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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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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검은칼날
작품등록일 :
2021.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2.07.05 16:00
연재수 :
110 회
조회수 :
25,462
추천수 :
455
글자수 :
581,056

작성
21.12.29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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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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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글자
12쪽

고수들의 대국

DUMMY

진섭은 손수 궤를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그럼 서예 말고 그림을 보여줄게”

그러자 돌쇠는 궤를 원래 위치로 옮겨놓았다.

“돌쇠야, 왼쪽 두 번째 선반에 있는 궤를 가져와.” 김진섭은 돌쇠가 궤를 제자리에 옮겨놓은 것을 보고 말했다.

돌쇠는 김진섭이 말한 궤를 끌어내렸다. 그걸 탁자 있는 데로 들고 왔다.

김진섭은 다시 자물쇠를 열고 화첩 하나를 꺼내서 펼쳤다.

“사임당 그림 맞죠?” 명희가 그 화첩을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내가 너한테 물어보려고 했는데··· 맞는 거야?”

“잠깐 볼게요.” 명희는 김진섭의 손에 있는 화첩을 빼앗았다. 그러고는 화첩에 고개를 처박았다.

“너 뭐하는 거야?” 동희는 동생의 무례에 눈살을 찌푸리며 꾸짖었다.

명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화첩에 몰두했고, 김진섭은 그걸 보고 동희에게 그만 두라는 손짓을 했다.

동희는 동생 대신 정중하게 사과했다.

“승호야, 너도 그림 좋아하냐?” 김진섭이 남매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승호는 무례한 아가씨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다가 김진섭이 묻는 말을 듣지 못했다.

“그림 좋아하냐고? 아니면 내려가서 바둑이나 두자.” 김진섭이 목소리를 높여 다시 물었다.

“예? 아니요. 아예, 그러세요.” 승호는 더듬으며 김진섭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럼 우린 내려가자.” 김진섭은 바둑 때문에 몸이 달아 승호를 재촉했다.

“예, 내려가시죠.”

“너희는 여기 있는 것 다 보고 내려와라. 이것 말고도 더 있으니까 또 보여줄게.” 김진섭은 화첩에 머리를 박고 있는 명희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저는 여기 있겠습니다.” 돌쇠가 김진섭에게 말했다.

“뭣 하러? 남들 그림 구경하는 걸 구경할 게 뭐 있어? 내려와.” 김진섭이 단호하게 말했다.

“예? 그래도요······” 돌쇠는 김진섭의 단호한 말투에 말을 끌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없어. 그게 비록 남의 것이더라도 말이야. 그냥 따라 내려와.” 김진섭은 그림을 지키려고 하는 것 같은 돌쇠에게 일갈했다.

“아니요. 그래도 누가 있는 게 저희한테도 좋을 것 같습니다.” 동희가 말했다.

명희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주위에서 하는 말들은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됐어. 너도 그림 보고 있든지, 아니면 따라 내려와서 바둑 두는 것 보든지.”

“그냥 여기 있을게요.” 동희가 사양하며 말했다.

김진섭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고는 승호의 등을 떼밀었다.

돌쇠는 뒤에 있다가 달려가서 김진섭보다 앞장섰다.


“거기 앉아라. 저번 하고 똑같이 네가 선장선수로 두어라.” 바둑판 앞에 앉은 김진섭이 반대 방향을 가리키며 승호에게 말했다.

“예.” 승호는 대답하고 나서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면서 설레는 기분을 가라앉혔다. 지금까지 대국을 앞두고 이렇게 설렌 적은 없었다.

바둑판 위에는 돌이 이미 놓여 있었다.

승호는 다시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흑돌을 바둑판 위에 놓았다.

김진섭도 호흡을 가다듬은 후 백돌을 바둑판 위에 놓았다.

바둑은 그렇게 시작됐다. 몇 수 지나지 않아 격렬한 공방이 이어졌다.

김진섭은 저번 대국과 달리 공세를 취했다. 그러면서도 후방을 돌아보며 공세의 수위를 조절했다. 또한 작은 것에 집착하지 않고 대세를 중시했다.

승호는 유연한 수비를 바탕으로 치고 빠지는 공격을 감행했다. 공격이 먹히지 않으며 수비로 돌아섰고 수비는 빈틈이 없었다.


승호는 숨이 막혔다.

김진섭은 저번과는 다른 바둑을 두었다. 내 실력을 분석하고 초반 공방의 구도를 미리 짜놓고 대국에 임한 것 같았다. 또한 실전경험이 없던 긴 공백 때문에 저지르던 잔 실수도 전혀 하지 않았다.

그가 삼 년 전 조선의 국수라는 얘기는 명불허전이었다.

그날은 기대했던 것보다 아쉬웠고 이겼어도 이긴 것 같지가 않았다. 난 그가 잔 실수 때문에 바둑을 망친 것을 그보다 더 아쉬워했다. 그래도 감탄했던 것은 부분 전투를 전체와 연결시켜 대세를 장악하는 능력이었다.

이번 대둑에서도 대세를 보는 눈은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잔 실수조차 저지르지 않으니 저번 바둑과는 달리 숨이 막혔다. 숨이 막히도록 승부욕을 자극했다.


김진섭은 숨이 막혔다.

승호는 저번과 같은 바둑을 두었다. 상대가 숨 돌릴 틈을 주지 않고 몰아치는 공격은 여전했다.

조선에 새로운 국수가 나타났다는 얘기는 명불허전이었다.

경쟁자가 없는 최고수는 패배를 구하다 스스로 지친다. 그래서 난 삼 년 동안 바둑을 두지 않았다. 그동안 실전경험이 없었더라도 어떤 고수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신진에게 무너졌다.

그날 승호는 내 실수를 받아주며 느슨하게 두기도 했다. 그러는 나를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난 자존심이 상했다.

이번 대국에서도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공격은 날카로웠다. 그렇게 몰아치면 누구라도 겁을 먹고 물러설 것이었다. 그러나 한 번 물러서면 두 번째도 물러서야 한다.

난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치면서 대세를 살폈다. 대세를 그르치지 않는 한도에서 최대한의 공세를 취했다.

승호는 내 공격을 버티면서도 한 번씩 후방을 찌른다. 공격이 날카로운 줄은 알았지만 수비조차 이렇게 철벽일 줄은 몰랐다. 난 공수겸장의 바둑에 숨이 막혔다. 숨이 막히도록 승부욕을 자극했다.


돌쇠는 숨이 막혔다.

두 명의 최고수는 속세와는 다른 바둑을 두었다. 둘 다 상대를 몰아세우는 공격은 날카로웠다. 진섭은 공격을 대세를 휘어잡는 도구로 썼고, 승호는 수비로 버티다 역공을 펼쳤다.

삼 년 전의 그리고 지금의 조선의 국수라는 둘은 명불허전이었다.

진섭은 어려서 기보를 보며 혼자 돌을 놓다가 나에게 상대 역할을 맡도록 했다.

그 때 나는 바둑을 둘 줄 몰랐고, 기보를 따라 순서대로 놓기만 했다. 손을 움직일 수 있는 인형 같은 역할이었다. 진섭이 직접 바둑을 가르쳐주진 않았지만, 난 이렇게 바둑을 배웠다.

만권루에는 중국 바둑책이건 일본 바둑책이건 없는 게 없었다.

진섭은 만권루의 모든 바둑책의 기보를 놓아보았고, 나도 그랬다.

난 이렇게 배운 바둑으로 여기저기서 실전경험을 쌓았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 최고수는 아니었지만 서울에서 내놓으라는 바둑꾼들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진섭이 바둑을 끊고 나서 나도 바둑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저 심심풀이로 가끔 내기바둑을 두었다.

그런데 작년부터 내기바둑판에서 김진섭도 이길 고수가 나타났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런 말은 과장이 심하다.

최고수라고 허풍을 떨던 놈들은 나에게도 지고 나서 꼬리를 내렸다. 허풍은 고수였으나 실력은 별로였다.

진섭을 이길 고수라니! 이따위 얘기는 비웃는 것조차 지겨웠다. 그따위 고수가 있다면 내가 먼저 깨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승호의 바둑을 보니 그는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 소문의 주인공이 승호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진섭이 왜 다시 돌을 다시 잡았는지, 변양호의 집에서 돌아오면서 왜 그렇게 흥분했는지.

어떤 대결이든 세상에는 진정한 고수가 많지 않다. 어떤 시대에는 상대조차 없이 자신만이 유일한 고수일 때도 있다. 그래서 고수는 외롭다. 외로워서 아예 누구와의 대결을 그만둔다. 그런데 그런 고수가 맞수를 만났으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나는 숨이 막혔다. 그런 최고수들의 대결을 직접 옆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나는 변양호의 사랑방 툇마루에 앉아 있던 그날이 한스러웠다. 문이 닫힌 방안에서 고수들은 최초의 대결을 벌이고 있었고, 나는 밖에서 돌 놓은 소리만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의 바둑을 직접 보았더라면 오늘의 대국을 더욱더 간절히 기다렸을 것이다.


“창 좀 열어라. 덥구나.” 김진섭이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말했다. 시선은 소매로 땀을 훔치는 승호에게 가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돌쇠는 대답하며 손바닥에 고인 땀을 엉덩이에 닦았다. 그러고는 창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창문이 열렸고, 겨울바람이 세 명의 땀을 식혀주었다.

그 때 동희가 위층에서 내려오면서 찬바람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김진섭과 돌쇠는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동희를 바라보았고, 눈길이 마주치자 동희는 김진섭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대결의 정적을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승호는 그것도 모른 채 바둑판만 응시하며 검지를 바둑통에 대고 까딱이고 있었다.

“너 혼자 내려왔어? 명희는?” 김진섭이 동희에게 물었다.

“아직도 보고 있어요. 저 먼저 내려왔어요. 저는 잘 봤습니다. 고맙습니다.”동희가 김진섭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그제야 승호는 고개를 들어 동희를 보았다. 그러고 써늘해진 공기의 원인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열려진 창문으로 찬바람이 밀려들었고, 창문 뒤로는 본채와 통하는 문이 보였다.

“뭐 해? 네 차례야.” 김진섭이 돌을 바둑판 위에 놓으며 집중력이 흩어진 승호를 다그쳤다.

“예, 여기요.” 승호는 김진섭의 돌을 받았다. 이미 읽어놓은 앞의 수이기에 손길이 빨랐다.


“쿵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대국자 둘과 구경꾼 둘은 모두 놀라며 열어놓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돌쇠야! 문 열어라. 대감님 오신다.” 본채와 통하는 문밖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심 대감네 잔치에 가신다고 했잖아?” 김진섭이 돌쇠를 쳐다보며 물었다.

“예, 그러셨는데, 지금 오신 걸 어떡합니까. 그건 그렇고 얘들 밖으로 나가는 것도 그런데 어떡합니까?”

“어쩔 수 없지, 뭐. 너희들 위에 올라가서 숨어 있어라.” 김진섭은 돌쇠에게 대답하며 승호와 동희에게 말했다.

“바둑판은 어쩔까요?” 돌쇠가 물었다.

“이걸 지금 언제 치워? 그냥 나가봐라.”

돌쇠는 뛰어나가면서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았다. 승호와 동희가 위층으로 올라간 것을 쳐다보고 있다가 문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달려가 본채와 통하는 문을 열고 집사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김진섭이 문 앞에서 김흥방을 맞으며 말했다.

“그래, 너 여기 있다고 해서 일부러 왔다.” 김흥방이 대답하자 옆에 있던 화려한 중인차림의 남자가 간단한 인사를 건넸다.

“보실 서화가 있으십니까?” 김진섭이 시간을 끌려고 물었다.

“들어가서 얘기하자.”

김진섭은 아버지를 안으로 모셨다. 그런데 탁자 위의 바둑판이 어색하게 보였다.

“바둑 두고 있었냐?” 김흥방이 물었다.

“예. 혼자 돌 좀 놓아보고 있었습니다.” 김진섭은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혼자 두었다고? 이놈아 혼자 두었으면 흑이든 백이든 모두 한쪽에 있어야지 왜 반대쪽에 있어?”

“예? 아, 그거 말입니까. 상대편 역할은 돌쇠한테 하라고 했습니다.” 김진섭은 진땀을 흘리며 핑계를 댔다.

“됐다. 알았으니, 올라가서 조맹부(趙孟頫) 서첩 찾아오너라.”

“예,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김진섭은 긴장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재빨리 뒤돌아섰다. 그러고는 계단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그러면서 이미 두었던 수들을 되짚어보았고 앞으로 둘 수들을 헤아려보았다.


난 오늘 바둑을 배우면서 한 단계씩 올라서던 때의 희열을 느꼈다. 고수가 된 후에는 느낄 수 없던 희열이었다.

고수가 되고 나서는 상대에게 거의 아무 것도 배울 만한 게 없었다. 상대를 처참하게 뭉개버리는 것에 쾌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건 오래가지 못 했다. 그래서 바둑을 끊었다.

상대에게 무언가 배울 수 있다는 건 행복이다. 그리고 그런 기회는 흔치 않다. 난 오늘 무척이나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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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왕세제 책봉 22.01.02 352 5 13쪽
13 역관 +1 22.01.01 408 7 13쪽
12 종로 괘서 21.12.31 379 7 12쪽
11 그림 거간꾼 21.12.30 385 8 15쪽
» 고수들의 대국 21.12.29 394 9 12쪽
9 진화루 21.12.28 422 9 13쪽
8 포도군관 21.12.27 439 10 13쪽
7 역관가문의 후손 +1 21.12.26 599 8 12쪽
6 비공개수사 +2 21.12.25 501 9 12쪽
5 광통교 화방 +1 21.12.24 565 10 13쪽
4 내기바둑 +1 21.12.23 628 12 13쪽
3 명문대가의 얼자 +2 21.12.22 774 22 14쪽
2 해산 +1 21.12.21 991 23 13쪽
1 서소문 괘서(掛書) +10 21.12.20 1,918 4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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