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벽가의 행사가 옳지 못하지 않습니까
28화 벽가의 행사가 옳지 못하지 않습니까
- 문주님, 그냥 이리 화신기 승경단을 넘기고 마는 것입니까?
속이 답답해진 길운이 슬쩍 문주 기해전에게 물었다.
- 조용히 하거라.
그런데 돌아오는 기해전의 대답은 짧고 단호한 한 마디였다.
길운은 울컥하는 마음에 눈빛이 번뜩였다.
- 이미 승경단을 포기하고 죽을 결심을 했던 상황에서도 벽가의 어르신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제가 심해화산홍산호를 꺼내지 않았다면 어찌 승경단이 만들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리 허망하게 보물만 잃고 말라는 말씀입니까?
- 허어! 그 덕에 죽을 목숨을 살지 않았더냐!
- 살기만 하려고 했다면 절염선자인들 못해 줬겠습니까? 이미 상황이 끝난 마당에 도착한 것이니 명망 높은 벽가의 처사로 옳지 않습니다.
- 조용히 하거라. 고작 성단기 주제에 네 말을 벽가의 어르신들이 듣지 못할 것 같으냐?
- ······.
결국 기해전의 무거운 경고를 듣고서야 길운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길운의 말은 영체기 중기 이상의 수사들이라면 모두 들은 터였다.
성단기 수사가 전하는 심언 따위야 영체기 중기 정도가 되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기해전도 이미 그런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길운의 반발을 억지로 누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두루뭉술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동천 벽가, 그것도 태상문주의 명을 받고 온 수사들의 입장은 또 달랐다.
자신들의 행사가 자칫 태상문주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이야, 우리의 행사가 옳지 않다 했느냐?”
그래서 결국 벽가의 수사를 이끌고 온 영체기 완경의 늙은 수사가 길운을 보며 묻는 상황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
“어찌 말이 없느냐? 네가 분명 삼약문의 문주에게 이르기를 우리 동천 벽가의 행사가 옳지 않다 했는데?”
‘이거 불바다 앞에서 섶을 지고 나선 격이구나. 미친 짓을 했어.’
그 순간 길운은 자신의 행동이 경솔했음을 깨달았다.
수도계의 일은 항시 힘의 논리를 따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동천의 벽가는 약부나 약화천의 기억에서 수도계의 4대 지배 세력에 속하는 곳이었다.
수도계는 크게 인계와 영계, 선계의 세 등급으로 나뉘는데, 지금 길운이 있는 곳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계 중의 한 곳이다.
그리고 이곳의 수도계는 동서남북의 네 구역으로 나눌 수 있고, 그 각각의 방위를 지배하는 수도 세력이 있다.
동천의 벽가는 바로 그 동쪽 구역을 다스리는 지배자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곳을 두고 행사가 옳다 옳지 않다 떠들다니.
죽고 싶다면 무슨 짓을 못할까.
“존장께서 묻고 있지 않느냐 어서 대답하지 못할까!”
쿠릉!
“커억!”
길운이 잠시 머뭇거리자 결국 벽가의 수사들 중에 뒤에 있던 하나가 나서며 영기를 뿜어냈다.
길운은 영체기 수사가 뿜어낸 영기를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꿇으며 피를 토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지금 저 아이를 겁박하여 언로를 막고, 우리의 치부를 가리려는 것이냐?”
그런데 그런 후손의 행동에 인솔자인 영체기 완경의 수사가 버럭 화를 냈다.
그리고 슬쩍 손바닥을 저어서 길운에게 영기를 뿌렸다.
그 영기는 길운의 몸을 감싸며 진탕된 내부를 진정시켜주며 길운을 일으켜 세웠다.
“나는 너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나가듯 듣기에도 네 말에 그만한 이유가 있어 보이니, 그것을 자세히 듣고자 할 따름이다. 그러니 겁먹지 말고 네가 품은 뜻을 말해 보아라.”
그는 길운을 일으켜 세우고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달래듯이 그렇게 말했다.
이에 길운의 속은 복잡해졌다.
그 수사의 말을 믿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내친 걸음이었다.
여기서 말을 바꿔봐야 도리어 낭설을 떠들어 벽가의 명예를 떨어뜨렸다는 소리나 들을 뿐이다.
이미 입에서 나온 말을 없었던 것으로 할 방법은 없었다.
결국.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말을 해 보거라.”
“제 좁은 소견으로 동천 벽가의 어르신들께서 도착하기 전에 이곳 삼약문의 일은 이미 마무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으음. 그래?”
“그렇습니다. 용조는 절염선자에게 패하여 도주하는 중으로 삼약문의 화는 사라진 후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 우리가 조금 늦은 감이 있기는 하구나.”
“일이 이미 마무리가 되었다면 삼약문은 구화문의 절염선자에게 승경단 몇 알을 주는 것으로 보답을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많아봐야 두어 개 정도면 보상으로 차고 넘쳤을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없었다면 구화문의 절염이란 아이가 그 정도에 만족하고 물러났을까?”
“아니었다 해도 화신기 승경단 일곱 개를 모두 취한 것은 도가 치나치지 않겠습니까? 원래 두 개 정도로 끝낼 문제를 절염선자가 만족하지 못하고 일곱 개 모두를 욕심냈다면, 그것은 절염선자가 염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 그건 분명 그러하다.”
“그런데 그것을 막아준 벽가에서 승경단 일곱 개를 취함은 어찌 된 것입니까?”
“으음?”
길운의 물음에 벽가의 수사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일곱 개를 빼앗길 것을 막아준 것인데 그 보상으로 일곱 개를 받았다?
이건 분명 옳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이야, 네 계산에는 빠진 것이 있구나.”
“빠진 것이라니요?”
“삼약문이 우리 벽가의 보호를 받게 되는 것을 빼면 되겠느냐? 벽가는 삼약문에 큰 지원을 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느냐.”
“그럼 그것이 승경단을 받는 것에 대한 보상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허면, 저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화신기 승경단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귀한 보물까지 털어 넣었는데 손해만 보는 것이 아닙니까?”
“그야 네 목숨을 부지하게 된 것으로······.”
“그것은 절염선자의 경우라도 제 목숨은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너는 우리가 아닌 절염이 상황을 마무리 했더라도 네 몫의 보상은 없었을 것은 생각지 않느냐?”
“그러니 지금 벽가의 행사가 구화문의 절염선자와 다를 것이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어찌 구화문과 벽가가 같을 수가 있습니까?”
“으음.”
다시 한 번 허를 찔린 벽가의 수사는 짧게 신음을 토했다.
생각보다 성단기 애송이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우르르르르르르르릉!
그 때, 저 먼 하늘에서 뇌성이 울리며 천지가 샛노란 기운이 하늘을 뒤덮었다.
그러자 벽가의 인솔자가 얼굴빛이 하얗게 변하며 옷매무새를 바로하고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알겠습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서 깊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저 먼 하늘의 빛이 원래대로 돌아오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해졌다.
“자, 받아라.”
그리고 벽가의 수사는 소매 안에서 상자를 꺼내고, 그 상자에서 화신기 승경단이 들어 있는 자기병 하나를 꺼내 길운에게 밀어 주었다.
허공을 격하고 날아와 길운의 눈앞에 멈춘 자기병.
화신기 승경단이 들어 있는 자기병은 그 자체로 귀한 보물인 듯, 온갖 법문이 어지럽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걸 어찌 저에게 주십니까?”
길운이 의아한 표정으로 벽가의 수사를 보며 물었다.
“일곱 승경단이 세상에 나온 것에 네 공이 크니, 그 보상으로 이것을 주라하시는구나.”
“누가······. 설마 태상문주님께서······.”
“그래, 그러하다. 태상문주님께서 이르기를 보상으로 과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또 이만한 보상을 해 줄 깜은 된다 하셨느니라.”
“아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벽가 수사의 말에 길운은 뇌성이 울려왔던 쪽의 하늘을 향해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이리 되니 벽가의 수사들은 더 이상 길운에게 할 말이 없어졌다.
일을 마무리 한 것도 벽가의 태상문주이고, 그것에 저리 감사를 표했으니 무슨 말을 더 한단 말인가.
다만 삼약문의 장로들만 표정이 기묘해졌을 뿐이다.
어차피 승경단은 자신들의 손을 떠난 것.
이미 소유권이 없던 것임에도 그 중에 하나가 길운의 몫이 되니 이리저리 마음이 동했다.
하지만 그 동안 길운이 장로들과 쌓은 정이 있어서 그런지, 장로들은 슬며시 피어나던 욕심을 억누르는 모습이었다.
“자, 그럼 이제 우리는 떠날 것인 즉, 삼약문은 원기를 회복하는데 힘쓰도록 해라.”
벽가의 수사는 태상문주의 의지를 전해 받은 이후라 그런지 더는 일을 벌일 생각이 없는 듯 그대로 일행을 데리고 구름을 밟으며 모습을 감췄다.
남은 것은 기해전과 장로들, 그리고 길운이었다.
“후아. 죽을 뻔 했네. 뭐해요? 산도 장로를 돌보지 않고요!”
한동안 넋이 나간 모습으로 서 있던 길운이 문득 장로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얼었던 것처럼 굳어 있던 이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중에 제일 급한 것은 용조에게 얻어맞아 빈사 상태에 빠진 산도 장로를 구하는 것이었다.
“괜찮을 거다. 숨만 붙어 있다면 회복시키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여기가 어디냐? 삼약문이니라.”
기해전이 산도 장로를 치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길운에게 다가와 달래듯이 말했다.
“그렇겠지요. 설마 삼약문에서 장로를 구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길운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하던 중에 불쑥 화신기 승경단이 들어 있는 자기병을 기해전에게 내밀었다.
“무슨 뜻이냐?”
기해전은 그것을 곧바로 받지 않고 길운을 보며 물었다.
“이런 보물을 가지고 있어봐야 어디에 쓰겠습니까? 제가 이제 겨우 성단기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귀한 것을 이리 내민단 말이냐?”
“제게는 화신기 승경단 보다는 영체기 승경단이 더 급합니다. 그러니 영체기 승경단이나 넉넉하게 챙겨주십시오.”
“허! 허! 허허허허허허!”
길운의 말에 기해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사실 길운이 가지고 있는 승경단은 결국 벽가의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을 목숨 걸고 나서서 얻어낸 것은 길운이다.
그래서 기해전이나 장로들도 감히 그것을 욕심낼 면목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이리 내어 준다고?
“다만 이것을 삼약문에 드렸다는 소문은 좀 내어 주십시오.”
놀라는 기해전에게 길운이 빙그레 웃으며 조건을 내걸었다.
그 말에 기해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성단기에 지나지 않는 길운이 승경단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사실이 소문이 나는 순간 아마도 제일 먼저 절염부터 길운을 찾을 것이다.
물론 길운이 화신기 승경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벽가의 수사들과 삼약문의 수사들만 아는 일이지만, 수도계의 소문이란 어디서 어떻게 새어나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하늘을 물들였던 보물의 탄생에 얽힌 일이다.
길운이 화신기 승경단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백에 백, 소문이 나고 말 것이었다.
“요망한 것. 결국 스스로 지키지 못할 것이니, 싸게 넘기겠다는 거로구나?”
언제 다가왔는지 조양 장로가 투덜거리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런 조양 장로의 눈빛에 담겨 있는 것은 고마움이었다.
“누가 싸게 넘긴다고 했습니까? 아주 이참에 삼약문의 기둥을 다 뽑아갈 건데.”
“뭐라?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으아앗!”
“거기 서지 못하느냐!?”
“아니, 그러다가 내 덕분에 삼약문에서 화신기 수사가 떡 하니 나오게 되면? 그 때는 그 고마움을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 때는 그 때고! 지금은 일단 꿀밤부터 맞고 보자!”
“으라라라라!”
“이 노옴! 감히 또 깃발을 뿌려?!”
“하하하하. 저는 이만 물러갑니다. 가서 정양을 좀 해야겠습니다. 조양 어르신도 어서 오십시오.”
“이 놈! 이 진법을 풀지 못하느냐?!”
“하하하하하하.”
폐허가 된 삼약문의 터전 위로 길운과 조양 장로의 어울리지 않는 활기가 요동쳤다.
그렇게 삼약문의 위기가 겨우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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