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
“그런데 무슨 일이야?”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일단 확인 차 라뮤에게 물었다. 그러자 라뮤가 잠시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응?”
뜻밖의 말에 나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라뮤군.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해서는 안 된단다.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 유추하려 라뮤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저 작고 귀여운 얼굴이 보일 뿐이었다. 음. 이 애는 앞으로 미인이 될 거야.
애초에 나에게 독심술 같은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리 쉽게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렇다곤 해도 나도 지금 라뮤가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그저 라뮤가 내 상태를 알아챈 것에 놀랐고, 또 내가 그렇게 티를 내고 있었나 하는 생각에 아차 싶었을 뿐이었다.
그다지 드러내놓고 말할 만한 일도 아니라 어떻게 얼버무릴지 고민하다가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제대로 얼버무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런 엉터리 대답을 한들 라뮤가 납득할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음... 그렇지만 말로는 제대로 표현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은데.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말이나 글로서 형태화 시키는 것은 굉장히 까다롭고 번거로운 일이다. 그걸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한 번 더 가공까지 해야 한다면 그 수고는 훨씬 더 배가 된다.
만약 이런 일이 쉬웠다면 세상의 모든 작가들이 그렇게 죽을 정도로 머리를 쥐어 짜내고 있지는 않겠지.
무엇보다 나 자신이 납득이 갈 만큼 명확하게 이 생각을 정리하지도 못하고 있었기에 누군가에게 설명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는 나를 보며 라뮤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표정에서부터 나를 걱정한다는 것이 느껴졌기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책감이 장난 아니게 밀려들어왔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저 얼굴에 미소를 돌려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하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그 때 문득 신의 계시처럼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말로 전하기 어렵다면 다른 방법을 쓰면 되지 않은가.
옛 선현들이 남긴 말 중에는 이런 말이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과연 틀린 말이 하나도 없구나.
라뮤가 아무리 가련하고 사랑스러워도 일단은 용사이기에 조금 주저가 되기도 했지만 어제의 세라를 보면 그렇게까지 걱정할 일이 아닐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하기로 정했다면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다. 그저 실행할 뿐.
나는 몸을 일으켜 앉으며 옆에 누운 라뮤를 똑바로 처다 보며 입을 열었다.
“같이 갈 데가 있어.”
갑작스러운 내 말에 라뮤가 놀란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어, 어디요?”
“물론 혼인 신고서를 제출하러 관공서에...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순도 100퍼센트의 본심이 튀어나와 버렸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 지금은 참도록 하자.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건지 라뮤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만나게 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예, 예엣?!”
“지금부터 만나러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줄래?”
쇠뿔도 단김에 당기랬다. 이왕 마음먹은 김에 지금 당장 가는 게 좋겠지. 그런 마음으로 라뮤에게 말했지만 여전히 라뮤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에, 에? 하, 하지만 아직은 이르다고 할까, 마음의 준비가...!“
허둥대는 라뮤를 보고 있자니 흐뭇한 기분이 들었지만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라뮤의 등을 떠밀었다.
“자자.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모르는 사람과 만나는 건 나 같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겐 매우 긴장되고 힘든 일임에 틀림없다. 라뮤도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으니 저런 반응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부터 만나러 갈 존재는 겉으로 보기엔 그저 사람 좋은 아저씨일 뿐이니까 라뮤도 금새 익숙해질 것이다.
“우우... 하지만 벌써 부모님께 인사라니... 저한텐 무리에요오...”
“응?”
잔뜩 움츠러든 채 기어가는 목소리로 라뮤는 중얼거렸다. 뭔가 이 상황에서 어울리지 않는 말이 들린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예?”
뭔가 이상한 걸 느낀 건지 라뮤도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뭔가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에 혼선이 생긴 건가.
“그러니까... 부모님이 어쨌다고?”
“예? 그러니까 지금부터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는 게 아닌가요?”
잘못 들은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라뮤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무래도 아직 내 귀는 제 기능을 다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매일 같이 라뮤와의 행복한 미래만을 꿈꾸고 있는 내 뇌가 형편 좋게 환청을 만들어 내고 있는 건 줄 알았다.
뭐라 말하기 힘든 미묘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자니 내 표정을 보고 뭔가를 깨달았는지 라뮤의 얼굴이 가을의 단풍보다도 붉게 물들었다.
“아, 아우. 아니에요 아니에요...! 형이 헷갈리는 말을 하니까... 아우우.”
레일을 벗어난 기관차처럼 전력으로 헛돌고 있던 라뮤가 작은 주먹을 쥐고선 나를 투닥투닥 두드리기 시작했다.
물리적으로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지만 방어 관통 공격인 모양인지 심장이 아파왔다.
한동안 나를 투닥거리며 두들기고 있던 라뮤가 진정될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라뮤의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심정지가 와서 사망하지 않을까 하고 심각하게 생각하게 됐을 때 쯤 라뮤의 공격이 멎었다. 위기일발이었구나.
라뮤는 여전히 얼굴에 붉은 기운이 잔뜩 남아있었지만 어떻게든 진정한 모양인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에헴. 어, 어쨌든. 그럼 누구를 만나러 가는 건가요?”
“...가보면 알게 될 거야.”
미리 말을 해주는 것보단 직접 만나게 해주는 편이 편견 없이 누군가를 마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굳이 라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어쩌면 여러모로 불편한 만남이 될 수 도 있으니까.
“...알겠어요.”
라뮤는 여전히 뭔가를 물어보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믿고 따라오기로 정한 거겠지.
“잠까안~!”
한차례 작은 소란이 있은 후에 겨우 출발하려던 순간 방의 문이 벌컥 열리며 또렷한 목소리가 우리에게 곧게 뻗어왔다.
갑작스런 방문에 놀란 나와 라뮤는 그대로 굳은 채 열린 문 너머에 서 있는 사람을 쳐다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작가의말
조금 늦어졌습니다.
원래는 해가 바뀌기 전에 올리려고 했었는데 올해도 가면라이더 극장판을 보러 갔다 온다고 일정이 밀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올 한해도 하시는 일들 모두 다 잘되길 바랍니다.
여러분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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