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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칼날 님의 서재입니다.

그림과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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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검은칼날
작품등록일 :
2021.12.18 21:47
최근연재일 :
2022.07.05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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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4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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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광통교 화방

DUMMY

보름달이 먹힌 다음날, 변양호는 해질녘이 되어서 돌아왔다.

동희와 명희는 인사를 드리다 아버지의 굳은 표정을 보았다. 그래서 명희는 아버지 앞에서 재롱을 부렸다.

변양호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물러가라고 했다.


그 다음날, 명희는 아버지께 아침문안을 드리고 나서 승호를 졸랐다. 광통교 화방에 나가보자고 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동희는 막무가내로 조르는 명희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 때, “이쪽으로 드시지요.” 청지기가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사내를 데리고 들어오며 말했다. 그러고는 사랑채 쪽으로 양반 차림새의 사내를 이끌었다.

남매와 승호는 처음 본 사내였지만 변양호의 손님임을 알 수 있었다. 사내가 다가오자 한쪽으로 물러서며 머리를 조아렸다.

사내는 헛기침을 하며 그들을 지나쳤다. 그런데 몇 걸음 옮기고 나서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너, 고개 좀 들어보아라.” 사내가 말했다.

남매와 승호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사내의 눈길은 승호에게 가 있었다.

눈이 마주친 승호는 그의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남매는 사내와 승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내는 고개 숙인 승호를 한동안 쳐다보았다.

“가자.” 사내가 말했다.

“예?” 사내의 말에 승호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서 고개를 들었는데 사내는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니라 청지기에게 한 말임을 깨달았다.

남매도 고개를 들고 사랑채로 향하는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는 사람이야? 뭐 잘못한 일이라도 있어? 누가 잡아갈 것처럼 왜 그래?” 명희가 불안해하는 승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니에요.” 승호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화방 가신다고 하셨잖아요?” 화제를 바꾸면서 명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가보자고.” 명희는 더 이상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동희도 명희와 승호를 따라나섰다.


남매는 어제 어색한 화해를 했지만, 광통교로 향하는 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명희는 어색함이 불편했다. 그래서 김진섭이 내준 화첩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리 내기라고 해도 그걸 내준 건 이해하기 힘들었다. 동희에게 김진섭이 윤두서의 화첩을 광통교에서 산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추리를 늘어놓았다.


수표교에 사는 최씨가 윤두서의 진적을 많이 비축하여 권축을 이루었다는 소문이 있다.

광통교의 화방에서는 이것을 바탕으로 가짜를 만들고 공재의 인장을 찍어 팔고 있다고 했다. 속아서 이를 사가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그래서 난 오늘 승호를 졸라 광통교에 나가보자고 한 것이다.

화상은 고객이 김진섭이니까 아예 가짜를 속여서 판 것이 아니라 진적에다 가짜를 몇 점 섞었을 것 같다.

김진섭은 아버지께 화첩을 가져와 감식을 부탁하며 자랑하려고 했다. 그런데 위작이 섞여 있다고 하자 내기에 지고 나서 내게 쉽게 내준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이 진짜라고 해도 가짜가 섞인 화첩을 자랑할 수는 없다. 가짜 하나에 자신의 감식안이 비웃음을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동희는 이런 명희의 추리가 그럴 듯하다고 여겼다.

남매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새 광통교에 도착했다.

다동 집에서 광통교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곳에는 화방들이 즐비했고 갖가지 그림들이 넘쳐났다. 골목입구의 큰 화방들은 갖은 그림들이 그려진 병풍들을 내놓고 있었다. 병풍이야 양반사대부집뿐만 아니라 여염집에서도 없어서는 안 되는 살림세간이었다. 게다가 집안의 온갖 잔치나 행사에 꼭 필요한 물건이라 수요가 많았다. 돌상과 혼례상도 병풍 앞에서 받았고, 회갑연도 그랬으며, 상례에 있어서는 시신을 병풍 뒤에 두었다. 큰 화방에서는 주로 고급스러운 행사용 병풍들을 팔았다. 그리고 작은 화방에서는 살림세간으로 쓰는 싸구려 병풍들을 팔았다. 물론 돈 많은 양반들은 이런 기성품들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에 청나라에서 수입한 문인화로 병풍을 주문했다.


명희는 집안의 수준 높은 그림들도 좋아했지만, 광통교에 나와 민화를 보는 것도 좋아했다.

양반과 부자들도 그림을 모았지만 품위 때문에 이곳에 나오지는 않았다. 그들은 비싼 그림들을 대개 중개인을 통해 사들였다.

이곳의 그림들은 민중들이 벽사(辟邪)나 구복(求福)을 위해 구입하려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명희는 울긋불긋한 진채의 민화를 좋아했다.

“저 호랑이 그림, 시점이 〈계산행려도(溪山行旅圖)〉랑 같지 않아?” 명희가 화방을 둘러보다 호랑이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계산행려도〉라니······” 동희는 명희의 뜬금없는 소리에 말을 끌며 그녀가 가리킨 그림을 쳐다보았다.

남매는 북송(北宋)의 범관(范寬)이 그린 〈계산행려도〉를 10분의 1 정도로 축소한 모사본을 본 적이 있다. 아버지가 청나라 친구에게 선물로 받았다는 그림이었다. 그것의 크기는 가로 1자 세로 2자 정도였다. 그러니 실물은 키 큰 승호보다도 머리 하나가 더 큰 대작일 것이다.

그런데 동희는 명희가 왜 이 그림을 들먹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그림 보면 한 화면에 호랑이 얼굴이 앞과 옆을 같이 그렸잖아?” 명희는 동희의 표정을 보더니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런데?”

“〈계산행려도〉도말이지, 정면에서 본 것 말고도 위에서 본 것과 아래서 본 것 모두가 한 화면에 들어가 있잖아? 산수화가 됐든 민화가 됐든 시점이 다 그렇다니까.”

“이동하는 시점으로 그리는 게 뭐 특이한 게 아니잖아? 실제 경치의 아름다움을 다각도로 담아내기 위해서 눈앞에만 보이는 한 면만을 그리지 않는 거지.”

“그래, 바로 그게 판화랑 다른 거라고.”

“응? 그 판화······” 동희는 말을 끌며 얼마 전 아버지가 보여준 서양판화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께서 남매가 태어나기 전에 북경 천주당에 갔을 때 선물로 받은 그림이라고 하셨다.

가는 선을 반복적으로 긁어내서 만든 동판화였다. 곧게 뻗은 길이 앞으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것이 인상적인 풍경화였다. 나무 역시 멀어질수록 작아졌다.

“알겠지? 그 그림이 사실적이긴 한데 답답한 이유를. 그 서양화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은 거라고.” 명희는 동희에게 잠시 생각할 여유를 준 다음에 말했다.

“그래, 맞아. 한곳에만 초점을 둔다면 앞모습과 옆모습을 동시에 그릴 수가 없으니까.”

동희는 명희가 말한 서양풍경화의 일점투시법을 머릿속에 그렸다.

“원칙은 있지만 바보 같기도 하지? 아무리 사실적인 그림이라도 그림은 사실이 아니잖아? 게다가 우리가 본 앞모습과 옆모습 모두 사실이니까 그걸 동시에 그리는 게 더 사실적일 수도 있는 거지.”

동희는 고개를 끄떡이며 명희의 말을 음미했다.

승호는 줄곧 겁먹은 표정으로 얼이 빠진 것 같았다. 원래 그림 보는 걸 즐기지 않았지만 오늘은 아예 어떤 그림도 눈에 두지 않았다.

“우리 저기 가보자.” 명희는 멍한 승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승호는 딴생각을 하느라 명희의 무슨 말을 했는지 몰랐다. 그저 목소리 때문에 고개를 돌렸다가 눈이 마주쳤다.

“뭔 생각하는 거야? 빨리 와.” 명희는 다그치며 윤두서의 그림이 걸린 화방으로 향했다.


“다 가짜야. 여기 공재 할아버지 위작뿐인 걸.” 명희는 동희를 바라보며 일부러 화상에게 들으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공재 할아버지 위작? 뭐, 다 가짜라고.” 화상이 남매의 대화를 듣고는 발끈했다. 화를 내려다가 소녀의 차림새가 부유한 중인의 딸 같아 참았다. 그리고 그림 보는 게 그냥 어린애들 장난이 아님을 깨달았다. 애들이 윤두서의 위작이라고 지목한 것도 그렇고, 애들 말대로 걸어놓은 그림은 모두 가짜였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 집에 당연히 공재 선생 그림이 있지요. 하지만 걸어놓은 그림이 다 진짜는 아니에요.” 화상은 명희에게 말을 높여 높였다.

“다 진짜는 아니라고? 그럼 진짜가 있기는 한 거요?” 명희는 화방 입구에 걸어놓은 그림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예? 저 〈마상처사도(馬上處士圖)〉가 가짜라고요?” 화상의 정색했다.

“가짜가 아니면! 말 위의 처사도 그렇고, 말도 그저 그렇고. 저런 가짜 그림에 낙관이 다 뭐요?”

화상은 단호한 명희의 말을 되받아치려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명희의 확신에 찬 표정에 기가 눌렸기 때문이다. 가짜를 팔면서도 항상 당당했지만, 아니 당당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가짜를 팔 수 없었지만, 명희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보기만 할 거면 그냥 보다 가쇼. 난 잠시 안에 들어가 있겠소.” 화상은 명희를 피하며 자리를 뜨려고 했다.

“저거는 안 살 거고 진적이 있으면 당연히 사죠. 승호아, 돈은 가져왔지?”

“예, 아가씨···” 승호는 말을 끌면서 품안의 은 한 덩어리를 꺼내 명희에게 주려고 했다.

명희는 밤톨만한 은덩이를 보고 놀랐다. 흥정을 하려고 그냥 한 말이었기에 더 놀랐다.

화상도 놀랐다. 그냥 그림이나 보러온 줄 알았더니 은덩이를 가지고 있었다. 근데 저만한 은덩이로 그림을 사면 얼마를 거슬러줘야 할지 몰랐다.

“혹시 공재 할아버지 화첩 있어요?” 명희는 은덩이를 받아 쥐고 화상에게 물었다.

“아가씨, 화첩보다 아까 그 족자가 대작 아닙니까?”

“아니요, 그건 됐고. 화첩이 있으면 보여줘요.”

“예, 그럼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화상은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화첩 하나를 들고 나왔다. “아가씨, 이게 진적입니다.” 앞쪽 몇 장을 펼쳐 보이며 자신 있게 웃었다.

명희는 화상에게 화첩을 받아들고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살펴보았다.

동희도 옆에서 명희의 손길을 따라 넘어가는 그림들을 살펴보았다.

“진적이 섞여있긴 하네. 여기까지만.” 명희가 화첩을 덮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검지를 화첩 사이에 끼워놓았다.

“그러게, 네 손가락 끼워놓은 앞의 몇 쪽만 사면 될 거야.” 동희가 명희를 쳐다보며 한 마디 거들었다.

“오빠가 앞의 여섯 쪽만 사라네요.” 명희는 동희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 화첩을 뜯어서 어떻게 팝니까?” 화상은 정색했다.

“그럼, 진화루에다 판 화첩은 어떻게 만드셨나?” 명희도 정색했다.

화상은 명희의 입에서 나온 ‘진화루’라는 말에 사색이 되었다. 장사꾼이 낯빛을 드러내면 안 되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김진섭에게 판 〈마상처사도〉의 진적도 본 것 같았다. 김진섭과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어린애들이라고 얕잡아보다가 낭패해졌다.

“이건 다 가짜입니다. 저도 진짜인 줄 알았는데 아가씨가 말을 듣고 보니 가짜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죄송합니다. 이건 팔지 못하겠습니다.” 화상은 붉어진 낯빛을 감추며 냉정하게 말했다.

“아니, 화첩을 통째로 다 살게요.” 명희는 화상이 매매를 거부하자 당황해서 황급히 말했다.

“아니요. 죄송합니다.” 화상은 김진섭이란 고객을 놓칠 수가 없었다. 속여 팔았다는 걸 들키기보다 아예 진적을 태워버리기로 결심했다. 김진섭이 진적에다 위작을 섞어 두 개의 화첩을 만들어 팔았다는 걸 알면 자신을 어떤 식으로든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아가씨, 이 은덩이를 다 주고 사지요.” 승호는 화상이 망설이자 흥정을 집어치우라는 의미로 명희에게 말했다.

화상의 눈빛이 흔들렸다. 김진섭의 보복의 위험보다는 탐욕이 앞섰다. 핑계를 만들어 모른 척하기로 결심했다가 또 두려워졌다.

“어쨌든 사겠소. 이 정도 은이면 충분할 것이오.” 승호는 망설이는 화상에게 은덩이를 던져주며 말했다. 그러고는 화첩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남매도 승호를 따라 일어섰다.

화상은 화방을 떠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여전히 망설였지만, 그들을 불러 세우지 않았다. 결국 승호가 던지고 간 은덩이를 움켜주고 미소 지었다.


“아가씨, 선물로 드릴게요.” 승호는 화첩을 명희에게 내밀었다.

“이 화첩은 그렇게 값나가는 게 아니야.” 명희는 그걸 받아들고 말했다.

“그냥 선물하고 싶어서요.”

“그 그림이 그렇게 비싸지는 않을 텐데. 흥정도 안 하고, 그냥 그 은을 다 주고 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는데.” 명희는 세상물정 모르는 소녀처럼 말했다.

“그냥 선물하고 싶었어요. 갖고 싶은 걸 가졌으면 쓴 돈은 아쉬워할 필요가 없어요.” 승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근데, 그 은덩이는 어디서 났어?” 동희와 명희가 동시에 물었다.

승호는 말을 돌리다 결국 내기바둑 둬서 땄다고 털어놓았다.

명희는 자기도 돈 좀 따볼 테니까 다음에 내기바둑 두는 데 데려가 달라며 졸랐다.

동희는 흰소리 좀 늘어놓지 말라며 핀잔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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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공개수사 22.01.03 351 7 13쪽
14 왕세제 책봉 22.01.02 356 6 13쪽
13 역관 +1 22.01.01 411 8 13쪽
12 종로 괘서 21.12.31 384 8 12쪽
11 그림 거간꾼 21.12.30 390 9 15쪽
10 고수들의 대국 21.12.29 398 10 12쪽
9 진화루 21.12.28 427 10 13쪽
8 포도군관 21.12.27 444 11 13쪽
7 역관가문의 후손 +1 21.12.26 611 9 12쪽
6 비공개수사 +2 21.12.25 507 10 12쪽
» 광통교 화방 +1 21.12.24 572 11 13쪽
4 내기바둑 +1 21.12.23 634 13 13쪽
3 명문대가의 얼자 +2 21.12.22 780 23 14쪽
2 해산 +1 21.12.21 1,003 24 13쪽
1 서소문 괘서(掛書) +10 21.12.20 1,937 4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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