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용건이 끝났으니 나는 이만 나가보도록 하지.”
들어오는 세라씨와 나에를 뒤로하며 길이 방을 나섰다. 그래 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거라.
“아 드렉씨 좋은 아침이에요.”
변함없이 포근한 미소가 눈부시다. 시간이 미묘한 인사는 둘째 치고.
“쳇. 용케도 안 죽었네...”
유감스럽다는 듯이 혀를 차며 독설을 내뱉는 나에였지만 역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시기에 더위라도 먹은 것 같은 텐션이었다. 나보다 더 안색이 안 좋은 거 아닌가 싶을 정도다.
“정말~ 나에는 또 심술만 부리고. 그러면 못써요.”
엄마 같은 느낌을 풍기며 세라씨가 나에를 나무랐다. 저런 엄마라면 나도 부디 혼내 줬으면 합니다.
“시끄러. 엄마냐?”
나랑 같은 감상을 품었는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툴툴대던 나에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누~가~엄~마~란~거~죠~?”
“히익...!”
나에의 어깨를 잡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하는 세라씨의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귀기가 느껴졌다.
뒷모습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직접 마주 서 있는 나에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만 봐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안 그래도 초췌한 얼굴이었던 나에의 얼굴이 더 심각해져서 저대로는 나보다 먼저 저 세상으로 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세라씨도 저렇게 화를 낼 때가 있구나. 앞으론 세라씨의 앞에서도 언동에 주의를 기울여야겠다.
그건 그렇고 역시 세라씨도 신경 쓰이는 건가. 나이라든가 주름살이라든가 처지는 뱃살이라든가.
“드렉씨 지금 뭔가 실례되는 생각 하지 않았나요오~?”
“아니오. 전혀.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언동 및 뇌내 독백에도 주의를 기울여야겠다.
“정말. 두 분 다 심술궂어요.”
세라씨는 분명히 내게 등을 돌리고 있을 터인데 사탄의 인형의 한 장면처럼 목만 180도 돌아서 나를 돌아볼 것만 같았다.
예민한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조심하자. 위기의 순간을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는 남자가 되고 싶다.
진정이 되었는지 검은 오라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던 세라씨가 평소의 천사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방금 봤던 모습은 기억 저편에 묻어두도록 하자. 응, 그게 분명 좋을 거야.
“몸은 어떤가요? 아픈 데는 없어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안부를 물어오는 세라씨에게 약간의 공포를 느끼며...... 아니, 아무 일도 없었다. 나도 참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하하하.
세라씨의 질문에 적당히 몸을 움직여 봤지만 역시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네. 아주 쌩쌩합니다.”
“와~ 다행이다. 그렇죠 나에?”
피어나듯 가련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세라씨에게 나에는 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흥. 바퀴벌레 같네.”
“드렉씨가 잠들어 있을 땐 엄청 걱정했으면서.”
“윽, 야 누가 걱정을 했다고!”
“3일 동안 잠도 거의 안자고 드렉씨를 치료했으면서.”
“야 하지 마!?”
나에가 당황하며 세라씨의 입을 막으려고 허둥댔다. 기분 탓인지 얼굴이 붉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뭐랄까. 신선해서 보기 좋구만.
왠지 모르게 흐뭇해져서 두 아가씨의 모습을 슬그머니 지켜보고 있었더니 타겟을 바꾼 듯 나에가 나를 손가락질 했다.
“아, 아니거든! 그냥 니 몸이 이상해서 성 안에 사람들 아무도 치료를 못하니까 할! 수! 없! 이! 내가 치료 한 거뿐이거든!”
얼굴에서 불이라도 뿜을 기세로 나에가 말했다. 혹시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츠, 츤... 어쩌고 하는 그건가?
설레는 마음에 나에의 얼굴을 보자 수치심 때문인지 붉어진 얼굴에 눈꼬리에는 눈물이 살짝 맺혀 있었다.
이 녀석이 이렇게 귀여웠던가?
러브코메디 소설의 주인공 같은 뻔하고 멋대가리 없는 감상을 내가 갖게 될 줄이야.
하지만 한창 때 소녀의 풋풋함이 느껴지는 저 반응을 보니 귀엽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평소의 마구 놀 것 같은 인상과의 갭이 크게 작용한 것이리라.
어라? 제길 위험하다. 가슴이 두근거리잖아. 나에게 두 번째 봄이 온 것인가? 아, 물론 첫 번째는 라뮤다.
“바, 바퀴벌레도 눈앞에서 죽으면 기분이 안 좋아지니까, 그러니까 치료해 준 거 뿐이라고!”
나는 바퀴벌레랑 동급인 건가. 그보다 바퀴벌레 죽은 걸 봐서 기분이 나쁜 건 징그러워서 그런 게 아닌가? 조금 상처다.
“나에도 솔직하게 드렉씨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될 텐데.”
“아니 그건 아냐.”
나에는 방금 전까지의 부끄러워하던 모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정색을 한 채 엄격하고 근엄하며 진지한 모습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뭐 그런 거겠죠. 잘 가라 나의 짧은 봄이여. 잠시라도 나에를 귀엽다고 생각한 내 머리에 구원이 있기를.
“누가 저런 후줄근하고 인기 없어 보이는 남자를 좋아하겠어?”
싸늘하다. 비수가 날아와 가슴에 꽂히는 것 같다. 반박할 수 없다는 게 너무나 슬프구나.
“에~ 하지만 저는 좋아하는 걸요?”
뭐...라고......?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세라씨가 좋아한다고? 무엇을?
진정해라. 아직 목적어를 듣지 못했잖아. 분명 내가 생각하는 거랑은 다를 거다. 예를 들면 뜨개질 하는 걸 좋아한다든가. 아 이건 왠지 세라씨랑 이미지가 맞는 거 같다.
흰색 털실로 스웨터를 짜고 있는 세라씨의 모습을 망상하며 현실도피를 하고 있자 세라씨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저는 드렉씨를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크헉! 갑자기 심부전증이 발병한 것 같다...!
심장이 코크스크류 펀치를 맞은 것처럼 꽉 조여들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호흡을 간신히 가다듬었다.
빠르게도 다시 찾아왔도다 세 번째 봄이여.
이 고백에 어떤 멋진 말로 대답을 해줘야 할까?
“물론 나에도 좋아해요. 그리고 길이랑 라뮤도 좋아해요.”
너무나 멋진 미소로 세라씨가 덧붙였다. 이번에도 짧았구나 봄이여...
“뭐, 너니까 그럴 거라 생각은 했지만.”
나에가 관자놀이를 지긋이 누르며 말했다. 왜 나만 바보같이 저 말을 믿었을까.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상처를 치료해줄 사람 어디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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