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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jxjxje1 님의 서재입니다.

층간소음으로 연기천재가 되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근복앙
작품등록일 :
2023.10.15 20:39
최근연재일 :
2023.11.16 23:16
연재수 :
33 회
조회수 :
2,208
추천수 :
64
글자수 :
214,268

작성
23.10.25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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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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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대본리딩(2)

DUMMY

하.

절망감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덮였다.

나름 소소하게 웃었어서 말한 거였는데, 나만 웃겼던 걸까?


“······”


시간이 갈수록 점점 분위기가 굳어지자, 제일 먼저 성동한 선배가 억지 웃음을 지으며 침묵을 깼다.


“·으허허헛! 박세남이 잘 했어! 배... 철수라니, 어부들은 라디오는 안 듣겠구먼 그래.”


선배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얼버무렸다. 더 이상 생각이 안 나는 것 같았다.


‘후우우.’


실제로 본 시간은 얼마 안 되지만 성동한 선배가 얼마나 수다쟁이인지 알았기에, 그의 입을 다물게 한 내 개그에 한숨만이 나왔다.


‘다시는 하지 말자.’


배철수. 이제 금지 단어다.


아무튼 모두가 얼음장 같은 상황에 조금씩 말꼬리를 틀며 싸늘한 분위기를 녹일 때, 제작 피디가 너그러이 웃더니 나를 다독이기 시작했다.


“세남씨, 너무 기죽지 말아요.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나름 재미있었어.”

“감사합니다···”


처음 오디션장에서 볼 때도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더니, 참으로 친절하신 분이다.


제작 피디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른 사람들도 한 두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은근 되새기면 웃겨요 세남씨!”

“나도 이 개그 회식자리에서 사용해야겠다.”

“야! 쓸 거면 끝물에 써, 괜히 썼다가 중간에 분위기 파토내지 말.... 흡!”


마지막 말을 뱉은 분이 황급히 입을 가렸지만 이미 다 들은 상황이다. 나는 여러 사람들 중 오직 그 사람만을 바라보며 이름을 기억했다.


‘김태식씨.’


나중에 복수할 겁니다.

그래도 나름 회심의 유머였는데 젠장.


“아저씨는 천재에요.”

“···칭찬이에요?”


추가로 내 옆에서 조용히 소곤거리는 다솔 씨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바로 대본을 펼쳐 들며 붉어진 얼굴을 감추고자 애썼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하는 이미지라도 남기자.’


분위기 메이커가 되기는 글렀으니 열정이라도 보여야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마음먹고 열심히 대본을 펼쳐들었는데, 아까 나를 다독이던 제작 피디가 빵을 집어먹더니 문득 궁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 세남씨 혼자 이 많은 빵을 들고 오던데, 매니저는 어디 갔나요?”

“제가 아직 매니저가 없습니다.”

“진짜요?”


피디가 놀랐는지 빵을 먹다 말고 켁켁거렸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피디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속사를 구해야 하기는 하지.’


허나 아직 시급하게 결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천천히 알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멋쩍게 웃고 있던 와중, 성동한 선배님이 나를 바라보더니 제안을 건넸다.


“소속사가 없으면 내가 소개해줄 테니, 우리 소속사로 들어올텨?”

"선배님네로 말입니까?"

“우리 블루 엔터가 규모는 작아도 배우들만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전문엔터거든. 그래서 커리어 쌓기에도 좋고 나중에 선배들한테 한 번씩 연기지도도 받을 수 있고 ··.”


성동한 선배의 입에서 끝없이 흘러나오는 말.


정말 나라는 배우가 욕심이 나서 그런지, 아니면 방금 전의 '배철수 사건' 때문에 미안해서 그런지 몰라도, 선배의 제안은 고마웠기에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거절했다.


아까 말했듯이 아직은 소속사를 정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매니저는 없지만··· 그래도 비스무리한 거는 있어요.”

“비스무리?”

“음··· 그게.”


무심코 나온 ‘비스무리’에 관해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싶어 말을 얼버무렸는데, 다행히도 하늘은 내 편이었는지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며 이목을 싹 앗아갔다.


벌컥


비스무리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김강현’ 역을 맡은 정석기입니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반가움이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 또한 내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몇 초간 눈이 마주쳤다.


씨익


‘왜 이렇게 반가운지 모르겠네. 흐흐.’


이글거리는 눈으로 쳐다보는 그와 달리, 나는 ‘비스무리’의 등장에 기분이 좋아 실실거렸는데, 녀석은 그런 내 웃음의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잘생긴 얼굴이 순간 못생겨 보일 정도로 와락 구겨대며 거칠게 맞은편에 착석했다.


나는 그를 놀리고자 천천히 입을 벌리며 중얼거렸다.


‘안. 녕.’


녀석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한 글자씩.


‘노. 예. 자. 식. 아.’


아.

배철수로 떨어졌던 기분이 좋아졌다.



#



이후의 일은 매우 전형적이었다.


30분 정도 지각했지만 주연이다 보니 아무 말 못하는 제작진들과 그런 분위기를 내심 알아채고 아무렇지 않게 죄송하다 말하는 정석기. 그리고 그 타이밍에 고생한다며 익숙하게 커피를 전체에 쫙 뿌리는 석기의 매니저까지.


수면 밑으로는 탐탁치 않은 공기가 흘렀지만, 방송국에서 ‘주연’ 혹은 ‘스타’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하는 게 드문 일은 아니었기에, 다들 툴툴거리면서도 유야무야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딱 한 사람, 정석기에게만은 냉소적인 반응을 드러낸 사람이 있었다. 심지어 매니저가 뿌린 커피도 거절했다.


“석기씨, 다음부터는 화장실 갈 시간도 고려해서 일찍 와주세요.”

“네?”

“저희가 지금 몇 분을 기다린지 아세요? 일찍 오시라구요.”

“...죄송합니다. 작가님.”


작가님의 노골적인 말에 정석기가 당황하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


하긴 아무리 잘나가는 배우라 해도 방송국 짬밥만 20년이 넘어가는, 드라마계의 대모에게 비비기란 무리일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행동이었다.


‘저 놈이 김소월 작가님 성격을 모를리도 없을테고··· 왜 늦게 온 거지?’


나보다 더 오래 연예계 생활을 했기에 이 바닥 생리를 모르는 것도 아닐텐데, 굳이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왜 일부러 지각을 했는지를 알 수가 없는 대목이었다. 알 수가 없었는데


‘응?’


하지만 다시 한 번 그놈과 우연히 눈이 마주치면서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야, 그런 거였어?’


녀셕의 눈에 담긴 감정.

그것은 바로 짜증과 원망··· 초조함이었다.


즉, 노예 내기로 제발 저린 녀석이 나를 마주치는걸 꺼려해 일부러 시간을 넘겨서 온 것.


사정을 모두 파악한 나는 훨씬 재밌어진 상황에 거듭 웃음이 나왔고, 다행히도 내 옆에 앉은 다솔씨가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때쯤, 감독님의 시작을 알리는 말이 흘러나와 웃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김나태 감독님의 트레이드 마크인 축 처진 몸이 약 45도 정도 곧추서면서 손에 쥔 간이 메가폰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1회 첫 씬부터 들어가겠습니다.”


‘응?’


분위기가 급속도로 반전했다.


말투부터 해서 음정의 높낮이 그리고 배우들을 바라보는, 아니 내려다본다고 하는 게 정확할 정도로 위압감을 가진 한 사내가 메가폰을 든 채 앉아 있었다.


“1990년 여름, 그날은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이었다.”


나레이션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에서 기세가 듬뿍 뿜어져 나왔다. 주위를 슥 둘러보니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최근에 알게 된 한다솔씨, 그녀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나이어린 조연들 그리고 사이드에 앉아서 이를 신기하게 지켜보는 신입 매니저들까지.


경력이 얼마 안 되는 신예들만이 그런 얼굴이었고, 나머지 경험 많은 배우들은 익숙한 듯 대본을 쳐다보고 있었다.


즉, 저들에게는 지금 상황이 전혀 놀랍지 않다는 않고, 오히려 일부 한가닥 하는 배우들의 경우에는 살짝 긴장하는 모습마저 엿볼 수 있었다.


‘뭐지?’


얼마 안 가 그 의문이 풀렸다.


“1회차 2번째 씬 다시 하겠습니다.”

“예.”


정석기가 입이 마른 지 입술을 한 번 훑고는 다시 대사를 외쳤다.


“정말 지긋지긋해. 매일 맡는 비료 냄새, 황폐한 땅, 기계처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진짜 다들 이런 삶에 만족하는 거야? 나는 이런 답답한 곳에 하루라도 더 있고 싶지 않아! 차라리 나가서 오토바이를 타다 뒤지든, 아니면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노름밖에 없는 깡패 새끼들이랑 싸우든, 뭐라도 해야겠어!”


정석기가 방금 전 외쳤던 대사에 말머리에 하이라이트를 넣으며 감정을 드높였다.


김강현.


정석기가 연기하는 인물로, 중학교 때부터 쌍화동에 이사와 살기 시작한 비료 공장주의 아들이다.


그는 이전에 다니던 도시 학교에서 큰 사고를 일으켜 아버지가 계시는 시골로 전학을 왔는데, 처음에는 휴식을 취한다는 명목으로 버텼지만 그게 1년이 지나고 2년, 어느덧 3년까지 접어들자 답답함에 미쳐가고 있었다.


전원일기의 삶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새장 속에 새.

그게 바로 김강현인 것이다.


그런 김강현의 답답함을 토로하고자 정석기가 나름 열연을 펼쳤지만 김나태 감독의 마음에는 안 들었는지, 다시금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중회의실을 울렸다.


“석기씨 방금 그 부분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다시 해보죠.”

“···예.”


정석기는 대놓고 지적하는 감독님의 말에 얼굴이 불그스름해졌지만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수십 개의 눈을 인지했는지, 내색하지 않고 대사를 똑같이 읊었다. 결국 총 4번의 ‘다시!’를 듣고 나서야 다음 씬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이건 정말···’


쉽지 않다.


방금 전까지 중회의실에 가득찬 배우들의 존재감이 순식간에 잡아먹혔다. 김나태 감독의 형형한 눈빛과 자그마한 체구에서 올라오는 열띤 기세가 예전 고깃집에서 삼촌이 한 말을 떠올리게 했다.


-피디란 사람이 그러면 안 되는데 어찌나 독선적이라는지··· 좋게 애기하면 예술가고 나쁘게 말하면 난봉꾼이래, 난봉꾼.


정말로 그는 자기의 기준에 만족할 때까지 배우들을 싸잡으며 장내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실제 촬영현장도 아니고 단순히 합을 맞춰보는 리딩장에서 말이다.


‘그래도··· 분명한 건 실력은 있으셔.’


만약 처음에 선보인 정석기의 연기를, 완성도 측면에서 점수를 매겨본다 하면 60퍼 정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님이 세세하게 말투, 어감, 심지어 배경에 대한 설명까지 디렉팅을 해주면서 방향을 잡아주니 마지막에 석기가 이를 아득바득 갈면서도 75퍼의 연기를 선보이게 됐다. 당연히 그제서야 만족한 감독님도 고개를 끄덕이며 ‘컷!’을 외쳤고.


‘그 말은··· 최소 75퍼 이상의 연기력을 보여야 통과할 수 있다는 이야기구나.’


왜 경험 많은 베테랑들이 긴장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정석기의 차례가 끝나자, 그놈과 함께 메인으로 꼽히는 주연 박이슬(박이슬도 지각하기는 했지만 석기 그놈보다는 일찍 도착했다)도 도합 4~5번의 열연을 반복해서 펼치고 나서야 감독님의 ‘다시’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천천히 진행되는 씬과 자기 차례가 다가올 때마다 죽상이 되는 여러 배우들.


한다솔은 처음에는 버벅거렸지만 그동안 내가 알려준 것들을 많이 연습했는지, 오디션 때보다 훨씬 뛰어난 기량을 보이며 7번만에 통과했고, 명품 조연인 두 분들은 노련미를 풀풀 풍기며 한 두번만에 통과해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역시 경험은 무시할 수가 없는 듯 했다. 주변의 모두가 부러워하는 시선을 던졌다.


그 이후 또다시 이어지는 리딩과 끊임없이 몰아치는 감독님의 ‘다시!’의 늪


모두가 간신히 자기 차례를 패스하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나는 내 앞의 장면들이 모두 끝나고 어느덧 하건우가 극 중 처음 등장하는, 3학년 1반에서의 장면이 다가옴을 느끼자 엄습하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감독님의 무심한 목소리가 고요한 회의장을 울렸다.


“전체 씬 중 3회차 6번째 씬 들어갑니다. 제일 광덕고 3학년 1반. 녹슨 경첩과 함께 지그시 열리는 문. 안으로 들어가자 케케묵은 종이향과 함께 오래된 묵빛 커튼이 보인다. 빛이 창을 통해 쏟아지던 와중, 모두가 선생님을 따라 들어오는 전학생을 바라본다.”


감독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내면의 스위치가 딸깍! 하고 올라갔다. 오디션장에서 겪었던 것처럼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며 집중을 위해 슬그머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나는 하건우였다.


“안녕. 내 이름은 하건우야··· 좋아하는 거나 취미는 딱히 없어.”


감독님에게서 아무 말이 없었다.

그의 반응을 암묵적인 통과라 여기며 다음 대사를 내뱉었다.


“나한테 말 걸지마.”


이번에도 아무 반응이 없다.

그 말은 즉슨, 내 연기가 최소 75퍼 이상으로 펼쳐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안도감이 들며, 자신감이 뒤이어 자리를 비집고 올라왔다. 감독님이 나레이션을 뱉으며 이어진 씬의 추가 연기를 요구했다.


“황당한 시선을 보내는 선생님을 뒤로 하며 묵묵히 교실 안쪽으로 걸어간다. 딱히 어느자리를 앉으라는 말은 없었지만 맨 뒤, 청소함이 위치해있는 후미진 곳이 마치 본인의 자리임을 알아채고는 앉는다. 이쪽을 쳐다보는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런 눈으로 한 번 더 바라보면 눈을 파버릴지도 몰라.”


모두가 숨을 죽였다. 이후 대사를 뱉어야하는 주변 조연들이 멍을 때리다 급하게 대사를 내뱉었다. 다만 대사에는 과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뭔가에 끌려다니지 않으려 몸부림을 치는 것 같았다.


“쟤 이상해!”

“어디서 저런 얘가 온 거지?”

“가까이 하지 말자”


“다시!”


아니나 다를까, 이를 알아챈 감독님이 즉시 호령하며 그동안 커트 없이 쭉 이어가던 분위기가 산산조각이 났다. 조연들은 얼굴이 시뻘개지며 연신 주변에 죄송하다를 남발했다.


하지만 감독님은 어서 빨리 이전의 분위기를 되살리고 싶다는 듯 나레이션을 다시 뱉으며 배우들을 채근했다.


“이번에는 촬영로케 스케줄상 4,5회차 건너뛰고 6회차 5번씬부터 갑니다 해당 씬 배우님들 준비하세요.”


6회차 5번씬이면 학교 옥상에서 주연인 박이슬과 내가 처음으로 부딪히는 씬이었다. 감독님께서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연이어진 나의 리딩 씬에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이쪽으로 더욱 집중됐다. 하건우와 박이슬이 연기하는 이지혜의 가치관이 부딪히는 극 중 중요한 장면이었기에 모두가 더 관심을 갖는 것도 있었다. 회의실의 분위기가 가열됨을 느끼며 나는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내가 그 동안 해온 걸 보여주면 돼.’


긴장할 이유는 없었다.

연기의 신전에서 수백번 아니 어쩔 때는 하나의 씬을 가지고 몇천 번도 넘게 할 때도 있지 않았는가?


연기를 펼치는 장소만 바뀌었을 뿐 ‘나’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눈을 뜨고 대사를 뱉고 난 이후의 ‘결과’ 또한 똑같을 것이다.


나는 희미하게 귓가를 스치는 감독님의 ‘액션’에 굳게 닫힌 입을 열었고, 서둘러 대본을 보며 대사들을 준비하던 박이슬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무언가에 홀린 듯 대본을 떨어뜨렸다. 상대가 준비가 덜 된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이곳은 광덕고 옥상이었고 나와 그녀는 하건우와 이지혜였다.


“너는 머저리야.”


숨을 빨아들이며 대사를 내뱉었다.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바뀌며 이지혜가 주춤거렸다. 나는 그런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비릿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지금 네 몰골을 봐. 너가 부모님 없이 뭘 할 수 있는데?”

“....”

“네가 입고 있는 옷, 신발, 생김새, 교우관계... 심지어 유독 너에게만 관대한 선생님까지 이 모든 게 너 혼자서 가능했을 것 같아?”

“네가 무얼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해!”

“꼭 모든 걸 겪어야만 알까? 너랑 나를 봐.”


자연스러운 흐름. 내가 이끄는 대사의 흐름을 따라 마치 물결마냥 이지혜가 따라왔고, 중간중간 감독님이 상황에 적절한 나레이션을 넣으며 나와 이지혜가 날 뛸 수 있도록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주었다.


.

.

.

“해가 저물며 노을을 따라 흘러들어온 바람이 세차게 옥상 문을 흔들었다. 하건우의 말에 이지혜는 상처받은 얼굴로 그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는 몸을 돌려 옥상을 나선다.”


“하건우, 건방떨지마”

“건방?”

“너랑 이제 오늘처럼 만나서 대화하는 일은 절대 없을거야.”

“솔직하지 못하네.”

“너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면서”


“오케이 그만.”


이지혜의 얼룩진 얼굴이 뿌연 잔상을 남기며 옥상에서 사라졌다. 끝났다. 6회차 씬의 끝을 알리는 컷 소리와 함께 가슴에 남아있던 부담감이 사라지며 하건우에서 박세남으로 스위치가 오프됐다. 전신의 근육이 슬며시 이완됨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살짝 흘러나왔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아니면 롱씬을 감독님의 ‘다시!’ 없이 무사히 마쳤다는 뿌듯함에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스스로 느껴지는 만족감만은 확실했다.


‘괜찮게 한 것 같은데?’


그래도 내 연기에 실수는 없었는지 머릿속으로 복기하며 호흡을 가다듬을 때, 어디선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내 반대편에서 들썩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숨을 고르고 있는 박이슬이었다.




하지만 내가 마주 쳐다보자 그녀가 바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지?’


그녀도 나처럼 정신이 한껏 물입해 있어서 그런지 얼굴에 열기가 가득한 모습이었는데, 나는 고생했다는 뜻으로 살짝 인사를 하고 싶었으나 그럴때마다 내 눈을 묘하게 피하는 그녀로 인해 살며시 입맛을 다질 수 밖에 없었다.


‘아직 어색해서 그러겠지.’


내가 싫은 건 아니겠지라며 알 수 없는 그녀의 태도에 내심 합리화를 하고 있을 무렵,


“······”

“······”


이어지지 않는 감독님의 다음 나레이션과 회의실을 감싸는 묘한 정적에 나는 생각을 멈추고 눈을 뻐끔거렸다.


‘뭐야?’


싸늘한 고요함이 회의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치 이 무음(無音)을 깨면 누군가에게 처벌이라도 받을 법한 분위기처럼.


혹시... 내 연기가 별로였나? 그래서 감독님도 다시 라는 말을 안 꺼낼 정도로 처참할 지경이라 그냥 두고 본 건가?


뭐지?


-꿀꺽


그러나 영원과도 같은 찰나는 누군가의 침 넘기는 소리와 함께 산산히 부서졌고, 이내 무음에서 소음으로 페이드 아웃된 회의실은 감탄사와 함께 기자들의 열띤 셔터소리 그리고 배우들의 탄성으로 범벅이 됐다.


찰칵 찰칵


“방금 봤어? 빨리 찍어!”

“와 이런 걸 천재라고 하는 건가?”

“박세남이 이 망할 상놈같으니라고!”

“선배님 기자들도 있는데 욕은 좀! 아니 그보다 요즘 애들이 옛날과 다르다고는 하지만 커트가 아예 없다뇨? 물론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하잖아요!”

“아, 아조씨!”

뭐야 이 반응은...?


“이놈 안되겠다. 우선 우리 소속사부터 들어와라, 계약부터 맺자!”

“네?”

“선배님! 저희 소속사도 있거든요?!”


나는 그저 신전에서 한 대로 평소대로 했을 뿐인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안돼! 배철수는 내 꺼여!”


아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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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정석기 23.10.31 52 2 17쪽
16 성물(2) 23.10.30 53 1 13쪽
15 성물 23.10.27 5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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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노예내기 23.10.18 94 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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