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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길을 걷는 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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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대비
작품등록일 :
2024.08.22 10:36
최근연재일 :
2024.09.17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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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200

작성
24.09.1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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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도읍

DUMMY

사흘이 지나 돌아온 리질란은 잠깐 시밀을 찾아 헤매야 했다.


시밀은 조합 건물 3층 조합장실에서 전 조합장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있었다.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잠깐 나갔다 온다.”


화가들 사이에서 그림을 그리던 시밀이 일어났다.


“다녀오십시오. 조합장님!”

“다녀오십시오!”


화가들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빛이 된 리질란이 날아올랐다. 시밀도 리질란의 뒤를 따랐다.


“우선 성지로 갈 겁니다. 거기서 새로운 연결을 구축하고, 용사의 이름을 받으면 끝입니다.”

“나 말고도 새로운 용사가 있나? 새로 탄생한 용사의 개선식이 있다고 말하던데.”

“저겁니다.”


리질란이 한쪽을 가리켰다.


도읍의 한쪽 하늘에 거대한 별길이 깔렸다.


별길의 크기가 어지간한 별보다 컸다.


별길의 중앙에서 실체를 가진 황금색 별빛이 마차를 끌고 있었다.


“용사님의 개선식입니다.”

“나?”

“용사란 빛의 핵심 무력이자 권력이자 자존심입니다. 새로운 용사의 탄생을 알리는 건 필요한 작업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다 해도?”


시밀은 거창한 환영식 같은 건 바라지 않았다.


사흘밖에 지내지 않았지만, 화가 조합에서의 생활은 꽤 보람찼다.


“그래서 저 마차에는 대리인이 들어가 있습니다.”

“필요 없다고는 절대 말 안 하는군.”

“그렇습니다.”


성지는 도읍 한쪽에 있는 빛으로 뒤덮인 땅이었다.


‘선은 안 되고, 원리로도 일격에는 무리. 같은 지점을 10번 정도 그으면 될까?’


별 먹는 것을 일격에 반으로 가른 원리를 몇 번이나 써도 가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 빛의 방벽이었다.


방벽은 위가 아니라 아래가 오히려 더 강했다.


“줄기 근처군.”

“맞습니다. 줄기로 뽑은 빛을 가공하는 게 도읍 사제들의 주 업무 중 하나죠. 사제들이 가진 절대 권력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과연.”


유리는 에너지의 중요성을 귀 따갑게 강요했다.


그건 지구와 이쪽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행상에게 남은 별빛의 양은 곧 목숨이었고, 화가 조합에 머무는 동안에도 생활 모든 부분에서 별빛을 다양하게 활용했다.


“별의 용사와 진짜 용사들이 쓰는 별빛은? 그것도 권력인가?”

“권력이라 칭할 것까진 아닙니다. 아니, 아무리 작아도 권력은 권력이군요. 그래도 절대다수의 별빛은 성지에서 나옵니다.”


성지에 들어간 시밀은 덜컥 굳었다.


무수한 사제가 길의 양쪽으로 늘어서 눈을 감고 양손을 모아 가슴 앞에 별빛을 띄워두고 있었다.


은은한 빛들이 성지 전역을 밝혔다.


“이건...?”

“의례입니다. 무시하시죠.”


리질란은 사제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시밀도 조심스레 사제들이 만든 길을 나아갔다.


“몇 명이나 되는 겁니까?”

“300만? 그 정도 될 겁니다.”

“... 사제의 숫자만 300만?”

“외곽과 달리 빛의 영역 안쪽은 간이 서품이 없습니다. 모든 사제는 성지에서만 임명되고, 성지의 부름에 답해야 하죠. 그런 시선에서 보면 많은 숫자는 아닙니다.”


시밀은 ‘이게 많지 않다고?’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건물 몇 개를 지났다. 사제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시밀은 리질란을 따라 성지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성지 깊은 곳, 시밀이 느끼기로는 줄기의 바로 위.


그곳에는 거대한 빛이 있었다.


고밀도, 고순도 빛의 주변에는 시밀도 읽을 수 없는 문자가 새겨진 벽이 빛을 흡수하며 빛났다.


문자들이 빛, 소리, 영혼으로 공명하며 웅웅 울렸다. 그 울림은 빛 앞에서 모였다. 기이하게 뒤틀린 공간이 하늘을 보는 눈을 통해 보였다.


“연결을 끊고 갱신하는 축복입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시밀은 공명 안으로 들어갔다.


새빛별과의 연결이 끊어졌다.


공명은 알 수 없는 힘으로 시밀의 영혼을 줄기, 그리고 도읍과 연결했다.


시밀의 머리로 직접 의지가 전해졌다.


‘소멸의 용사.’


시밀이 용사로서 활동할 이름이었다.


“명명 받았군요.”

“용사의 이름이라는 건 어떻게 정해지는 거지?”

“태초의 빛이 용사를 들여다보고, 그 근본에서 따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자기 이름을 부정하던 용사들도, 시간이 지나면 인정하게 되더군요. 어떤 이름을 받으셨습니까?”


시밀은 자신은 소멸과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려고 했다. 그 순간 시밀의 머리를 스친 건 별 먹는 것을 향해 원리를 휘둘렀을 때였다.


별 먹는 것은 원리에 닿은 부분이 소멸하며 죽었다.


“소멸의 용사.”

“그렇군요.”


리질란은 시밀의 눈을 빤히 보았다. 그리고 의외의 질문을 던졌다.


“용사님의 성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시밀은 리질란에게 한 번도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리질란도 시밀의 이름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내가 용사가 되기를 포기하면 다시는 만날 일이 없어지니까.’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인물의 이름은 기억할 필요도 없다.


이 신기한 공간과 영혼을 가진 문자들의 공명, 그리고 연결의 갱신보다 리질란의 질문 하나가 시밀에게 용사가 되었음을 체감하게 했다.


“시밀.”

“그렇군요. 끝났으면 나가죠. 조합에 가입한 것만으로 도읍에서 살기에는 부족할 겁니다. 제가 보조하도록 하겠습니다.”


시밀과 리질란은 지상으로 올라왔다. 건물들 사이를 지나는 시밀에게 리질란이 말했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겠습니다.”


시밀의 대답도 듣지 않고 리질란은 옆길로 빠졌다.


시밀은 리질란이 사라진 장소를 잠깐 바라보다가 앞으로 나아갔다.


***


시밀의 기척이 멀어지는 걸 확인한 리질란이 몸을 돌렸다.


전신을 금색으로 치장한 남자가 리질란 앞에 서 있었다.


“성지가 당신의 행방불명에 입 다문 이유가 이거였군.”

“그렇게 한가하면 승단 시험이나 치르는 게 어떻습니까. 황금빛.”

“용사님이라고 해야지. 보조 사제.”

“승단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황금빛 용사님.”

“사양하겠어. 행복해지지 않을뿐더러 내 재보를 잔뜩 소모하게 되니까.”

“언제까지....”


황금빛 용사가 리질란의 말을 끊었다.


“아이처럼 굴 거냐. 어른이 되어라. 500년 만에 만나도 당신은 달라진 게 없군. 그래서, 제대로 된 어른을 만들려고 20번째의 보모가 된 건가?”

“그의 나이는 제 선택과 무관합니다.”

“알아. 그냥 의무를 팽개치고 500년 동안 잠적한 스승의 별빛이 느껴져서, 잠시 보러온 거지.”

“볼일이 끝났다면 가보겠습니다.”

“이상의 용사. 당신의 500년은 수천 개 별의 미래가 될 수도 있었다. 진정으로 그 자리가 당신의 이상이 향하는 방향인가?”

“그렇습니다.”

“... 조금은 망설일 줄 알았더니. 재미없군.”


황금빛 용사는 쯧 혀를 차고는 등을 돌렸다.


리질란은 제자리에서 오랜만의 재회를 곱씹었다.


“어른이 되어라, 인가.”


같은 말을 많이도 했었다. 그와 같은 시기를 활동한 용사라면 한 번씩은 들었을 말이었다.


“이상과 이성의 차이를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조금은 달라졌을는지.”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이미 과거는 확정되었고, 그는 여기 있으니까.


저 멀리 시밀이 걸어가고 있었다.


성지가 신기한지 걸음을 늦추고 여기저기 구경하는 그에게 의례를 마치고 시간이 남은 사제 몇이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해 이런저런 설명을 시작했다.


육신의 성장조차 끝나지 않은 소년이다.


저 소년에게도 어른이 되라는 말을 하게 될까.


“잠깐, 성장이 끝나지 않은 용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역대 용사는 육체의 성장이나 변화는 이미 끝난 상태로 용사가 되었다.


조건부이기는 하지만, 용사는 불로불사의 존재다.


이 조건 하나만 보고 용사가 된 사람도 있을 정도로, 그 축복은 하늘의 모든 세력을 통틀어 압도적이다.


하지만 성장이 끝나지 않은 채로 용사가 되면, 그건 어떻게 되는 걸까.


***


시밀과 리질란은 조합 거리로 돌아왔다.


“집부터 알아봐야겠군요. 위치는 까다롭게 선정할 필요가 없다는 게 다행입니다.”

“날아가면 그만이니까.”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은 드물지 않게 보였다.


시밀과 리질란처럼 전신을 빛으로 바꾸는 사람은 없었지만, 빛과 비슷한 속도로 날아가는 사람은 드물게 찾을 수 있었다.


“요구 조건이 있으면 최대한 맞추겠습니다.”


시밀은 약간의 고민 후 답했다.


“하늘이 잘 보이는 곳.”

“탁 트인 하늘은 하늘세가 많이 나와 힘들 겁니다. 하늘세는... 필요할 때 말해드리겠습니다. 조금 복잡한 거라서.”

“용사의 활동 지원금이라는 게 있다고 들었는데?”


어린 시밀을 보고 성지의 사제가 알려주었다.


사고 싶은 게 있으면 활동 지원금으로 요청하면 어지간한 건 살 수 있을 거라고.


애 취급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시밀에게는 필요한 정보였다.


“그걸 포함해도 그렇습니다. 하늘세가 매겨지는 건물은 도읍에서도 최상위권 부자들이나 사는 겁니다.”

“내 별빛을 팔면?”

“용사의 별빛이라면 살 수는 있겠지만, 추천은 하지 않습니다. 육신이나 영혼에 간섭하는 수단으로 쓰일 수도 있고요.”

“... 그럼 됐고.”


여담이지만, 화가 조합에서는 하늘이 잘 안 보였다.


수십 층짜리 빌딩이 늘어선 건 아니었다. 조합 거리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10층 높이였다.


하늘이 안 보이는 건 하늘을 가리는 구조물이 많아서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생겼다가 사라지는 별길과 시밀은 용도도 모르는 여러 구조물의 빛이 하늘과 별빛을 가렸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어떤?”

“용사가 자원해 임무를 수행하면 성지에서 보상금이 나옵니다. 용사들도 급전이 필요할 때 쓸 정도로 상당한 금액입니다. 다른 방법은 그림입니다. 뛰어난 화가는 언제나 수요가 높습니다. 실력만 인정받으면, 집 정도는 그냥 선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대신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

“용사님의 실력에 달렸습니다.”


시밀은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말을 꺼내려고 했다.


용사의 임무는 성지에서 지정해주며, 한 번 지정되면 거절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어차피 해야만 하는 임무라면, 집도 얻을 겸 한 번쯤 자원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판단이었다.


쿠구궁...!


지진과 함께 땅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시밀이 리질란을 보았다. 그는 이미 한 뼘쯤 땅에서 몸을 띄우고 있었다.


“큰일은 아닙니다. 그래도 봐둘 가치는 있는 일이죠.”


시밀은 리질란을 따라 몸을 띄웠다.


일대의 땅 전체가 내려앉고 있었다.


리질란의 말대로 큰일은 아닌지 조합 거리 사람들도 ‘이번엔 이쪽이냐’. ‘재수 더럽게 없네’ 등등 불평하며 거리에 나와 다양한 수단으로 몸을 피했다.


상인 조합이라 쓰인 건물은 별빛으로 건물 자체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대피 수단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사, 살려줘!”

“별빛을! 별빛을 한 조각만!”


천천히 내려앉던 대지가 추락했다.


도읍 일부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시밀이 보기에는 거대했지만, 도읍의 전체 크기로 보면 크다고는 할 수 없는 구멍이었다.


추락하는 대지 아래로 태초의 빛이 근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변치 않는 그 모습이 별을 삼키기 위해 입을 벌린 별 먹는 것을 보는 것 같아 시밀의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어진 리질란의 말에 불쾌함은 한기가 되어 시밀의 전신을 감쌌다.


“용사가 죽었군요. 이 크기면, 순위 높은 용사였을 겁니다.”

“이게... 용사가 죽은 영향이라고?”

“용사를 되살리려면 강대한 힘이 필요합니다. 저장해둔 빛으로 가능하면 최선이지만, 그게 힘들면 도읍을 유지하는 별빛 일부를 사용하죠. 별의 용사이던 시절과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이게 달라지는 게 없다고? 방금 수백 명이....”

“용사라는 불길이 커진 것만큼, 촛불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초도 커진 거죠. 그게 다입니다.”


시밀이 비장한 표정으로, 지금도 태초의 빛을 향해 떨어지고 있는 도읍의 조각을 노려봤다.


“저 사람들을 구해도 되나?”

“용사로 일하다 보면 저런 희생은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른이....”


리질란이 말을 멈췄다. 시밀이 리질란을 재촉했다.


“대답!”

“... 됩니다.”


시밀이 빛이 되었다.


시밀에게 보이지 않도록 주의하며, 리질란은 얼굴을 쓸었다.


“나는 달라진 게 없군.”


자괴감에 질척이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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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하늘의 규칙 +7 24.09.13 558 50 12쪽
24 새로운 생활 +16 24.09.12 586 65 13쪽
» 도읍 +6 24.09.11 608 63 13쪽
22 도읍 +13 24.09.10 623 75 15쪽
21 새빛별, 그리고 나. +18 24.09.09 638 86 12쪽
20 작품명, 새빛별. +14 24.09.08 639 70 13쪽
19 대화 +7 24.09.07 622 71 14쪽
18 대화 +5 24.09.06 649 57 15쪽
17 최고의 사냥꾼 +9 24.09.05 696 72 14쪽
16 최고의 사냥꾼 +5 24.09.04 733 75 12쪽
15 최고의 사냥꾼 +6 24.09.03 764 69 12쪽
14 작은 별들의 용사 +15 24.09.02 842 94 16쪽
13 친구 +9 24.09.01 827 83 12쪽
12 살인 +6 24.08.31 810 74 13쪽
11 용사 +6 24.08.30 820 77 14쪽
10 하늘을 보는 눈 +10 24.08.29 815 81 12쪽
9 어른들 +8 24.08.28 833 74 13쪽
8 용사들 +3 24.08.27 851 60 14쪽
7 검, 별, 원, 색. +7 24.08.26 874 71 13쪽
6 검, 별, 원. +3 24.08.25 906 70 14쪽
5 촛불 +7 24.08.24 937 83 12쪽
4 촛불 +14 24.08.23 1,029 86 14쪽
3 작은 별의 용사 +5 24.08.22 1,130 68 13쪽
2 작은 별의 용사 +5 24.08.22 1,244 75 13쪽
1 작은 별의 용사 +7 24.08.22 2,353 8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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