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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칼날 님의 서재입니다.

그림과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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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검은칼날
작품등록일 :
2021.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2.07.05 16:00
연재수 :
1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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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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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5
글자수 :
581,056

작성
21.12.26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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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역관가문의 후손

DUMMY

언젠가는 해야 할 이야기였지만, 쉽게 꺼낼 수 없었던 이야기였다.

변양호는 이야기를 하던 중간 감정이 북받치기도 했고, 승호의 반응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말을 끝내기 위해 모두 무시했다. 아니었다면 이 긴 이야기를 끝마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마음 한구석에 놓여 있던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았다.

변양호 남은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허공을 응시한 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형은 장씨 일문이기는 했지만, 권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형은 가장 우수한 역관생도였다. 생도 중에서 형은 항상 최고였고, 난 항상 그 다음이었다. 그런데 서로 최고를 다투는 처지가 아니라 형이 그냥 최고였다. 형은 나에게 경쟁상대가 아니고 목표였다.

우리는 역관 생도로 함께 기숙 생활을 했다. 공부도 같이 하고 항상 붙어 다녔다.

다른 생도들은 우리를 시기하면서 못마땅하게 여기고 따돌리기까지 했다.

나는 분통을 터트리며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 욕을 한다고 욕을 했다.

어쨌든 형은 생도 중 가장 우수했으나 역관이 되지 못했다.

숙종이 집권한 때, 인동 장씨 집안이 최고의 권세를 누렸었지.

조선은 양반의 나라이다. 그런데 양반들이 중인 역관들이 권력을 잡는다는 게 얼마나 못마땅했을까?

결국 장씨 집안은 역적으로 몰려 몰락했다.

권력투쟁의 당사자들은 권력을 잃고 나면 몰락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조선은 권력투쟁과는 직접 관계없는 같은 집안사람들도 처벌했다.

장씨 가문 역관들은 최고의 수준을 유지했다. 형도 그랬다.

하지만 조선은 최고의 역관보다는 자기 패거리의 질 낮은 역관을 쓴다. 조선에서 최고였던 장씨 역관들은 조선에서 사라졌다. 형도 그랬다.

그 때 난 열 살이었고 형은 열두 살이었다.

나는 스스로 제이인자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조만간 형을 꼭 따라잡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형은 퇴학을 당했다.

어른들의 정치놀음에 형은 실력도 발휘해보지 못하고 역관생도의 자격을 빼앗겼다.

나는 사역원의 생도로 남았고, 친구 없이 혼자 지내며 제일인자가 되었다.


변양호는 격앙된 감정을 누르려고 긴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끝냈다.

승호는 변양호의 얘기를 들으면서 대충 감을 잡았었다. 혼란스러웠지만 생각을 정리해가고 있었다.


난 지금까지 내가 조선의 수많은 성이 없는 노비인 줄 알았다. 내가 그냥 승호가 아닌 인동 장씨 가문의 장승호일 줄은 몰랐다.

난 내 성이 ‘장’씨라는 것에서 이야기의 핵심을 꿰뚫어봤다.

변양호가 왜 자신이 누구의 아들인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건 나를 살리는 방법이었다.

아버지조차 서울을 떠나 지방을 전전하셨으니까.

조선에서는 누구의 아들로 산다는 게 편할 수도 있고 지옥 같을 수도 있지만, 인동 장씨 집안의 후손이란 건 지옥일 것이다.


“형에게 미안하지만, 난 널 아들처럼 키워주지 못했다.” 변양호가 생각에 잠긴 승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아닙니다. 어르신.” 승호는 정색하면 대답했다.

“앞으로는 그렇게 부르지 마라. 이제부터 널 양자로 삼을 테니. 진작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 미안하구나.”

“예?” 승호는 놀라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당장 법적으로 널 양자로 삼을 수는 없구나. 이번 일 돌아가는 걸 좀 봐야지. 세상이 바뀌면 네 아버지께서 돌아 오실지도 모르고······” 변양호는 한숨을 쉬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앞으로 청나라에 가야할지도 모르겠다. 이번 일이 잘못되면······”

“예?” 승호는 ‘청나라’라는 말에 놀라서 반응을 보였다.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이건 좀 더 있다가 얘기하자.”

승호는 궁금한 눈으로 변양호를 보았지만, 그는 말을 돌렸다.

승호는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모든 걸 물어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부모의 이름은 물어봐야할 것 같아 용기를 냈다. 변양호는 긴 이야기 속에서 형이라고만 했을 뿐, 이름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어, 아버지 함자는···?”

“형은 희자 수자를 쓰셨다.” 변양호는 ‘희’와 ‘수’에 힘주어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어색한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그만 나가보아라. 나중에 또 얘기하자.”

“예.” 승호는 절을 올리고 일어섰다.


‘엄마!’

승호는 방을 나서며 치밀어 오르는 단어를 삼켰다. 태어나서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던 호칭이었다.

자신은 역병이 유행할 때 누군가 변양호의 집 앞에 놓고 갔다던 아이가 아니었다.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눈 안에 가두려고 했다. 하지만 눈물은 그럴 수가 없었다. 눈물을 쏟았다.

목구멍을 타고 오르는 흐느낌만 겨우 삼켜버렸다. 여기서 소리를 내서 울 수는 없었다.


승호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집을 나섰다. 어디로 갈지 몰랐지만 어디든 가야 했다.

겨울의 짧은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이젠 돈을 빌려서 할 거야?”

“뭐요?” 승호가 취한 목소리로 털보에게 되물었다.

“다 잃었잖아?”

“어? 그래?”

“빌려서 하든지, 아니면 일어나.”

“아니, 빌려서 할게. 패 돌려요.”

선을 잡은 털보가 그 말을 듣고 패를 돌렸다.

“이젠 끗발 떨어진 것 같은데 그만 하지.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고.”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술집주인이 말했다.

“아니야, 됐어요. 돈이나 빌려줘.”

“오십 냥이면 되겠나?”

“그래요.”

“여기 스물다섯 냥 있네.”

“오십 냥이라고 했잖아요. 왜 스물다섯 냥밖에 안 쥐?”

“뭐? 판돈으로 오십 냥을 빌리려면 일백 냥을 빌려야지.”

“뭐? 선이자가 배야?”

“노름판 처음이야? 몰랐어?”

“그래, 처음이요. 그런 건 몰랐소.”

“하는 걸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지만, 이상하던데. 실력이 장난이 아니라······”

“돈 걸어!” 패를 돌린 털보가 외쳤다.

승호는 주인이 내준 스물다섯 냥에서 한 냥을 집어던졌다.

“한 달 안에 오십 냥 다 갚아야 하네. 만약 한 달 안에 못 갚으면 이자는 달마다 두 냥씩일세. 원래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돈을 안 빌려주는데, 판돈 가져온 걸 보니 부잣집 자제 같던데······ 근데 보증인이 있어야 하는데······” 주인은 승호가 가져온 백 냥이 훨씬 넘는 은덩이를 떠올리며 말을 끌었다.


나는 그 백 냥을 팔십 냥으로 바꿔주었다.

어린놈은 그걸 받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상물정 모르면 돈 많은 어린 놈’덕에 난 서른 냥이 넘는 이득을 보았다.

하지만 차림새가 양반집 자제는 아니었다.

어쨌든 그런 은덩이를 한 번만 더 가져오면 또 다시 엄청난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앞으로 또 찾아올 손님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손님이라면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돈을 빌려주려고 했고 빡빡하게 굴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신분은 알아야 했다.


“아니, 보증인은 됐고, 자네 신분만 확실하면 돈 빌리는 게 무슨 문제겠는가?” 주인은 선심 쓰듯 말했다.

“내 신분, 나말이요? 음, 그러니까 난 변 역관 댁 양자요.” 승호는 혼란스러워 하다가 술김에 되는대로 답했다.

“양자? 변 역관? 상자 화자 쓰시는 분?”

“아니, 양자 호자 쓰시는 분이요.”

“변양호? 다동 변 역관 집안?”

승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떡였다.

주인은 놀라움을 감추며 고개를 끄떡였다.

다동 변 역관 집이라면 서울에서 소문난 부잣집이었다.

주인은 승호의 말을 반신반의했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차용증에 수결만 하게.” 주인이 문서를 내밀며 말했다.

승호는 문서에다 대충 수결을 하고 판을 살폈다.

승호가 주인과 얘기하는 사이에 판이 커져 있었다.

승호는 잠깐 기다리라고 하며 판돈을 걸었다.

확률을 계산했다. 상대의 패와 내 패를 보면 어느 정도 계산해낼 수 있었다. 시간이 많으면 정확히 계산해낼 수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돈을 땄다.

하지만 노름은 확률을 계산할 수 없게 빨리 돌아간다. 게다가 바둑을 둘 때처럼 복잡한 확률계산을 할 넉넉한 시간이 없다. 또한 집중력은 계속 발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노름은 확률이 아니라 운의 영역에 들어가게 된다.

승호는 집중력을 발휘해보려고 했지만 피로와 취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그래도 마지막 집중력을 동원해 계산을 마친 후, 주인에게 빌린 돈 열 냥을 걸었다.

승호가 돈을 걸자 털보가 패를 깠다.

“어떻게 이럴 수가······ 이건 말이 안 되잖아!” 승호는 화가 나서 소리치며 털보의 가슴을 밀쳤다.

“이놈 뭐야? 진 건 진 거지.” 털보도 소리치며 승호를 밀쳤다.

“이게 뭐야? 이놈아!” 승호는 자신을 밀칠 때 털보의 소매에서 떨어진 패를 집어 들고 소리쳤다. 그리고 바닥에 깔린 패를 마구 뒤집었다.

“이게 뭐냐고? 네 개만 있어야 되는데, 어떻게 다섯 개야? 이놈이 속임수를 써!” 승호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갑자기 아찔했다. 목덜미가 무거웠다.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목침으로 뒤통수를 가격당한 것이다.

그 때 잠가놓은 문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이놈들 다 잡아!”

승호가 아는 목소였다. 뒷덜미가 묵직하고 정신이 흐렸지만 확신했다. 며칠 전 변양호를 방문했던 포도군관의 목소리였다.

포졸들이 신발을 신은 채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 뒤에 바로 그 포도군관이 서 있었다.

노름꾼들은 도망치려고 했지만 문은 이미 포졸들에게 막혀 있었다.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하다가 포졸들의 육모방망이에 무릎을 꿇었다.

“이놈은 뭐야? 기절한 거야?” 포졸이 쓰러진 승호를 발로 차며 말했다.

승호는 옆으로 자빠졌다. 정신이 잃지 않았지만 몸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쯧쯧, 이 어린놈을 우려먹으려고 했구먼.” 포졸이 혀를 찼다. 그러면서 일어나지 못하는 승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승호 옆에 있던 문서를 집어 들었다. 그걸 포도군관에게 내밀었다.

“야 이놈아, 한 달에 일 할이면 일 년이면 원금의 배가 넘잖아? 노름 이자라고 이렇게 받아 처먹어.” 포도군관이 이를 갈았다.

“아니요, 아니에요. 그건 그냥······” 주인이 발뺌했다.

“뭐? 어디서 발뺌하려고.” 포졸이 중간에 끼어들어 꾸짖었다.

“그건 그냥 장난삼아 적어본 건데요.” 주인이 또 발뺌했다.

“이놈, 어디서 거짓말을 해. 저놈하고 대질하면 바로 드러날 텐데.” 포졸이 꾸짖었다.

“넌 그만해라.” 포도군관이 주인을 다그치던 포졸에게 말했다.

“밖에서 들어보니 가관이더구먼. 사기도박에, 고리사채에, 게다가 변양호 양자라는 놈은 또 누구냐?” 포도군관은 경멸하는 말투로 꾸짖으며 승호를 바라보았다.

승호는 그를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변명이라도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닫았다.

도대체 양자 이야기는 왜 꺼냈는지, 아니 어쩌다가 노름판에 끼어들게 됐는지 자책했다. 포도청에 잡혀 들어가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든 자신을 경멸했다.

“저놈이 이 은덩이를 가져왔어?” 판돈을 압수한 포졸이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은 고개를 끄떡였다.

승호는 뒷덜미를 부여잡고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가리키는 주인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어린놈이 어디서 이런 큰돈을 들고 노름판에 찾아왔나?” 포도군관이 말했다.

“저야 모르죠. 군관나리 이번이 처음이니 한 번만 봐주십쇼. 술상을 차려 올릴 테니 우선 앉아서 말씀하시죠.” 주인이 능글맞게 포도군관에게 말했다.

“앉긴 뭘 앉아. 이놈이 국법을 어기고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포도군관이 정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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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그림에 미친 사람들 22.01.08 305 7 12쪽
19 금지옥엽 22.01.07 312 9 11쪽
18 집 떠나와 22.01.06 299 7 14쪽
17 그림 그리는 소년 22.01.05 312 7 12쪽
16 성묘 22.01.04 338 7 15쪽
15 공개수사 22.01.03 352 7 13쪽
14 왕세제 책봉 22.01.02 357 6 13쪽
13 역관 +1 22.01.01 413 8 13쪽
12 종로 괘서 21.12.31 385 8 12쪽
11 그림 거간꾼 21.12.30 391 9 15쪽
10 고수들의 대국 21.12.29 399 10 12쪽
9 진화루 21.12.28 428 10 13쪽
8 포도군관 21.12.27 446 11 13쪽
» 역관가문의 후손 +1 21.12.26 613 9 12쪽
6 비공개수사 +2 21.12.25 508 10 12쪽
5 광통교 화방 +1 21.12.24 573 11 13쪽
4 내기바둑 +1 21.12.23 635 13 13쪽
3 명문대가의 얼자 +2 21.12.22 781 23 14쪽
2 해산 +1 21.12.21 1,005 24 13쪽
1 서소문 괘서(掛書) +10 21.12.20 1,939 4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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