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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길을 걷는 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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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대비
작품등록일 :
2024.08.22 10:36
최근연재일 :
2024.09.17 19:00
연재수 :
2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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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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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200

작성
24.08.22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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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글자
13쪽

작은 별의 용사

DUMMY

용사 후보가 된 시밀은 힐런에게 훈련받기 시작했다.


아침을 먹은 시밀은 식탁에 유리가 먹을 몫을 남겨두고 문으로 향했다.


“아침, 차려놨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집에 돌아오면 그녀가 음식을 먹고 설거지까지 해둘 것이다.


시밀은 문 옆에 있던 목검을 꾹 쥐었다.


유리가 쓰던 목검이었다. 힐런이 시밀의 체격에 맞는 새로운 목검을 만들어주겠다고 했지만, 시밀이 끝까지 거절했다.


“어, 아. 안녕! 시밀!”

“그래.”

“시밀! 오늘도 숲이야?”

“어.”


숲으로 가며 마주치는 아이들이 시밀에게 인사를 건넸다.


시밀이 유리와 살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을 때처럼, 시밀이 용사가 되자 사람들의 태도가 또 바뀌었다.


앞장서 따돌릴 때는 언제고 틈만 나면 시밀과 친해지기 위해 다가왔다.


예전이라면 한껏 비웃어주며 굽실대는 아이들 사이에서 왕처럼 군림했겠지만, 시밀은 저들의 말에 진지하게 대꾸해 줄 마음도, 그럴 기력도 없었다.


시밀을 움직이던 동력은 힘이 다했다.


이야기보따리는 닫혔고, 유리도 마음을 닫았다.


시밀의 세계도 덩달아 닫혔다.


작은 새빛별, 시밀의 전부인 새빛별.


시밀은 닫힌 별 위에 있었다.


숲 앞에서는 힐런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힐런의 집은 숲 안에 있으니, 그는 인생을 용사 후보를 기다리는 일에 투자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용사를 가르치는 것 말고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 조각과 이상을 일으킨 별빛에서 태어난 괴물과 맹수를 잡는 게 그의 일이었다.


십수 년 후면 시밀의 것이 될 일이기도 했다.


“검을 들어라.”


시밀은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위에서 아래로. 단순한 내려 베기.


팔이 떨어지기 직전까지의 휘두르기가 끝나면 몸을 혹사하는 단련이 시작됐다.


시밀은 숲을 달리는 사냥감이 된다. 힐런은 각종 무기로 시밀을 함정으로 유도하고, 시밀은 함정을 피해 달아나는 간단하면서 악랄한 단련이었다.


숲을 한 차례 달리고 나면 시밀의 몸은 늘 피투성이가 되었다.


숲에서 탈출한 시밀이 땅에 드러누웠다.


“허억. 허억. 왜 저는 이런 단순한 것밖에 안 해요!”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힐런이 한발 늦게 숲에서 나왔다.


“유리 누나는 여러 검술도 막 배우고 했잖아요.”

“유리는 검술을 배워야 했고, 넌 검술을 배울 필요가 없다.”

“그건 무슨....”

“넌 별빛을 깨우쳤다.”


힐런이 시밀의 가슴을 가리켰다.


시밀의 몸에서 피어난 희미한 별빛이 다친 몸을 치료했다.


“별빛을 깨우친 시점에서 내 삼류 검술은 의미가 없다. 그걸 자유자재로 다루는 날이 오면 나 같은 놈은 백 명이 달려들어도 네게 상처 하나 못 낸다.”

“... 힐런 기사님도 별빛을 다룰 줄 알잖아요?”


힐런의 손 위로 반짝이는 빛이 생겼다.


“이건 진정한 별빛이 아니다. 내 생명력을 태워 빛으로 가공한 가짜지. 유리가 쓰던 별빛도 마찬가지다. 진짜를 동경한... 가짜들의 몸부림이지.”


타오르는 자신의 생명을 보는 힐런의 눈이 너무 아련하고 고통에 젖어 있어, 시밀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새빛별 모두에게 존중받는 동경과 두려움의 대상에게도 나름의 고민은 있는 모양이었다.


시밀은 누워 하늘을 보았다.


무수한 별빛이 반짝였지만, 별빛을 제외한 다른 색은 없었다.


푸른 하늘은 없었다.


“곧 행상이 오는 날이다. 용사 후보가 되면 요한 사제님에게 원하는 물건 하나를 부탁할 수 있게 된다. 원하는 게 있으면 생각해 둬라. 유리에게 묻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 새빛별을 나갈 수 있는 물건은 없겠죠?”

“없다.”


그렇겠지.


***


훈련이 끝나고 시밀은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을 차려뒀던 식탁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그보다 시밀이 놀란 건 식탁 위에 각종 잡동사니를 늘어놓고 만지작대는 유리였다.


“누나?”

“어, 왔어...?”


시밀은 유리의 눈동자 안에 있는 어색함을 무시했다. 그냥 유리가 침대에서 나와 다른 무언가를 할 생각이 들었다면, 그걸로 좋았다.


시밀은 식탁에 다가가 유리가 손에 든 물건을 보았다.


“이건 뭐야?”

“... 별빛을 이용해 빛을 내는 장치.”


유리의 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졌다.


별빛은 그 자체로 찬란한 빛이다. 별빛을 이용해 빛을 만드는 장치?


용도가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 보여줄게.”


유리의 손에 별빛이 모였다. 빛이 두 개의 나무 막대에 닿자 가운데 있는 금속 봉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태어나 처음 겪는 색의 폭력이었다.


시밀은 유리가 왜 칙칙하다는 말을 달고 사는지 깨달았다.


집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이 껍질을 벗었다.


껍질이 두꺼운 과일은 아무리 깨물어도 먹을 수 없고, 떨떠름한 맛만이 남는다.


껍질을 벗기고 한입 베어 물면 그제야 진가가 드러난다.


시밀은 사물이 감추고 있던 진정한 색을 발견했다.


빛은 고작 집을 밝히는 데 그쳤지만, 시밀은 저 작고 장엄하고 엄숙한, 진짜 색을 드러내는 빛의 칼날에 빠져들었다.


“전공을 살려서 만들어 봤는데... 어때?”

“누나는 역시 천재야!”


시밀은 유리를 껴안았다.


“그, 그래?”

“누가 뭐라고 해도 누나는 천재가 맞아. 누나가 아무리 부정해도 나한테 누나는 영원히 천재야.”


유리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그녀의 동력은 인정 욕구였다. 두 번째 삶이 가져다준 지식, 그리고 지식을 뒤따르는 자아 성찰의 저주.


육신이 머무는 세상과 영혼이 머무는 세상의 괴리는 두 번째 삶을 인지한 뒤로 잠시도 쉬지 않고 그녀를 시험에 들게 했다.


차라리 이름이라도 달랐다면 조금은 나았으리라. 불행히도 그녀는 육신도 영혼도 유리였다.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그녀는 영혼의 자아가 훨씬 강했다. 그녀는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모두 거부하고 자못 장엄하게 영혼이 가진 지식에 따라 ‘나를 유리라고 부르라’라는 말을 해버렸다.


그때부터 마을에서 그녀는 별종, 천재, 특별한 사람 등으로 불렸다.


차라리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것을.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 소리는 그녀의 영혼을 자극했고, 영혼의 향수를 일깨웠다.


돌아갈 수 없는 문명의 기억을.


향수를 잊기 위해 유리가 선택한 것이 육신의 인정, 타인의 인정이었다.


사람들이 용사 후보 유리를 우러러볼 때만큼은 그녀도 영혼의 기억을 잊을 수 있었다.


유리는 영원히 특별해지고자 했다. 비록 하나의 특별함은 잃었지만,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특별함이 남았다.


향수를 끝없이 자극하는 영혼의 기억이지만, 동시에 그녀를 붙잡고 있는 단 하나의 밧줄이었다.


그녀를 이불에서 벗어나게 한 건 두려움이었다.


유일한 밧줄마저 끊어지고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표류자가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세상에 홀로 남겨지는 건 아닐까, 하는 존재 위기.


유리 앞에는 그녀를 긍정해 줄 사람이 있었다. 그녀도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남들에게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에게 유리의 이야기는 공상... 머릿속에 그려내는 것조차 힘든 꿈보다 꿈같은 이야기였다.


유일하게 단 한 사람만이 그녀의 공상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 불야성.”

“불야성?”

“불야성 이야기는 안 해줬지?”


시밀은 유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새빛별은 작은 별이다.


새빛별에서 나오는 자원만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새빛별에는 정기적으로 행상이 온다.


촌구석 작은 별에 들리는 행상은 사제에게도 귀한 손님이었다.


말이 하늘을 달렸다. 말들의 발에서는 별빛이 반짝였고, 그 앞에는 별길이 깔렸다.


마부들이 말의 고삐를 능숙하게 조이며 마차를 새빛별에 안착시켰다.


덜컹!


거대한 마차가 땅에 닿으며 만들어지는 소음까지는 그들도 어쩔 수 없었다.


수십 대의 마차 주위에는 수백의 인파가 기다렸다.


거래는 물물교환으로 이루어졌다.


아낙들은 집에서 손수 만든 물건들을 품에 한가득 안고 마차를 가린 천이 열리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요한은 행상 대표인 힐튼과 만났다.


“간만입니다, 요한 사제님.”

“무탈하셨는지요.”

“실은, 무탈하지 못했습니다.”


힐튼의 시선이 마차를 끌던 말의 발굽에 머물렀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것까지 포함해. 들어가서 이야기하죠.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요한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계산적인 남자가 이토록 안달 난 모습을 처음 보았다.


말발굽에 깃든 별빛의 양도 평소보다 훨씬 적었다. 별길을 만드는 축복은 행상들에게 목숨과 직결되는 것일 터인데.


이 근처 하늘을 훤히 꿰고 있는 힐튼이 축복을 저리 낭비하는 것도 이상했다.


“알겠습니다.”


요한은 힐튼을 집으로 안내했다.


힐튼은 편지 한 장을 꺼냈다.


편지지가 드러났을 뿐인데도 방이 빛으로 가득했다.


저런 편지를 보낼 수 있는 건 세상에 단 한 곳뿐이었다.


“중앙...?”

“성지의 사제가 나타나 이걸 주고 갈 때만 해도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요한은 힐튼의 손에서 편지를 빼앗듯이 받아내 편지지를 뜯었다.


방을 가득 채우던 별빛이 땅에, 별에 스몄다.


요한은 한탄했다. 이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수백 번을 듣고 수십 번을 보았다.


그는 사흘 굶은 짐말처럼 고개를 내려 편지를 읽었다.


힐튼이 조심스레 물었다.


“용사... 맞습니까?”


요한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감입니다.”


용사는 별을 위기에서 구한다.


용사가 필요하다는 건 별이 위기에 빠졌음을 뜻했다.


별의 위기란 대개 별의 소멸이고, 이 작은 새빛별은 스스로 종말을 막아낼 힘이 없었다.


용사 후보란 다음 대 기사의 다른 이름이었고, 기사와 용사 후보 모두 검이나 조금 휘두를 줄 아는 게 전부다.


편지의 내용은 얼마 되지 않았다. 멸망이 확정된 별에 긴 미사여구를 붙일 이유가 없는 까닭이다.


“힐튼, 별 먹는 것을 만났습니까?”


힐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지척에 다가올 때까지 저희는 그게 별 먹는 것이라는 것조차 몰랐습니다. 보여야 할 별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그제야 깨달았죠. 그것은 소문대로 하늘에 가려 보이지 않는 새까만 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살펴볼 여유 같은 건 없었습니다. 목숨보다 아까운 별빛을 낭비해가며 달리고 또 달렸죠. 평소 축복이 제 목숨보다 귀하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그것도 다 취소해야 하게 생겼습니다.”

“그렇군요.”

“... 농이 재미없었나요?”

“적어도 시한부 환자에게는.”

“얼마나 남았습니까?”

“다음 상로에서 새빛별을 빼셔도 될 겁니다.”


힐튼은 1년에 한 번 새빛별에 들렸다.


이 작은 별과 별에 사는 사람들의 남은 수명은 채 1년이 되지 않았다.


“축복은 걸어 드리겠습니다. 대신, 물건을 조금 싸게 주셨으면 좋겠군요.”

“... 알겠습니다.”


깐깐한 상인도 마지막을 준비하는 별에 내는 부조금까지 아까워하진 않았다.


한두 푼의 적선을 눈여겨본 별빛이 훗날 그를 구해줄지도 모르니까.


요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 별의 용사에게 가망은 없습니까?”


힐튼은 말하고도 아차 싶었다.


별 먹는 것은 잡아먹은 별의 숫자가 세 자릿수에 이르는 괴물이었다.


새빛별보다 수백 배는 큰 별의 용사들도 별 먹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한낱 행상보다 별을 가꾸는 사제인 요한이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해봐야지요. 별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것이 별을 가꾸는 사제에게 주어진 의무이니.”


요한의 말은 힐튼에게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 같았다.


***


요한은 바로 시밀을 찾아갔다.


별에 스며든 편지의 빛, 중앙에서 온 편지는 용사 의식을 치를 능력도 없는 작은 별에 용사를 만들어내는 간이 의식이었다.


‘그리고 새빛별에게는 저주지.’


시밀은 힐런과 함께 숲 바깥에 있었다. 시밀의 앞에는 별빛이 검의 형태로 뭉쳐 있었다.


요한은 가져온 검을 시밀을 향해 던졌다.


“잡으세요!”


시밀이 검을 잡았다. 시밀의 앞에 있던 별빛이 검으로 스며들어 은은한 빛을 냈다.


별의 선택과 용사의 무기.


이제 정말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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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하늘의 규칙 +11 24.09.14 564 54 13쪽
25 하늘의 규칙 +7 24.09.13 558 50 12쪽
24 새로운 생활 +16 24.09.12 586 65 13쪽
23 도읍 +6 24.09.11 607 63 13쪽
22 도읍 +13 24.09.10 623 75 15쪽
21 새빛별, 그리고 나. +18 24.09.09 638 86 12쪽
20 작품명, 새빛별. +14 24.09.08 639 70 13쪽
19 대화 +7 24.09.07 622 71 14쪽
18 대화 +5 24.09.06 649 57 15쪽
17 최고의 사냥꾼 +9 24.09.05 696 72 14쪽
16 최고의 사냥꾼 +5 24.09.04 733 75 12쪽
15 최고의 사냥꾼 +6 24.09.03 764 69 12쪽
14 작은 별들의 용사 +15 24.09.02 842 94 16쪽
13 친구 +9 24.09.01 827 83 12쪽
12 살인 +6 24.08.31 810 74 13쪽
11 용사 +6 24.08.30 820 77 14쪽
10 하늘을 보는 눈 +10 24.08.29 815 81 12쪽
9 어른들 +8 24.08.28 833 74 13쪽
8 용사들 +3 24.08.27 851 60 14쪽
7 검, 별, 원, 색. +7 24.08.26 874 71 13쪽
6 검, 별, 원. +3 24.08.25 906 70 14쪽
5 촛불 +7 24.08.24 937 83 12쪽
4 촛불 +14 24.08.23 1,029 86 14쪽
» 작은 별의 용사 +5 24.08.22 1,130 68 13쪽
2 작은 별의 용사 +5 24.08.22 1,244 75 13쪽
1 작은 별의 용사 +7 24.08.22 2,353 8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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