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epin 님의 서재입니다.

별길을 걷는 용사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새글

태대비
작품등록일 :
2024.08.22 10:36
최근연재일 :
2024.09.17 19:00
연재수 :
29 회
조회수 :
23,286
추천수 :
2,042
글자수 :
172,200

작성
24.08.26 19:00
조회
874
추천
71
글자
13쪽

검, 별, 원, 색.

DUMMY

시밀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일격에 골통이 깨졌다. 고통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일어났어? 밥 먹고 갈래?”

“아니. 괜찮아.”


식탁에서는 유리가 밥을 먹고 있었다.


시밀은 식사가 필요 없는 몸이 되었지만, 유리는 아니었다.


“갔다 올게.”

“응.”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유리와 시밀는 평생 필요한 대화를 이미 끝마쳤다.


모든 대화가 끝났기에, 이후의 대화는 덤에 불과했다.


집에서 나온 시밀은 별길을 만들었다.


***


별길을 걷는 시밀에게 한 가지 작업이 추가되었다.


시밀은 별길을 걸으며 검을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한 발자국에 한 번씩.


시밀의 목적은 더 강하게 내려친다거나, 더 빠르게 내려치는 게 아니었다.


원을 그린다.


별검이라는 사내가 보여준 완벽한 원을 이 몸에 재연한다.


시밀은 입을 꾹 다물고 검을 휘둘렀다. 입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까지 멈춘 건 아니었다.


‘어떻게 원을 그릴 수 있지?’


검으로 원을 그리는 건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옆에서 누가 봐주지 않아도 자신이 그리는 궤적이 원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검을 휘두르는 팔을 멈출 수도 없었다.


이건 시밀에게 주어진 유일한 희망이자 가능성이었고, 별검이 보여준 검이라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시밀은 검을 휘두르며 별 먹는 것에게 다가갔고, 그렇게 세 번을 죽었다.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약간 느려졌다.


저번 세 번은 운이 좋지 않았다. 즉사하지 못하고 고통과 죽음을 그대로 느껴야 했다.


고통 없이 죽은 두 번이 운이 좋았던 거겠지.


속도가 느려졌을지언정, 시밀은 멈추지 않았다.


발을 멈추면 시밀의 세상은 사라진다. 별과 함께 죽음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선도 못 그리는 녀석이 그림을 그리려 해? 아까부터 보고 있자니 속이 꽉 막힌다!”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시밀이 발을 멈췄다.


시밀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별길을 걷는 다른 사람들을 곁눈질로 봤지만, 모두 속도가 시밀의 반도 안 되었다.


“뭘 봐?”


시밀이 아는 사람 중 가장 몸이 좋은 사람은 힐런이다.


눈앞의 남자는 힐런보다 어깨가 2배는 넓었고, 얇은 옷 너머로는 빵빵한 근육이 뚫고 올라올 것 같았다.


손에는 아담한(?) 붓을 들고 있었다. 시밀의 팔뚝 크기의 붓이 남자 손에서는 작게 보였다.


“누구냐?”

“어디서 누가 그런 말투 하라고 시켰지? 용사는 별의 얼굴이니까, 남한테 굽실거리면 안 되는 건 맞아. 그래도 상대를 봐가면서 말을 까야지. 안 그래? 꼬마 형제?”

“... 그러게요.”


시밀은 공손해졌다.


시밀이 별빛을 사용해도 남자의 주먹 한 방이면 머리가 펑! 터져버릴 것 같았다.


남자의 특별한 부분은 붓과 근육으로 끝이 아니었다.


남자는 별길을 걷고 있지 않았다. 남자의 발밑에 있는 건 색이었다.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무수한 색채들.


“내 소개부터 해야겠지. 삼원색 우레길. 보다시피 화가다.”

“... 어디가요?”

“이 붓 안 보여?”


붓을 들면 다 화가냐는 말이 혀끝에서 아릿하게 멈췄다.


“그 색은 뭔가요?”

“빛의 영향권에서도 구석인 이런 하늘에서 색을 보는 건 힘들겠지. 가르치지도 않을 거고. 그냥 너희가 빛의 아이인 것처럼, 이 하늘 어딘가에는 색의 아이도 있다. 그렇게 생각해.”

“빛과 색은 적인가요?”


우레길은 눈을 가늘게 떴다.


“꼬마 형제는 싹수 노란 친구였구나. 친구냐 적이냐를 물으면... 그때그때 다르다는 말밖에 못 해주겠어. 왜, 또 묻고 싶은 거 있어? 그림을 그리려는 자세가 기특해서 답해주는 거야.”

“색의 자식이라면, 삼원색은 어느 쪽을 쓰나요?”


우레길이 경악했다. 시밀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흘러들어온 자는 아닌데? 그걸 누구에게 들었어?”

“아는 누나요.”

“여기가 색의 영토도 아니고, 빛의 영역에 태어난 흘러들어온 자가 그런 시시콜콜한 걸 알려줬다고?”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시밀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화가다. 당연히 삼원색도 그림에 쓰는 색이지. 흘러들어온 자의 지식을 아는 작은 별의 용사라. 기분이다! 네게 그림을 알려주마.”

“저는 그림은....”


배울 생각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우레길이 선수를 쳤다.


“하늘에 원을 그리고 싶지?”


시밀은 말문이 막혔다.


“나한테 배우면 그릴 수 있다.”


별검에게 배운 ‘원’은 시밀이 손에 쥔 유일한 희망이었다.


희망에 불씨를 더할 수 있다면, 가르침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은....


“얼마나 걸리나요?”


별검의 원은 딱 봐도 단기간에 완성된 게 아니었다.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을 그것 하나만을 위해 검을 휘둘렀겠지.


별검의 본신이 진짜 별이라면, 천년, 만년의 시간이 걸렸을지도 몰랐다.


“꼬마 형제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되나?”

“아무리 많이 잡아도 1년이요.”

“현실 시간으로 사흘. 사흘 안에 꼬마 형제에게 그림의 기초와 원의 기초를 알려주마. 이러면 됐지?”


사흘. 이건 볼 것도 없다. 시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우레길의 말에 신경 쓰이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현실 시간으로 사흘이라면....”

“꼬마 형제에게 색의 위대함을 보여주지.”


우레길이 붓을 움직였다. 하늘에 하나의 세상이 그려졌다.


우레길은 시밀을 붙잡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하나의 그림이 별빛을 흡수하며 하늘을 유영했다.


***


우레길이 그린 건 화가의 공방이었다.


우중충한 목제 건물 안에 그림을 그릴 때 쓰는 도구가 쌓여 있었다.


먼지 쌓인 공간이었지만, 시밀이 이 공간에 들어오자마자 느낀 감상은 화사함이었다.


“색이....”

“칙칙한 별이랑 다르지? 아무리 생각해도 꼬마 형제는 우리 쪽에서 태어났어야 했어.”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색이 있는 장소에는 푸른 하늘도 있나요?”

“있어. 기본적으로 하늘을 그린 사람 마음이지만. 그리고 네가 들은, 흘러들어온 자의 지식에 있는 푸른 하늘과는 조금 다를 거다.”


우레길은 창고 같은 공방을 뒤져 낡은 연필과 종이, 그리고 몇 권의 책을 꺼냈다.


우레길이 책을 폈다.


책에는 해부도가 그려져 있었다.


유리의 지식으로 이런 게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인체부터 시작하자.”

“... 원을 그리는 거 아니었어요?”

“나는 그림의 기초랑 원의 기초를 알려준다고 했지, 한 번도 원을 그리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말한 적 없다? 나한테 배우면 원을 그릴 수 있다고 했지.”

“우와....”


애를 상대로 무슨 악질적인 말장난인가.


절로 혐오 섞인 탄성이 나왔다.


“말본새하고는. 그래서, 안 배우게?”

“아뇨.”


시밀이 냉큼 대답했다.


순식간에 이런 공간을 만들어내는 사람의 가르침을 걷어찬다고?


바보 같은 짓이다.


그리고 우레길의 말대로라면, 그에게 그림을 배우는 건 원을 그리는 방법으로도 이어진다.


“진짜 싹수 노란 녀석 같으니. 우선 네가 시도하고 있던 그건 허공에 원을 그리는 행위다. 잘 그린 원은 그 자체로 하나의 그림이지. 종이에 그림도 못 그리는 녀석이 하늘에 그림을 그리려 하고 있으니 내가 기가 막혀? 안 막혀? 거기 공책하고 연필 들어.”


우레길의 때아닌 그림 수업이 시작되었다.


연필 잡는 방법부터 시작해 힘을 조절하는 법, 선 긋는 법, 초점 잡는 법, 그리고 해부도.


인간의 몸에 익숙해지는 데 2달이 걸렸다.


중간에 시밀은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냐고 우레길에게 물었고, 우레길은 3년이라고 답했다.


이곳의 1년이 바깥의 하루였다.


시밀은 졸지에 3년을 갇혀 그림을 배우게 되었다.


인간 다음은 인간이 아닌 것들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시밀도 아는 동물부터 시작해 각종 괴물, 그리고 별까지.


“이것들을 배워서 의미가 있나요?”

“지네가 꿈틀대며 나무를 오른다. 지네의 구조를 모르는 사람이 지네의 움직임을 얼마나 자세히 그릴 수 있을까? 기껏해야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그리다 말겠지.”


용사인 시밀은 식사가 필요 없었고, 한 번 푹 자면 사흘은 버틸 수 있었다.


우레길은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집중해 그림을 그린다. 집중력이 떨어지면 집중이 덜 필요한 그림을 그리고, 휴식을 취한 다음에는 다시 집중해 그림을 그린다.


생물을 그리며 1년을 보냈다.


우레길이 시밀에게 시켰다.


“원을 그려라.”


시밀은 원을 그렸다. 원은 참으로 다양한 곳에서 쓰였다.


조금 과장해 모든 그림은 원에서 시작한다고 말해도 되었다.


시밀은 어떠한 도구도 없이 원을 그려냈다.


시밀의 눈에는 흠잡을 곳 없는 원이었지만, 우레길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풍경을 그린다.”


우레길은 시밀에게 기억하는 풍경을 최대한 자세히 그려보라 했지만, 시밀이 아는 풍경이라고 해야 별빛이 점점이 찍힌 하늘과 새빛별의 반복되는 경치가 전부였다.


우레길이 허공에서 여러 그림을 꺼냈다.


시밀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처음 보는 색으로 가득한 그림이 끝도 없이 튀어나와 공방 벽을 장식했다.


“이게 전부....”

“내가 없는 걸 그렸을 것 같아? 전부 풍경화다. 실존하는 풍경이지. 잡담할 시간에 손을 움직여.”


처음에는 풍경화를 단순히 베끼기만 했지만, 점차 그림이 바뀌었다.


우레길이 그린 풍경이 정면이라면, 시밀은 옆이나 뒤, 아니면 비스듬한 각도에서 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건 왜 이렇게 그렸지?”

“그럴 것 같아서요.”


시밀의 대답에 우레길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시밀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우레길도 붓을 잡았다.


우레길의 그림은 그림보다 낙서에 가까웠다. 색 위에 색을 칠하고, 그 색 위에 또 색을 칠한 낙서.


“그건 뭔가요?”

“그림.”

“그게요?”

“때가 되면 보일 거다.”


시밀은 이제 하나의 풍경을 보고 그림에 나타나지 않은 부분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그린 그림은 원래의 그림과 하나처럼 꼭 들어맞았다.


시밀은 수십 장의 그림으로 거대한 하나의 풍경화를 그렸다.


“역시, 너는 빛보단 색에 가깝다.”


우레길은 그 그림을 보고 그런 감상을 남겼다.


그 그림을 끝으로 풍경 그리기가 끝났다. 마찬가지로 1년 남짓한 시간이 지났다.


“원을 그려라.”


1년 전과 같은 요구였다.


시밀은 원을 그렸다. 1년 전과 똑같은 원이었지만, 무언가가 달랐다.


시밀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우레길이 말했다.


“그걸 알아내는 게 마지막이다. 그리고 싶은 걸 그려라.”


시밀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싶은 것?


시밀은 우레길이 시키는 것만을 그려왔다.


풍경화를 완성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우레길이 그린 그림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았다.


오롯한 시밀의 작품은 아니었다.


한 달이 지나도 시밀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우레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밀을 지켜보기만 했다.


시밀이 종이에 연필을 댔다.


종이에 줄을 쓱쓱 긋더니, 종이를 찢었다. 같은 작업이 반복되었다.


시밀이 버린 종이가 공방 구석에 쌓였다.


“무엇을 그리려고?”

“환상.”

“내면을 그리는 게 가장 어려운 것이지.”


반년이 지났다. 시밀 앞에 있는 종이에는 흑백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시밀은 붓을 들고 종이에 점을 찍었다. 그리고 종이를 찢었다.


“... 이 색이 아냐.”


밑그림을 그리고, 점을 찍는다. 그리고 종이를 찢는다.


일주일이 지나 시밀은 하나의 색을 칠할 수 있었고, 다시 일주일이 지나 하나의 색을 더 찾았다.


세 번째 색을 찾는 데는 한 달이 걸렸다.


네 번째 색을 찾는 데는 한 호흡이 걸렸다.


그림이 점차 색을 가졌다. 시밀은 우레길의 공방에 있는 모든 재료를 이용했다.


물감을 섞고, 물감만으로 색이 나오지 않으면 종이나 나무를 곱게 갈아 물감과 섞어 색을 만들었다.


그림이 점차 채워졌다.


그림은 한 부분만이 남게 되었다. 시밀은 그 색을 찾지 못하고 두 달을 헤맸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시도했다. 하지만 무얼 해도 딱 한 발자국이 부족했다.


“세상이 색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건 숨 막히는 일일 거야. 안 그래?”

“...!”


시밀은 붓을 놓았다. 그리고 그림을 조용히 앞으로 밀었다.


“제목은?”

“고향.”


그것은 하늘의 한 부분이 비어있는 도시를 그린 그림이었다.


“나는 네 생각을 모르지만, 네 삶이 어디 있는지는 알겠다.”


공방이 흩어지며 우레길과 시밀은 별이 반짝이는 하늘로 돌아왔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7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별길을 걷는 용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9 비탄의 사랑 NEW +8 23시간 전 344 46 13쪽
28 비옌 +16 24.09.16 467 51 12쪽
27 승단전 +11 24.09.15 516 58 12쪽
26 하늘의 규칙 +11 24.09.14 565 54 13쪽
25 하늘의 규칙 +7 24.09.13 558 50 12쪽
24 새로운 생활 +16 24.09.12 586 65 13쪽
23 도읍 +6 24.09.11 608 63 13쪽
22 도읍 +13 24.09.10 623 75 15쪽
21 새빛별, 그리고 나. +18 24.09.09 638 86 12쪽
20 작품명, 새빛별. +14 24.09.08 640 70 13쪽
19 대화 +7 24.09.07 622 71 14쪽
18 대화 +5 24.09.06 649 57 15쪽
17 최고의 사냥꾼 +9 24.09.05 697 72 14쪽
16 최고의 사냥꾼 +5 24.09.04 734 75 12쪽
15 최고의 사냥꾼 +6 24.09.03 764 69 12쪽
14 작은 별들의 용사 +15 24.09.02 842 94 16쪽
13 친구 +9 24.09.01 828 83 12쪽
12 살인 +6 24.08.31 810 74 13쪽
11 용사 +6 24.08.30 820 77 14쪽
10 하늘을 보는 눈 +10 24.08.29 815 81 12쪽
9 어른들 +8 24.08.28 833 74 13쪽
8 용사들 +3 24.08.27 851 60 14쪽
» 검, 별, 원, 색. +7 24.08.26 875 71 13쪽
6 검, 별, 원. +3 24.08.25 906 70 14쪽
5 촛불 +7 24.08.24 938 83 12쪽
4 촛불 +14 24.08.23 1,029 86 14쪽
3 작은 별의 용사 +5 24.08.22 1,130 68 13쪽
2 작은 별의 용사 +5 24.08.22 1,245 75 13쪽
1 작은 별의 용사 +7 24.08.22 2,354 84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