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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클리에의 서재

마샬 에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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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클리에
작품등록일 :
2018.11.27 18:56
최근연재일 :
2019.01.18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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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13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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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후계자들의 밤 (7)

DUMMY

에일린은 운 좋게도 바로 다음 마을에서 마차를 구할 수 있었다. 아무르에서 마차가 귀한 것인지 상인이 바가지를 씌울 요량이었는지는 몰라도 금화를 다섯개나 주고 샀다는 사실에 리텔이 짧게 불만을 표시했지만, 에일린은 말을 직접 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가끔 돌부리에 걸려 마차가 튀어오르자 리텔이 신음하는일이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이전 마부의 실력이 대단히 좋았던 것 같았다.


아무르 영지는 클레어 영지 이상으로 넓고 길게 뻗어 있었다. 마르코가 이 머나먼 거리를 가다가 다시 클레어 영지로 되돌아 왔을 것이라는 그럴듯한 소문이 생각나서 웃음이 나기도 했다. 또 국경선 너머 흐릿하게 보이는 산맥 저편에 마법사들의 도시가 있다는 생각에 설레이기도 해서, 에일린은 좀처럼 하지 않던 여행이 기분좋게 느껴졌다.


미하일은 가는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출발 전 병사들 틈에 섞여 대열의 뒷쪽을 지키는 란테를 힐긋 보더니 코웃음을 한 번 친게 다였다. 란테는 굳이 의미를 따져 묻지 않았다.


"적어도 이 땅에서 습격을 당할일은 없을테니 먼저 가 보겠다."


미하일이 꺼낸 첫 마디였다. 검게 칠한 플레이트메일 외에 어떤 무기도 지니지 않은 그를 보며, 에일린은 하마터면 조심히 가라는 말을 내뱉을 뻔 했다.


"호위 감사했습니다. 미하일 남작님. 내일 파티에서 뵙도록 하죠."

"욕정만 살아있는 머저리들이 짝짓기 하는 장소에서 볼일은 없을거다."


그는 거칠게 말을 몰아 떠났다. 후작의 도시까지는 탁 트인 대로를 따라 곧장이었으니, 그의 말대로 호위가 없어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루시안에서 최고로 흉악한 기사라는 소문은 사실이었네요."

"원래 그런 의미는 아니겠지만. 나를 저렇게 대하는 귀족이 있다는 사실이 신선하기도 하네."


그녀를 동경하는 사람, 흠모하는 사람, 질투하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드러내놓고 경멸하는 귀족은 흔치 않았다. 누구에게나 그런 것인지, 이중 약혼 때문인지 영문도 알 수 없는 그의 분노는 확실히 새로운 종류의 발견이었다.


"클레어의 문장이로군. 레이디 에일린이 안에 계시는가?"


도시 안으로 들어선 첫 목에서 에일린의 마차를 가로막는 이가 있었다. 에일린은 목소리만으로도 그가 미하일 남작이 말했던 머저리 중 하나일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3년만인가요? 리에르 퓌세레 자작님. 여전히 건강해보이시네요."


에일린은 반갑지 않은 얼굴로 작고 탁한 피부의 자작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의 옆에 서 있는 하인과 옷을 바꾸면 하인이 더 귀족같아 보일 거라는 발칙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맙소사. 너무 오랜만이라 내 눈이 착각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겠지? 이 허름한 행색의 레이다가 정녕 루시안의 보석 에일린이란 말이오?"

'밀 농사 짓다가 온 것 같은 몰골로 그런 말을 하면 안되지.'


에일린은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실례를 무릅쓰고 그를 빤히 바라봤다. 리에르 자작이 과하게 놀란 내색을 했지만,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그의 하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시골 처녀나 하녀라고 하기엔 독보적인 아름다움이죠. 금발머리의 레이디가 에일린 백작영애가 맞습니다 도련님."

"론들리. 자네는 아버지만 아니었으면 당장 내 저택에서 쫓겨났을거야."

"주인님의 명령이라면 얼마든지요."


론들리는 콧수염을 씰룩거리며 점잖게 말했다. 리에르 자작은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을 당했소? 나도 오는길에 도적무리를 만나서 내 기사단과 함께 소탕하고 오는 길이오. 아무르의 치안은 정말 형편 없더군!"

"말씀대로 좋지 않은 일을 당했습니다. 아무르의 치안에 대해서는, 저를 호위해 주신 미하일 남작님과 상의 하시면 될 것 같네요. 저택에 먼저 도착해 계실겁니다."


미하일 남작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얼굴색이 변했다. 리에르 자작은 황급히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떠났고, 리텔은 참지 못하고 깔깔거리며 웃다가 어깨를 붙잡고 쓰러졌다. 내일부터 만나야 할 귀족 자제들이 클레어 기사단 전체를 합친 수 보다 많다는 것을 깨닫고 잔뜩 인상을 쓰던 에일린은, 갑자기 마르코가 보고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세상에! 에일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스스로도 놀랄만큼 황당한 생각을 했지만, 그보다 더 놀랄 일은 후작의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미하일이 이야기했던 머저리에 속하는 남자 귀족 다섯 여자 귀족 둘과 인사를 마친 다음에서야 저택에 들어선 에일린은 구면이었던 집사의 정중한 안내를 통해 방을 배정 받았다.


"이게 무슨 장난인가요?"


방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서쪽 하늘이 보이는 방이었고, 저물어가는 노을이 보여 퍽 인상적이었다. 에일린은 곧장 옷을 갈아입고 마르코를 찾았다. 딱히 그가 보고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잠이 들기에 이른시간이었고, 편하게 이야기 할 상대가 필요했다. 리텔에게는 안정을 취하도록 했다.


마르코는 저택 외곽에 아무르 주둔 기사단을 위한 연무장에 있었다. 그가 쓰는 무기는 날이 넓지 않은 장검이었고, 검에 조예가 없는 에일린이 보기에도 그는 아주 부드럽고 정교한 검술로 상대를 제압했다. 그의 주변에는 희미하게 붉은 빛이 감돌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것이 노을빛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아지랑이 같이 피어오르며 그의 몸 주위를 둘러싼 것을 보니 숙련된 기사일수록 겉으로 드러난다는 '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연이어 세명의 기사들을 제압했고, 마지막으로 그를 상대한 것은 에일린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높은 사람과 얘기하기 어렵다는 핑계는 대지 않았으면 하네요. 그대가 왜 아무르에 있는거죠?"


클레어 최고의 실력자이자 제1기사단 단장 프레드릭. 그가 아무르에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일 이었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이곳에 아주 익숙한 듯 편하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 아가씨. 정말 오랜만입니다. 예뻐지셨네요?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프레드릭은 짧은 머리의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며 어색하게 웃다가 황급히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당황한 나머지 에일린의 옆에 서 있던 밀란과 부딪혀 휘청거렸다. 마르코 역시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는 에일린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려고 하다가 그녀의 표정을 보고 흔들려던 손을 다시 내려버렸다.


"누가 설명좀해주실래요?"


에일린은 세 남자를 번갈아가며 물었다.


"아버지의 과잉보호로 클레어 최고의 기사를 추가로 보내주셨다고 하기에는, 이곳에 너무 빠른 적응을 한 것 같아 보이는군요 프레드릭경. 밀란경은 알고 있었나요? 아니면 마르코가 초대했다는 농담은 하지 않겠죠?"


마르코는 에일린이 이름으로 불러주었다는 감동도 못 느낄 정도로 얼어붙어 있었고, 밀란은 그녀와 비슷하게 황당한 얼굴이었다.


"저, 그게. 이런걸 뭐라고 하더라?"


프레드릭은 피가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한참동안 목덜미를 긁었다. 아무래도 적절한 표현을 찾고 있는 듯 했다.


"이직했는데요."


그는 그렇게 말한 뒤 마르코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뒷일을 부탁하네 친구여'라는 눈짓을 한 뒤 달아나버렸다. 에일린의 한쪽 눈썹이 한껏 치켜올라갔다. 자세히 보니 제1기사단은 프레드릭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연무장 곳곳에서 땀을 닦으며 나오던 기사들은 에일린을 마주치고는 프레드릭과 같은 표정을 짓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마르코."

"제발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설명할게요."


마르코는 자신의 별채로 에일린을 안내했다. 한참동안 안절부절 못하고 머뭇거리는 그를 보다못한 에일린이, 마주앉은 테이블 위에 손을 꼭 잡아주어 진정시켜야 했다.


"그러니까. 아마도 세 달 전이었을 겁니다."

"마르코가 최근 클레어 영지에 방문했을 때보다 훨씬 더 오래전이군요?"


에일린은 마지막 단어에 더욱 힘을 주어 말했다.


"화내지 말아요. 속이려고 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거래가 있었던 것 같아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아무르의 치안이 좋지 않아요. 마을 자경단 외에도 기사를 포함한 정규군이 도적의 습격을 당할 정도로 말이죠.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서는 질적으로 우수한 부대가 필요했고, 클레어 가문과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사단을 지원해 주는 대신 무언가 다른 것을 제공하는 것으로."

"제1기사단은 선대부터 공들여 키운 클레어 최고전력이에요. 그런 기사단을 거래로 이용한다구요? 파견도 아니고 기사단을 통채로 내어주는 거래가 어디있어요?"

"내용은 저도 모릅니다. 에일린. 맹세하건데 아버님은 정말 아무 말씀도 해 주지 않으셨어요. 심지어 프레드릭을 포함한 모든 기사들이 단지 명령에 따를 뿐 이라면서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특별히 비밀로 하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프레드릭이 누차 부탁했습니다. 아가씨에게 제대로 된 작별인사를 하지 못했다. 따로 기회가 되면 할 예정이니 그때까지는 기다려달라 라고 말이죠."


아버지는 항상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었다. 함께 두던 체스에서도 그랬고, 그가 하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에일린은 아버지가 하는 일의 의미를 항상 지나고 난 뒤에야 깨닳을 수 있었다. 후작가와의 혼담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이번 만큼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 이었지만,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 치고는 프레드릭경의 이야기가 아주아주 부실한데요."

"귀족 울렁증이 있어서...라고 하더군요."


에일린은 그제서야 표정을 풀고 웃었다. 기사단장이 되기 전 에일린의 호위기사로 있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인 만큼 프레드릭의 단점은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시절 에일린이 말을 붙이려고 하면 얼굴이 빨개져서 도망치던 기억이 눈에 선했다. 결국 프레드릭은 호위기사를 그만두겠다고 했고, 그 다음 란테가 호위기사로 임명되었다.


'그 친구는 적 앞에서는 전투의 신이 되죠. 여자나 귀족 앞에서는 벙어리의 신이 됩니다.'

'그럼 여자 귀족 앞에서는요?'

'등신이 됩니다.'


화가 난 에일린이 란테에게 상담을 했고 란테 역시 이 점에 대해서 무척 안타까워 하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따돌림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프레드릭이라면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자 기분은 조금 나아졌다. 에일린은 마르코의 잘못이 아닌데도 무척 미안해 하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는 최대한 에일린을 즐겁게 해 주려고 노력했고, 프레드릭에게 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활용해서 공감을 이끌어 내려고 하는 모습이 기특하기도 해서 그에게 맞춰 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야 이름을 불러주는군요."

"저택의 가족들을 제외하면 가장 많이 보는 사람이니까요. 사실 마르코는 남자라기보다는 오빠같은 느낌이에요. 저에게 친오빠가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는..."


그는 에일린이 웃을때 같이 웃어주고 화낼때 같이 화내주고 모든 일에 공감해주는 편안한 남자였다. 하룻밤을 위해 들이는 노력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속내가 검어 보이지 않아서 좋았다. 에일린이 마차에서 습격을 받은 이야기 도중에는 눈물이 맺히는 모습은 보기 미안할 정도였다. 주변에 남자 형제가 있는 친구가 없으니 단지 망상일수도 있지만, 기댈 수 있는 오빠 같이 친숙한 느낌이 그의 매력이었다.


"매력이 없다는 욕인가요, 함께하기 좋은 남자라는 칭찬인가요?"

"숙녀한테 짓궂은 질문을 하시는군요."


에일린은 란테와 리텔이 마중을 나오고 나서야 놀랄 만큼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쉽지만 오늘은 보내드려야겠군요. 하지만..."


마르코는 수줍은 어린아이처럼 머뭇거리다가 란테와 리텔이 이쪽을 보고 있는 것을 의식하고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내일부터 분명 즐거운 파티가 될 거에요."


에일린은 미소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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