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역시 일차적인 원인은 독자의 인내심 문제 같습니다. 독자들이 1, 2권 보다 재미 없다고 때려치우지 않고, 한 3, 4권 볼 때까지라도 읽어준다면 출판사 입장에서나 작가 입장에서나 앞권에 재미를 쏟아부을 필요가 없죠. 글도 더 안정적일 테고.
그럼 왜 독자들이 인내심을 못 갖는가? 사실 즐기자고 읽는 글에 인내심 가지면서 읽는 건 좀 이상하죠. 우리가 장르 소설을 공부하려고 읽는 것도 아닌데. 그럼 '용두사미 소설이 많은 건 독자의 인내심이 모자라기 때문이야'라고 말하는 건 영어 시간 지문에 프랑스어가 나온 것만큼 웃기는 얘깁니다. 그럼 뭐가 문제일까? 전반적인 작가의 자질이 딸리는 게 정말 문제일까?
좀 근본적인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재미라는 게, 그러니까 좀 어려운 말로 해서 쾌감이라는 게 꽤 여러 종류가 있지요. 정말 사람마다 다양합니다. 종족번식행위에서 느끼는 쾌감이 있는가 하면 남을 돕는 데서 얻는 쾌감도 있고 멋진 음악이나 시구를 접했을 때 느끼는 쾌감도 있습니다. 흔히 전자를 말초적 쾌감이라고 하고 후자를... 정확히 뭐라 하는진 몰라도 보통 고차원적, 정신적 쾌감이라고 하죠 아마?
근데 밥 너무 많이 먹으면 밥 먹는 게 고역이듯이, 쾌감도 한 종류만 열심히 느끼다 보면 그게 고역이 되죠. 경제학 가르치는 교수 말로는 이런 걸 좀 유식한 말로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럼 이제 맨 처음의 얘기로 돌아가보죠. 우리가 안 질리고 소설을 재밌게 잘 읽으려면 여러 종류의 쾌감을 번갈아 느끼든가, 아니면 한계 효용 체감이 좀 느린 종류의-뭐, 아무래도 말초적 쾌감보다는 고차원적 쾌감이 그런 쪽에 가깝지요?-쾌감을 느끼는 게 좋겠지요?
근데 그럼, 음, 실례가 될만한 질문인데, 장르소설 독자층의 대다수인 초등 고학년~고등학생 정도 또래의 청소년들이, 보편적으로 봤을 때 글에서 고차원적 쾌감을 느낄 수 있을 만한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을까요? 글쎄, 지금 갓 대학에 들어온 저도 꽤 최근까지 그런 시절을 겪었습니다만 대부분의 그 나이 또래 청소년들은 그런 거 모르죠. 어쩌겠습니까. 그들이-이렇게 써놓으니까 꼭 나는 아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사실 저도 잘 모르지만-그런 쾌감을 느끼는 법을 알 리가 없죠. 배운 적도 없으니까. 학교와 학원에서 글 읽는 법이랍시고 가르쳐놓은 건 '주제 파악하고 어떤 기법이 쓰였는지 알아보고 구조화시키고...암튼 수능 잘 봐라'하는 게 전부잖아요.
그럼 그들은 무슨 쾌감을 추구하는가? 당연히 좀 더 저차원적인, 그러니까 말초적 쾌감이죠. 그런 건 안 배워도 좀 더 알기 쉽잖아요? 그런데 그런 건 잠깐은 재밌어도 너무 보다 보면 고차원적 쾌감보다 훨씬 쉽게 질리거든요. 그럼 그게 1, 2권 넘어가서, 한 7,800페이지 넘어가서 그게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작가가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읽는 애들이 재밌게 볼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글에서 고차원적 쾌감을 느끼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작가는 그런 고차원적 쾌감을 지어낼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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