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
저택의 정문은 우리를 환영하듯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와중에도 경비병 한 명 서 있지 않은 것이 도리어 묘한 압박감을 주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감시당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실제로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테지.
열려 있는 문을 넘어 말이 없는 마부는 마차의 속도를 줄였다. 마차가 완전히 멈추고 나서 우리들은 마차에서 내렸다.
저택은 어제보다도 더 스산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저택 바깥은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펼쳐진 동안에도 이 곳만은 어제와 같은 풍경이었다.
무자비한 괴물들의 공격도 이곳만은 비켜가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이제 와서 생각할 필요도 없겠지.
“기분 나쁜 곳이네.”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저택의 흉흉한 분위기에 나에가 눈살을 찌푸렸다. 라뮤는 불안한지 슬그머니 내 소매를 붙잡았다.
저택으로 향하는 길에 마중나와 있던 것은 무뚝뚝한 어제의 메이드가 아니라 불길한 기운을 풍기는 아가씨와 그 가신이었다.
우리에게서 등을 돌린 채 언덕 아래로 불타버린 플루아를 바라보고 있던 둘은 우리들이 다가서는 소리에 돌아봤다.
“아하하. 오늘은 어쩐지 손님이 많으시군요.”
여느 때처럼 웃으며 말하는 알렉스였지만 일말의 그늘마저 가릴 순 없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공허한 눈빛으로 플루아를 내려다보고 있는 에스메랄다가 서 있었다.
“저를... 죽이러 오셨나요?”
우리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에스메랄다가 말을 허공에 흩뿌렸다. 덕분에 그 말이 우리에게 향하고 있다는 걸 바로 깨닫지 못했다.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서도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저 말은 자기가 악마라고 시인하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걸까. 나는 알 수 없었다.
“아가씨.”
누구도 먼저 대답하지 못하는 가운데 카티아가 머뭇거리면서 한 걸음 나섰다.
카티아의 목소리에.뒤돌아서 있던 에스메랄다의 몸이 한순간 떨렸다. 뒷모습에서도 평정심이 흐트러진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잠시동안 굳어있던 에스메랄다가 천천히 돌아서 이쪽을 봤다.
“카...티아.”
옅게 부는 바람에도 지워질 듯이 희미한 목소리였다. 에스메랄다의 동요가 그대로 묻어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돌아가세요.”
에스메랄다는 잠시 후 가라앉은 목소리로 축객령을 내렸지만 동요한 탓인지 전과 같은 기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카티아의 발걸음을 멈추기엔 충분했다. 둘 사이에 쌓인 시간이 벽이 되어 막아서는 것인 걸까.
예전에 거부당한 게 떠오른 것인지 카티아는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대로 돌아선다면 다음엔 더 이상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더 골이 깊어져 메울 수 없는 지경이 되겠지.
그렇기에 지금 이대로 내버려둘 순 없었다. 내 생각대로 에스메랄다를 흔들기 위해서도 둘 사이를 어떻게든 해야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한담?
마차에서 몇 가지 생각해 놓은 건 있었지만 빈말로라도 효과가 있을 거라곤 못하겠다. 애초에 친구 하나 없는 놈이 누구 사이를 중재 해줄 만 한 능력이 있을 리가 없지.
결정적인 순간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대신해 물러서려는 카티아의 등을 미는 작은 손길이 있었다.
“에...?”
“포기하면...안 돼요.”
예상치 못한 기척에 놀라는 카티아를 온 몸으로 밀며 라뮤는 자기 일도 아닌데 필사적인 표정이었다.
그런 라뮤의 기세에 밀린 것처럼 카티아가 다시 한 발 에스메랄다에게로 다가섰다. 라뮤의 덕분에 파고들 틈이 생긴 것 같았다.
“잠깐이면 되니까 이야기 좀 하지 않을시렵니까?”
라뮤가 만든 천금 같은 찬스를 그냥 날릴 수 없어서 되는 대로 내뱉었더니 수상한 권유같은 말이 튀어나와 버리고 말았다.
“좋죠. 자자 아가씨도 함께 어떠십니까?”
누구에게서라고 할 것도 없이 쏟아지던 미묘한 시선에 견디고 있으려니 알렉스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알렉스 너란 녀석이란... 큿.
알렉스의 권유에 에스메랄다는 마지막 힘이 빠져버린 것처럼 더 이상 거부하려 하지 않았다.
일단은 잘 된 건가.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어요 카티아?”
“으,응... 오랜만이야.”
마치 며칠 만에 만난 사람처럼 알렉스는 스스럼 없이 카티아에게 인사를 건냈다. 소꿉친구라고 했었던가. 2년이 넘게 만나지 못했을 텐데도 공백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친숙한 태도였다.
“......다친 곳은 괜찮은가요?”
알렉스의 가벼운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건지 에스메랄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얼마만큼이나 떨어져 있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운 마음의 거리가 한 발짝 가까워진 것이리라.
다만 물리적인 거리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은 채 두 사람은 멀찌기 떨어져 서 있었다. 또 다시 그때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게는 악마의 기운을 감지해낼 능력이 없지만 테스카가 조용한 걸 보면 염려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전적으로 믿을 순 없는 노릇이지만.
그리고 뭣보다 이 곳에는 용사들이 모두 모여있다. 어제의 소동으로 플루아의 악마도 용사들의 힘을 알게 됐을 테니 이 자리에서 섣불리 손을 쓰진 못할 것이다.
남은 것은 두 사람이 하기 나름이겠지만 그건 짧은 시간 내에 이루어질 일이 아닐 것이다. 애초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사람을 만나게 하는 것 정도 뿐이었으니까.
냉정하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해야 할 필요도 없다. 카티아를 이 곳에 데려온 건 에스메랄다를 흔들어서 악마의 정체를 밝혀내는 데 필요한 정보를 얻으려는 목적 때문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생각대로 에스메랄다를 흔드는 데는 성공했다. 이젠 전에는 얻을 수 없었던 정보를 끌어낼 시간이다.
“제대로 인사 드리러 왔습니다. 저희들은 지나가던 용사들입니다.”
이 분위기가 날아가 버리기 전에 서둘러 선제공격을 날렸다. 갑작스런 내 말에 주위의 눈총이 날아들었지만 애써 모른척 했다.
하지만 나에의 물리적 공격은 참기가 힘들었다.
“용사...라구요?”
카티아에게 향해 있던 에스메랄다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움직였다. 마치 처음 알게 되었다는 듯이 그 목소리에는 떨림과 경악이 배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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