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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n 님의 서재입니다.

별길을 걷는 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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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대비
작품등록일 :
2024.08.22 10:36
최근연재일 :
2024.09.18 19:00
연재수 :
3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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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33
추천수 :
2,044
글자수 :
178,837

작성
24.08.2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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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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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글자
12쪽

하늘을 보는 눈

DUMMY

시밀이 수련을 시작하자 다른 용사들의 시선이 몰렸다.


그들의 눈빛이 호기심에서 비웃음으로 바뀌는 건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풉.”


다소 과장된 웃음.


환결이었다.


시밀은 저 눈치 빠른 녀석이 다른 용사들이 시비를 걸기 전에 먼저 나섰다고 추측했다.


“그게 무슨 수련이야?”

“나한테는 수련 맞아.”


시밀은 검에 휘둘리는 건지 검을 휘두르는 건지 모를 동작을 반복했다.


환결은 시밀의 수련인지 장난인지 모를 행동을 지켜보았다.


시답잖은 장난은 절대 안 칠 것 같은 분위기를 하고 있지만, 넘치는 호기심은 시밀으로 하여금 가끔 이상한 행동을 하도록 했다.


그때마다 당황은 환결과 레이의 몫이었다.


이번에도 호기심에서 발한 행동의 연장선인 줄 알았다.


그야.


‘하늘이 아무리 넓다지만, 저런 검술이 어디 있어.’


무술은 자기 몸을 통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무술은 무술의 자격이 없다.


환결은 휘두르고, 가끔 찌르는 저 검 앞에 선 자신을 상상했다. 그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딴 게 검이라고? 내가 검을 한 수 알려주지.”


용사 하나가 시밀에게 다가갔다.


다른 용사들과 함께 시밀을 비웃던 용사였다.


그는 호기롭게 검을 뽑으며 시밀 앞에 섰다.


“자, 나한테 검을 휘둘러 봐라. 진짜 검술을 보여주마.”

“그만두는 게 좋을걸.”

“환결, 조금 같이 다녔다고 이 촌뜨기 편을 드는 거야? 연합을 배신하고?”

“... 시밀 너 힘 조절은 할 줄 알지?”

“아니.”


역시나.


환결이 보기에 시밀이 태어나 검을 휘두른 상대는 별 먹는 것이 전부다.


시밀의 검은 별 먹는 것의 몸에 상처를 남긴다. 그게 인간의 몸을 향해 휘둘러지면, 사람은 흔적도 남지 않는다.


“즉사만 시키지 마. 그러면 별빛으로 어떻게든 해볼 수 있으니까.”

“지금 저놈 편을 드는 거야?”


환결은 짜증이 밀려왔다.


죽음피로는 시밀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다.


환결도 레이도 죽음피로를 겪고 있었다.


“아, 그래. 나는 시밀이 이긴다에 우리 가문도 걸 수 있으니까, 빨리 끝내고 다시 출발하자.”

“어이, 촌뜨기. 덤벼라.”

“내 의지는 안 묻나?”


시밀은 검을 내린 채 똑바로 정면을 주시했다.


레이와 환결은 먼저 친근하게 다가왔기에 경계를 풀었다. 하지만 진짜 검술이니 촌뜨기니 하는 상대까지 존중해줄 정도의 인내심은 남아있지 않았다.

유리도 그랬다.


이유도 없이 좆같이 구는 상대가 있으면, 그 이유를 만들어주라고.


“네 의지? 나와 검을 맞댈 의지가 없다 이거지? 그럼 이건 어때.”


용사가 시밀에게 달려들었다.


그래도 한 별을 대표하는 인재답게 그 움직임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그러나 고작 별 하나를 기준으로 했을 때였다.


시밀의 적은 별 먹는 것이다.


빛의 속도로 움직여도 따라잡고, 아무리 두껍게 별빛을 펼쳐도 뚫어내는 재앙.


‘어떻게 하면 죽이지 않을 수 있지?’


남자는 너무 연약했다.


선은커녕 점도 버텨내지 못할 게 뻔했다.


남자를 선도 점도 찍을 수 없는 종이라고 생각하자 흥미가 동하기 시작했다.


저 재료는 어떤 식으로 다뤄야 하지? 완성한 작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물감을 뿌려?’


이미 재료는 색으로 가득했다. 아무 색이나 뿌리는 건 작품을 망칠 뿐이다.


‘그럼 접자.’


종이를 찢고 구기는 건 특기라면 특기였다.


종이를 가루로 만들어 물감에 섞은 적도 있고, 잘게 찢은 다음 물과 물감을 먹여 원하는 색을 만든 적도 있다.


‘너무 많이 건드리면 죽어.’


잘게 찢으면 재료가 죽어버린다. 적당히 죽지 않는 선에서 재료를 손봐야 한다.


시밀은 검을 놓았다.


용사와 영혼으로 이어진 무기는 자연스레 검집에 들어갔다.


검을 휘두르며 다가오는 종이가 보였다. 색으로 가득하고, 굴곡져 있어 다루기 까다로운 재료다.


‘뾰족한 부분부터 쳐내자.’


시밀은 날카로운 무언가를 손으로 잡고 옆으로 쳐냈다.


그리고 튀어나온 부분을 마음에 들도록 다듬고, 접힌 부분을 폈다.


일단 여기까지 하고 다시 밑그림을....


툭.


뒤로 물러난 시밀은 레이와 부딪혔다.


“만족했나?”

“어....”


시밀 앞에 있는 건 뼈가 부러지고 관절이 비틀린 용사였다. 얼굴에서는 눈물과 콧물이 줄줄 흘렀다.


“그런 것 같아. 먼저 가. 조금 쉬다가 따라갈게.”

“그러는 게 좋겠군.”


레이가 다른 용사들을 이끌고 떠났다. 쉬고 싶다는 말도 없이, 그들은 시밀에게 두려움 섞인 시선을 보내며 저 하늘로 사라졌다.


호기심, 죽음피로, 별 먹는 것, 연합, 용사, 그리고 멸시와 두려움.


길 잃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외부를 향해 가슴을 부수고 있었다.


다행히 시밀은 이럴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몇 장 그릴까.”


우레길의 공방에서 그림을 그릴 때는 어떤 고민도 걱정도 없었다.


모든 감정을 그림에 털어놓으면 됐다.


그러면 감정은 풍경과 인물에 녹았고, 마음은 놀랍도록 편안해졌다.


시밀은 검을 붓처럼 들고, 하늘에 그림을 그렸다.


아직 점도 제대로 찍지 못하지만, 흔적을 남기지 않을 거라면, 휘갈기는 정도라면 지금도 가능했다.


시밀은 하늘을 돌아다니며 검을 휘둘렀다.


본격적인 그림을 그릴 게 아니라면, 밑그림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시밀은 세 장의 그림을 하늘에 새기고 붓을 멈췄다.


“더 그리지 않나?”


시밀은 화들짝 놀랐다.


그의 옆에 한 쌍의 남녀가 서 있었다.


머리에 검은 갓을 쓰고, 갓에 검은 천을 달아 얼굴을 가렸다. 손에도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걸 빼면 다른 복장은 지극히 평범했고, 그 부분이 괴기함을 자아냈다.


여자가 남자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갑자기 말 걸면 어떻게 해! 놀랐잖아!”

“기척 없이 접근한 건 미안하군. 하지만 네 탓도 있다.”


갑작스러운 책임 선언에 시밀은 눈에 힘을 줬다.


“내 탓이라고? 뭐가?”

“하늘에 그림을 그렸지. 덕분에 하늘이 일그러졌다.”


시밀이 하늘을 보았지만, 하늘에는 어떤 이상도 없었다.


“빛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건 우리 하늘만이 가능한 일이니까.”

“자, 봐.”


여자가 장갑 낀 손으로 하늘을 당기자 하늘 일부분이 그녀의 손에 쭈욱 늘어났다.


“귀에. 일을 늘리지 마라.”

“겨우 이 정도로 뭘.”


남자의 타박에 귀에라 불린 여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알겠나? 네게는 안 보여도. 우리에겐 네가 그린 그림이 보인다. 도구를 가진 색의 영역도 아닌 빛의 땅에서 이런 그림을 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앞으로는 자중해줬으면 좋겠군. 우리 일이 늘어나니까.”

“자중하라고 해도, 나도 내가 뭘 한지 몰라.”

“그렇군. 색의 장인에게 직접 배웠을 리는 없고. 순수한 재능으로 이룩한 일이라면 제어도 힘들겠지.”


남자는 하늘에 손을 넣더니 새 갓을 꺼냈다.


“상연?”

“예술품을 봤으면 관람료를 내야 한다.”

“그래도 그걸 주는 건 너무....”

“준다고는 한마디도 안 했다. 써라.”


상연이라 불린 남자가 갓을 시밀에게 던졌다.


“혹시, 이 모자 이름이 갓인가?”

“흘러들어온 자는 아니고, 지식을 알고 있군. 그것도 하늘의 시천상제(始薦上帝)와 같은 세계의. 너를 눈여겨봐야 할 이유가 늘었다. 네 이름은?”

“새빛별의 용사 시밀. 그리고 그다지 눈여겨볼 필요는 없을 거야. 나도 내가 1년 후에 살아있을지 모르니까.”

“너 같은 놈일수록 끈질기게 살아남더군. 일단 갓부터 써라.”


시밀은 갓을 썼다. 갓에 달린 천이 자연스레 내려오며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이 보였다.


“이건....”

“하늘을 보는 눈이다. 갓을 쓴 자와 극히 특별한 자질을 가진 자에게만 허락된 세계지.”


하늘의 결이 보였다.


늘어선 검은색은 모두 같은 검은색이 아니었다.


하늘에도 결이 있었다.


빛이 지나간 길에는 하늘이 구부러졌고, 별이 있는 자리에서는 더욱 크게 구부러졌다.


시밀은 레이가 남긴 별빛의 흔적을 더듬어 연합 용사들의 집결지를 알아냈다.


그것과 비슷했다.


모든 존재는 하늘을 가로지르며 흔적을 남기고, 그건 하늘에 기록으로 새겨진다.


“하늘의 역사다. 이제 네가 그린 그림을 봐라.”


시밀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았다.


하늘에 그린 세 장의 그림.


공간의 구부러짐을 이용했기에 그림도 구부러져 공간에 붙들렸다.


세 개의 서로 다른 구부러짐이 뒤엉켜 하나의 그림을 만들었다.


그림에는 색이 없었지만, 굴곡이 있었고, 굴곡의 깊고 낮음이 색의 짙음과 옅음이었다.


“퍽 아름답지. 걸작을 그려놓고, 정작 그림을 그린 화가가 자기 그림을 보지 못하면 안타까운 일 아니겠어?”


그렇게 말하는 상연의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그것도 잠깐이었다.


“새겨라.”


상연의 목소리에 힘이 담겼다.


“이 장면을, 눈이 작동하는 방식을, 뇌에 새겨지는 정보를 모두 기억에 새겨라. 하늘을 보는 눈이 열린다.”


시밀은 눈에 힘을 줬다.


자신이 그린 그림과 그 그림의 굴곡, 그리고 하늘이라는 거대한 종이를 뇌리에 새긴다.


예술가라면, 화가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다.


화가 시밀은 평생을 써도 모자라지 않을 거대한 종이를 뇌리에 새겼다. 어떤 도구도 없이 최상의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재료는 흔치 않았다.


시밀은 갓을 벗었다. 그리고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시밀의 눈동자에 잠깐이지만 검은 하늘이 깃들었다.


“상연, 내가 보고 있는 게 진짜지? 이거 꿈 아니지? 하늘갓을 한 번 쓰고 하늘을 보는 눈을 얻었다고?”

“현실이다.”

“우선, 고맙다고 말할까.”


시밀은 갓을 상연에게 던졌다. 상연은 갓을 받아 하늘에 넣었다.


“관람료를 냈을 뿐이다. 그리고 자기도 모른 채 몇 번이나 하늘에 그림을 그려대면 귀찮아지는 건 우리다. 다음부터 자기가 그린 그림은 스스로 지워라.”

“어떻게?”

“지금부터 보여줄 방법으로. 귀에. 일할 시간이다.”

“하아. 이걸 언제 다 고쳐....”


귀에와 상연이 장갑 낀 손을 하늘에 뻗었다. 뻗은 손을 움켜쥐자 그 앞에 있는 공간이 일그러졌다.


둘은 시밀이 그린 그림을 접고, 꺾고, 뒤집어 흔적을 없앴다.


한 번 접었던 종이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지만, 구부러졌던 하늘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늘을 건드리는 자에게는 척살 부대가 파견된다. 별의 용사가 아니라 빛의 용사도 예외가 아니다.”

“....”

“어떻게 알았냐는 얼굴이군. 방법을 찾다 색에 손댄 용사가 한둘이었을까? 그림을 그렸으면 지워라. 그것만 지키면 우리를 다시 만날 일은 없다.”


두 사람의 손에 하늘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상연은 손으로 하늘을 벌렸다.


시밀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게 하늘에 속한 자들의 이동 수단이다.


“다음에는 성가신 일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군.”

“또 보자 꼬마야!”


상연과 귀에가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시밀은 검으로 하늘을 툭 건드렸다.


상연이 보여준 하늘에 물건을 보관하는 방법을 따라 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빛, 색, 그리고 하늘.”


이 하늘에 몇 개의 세력이 더 있고, 그들은 어떤 힘을 사용할까.


시밀은 하늘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의 궤적을 따라 선이 남았다.


“오.”


하늘에 그린 점과 선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우레길도 이런 눈을 가지고 있었을까?


시밀은 신이 나 검을 휘둘렀다. 쓰는 법이 완전히 다른 종이가 생겼으니, 종이의 성질과 손맛에 익숙해져야 했다.


레이가 별 먹는 것과 마주할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시밀은 그림 연습을 멈췄다.


하늘에 만든 흔적을 지우고, 시밀은 별 먹는 것이 있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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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도읍 +6 24.09.11 608 63 13쪽
22 도읍 +13 24.09.10 625 75 15쪽
21 새빛별, 그리고 나. +18 24.09.09 639 8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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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대화 +7 24.09.07 623 71 14쪽
18 대화 +5 24.09.06 650 57 15쪽
17 최고의 사냥꾼 +9 24.09.05 697 72 14쪽
16 최고의 사냥꾼 +5 24.09.04 734 75 12쪽
15 최고의 사냥꾼 +6 24.09.03 765 69 12쪽
14 작은 별들의 용사 +15 24.09.02 842 94 16쪽
13 친구 +9 24.09.01 828 83 12쪽
12 살인 +6 24.08.31 811 74 13쪽
11 용사 +6 24.08.30 821 77 14쪽
» 하늘을 보는 눈 +10 24.08.29 816 81 12쪽
9 어른들 +8 24.08.28 834 74 13쪽
8 용사들 +3 24.08.27 851 60 14쪽
7 검, 별, 원, 색. +7 24.08.26 875 71 13쪽
6 검, 별, 원. +3 24.08.25 907 70 14쪽
5 촛불 +7 24.08.24 938 83 12쪽
4 촛불 +14 24.08.23 1,030 86 14쪽
3 작은 별의 용사 +5 24.08.22 1,130 68 13쪽
2 작은 별의 용사 +5 24.08.22 1,245 7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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