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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칼날 님의 서재입니다.

그림과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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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검은칼날
작품등록일 :
2021.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2.07.0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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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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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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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내기바둑

DUMMY

김진섭은 할아버지께서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셨을 때 구입했다는 예찬의 산수화를 떠올렸다.


“어디서도 이런 그림은 구할 수 없지.’

할아버지는 친지들에게 예찬의 그림을 꺼내 내보이며 이렇게 자부했다.

할아버지께서 그러시니, 집안에서는 그 그림을 보물처럼 아꼈다.

내가 보기에는 어딘가 조잡해 보이는 면이 있었지만, 그래도 할아버지께서 자랑하시니 나도 그냥 그렇게 믿었다.

“이 낙관만 봐도 진짜임이 확실하다고.”

할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낙관을 진적의 근거로 삼으셨다.

그런데 명희의 말대로라면 가짜일 것이다.

할아버지는 위작을 진적으로 알고 사셨지만, 평생 진적으로 믿으셨다.

“이것이 선부께서 은자 이백 냥이나 주고 북경에서 사 오신 것일세. 이 낙관이 바로 예찬의 것이라는 증거일세.”

아버지께서는 대를 이어 그 그림을 자랑하셨고, 사람들은 모두 감탄했다.

따지고 보면, 그림 자랑을 하면서 그림은 없고 돈 자랑과 낙관 자랑이었다.

이제야 조선 최고의 감식안을 가진 변양호가 자신이 가져온 이 그림을 잘 모르겠다고 한 이유를 알았다.

세상물정 모르는 명희는 가짜라면 거리낌 없이 가짜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세상물정을 알기에 말을 삼갔다. 그래서 ‘아니다’라고 부정한 게 아니라 ‘모르겠다’고 회피한 것이다.

변양호는 그림을 좋아하기 때문에 감정을 부탁하는 누구의 의뢰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선 나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집안에 소장된 그림을 자랑하지 않았다. 아니, 보여주지도 않았다. 이건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역관 명문가인 변양호의 집안도 우리집안처럼 대대로 그림을 모아왔다. 그들은 청나라와의 무역으로 부를 축적했고 그것으로 그림을 사들였다. 웬만한 양반집보다 부유했지만, 그는 항상 검소했다. 자신이 수입해서 양반에게 팔았을 고급 비단을 몸에 두른 적이 없었다. 중인인 그는 양반들과 경쟁하지 않으려했다. 그림에 대해서도 그랬을 것이다.

이제야 변양호가 왜 소장한 그림을 안 보여주는지 알 수 있었다. 그 그림들이 보고 싶었다. 최고의 감식안을 가진 수장가가 어떤 그림을 가지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김진섭은 생각을 뒤로 하고 명희를 바라보았다.

명희는 화첩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동희는 명희의 어깨너머로 화첩을 보고 있었다.

승호는 바둑판을 치워놓고 남매 뒤에 앉아 있었다.

“그림 다 봤어?” 김진섭이 침묵을 깨며 물었다.

“보긴 다 봤는데, 네 번째 쪽마다 가짜가 있어요.” 명희가 김진섭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김진섭은 무심하게 되물었다.

“이 화첩 네 쪽마다 가짜인 거 같다고요.” 명희가 한 자 한 자 천천히 말했다.

“그런데?” 김진섭은 또 무심하게 되물었다.

명희는 김진섭의 무심한 반응에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흘렀다.

“너 그 화첩 마음에 들어?” 김진섭이 침묵을 깨고 명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가짜 빼면 최고지요. 근데 어디서 사셨어요? 요즘 광통교에서 공재할아버지 위작을 많이 판다던데요. 거기서 사셨어요? 그런데 거의 다 가짜라고 하대요. 그래도 도련님한테는 진적에다 위작 몇 점 섞어서 팔았네요.”

김진섭은 대꾸도 없이 다른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명희는 자신의 화첩에 가짜가 섞였다는 데도 남의 그림 얘기하는 것처럼 듣는 김진섭의 반응이 못마땅했다.

한참을 그러다 김진섭은 무슨 결심이나 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가짜가 섞였다고 해도, 네가 이 화첩 마음에 든다면 내기 하나 하자.”

“예?”

“너 모사한 그림 있지?”

“그건 왜요? 그냥 장난으로 베껴 그린 건데요.”

“모사한 그림이 있긴 있구나. 나도 모사한 그림을 좀 보면서 배워보게. 어쨌든 모사한 그림이랑 이 화첩이랑 걸고 내기바둑 한 판 두자.”

“있긴 있는데 그냥 장난으로 그린 거예요. 그런 것 갖다 어떻게 공재 할아버지 그림이랑 내기를 걸어요.”

명희는 말로는 사양했지만 윤두서의 그림이 탐났다. 김진섭은 명희의 그런 눈빛을 읽어냈다.

“장난으로 그렸든 어쨌든 간에 모작도 많이 봐야 감식안이 늘 거 아니야.”

“그건 그렇죠. 근데, 보고 싶으면 보여드릴 수는 있어도 내기를 걸 수는 없어요.”

“뭐 어쨌든 내기바둑 한 판으로 승부를 보는 거야.”

“아니, 됐어요. 그냥 보여드릴 게요. 조선 국수(國手)랑 바둑으로 무슨 내기를 해요?” 명희는 승호에게 들은 얘기가 있어 거절했다. 김진섭이 조선에서 가장 바둑을 잘 두 거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김진섭은 안 된다고 잘라 말하지 않는 명희의 말에 회심의 미소를 감추었다.


내기에 이겨면 명희가 모사한 그림을 보면 변양호가 소장하고 있는 원작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역관 명문가가 소장한 진품들이 무엇인지 보고 싶었다.

바둑도 두고 싶었다.

적수가 없어서 바둑을 안 둔지도 삼 년이 됐다.

긴박감도 없는 바둑이 재미없어서 그랬다.

경쟁자가 없는 최고는 외롭다.

그런데 승호와 명희가 둔 바둑을 보니 흥미가 생겼다.

백은 흑의 좌충우돌 칼 같은 공격을 유연하게 받아냈다.

백의 응수는 아마도 한 집만 져주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두기 위해서는 대국 전체를 보면서 끊임없이 계산해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승호는 빈틈없이 해냈다.

백이 봐준 바둑이라 진정한 실력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최고수인 것만은 분명했다.

가슴 속에 칼을 품고 있지만 상대를 베지 않는 아량이 돋보였다. 아니면 당하면서도 칼 한 번 꺼내 쓰지 않는 인내심일지도 몰랐다.


“누가 너더러 두라고 했어. 너 말고 고수 있잖아.” 김진섭은 생각을 접고 말했다.

“예?” 명희가 물었다.

김진섭은 명희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승호를 바라보았다.

“승호요?” 명희도 김진섭의 눈길을 따라 승호를 보며 물었다.

김진섭은 고개를 끄떡였다.

승호는 둘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요즘 서울에 고수가 나타났다던데 아마도 너인 것 같구나. 그래, 승호라고 하냐?”

승호는 김진섭의 물음에 놀라서 보라보았을 뿐, 대답도 못했다.

“선장선수(先將先手)로 한 번 두어보자.” 김진섭은 먼저 승호를 보며 제안했다. 그러고는 “그럼 되겠냐?” 고개를 돌려 명희에게 물었다.

승호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명희를 바라보았다.

“겨우 선장선수밖에 안 잡아주신다고요?” 명희는 승호와 김진섭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김진섭에게 물었다. 그러고는 “너는 어때?” 고개를 돌려 승호에게 물었다.

공재의 화첩은 탐났다. 하지만 그걸 차지하기 위해 자기 마음대로 유리한 조건을 제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대국의 당사자인 승호의 자존심도 세워주고 싶었다.

순장바둑에서 서로 맞둘 때는 흑이 바둑판의 한가운데 천원(天元)에 두고 나서 백이 두기 시작한다. 그런데 선장선수는 흑이 천원에 둔 상태에서 다시 선수로 대국을 시작한다. 대칭구도에서 정중앙을 차지한 후에 선수도 두기 때문에 흑이 단연 유리하다.

승호는 명희에게 고개를 끄떡임으로써 김진섭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난 김진섭과 명희가 한 내기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조선의 국수와 바둑을 둔다는 생각에 설렜다.

저잣거리의 고수들에게 선장선수를 잡아주고 내기바둑을 두었다.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바둑에 진 고수들은 이구동성으로 3년 전의 김진섭과 맞두어 볼 만하다고 평가했다.

그렇게 명성만 듣던 고수와 바둑을 둘 수 있게 됐다.

김진섭의 실력을 알 수 없고 내기 때문에 걱정도 됐지만 설렘에 어깨가 떨렸다.

어쨌든 내기도, 실력도, 승부도 어차피 두면 보면 모든 게 끝날 것이었다.


승호는 바둑판을 앞에 두고 꿇어앉았다.

김진섭과 승호는 서로 화점에 돌을 채워나갔다.

승호가 천원에 흑을 놓고 다시 선수로 대국을 시작했다. 흑은 초반부터 공세를 펼쳤다.

동희와 명희는 놀랐다. 승호가 바둑을 이렇게 공격적으로 두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도 남매는 흑을 잡은 승호의 바둑을 처음 접했다.

승호는 항상 백을 잡았고 흑의 어떤 공격이라도 유연하게 받아냈다. 마치 공격이란 걸 할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빈틈없는 방어는 어떤 날카로운 공격도 애초에 없던 것으로 만들었다.

명희는 승호가 상대의 공격을 받아내고 지키는 데 최고수인지 알았다. 그런데 승호는 초반 포석의 유리함을 지키지 않고 적극적으로 공격에 활용했다.

김진섭은 천원을 차지하고서 선수까지 둔 승호의 공격을 유연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수비에만 치중하지 않고 반격을 통해 공격의 예봉을 무디게 만들었다.

전투를 격렬했다.

명희는 조선 최고수의 바둑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바둑은 이미 중반을 넘어섰다.

이제 승호는 자신의 무뎌진 칼날을 처음처럼 휘두르지 않았다. 아무리 날카로운 칼도 공격을 하다보면 무뎌지게 되고, 그러면 다시 날카롭게 벼려야 한다.

격렬했던 공방은 소강상태에 들어섰다.

김진섭은 손길을 멈추고 바둑판을 응시했다.

승호는 상대의 응수를 기다리며 바둑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남매는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지만 둘은 무아지경에 빠져 바둑판만 응시하고 있었다.

얼마 후, 김진섭의 낮은 신음소리가 정적을 깼다. 하지만 자신이 내뱉은 신음소리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계속 바둑판을 응시했다.

남매가 바라본 승호는 검지를 바둑통에 대고 까딱이고 있었다. 남매는 승호가 집을 세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승호가 끝내기에 들어서면 하던 버릇이었다.

김진섭은 지금까지 치열했던 공방을 되짚어보다 승호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바둑을 이렇게 집중해서 둔 게 언제였던가?

끝까지 두어야 할 바둑을 두어본 건 또 언제였던가?

3년 전에 고수라고 떠벌이던 놈들이 끝내기도 가지 못하고 항복하는 게 지겨워 바둑을 끊었다.

그런데 지금은 3년 동안 실전 경험이 없어서 가끔 작은 실수를 저질렀다.

고수들끼리의 대결에서는 작은 실수도 치명적이다.

승호는 내 실수들을 놓치지 않고 응징했다.

끝내기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두세 집 차이는 패배를 의미했다.


승호는 까딱이던 검지를 멈추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명희는 승호가 유리한 것 같았지만 고수들의 바둑이라 확신할 수 없었다. 승호의 바둑은 자신과 둔 바둑과는 다른 수준의 바둑이었다. 그래서 줄곧 마음을 졸이며 보다가 한숨소리 뒤의 안도의 눈빛을 읽고는 마음을 놓았다.

김진섭은 고민에 빠졌다. 던지기에는 아쉬웠다. 그렇다고 상대의 실수를 바라며 더 둘 수도 없었다.

상대가 숨이 막히도록 치밀한 바둑을 두던 승호가 실수를 할 리도 없었다.

“졌다.” 김진섭이 돌을 던졌다.

“왜요? 아직 모르잖아요.” 명희가 김진섭의 항복 선언에 아쉬워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수준의 고수들의 바둑을 끝까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진섭은 명희에게 대꾸 없이 돌을 거두기 시작했다. 자신 앞의 백돌을 쓸어 바둑알통에 담았다.

승호도 황송해하며 돌을 거두기 시작했다.

김진섭은 승호가 정리하자 돌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고는 윤두서의 말 그림과 화첩을 명희 앞에 내밀었다. 명희는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지만, 김진섭은 그것을 명희를 던져주었다.

“도련님, 그림이요.” 명희는 김진섭이 던져준 그림을 다시 그에게 내밀었다.

“이 년아, 이제는 내 그림이 아니다. 네가 알아서 해라. 왜 다시 날 주냐?”

“아니에요······” 명희는 어쩔 줄 몰라 말을 끌었다.

명희는 내기를 장난으로 생각했다. 김진섭이 지더라도 어린애랑 한 내기라며 핑계를 대고 그림은 내주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내기에 지자 깨끗이 내주었다. 차라리 승호가 져서 자기가 모사했던 그림을 내주는 게 나았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내기에 걸린 윤두서의 그림은 꼭 갖고도 싶었다. 그런데 이런 그림이 막상 자신의 소유가 되자 당황스러웠다.

명희는 다시 한 번 화첩과 족자를 김진섭에게 내밀었다.

“됐어. 넣어두어라.” 김진섭은 명희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명희는 한사코 거절했다.

“그건 됐고, 대엿새 뒤에 사람을 보낼 테니 우리 집에 오너라. ‘진화루(珍畵樓)’의 그림들을 보여주마. 그 때 승호 너도 같이 와서 바둑이나 두자.”

명희는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김진섭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양반가문 중에서는 가장 많은 서화를 소장하고 있다는 진화루에 초대한다는 말에 가슴이 설렜다.

동희도 명희와 같은 이유로 설렜다.

승호는 다른 이유로 설렜다. 진화루의 그림은 아예 관심도 없었다. 조선의 일류 고수랑 바둑을 둘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설렜다. 시정에서도 내기바둑도 두어봤고, 고수들도 있었지만 진정한 고수를 만난 적은 없었다. 김진섭은 아니었다. 삼 년 동안 끊었던 바둑을 이렇게 둘 수 있다니, 그가 조선 최고수라는 평가는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김진섭은 올 때와 달리 빈손으로 일어섰다.


그날 밤, 달은 지구의 그림자에 먹혔다.

변양호는 처의 무덤이 있는 파주에서 하룻밤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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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칼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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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여자 사진 +2 22.01.09 297 8 12쪽
20 그림에 미친 사람들 22.01.08 303 7 12쪽
19 금지옥엽 22.01.07 309 9 11쪽
18 집 떠나와 22.01.06 297 7 14쪽
17 그림 그리는 소년 22.01.05 308 7 12쪽
16 성묘 22.01.04 334 7 15쪽
15 공개수사 22.01.03 349 7 13쪽
14 왕세제 책봉 22.01.02 353 6 13쪽
13 역관 +1 22.01.01 409 8 13쪽
12 종로 괘서 21.12.31 380 8 12쪽
11 그림 거간꾼 21.12.30 386 9 15쪽
10 고수들의 대국 21.12.29 395 10 12쪽
9 진화루 21.12.28 423 10 13쪽
8 포도군관 21.12.27 440 11 13쪽
7 역관가문의 후손 +1 21.12.26 608 9 12쪽
6 비공개수사 +2 21.12.25 503 10 12쪽
5 광통교 화방 +1 21.12.24 567 11 13쪽
» 내기바둑 +1 21.12.23 630 13 13쪽
3 명문대가의 얼자 +2 21.12.22 775 23 14쪽
2 해산 +1 21.12.21 994 24 13쪽
1 서소문 괘서(掛書) +10 21.12.20 1,931 4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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