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천서미(千鼠尾)의 끌리는 제안
11화 천서미(千鼠尾)의 끌리는 제안
“신묘한 재주를 지니셨습니다. 아까는 분명 저와 같은 축기기 중기의 남자 수사가 아니셨습니까.”
“호호호. 곧바로 알아보는구나. 역시 재주가 좋아.”
길운의 반응에 천서미가 짤랑짤랑한 목소리로 웃었다.
그러더니 정색을 하고 길운을 보았다.
“다시 말을 하마. 너는 나의 이야기를 들어볼 생각이 있느냐? 분명히 말하지만 천백서와 얽힌 것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진정 그렇다면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선배께서 이렇게 권하시는데 뿌리치는 것도 예는 아니지요.”
“호호호. 그래. 그렇다면 잠시 나를 따라오너라.”
천서미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훌쩍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그 순간 십여장을 뛰어오른 천서미의 몸에서 밝은 자주색의 둔광이 번뜩이더니 그녀의 모습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하지만 길운은 그런 그녀의 종적을 놓치지 않았다.
길운 역시 훌쩍 몸을 띄우는 것과 동시에 은빛의 둔광과 함께 허공에서 사라졌다.
이에 장시의 대로에 있던 선인 수사들이 무슨 일인가 고개를 들어 두 수사의 흔적을 쫓았다.
하지만 이내 자신들과는 무관하다 여겼는지 제 갈 길로 흩어졌다.
이 때, 천서미와 길운은 평원장시에서 가장 큰 여각의 별채 마당에 서 있었다.
“호호호. 역시 놓치지 않고 쫓아왔구나.”
천서미는 길운이 자신의 뒤를 쫓아 별채의 마당까지 도착한 것에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고작 축기기 중기에 불과한 길운이 자신의 뒤를 쫓아 온 것은 그만큼 뛰어난 면이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천서미가 하려는 일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이리 오너라. 앉아서 이야기를 하자꾸나.”
천서미는 길운을 정원의 한쪽 정자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둘은 정자의 돌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너는 천백서와의 일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천서미는 딱 잘라서 길운의 근심을 털어 주려 했다.
하지만.
“말씀은 알겠지만, 또 그것을 어찌 확신하겠습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저는 의심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길운은 속내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이럴 때에는 솔직한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차피 이곳은 평원장시 안의 건물이라 수사들의 개인적인 다툼은 허락하지 않는다.
특히 상급 수사가 하급 수사를 착취하는 행동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곳이 평원장시다.
공평한 거래를 위해서 평원장시에서 정해 놓은 규칙이었다.
길운이 여기까지 천서미의 뒤를 따라 온 것도, 평원장시를 벗어나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설득하기 위해서 내가 너를 데리고 온 것이 아니겠느냐. 이야기를 들어보면 너도 이해를 할 것이니라.”
“그렇습니까?”
“그래. 그러니 한 번 들어 보거라.”
이후, 천서미는 길운에게 그녀가 하려는 일을 설명하고, 아울러서 천백서가 절대 그녀의 일을 방해하지 못할 이유도 알려 주었다.
실상은 그다지 대단하지 않았다.
천서미는 천서 일족을 뒷배로 두고 있는데 비해서, 천백서는 고작해야 몇몇의 부하를 거느린 산수일 따름이었다.
그러니 혹시라도 천백서가 천서미의 일을 방해하는 일이 생기면, 천백서는 아무리 평원장시에 숨어 있더라도 무탈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천서 일족의 어르신 중에는 성단기를 넘어 영체기에 이르신 분도 계시는데, 고작 축기기 후기 따위의 천백서가 어찌 내 일을 방해하겠느냐.”
“그렇습니까?”
“도리어 그 놈은 어떻게든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중이다. 놈이 너를 나에게 천거한 것도 그런 맥락인 것이지.”
“저를 천거한 것이 말입니까?”
“그럼! 너처럼 좋은 인재를 소개한 공이 어찌 작겠느냐.”
“그리 말씀을 하시니 부끄럽습니다. 저는 그저 세상을 떠도는 방랑 산수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호호호. 자신을 삼 푼 감추는 것이야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이긴 하다만, 그렇게 너무 스스로를 낮추는 것도 좋지 않다. 너는 이미 나에게 보여준 것만으로도 축기기 중기로는 차고 넘쳤으니.”
“으음.”
“자자, 이제 이런 공치사는 그만두고 진짜 할 이야기를 해 보자꾸나. 이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너를 쓰려는 곳은 영체기 수사의 수련 거처니라.”
“주인을 잃은 거처야 항상 후배 수사들에게 좋은 영양분이 되지요. 물론 위험하기도 하겠지만.”
“실로 그러하지. 옳은 말이다. 하지만 선도 수련을 하는 이로써 어찌 작은 위험 때문에 큰 이득을 포기하겠느냐. 아니 그러하냐?”
“천 선배님의 그 말씀도 옳기는 합니다만.”
“그리고 내가 너를 필요로 하는 것은 너의 남다른 식견 때문이니, 너를 위험한 곳에 던질 생각은 없느니라.”
“식견 때문이라······.”
“물론 단지 그것만은 아니겠지. 축기기 중기 정도의 무력도 쓰기는 해야 할 것이다. 아, 그건 네가 기르는 영수(靈獸)로도 충분하겠구나.”
꾸이이익?
말 중에 천서미가 금아백저를 거론했다.
길운의 어깨 옆에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던 금아백저가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며 천서미를 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말씀은 저와 이 아이까지 나설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거지요? 당연히 저를 쓰려는 데에는 이 아이의 힘까지 포함을 한 것이고 말입니다.”
길운은 천서미가 금아백저를 거론한 이유를 그렇게 짐작했다.
그러자 천서미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을 피했다.
하지만 그런 모습만으로도 이미 답은 나와 있다고 봐야 했다.
“어쩌겠느냐. 좋은 기회가 아니더냐. 함께 가자꾸나.”
천서미가 다시 한 번 길운에게 동행을 권했다.
하지만 다행히 이때에는 억지로 기세를 뿜어내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길운의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마지막까지 강압으로 일행을 삼아봐야 결국 탐험 중에 사이가 틀어질 수 있음을 염려한 것이리라.
“으음.”
길운은 슬며시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좋은 기회인 것은 분명했다.
게다가 천백서와의 악연이 이번 일과 무관하다 했으니, 그 걱정을 덜어낸 상황이면 천서미와 함께 해도 좋을 듯 했다.
다만, 천서미가 지금껏 했던 말이 모두 사실이라야 하겠지만.
“좋습니다.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다만 지금 확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어째서냐?”
“그야 제가 천 선배님의 말씀이 모두 사실이란 확신이 없기 때문이지요.”
“꽤나 까탈스러운 아이로구나.”
“열흘의 말미를 주시면 제가 몇 가지를 알아보고 답을 드리겠습니다. 열흘 후에 제가 나타나지 않으면······.”
“알았다. 그리 해라.”
천서미가 화가 난 듯 얼굴을 한 쪽으로 돌려 길운을 외면하며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길운은 그런 천서미의 모습에도 정중함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길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앞으로 모아 허리를 살짝 숙여 읍하며 말했다.
“그저 천 선배님과 천서 부족에 대해서 조금 알아볼 요량이니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이곳에 초행이라 아는 것이 없어 그렇습니다.”
“알았다지 않느냐. 가 보거라. 열흘 후에 마음을 정하면 이곳으로 오면 될 것이다.”
천서미는 그렇게 말하며 소매로 영기의 너울을 만들어 길운에게 밀어 보냈다.
길운은 그 영기의 힘을 받아 별채의 담을 넘어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 * *
평원장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드넓은 숲과 들판이 연이어 있는 곳이지만 평원이란 이름에 걸맞게 낮은 언덕도 찾아보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그런 곳의 어느 지점, 주위를 둘러봐도 특별할 것은 하나도 없는 곳에 길운이 네 명의 수사들과 함께 있었다.
“천 선배님, 정말 이곳입니까?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단 말입니까?”
길운이 천서미를 보며 물었다.
“놀랐느냐? 하지만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다. 만약 평원 밖에 있었다면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았겠느냐.”
천서미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평원을 벗어났다면 찾기가 더욱 어려웠겠군요. 평원만 하여도 금아백저를 타고 열흘은 날아야 가로지를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곳이니까요.”
길운 역시 평원 안에 목적지가 있는 것이 다행이란 생각에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큼. 그거야 우리 같은 축기기 따위에게나 그런 것이지. 성단기의 어르신들만 하여도, 평원 정도는 하루면 넘을 수 있을 테지.”
“그러게, 사실 영체기나 화신기 어르신들까지 거론하여 말한다면, 이곳 평원 따위야 그분들에겐 이름 없는 들판에 지나지 않겠지.”
“지금 그런 소리를 해서 무엇합니까?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지금 영체기 수사의 수련 거처를 앞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길운에 이어서 말을 보태는 이들은 함께 탐험에 나선 세 명의 수사들이었다.
천서미와 길운, 거기에 이들 세 수사가 더해서 모두 다섯이 이번 일을 함께하기로 한 것이다.
셋 중에 마지막으로 입을 열어 이곳이 어떤 곳인지 일깨운 이는 철로 만든 붓을 들고 있는 황후지(璜厚志)라는 수사였다.
그가 들고 있는 철관필은 그의 애병으로 본명법보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본명법보는 수사가 자신의 영혼과 동조시킨 특별한 법기 도구를 이르는데, 보통은 주인의 성장에 따라서 개량을 거듭하며 일생을 함께 한다.
그래서 본명법보는 수사에게 가장 중요한 보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천 수사, 여기에 영체기 수사의 유진이 있다면 그 입구는 어찌 여는 것이오?”
황후지의 말에 이번에는 수사 우장구(禹帳具)가 나서며 천서미를 향해 물었다.
우장구는 덩치가 큰 우락부락한 사내였는데 깃대에 둘둘 말린 큰 깃발을 등에 지고 있었다.
황후지와 우장구 모두 축기기 후기의 수사라 천서미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완경이 후기의 완성이라 하지만, 따지면 같은 후기의 경지이니 크게 구별하지 않는 것이다.
“그건 소 수사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애써서 소 수사를 모신 것이니 말입니다. 소 수사, 이리로.”
우장구의 질문을 받은 천서미가 남은 한 명의 수사, 소태남(燒太襤)을 불렀다.
“음, 뭔가 이곳에 어릿어릿 한 것이 있는데······. 뭔가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말이지······.”
수사 소태남이 웅얼거리며 천서미의 곁으로 나섰다.
그는 체구가 작은 수사였는데 옆구리에 뚜껑이 덮인 옹기를 끼고 있었다.
그 옹기 역시 소태남의 본명법보로 원래 불씨를 담는 옹기였다고 한다.
그래서 화기(火氣)를 주로 다루는 소태남이 본명법보로 만들어 강력한 불을 그 안에 담았다고 했다.
길운은 아직 그 불을 보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그것을 볼 수 있을 듯 했다.
“이곳의 금제 결계는 땅 밑을 흐르는 수맥을 이용하여 만들었어요 소 수사. 원래 자연스럽게 흐르던 물을 이용한 것이라 이질감이 없지요.”
“오호, 듣고 보니 확실히 수기의 흐름에 기이한 것이 섞여 있는 듯합니다.”
소태남이 눈까지 감은 상태로 무언가와 교감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는 의념을 넓게 퍼트려 주변의 기운을 세밀하게 살피는 중이었다.
“원래는 그것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결계 진법이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먼 곳에서 큰 지진이 생기는 바람에 이곳의 결계에 틈이 생겼지요.”
“아, 그 지진이라고 하면 범인들의 주(走)라는 나라에서 일어난 선인들의 싸움을 말하는 것입니까?”
지진이란 말에 우장구가 아는 척을 하며 끼어들었다.
“네, 우 수사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 일로 이곳에 결계가 있음을 알았고, 그 결계를 연구하던 중에 이곳에 영체기 수사가 영면에 든 수련 거처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천서미도 숨길 이유가 없다는 듯이 순순히 대답을 해 주었다.
“아, 일이 그렇게 된 것이로군요.”
“사실, 주(走)의 일로 적잖은 금제와 결계, 진법 따위가 흔들려 문제가 많았지요. 우리야 그 덕에 이런 좋은 기회를 얻었으니 손뼉을 칠 일이지만. 바로 저기, 소 수사 저기입니다.”
천서미 수사는 그리 말을 하며 흙바닥 한 곳을 가리켰다.
소태남은 곧바로 천서미가 가리킨 곳으로 가서 다시 눈을 감고 뭔가와 교감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길운은 수사들의 그런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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