸에게 신분을 밝혔다.

포졸은 금방 태도를 바꿔 친절하게 들어가라고 했다.

남매는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괘서 때문에 그러는 거요.” 오는 길 내내 말 한 마디 없던 돌쇠가 남매에게 말했다.

“사람이 넘치는 종로에 괘서라니?” 동희가 혼잣말을 내뱉었다.

돌쇠는 그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길을 잡았다.

명희는 그런 모습을 보고 오빠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동희는 대꾸 없이 돌쇠의 뒤를 따랐다. 이런 일로 명희와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명희는 동희가 말을 받아주지 않자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승호는 머리가 아픈 듯 양손바닥으로 연신 관자놀이를 문질러댔다.


주모는 마루에 앉아 있다가 돌쇠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반갑게 일어섰다. 점원도 돌쇠를 보고 달려가 안내하려고 했으나, 주모는 점원에게 들어가서 다른 일을 보라고 했다.

“손님 오신다고 하셨는데······” 주모는 말을 끌면서 돌쇠의 뒤를 따라던 일행을 살펴보았다.

“손님 오셨잖소.” 돌쇠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아, 이 분들이셨어요? 어서 드세요. 술상은 이미 다 봐놓았소. 술시중 좀 들어드리려고 했는데 괜찮다고 하시더라고. 아까부터 혼자 기다리고 계세요. 혼자 계시기 지루하신지 바둑판을 찾으시더라고요. 어디 바둑판이 있어야지. 그래서 바둑판 빌려다드렸는데, ‘딱딱’ 소리가 나더라고. 그래서 술 넣어드릴 때, 봤더니만 혼자 바둑을 두고 계신다니까. 글쎄 바둑을 혼자 두는 거는 처음 봤다니까.” 주모는 수다를 떨었다.

그러면서 김진섭이 기다리는 방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그러고는 방안에 기별을 넣었다.

김진섭은 들어오라고 했다.

승호와 남매는 들어가서 인사를 하며 절하려고 했다.

김진섭은 만류하면서 일행을 반겼다.

“필요한 것 없으세요? 제가 술 좀 쳐드리겠습니다.” 주모가 슬그머니 방안에 들어오며 말했다. 그러면서 김진섭을 보며 친한 척했다.

“됐네. 자네는 나가 있어. 필요한 것 있으면 부를 테니까.” 김진섭이 손사래를 쳤다.

“예, 알겠습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세요.” 주모는 계면쩍음을 감추려고 명랑하게 대꾸했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갔다.

“들어와 있어라.” 김진섭이 밖에서 문을 닫으려는 돌쇠에게 말했다.

“예.” 돌쇠가 대답하고 들어와서 문을 닫았다.

“술부터 한 잔 마시자.” 김진섭이 혼자 놓던 바둑돌을 쓸어 담으며 말했다.

“제가 챙기겠습니다.” 돌쇠가 김진섭 옆으로 달려들며 말했다.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동희가 술병을 들어 김진섭에게 술을 따랐다. 그러고는 술병을 상위에 놓았다.

김진섭은 그걸 들어 동희와 승호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둘은 머뭇거리다 사례를 하고 잔을 잡았다.

“아가씨도 한 잔 들게.” 김진섭이 명희에게 술을 권했다.

동희는 명희가 잔을 받아들자 눈총을 주었으나, 명희는 그 눈길을 무시하고 술을 들이켰다.

“아무래도 돌려드려야겠어요.” 명희가 품안에서 화첩을 꺼내며 입을 열었다.

“뭐냐?” 김진섭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내기에 걸었던 공재 할아버지 화첩이요.”

“네가 이겼는데, 왜 이걸 나한테 주냐?”

“아니, 제가 그 그림을 그냥 받을 수가 없어서요.”

“내기는 내기가 아니냐? 이걸 왜 돌려줘. 술이나 한 잔 마셔.”

“그럼, 한 번 보기라도 하세요.” 명희가 김진섭에게 화첩을 건네며 말했다.

“이 화첩 다시 손봤어?” 김진섭이 화첩을 건네받고 물었다.

“보세요. 전과는 다를 거예요. 가짜 그림을 진짜로 바꿔놨거든요.”

“응? 그래, 그걸 어디서 구했어?” 김진섭이 흥미를 보이면서 물었다.

“그냥 구했어요.” 명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김진섭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화첩을 펼쳐보았다. 명희가 바꿔놓은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고 나서 화첩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로 펼쳐보았다.

“이런 거구나. 그 때 왜 네가 이상하다고 했는지 알겠다. 나도 그런 느낌이 들기는 했는데 그냥 믿었지. 의심스러운 것도 있었지만 그냥 믿는 게 속 편했어. 그래서 사람들은 진실보다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래야 속이 편하거든. 나도 그림 살 때 이런 적이 있지.” 한숨을 한 번 쉬고 말을 이었다. “근데, 화첩 안에 진적이 많더라도 가짜가 끼어 있으면 뭔가 보기 불편해. 이 화첩은 이제 한 장 한 장 그리고 전체가 정말 보기 좋구나.”

김진섭은 빈 술잔에 혼자 술을 채워 들이켰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처음부터 화첩을 펼쳐보았다. 또 다시 혼자 술잔을 채워 들이켜며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대충 훑어보고 승호와 바둑이나 두려고 했다. 그러나 화첩이 그의 눈길을 놓아주지 않았다. 한참동안 화첩을 감상했다.

“여기 있다. 잘 봤다.” 김진섭은 화첩을 명희에게 내밀었다.

명희는 그걸 받아들었다. 동희가 돌려주라고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김진섭은 완전한 화첩을 보고도 탐내지 않았다.

사양은 한 번으로 끝이었다.

명희는 더 이상 사양하는 건 상대에게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기요. 이건 제가 드리는 거예요.” 명희는 다른 화첩을 김진섭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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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공개수사 22.01.03 350 7 13쪽
14 왕세제 책봉 22.01.02 354 6 13쪽
13 역관 +1 22.01.01 410 8 13쪽
» 종로 괘서 21.12.31 382 8 12쪽
11 그림 거간꾼 21.12.30 387 9 15쪽
10 고수들의 대국 21.12.29 396 10 12쪽
9 진화루 21.12.28 425 10 13쪽
8 포도군관 21.12.27 441 11 13쪽
7 역관가문의 후손 +1 21.12.26 609 9 12쪽
6 비공개수사 +2 21.12.25 505 10 12쪽
5 광통교 화방 +1 21.12.24 568 11 13쪽
4 내기바둑 +1 21.12.23 631 13 13쪽
3 명문대가의 얼자 +2 21.12.22 777 23 14쪽
2 해산 +1 21.12.21 999 24 13쪽
1 서소문 괘서(掛書) +10 21.12.20 1,934 4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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