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루클리에의 서재

마샬 에일린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로맨스

루클리에
작품등록일 :
2018.11.27 18:56
최근연재일 :
2019.01.18 17:25
연재수 :
14 회
조회수 :
280
추천수 :
1
글자수 :
63,284

작성
18.12.03 17:58
조회
16
추천
0
글자
10쪽

후계자들의 밤 (3)

DUMMY

다음 날 백작의 지시로 수행원이 정해졌다. 마부 하나와 기병으로 이루어진 호위병 스물, 그리고 클레어에서 손꼽히는 기사 란테와 그의 부관인 기사 밀란. 하녀 리텔이 함께 했다. 테오는 결국 함께하지 못했다.

그 중에서 클레어 제3기사단의 단장 란테는 에일린의 유년기를 함께한 호위 기사로서, 영지의 기사들 중에서 가장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영지 외곽 치안을 위해 수년간 파견되어 있다가 돌아왔으니, 그녀로서는 꽤나 반가운 얼굴이었다.


"란테! 못보던 사이 많이 변했네요. 얼굴은 왜 그렇게 야위었어요?"

"젊은 기사들을 못따라가는 나이니까요. 아가씨는 더 예뻐지셨습니다."

"이제는 제가 유혹하면 넘어갈 것 같죠?"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그녀 주변에 동경할만한 대상이 별로 없어서, 한때는 란테와 결혼하겠다고 떼를 쓰던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란테는 에일린의 얼굴 크기만한 주먹으로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제가 결혼을 일찍했으면 아가씨만한 딸이 있었을겁니다."

"흥! 그런데 이 병사들 수는 뭐에요? 점령하러가요?"

"불편하신 줄은 알지만, 요즘 제국 곳곳의 치안이 불안합니다. 백작님께서 아가씨를 걱정하셔서 그런 거니 이해해 주십시오."


란테가 타이르듯 말했고, 에일린은 여전히 딱딱한 남자라며 불만을 표시했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호위기사 한명만 있어도 감히 백작의 문장이 있는 마차를 습격할 정도로 간이 큰 도적은 없었지만, 최근에는 큰 규모의 도적단도 생겨나 어느 귀족 영애가 습격당해 살해된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그 뒤로는 에일린도 가급적 성 밖으로 외출을 자제했다. 아버지가 호위 병사를 많이 내어준 것도 납득이 가는 부분이었다.


마차는 클레어 저택을 떠나 몇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렸다. 마부의 실력인지 란테가 배려해준 덕분인지 요람처럼 기분 좋은 흔들림에 에일린은 깜빡 잠이 들었다가,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리텔에게 얼마나 왔는지 물었다. 리텔은 마을 두 개를 지났다고 대답했다. 밖은 어느 새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세 번째 마을에 도착했을 때 란테가 하룻밤 묵을 것을 권했다. 보기 드문 행렬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가 여관에 들어서자 금방 흩어져 버렸다. 여관은 클레어 성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지만, 이런 변경에서 나름대로 보기 드문 고급 시설이었다. 에일린은 만족해하며 돈을 지불하고 리텔과 욕실로 향했다.


"리텔. 결혼이 뭐라고 생각하니?"


욕조에 몸을 담그던 에일린은 리텔에게 느닷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가끔 머릿속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는 버릇이 있었는데, 리텔이 수년간 무리없이 에일린을 모셔 왔음에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대목이었다.


"음. 저한테 하는 말 맞죠? 보통 그런 질문은 하녀한테 하는게 아니지 않나요?"


그녀가 벗어놓은 옷을 정리하던 리텔이 말했다.


"너는 내게 있어 하녀 이상이야. 리텔."

"그렇다고 친구는 아니죠."


리텔은 그녀가 열 살이 되던 해에 채용한 동갑내기였다. 대개 귀족가의 시종들이 그렇듯, 어렸을 적에는 어느 정도 허울 없이 지내다가도 철이 들 무렵이면 거리를 두게 된다. 그래도 리텔은 조금 나은 편이었다.


"대답해주렴.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얘기할까요? 사실대로 대답해 드릴까요?"

"내가 원하는 대답은 진실이 아니란 얘기니?"

"분명 그럴 거예요."


리텔이 간단하게 대답하고 자신도 옷을 벗어 정리해 두고는 욕조로 다가왔다. 에일린만큼 주목을 받을 외모는 아니었지만, 나름 마을 뭇 남자들이 한번쯤 돌아봤을 정도의 외모였다. 예쁜 적갈색 머리에 주근깨가 살짝 있었지만, 몸매는 에일린 보다 더 보기 좋게 풍만해서 그녀가 부러워 한 적도 있었다.

에일린은 리텔에게 등을 맡겼다. 리텔의 손이 몸의 곡선을 따라 움직이다가 허리를 지나자 간지러움에 움찔거렸다.


"그럼 솔직하게 얘기해줘."

"좋아요. 얘기해 드리죠. 결혼은, 백마 탄 왕자님 까지는 아니어도 아주아주 멋진 남자가 나만 사랑해주는 것. 질리지 않고 내 얘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는 남자와 밤새도록 얘기하다가 지쳐 그의 무릎에 잠드는 것. 부드러운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키스를 받는 아침이 매일인 일상."


에일린은 그게 어디 진실이냐며 투덜거렸다. 리텔은 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상상을 부수는 남자와 함께 잠을 자야 하는 것."


에일린은 웃음을 터뜨렸다. 리텔은 에일린을 따라 웃다가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감싸 안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에일린. 다수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당신이 행복해졌으면 해요."

"고마워. 내 편은 너밖에 없구나."


그날 밤. 에일린은 오랜만에 홀가분한 기분으로 잠에 들 수 있었다.

아무르 성까지는 천천히 달려서 일주일 거리. 도착하기 전에 파티가 시작되겠지만, 에일린은 일부러 서두르지 않았다. 나흘 낮 사흘 밤 하는 파티에 환영받지도 못할 얼굴을 일찍 보일 필요는 없었으니까.

사실 외모로 따지나 재력으로 따지나 귀족가의 영애들에게 에일린은 시기의 대상이었다. 차 맛도 모르면서 티타임을 즐기며, 누가 더 반짝이는 치장을 했는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취미도 없으니 그녀는 변변찮은 친구도 하나 없는 셈이었다. 리텔은 가식이라도 좋으니 많은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문득 창밖을 보던 중 멀리서 말을 탄 무리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고삐를 쥐지 않은 한 손에는 칼이나 창이 들려 있었는데, 곳곳에 피 얼룩이 묻어 있는데다, 하나같이 험악한 인상이 어딜 봐도 정식 군인 같지는 않았다.


"도적 패거리로군요. 어떻게 할까요 아가씨?"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 달려나갈 듯 한 얼굴이었지만, 성실하게도 기사 란테는 주인의 의견을 먼저 물었다. 에일린은 그 모습을 재미있어하며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우리와 같은 방향인가요?"

"지금은 아닙니다. 확신할 수는 없군요."

"그럼 그냥 두세요. 피를 보고 싶지 않네요."

"근처 마을에 해를 입힐지도 모릅니다."

"아무르의 경비대가 알아서 하겠죠. 내버려 두세요."


란테는 머리를 긁다가 다시 말을 몰았다. 그의 기사도와 어긋날 것을 알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싸움에 말려드는 것은 질색이었다. 도적 무리는 다행히도 숲속 저 편으로 멀어져 갔다.

클레어 백작령을 벗어나 처음 도달한 마을은 규모는 크지만 아주 가난한 마을이었다. 코이라는 이름의 마을은 거리에 부랑자를 제외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따금 보이는 동네 꼬마아이들은 핏기 하나 없이 말라있었다. 아이들은 말을 탄 병사들을 보고 손가락질을 하다가 달아나 버렸다. 부랑자는 구걸할 힘도 없는지 몸을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건물들은 모두 낡았고, 빈 집도 많아 보였다. 이런 마을에서 제대로 된 여관을 찾기 힘들 것 같아 란테는 지나칠 것을 권했고 에일린은 동의했다.


"지독한 마을이네요. 이곳도 아무르 영지인가요?"


에일린이 마차 창문을 살짝 열어 부관인 밀란에게 물었다.


"예. 지금 루시안에는 이런 마을이 많이 있습니다."


밀란은 창문 사이로 언뜻 보이는 연붉은 그녀의 입술에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얼른 답했다.


"후작의 성 까지는 얼마나 더 가야 하죠?"

"이 속도라면 닷새 정도는 더 가야합니다. 속도를 올릴까요?"

"아니요. 이대로 가주세요."


에일린은 밀란에게 지시한 후 책을 한 권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마차가 흔들리는 통에 눈이 조금 어지러웠지만 못 읽을 정도는 아니었다. 700여 년 전 오스텐에 각 나라가 세워질 무렵의 이야기를 담은 저자 불명의 역사서였는데. 현재까지도 가장 위대한 마법사로 추앙받는 '모르간'의 이야기 위주로 저술된 것을 봐서 아마도 본인이거나 그녀가 함께 여행을 했던 동료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고증도 많지 않으니 어쩌면 반쯤 소설인지도 몰랐다.

책에 따르면 모르간은 자신의 동료 중 한명을 사랑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랑을 하기에 너무 뛰어난 재목이었던 그녀는 나라를 세우고 모르간의 초대 여왕이 되었다. 어쩐지 그 대목은 다른 내용보다 상세하게 기술이 되어 있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이 나라를 가볍게 던져 버릴 수 있는 여자라면 사랑할 수 없소.'

'왜 달아나려고 하죠?'

'나의 위대한 여왕이여. 나는 당신의 힘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르오, 하지만 이 나라의 힘이 될 수는 없소.'


남자는 떠났고, 후에 그녀는 어느 나라의 왕족과 결혼했다.

에일린은 그 대목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버려야만 했던 남자와 그를 붙잡을 수 없는 여자. 벌써 몇 번째 다시 읽으며 언젠가는 이런 사랑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픈 사랑이지만 희생의 고귀함이 느껴져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르코와 결혼한다면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아니, 그러기에는 동기가 너무 추악하지.'


결혼하여 데릴사위로 데려오면 후작의가 지원이 더해져 더욱 번창한 영지가 약속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면 작위도 물려받게 된다. 하지만 테오는 평생 그늘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녀는 적어도 테오가 성장할 때 까지 결혼을 미뤘으면 했다. 동생의 성장을 본 뒤 영지를 잇게 할 때가 된다면 다른 귀족과 결혼하여 훌쩍 떠난다고 해도 홀가분할 것 같았다. 물론 상대에 대한 감정은 제쳐두고 말이다.


"아가씨."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어느샌가 마차는 멈춰있었다. 란테가 부르는 소리에 에일린은 생각을 멈추고 조용히 책을 덮었다. 멀리서 말굽 소리와 절그럭 거리는 쇠울림이 들려왔다. 그녀가 창문을 열고 란테를 찾았지만 그는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란테는 장검을 뽑으며 나직이 말했다.


"포위당했습니다."


작가의말

누추한 저의 글 공간에 귀중한 시간을 내 주시는 독자 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마샬 에일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휴재공지 19.02.08 6 0 -
14 Countess (6) 19.01.18 17 0 11쪽
13 Countess (5) 19.01.11 23 0 7쪽
12 Countess (4) 19.01.10 17 0 8쪽
11 Countess (3) 19.01.08 13 0 9쪽
10 Countess (2) 19.01.07 13 0 8쪽
9 Countess (1) 18.12.19 10 0 16쪽
8 후계자들의 밤 (8) 18.12.13 30 0 10쪽
7 후계자들의 밤 (7) 18.12.13 11 0 13쪽
6 후계자들의 밤 (6) 18.12.12 14 0 11쪽
5 후계자들의 밤 (5) 18.12.10 13 0 12쪽
4 후계자들의 밤 (4) 18.12.06 17 0 9쪽
» 후계자들의 밤 (3) 18.12.03 17 0 10쪽
2 후계자들의 밤 (2) 18.12.03 20 0 7쪽
1 후계자들의 밤 (1) +2 18.11.27 65 1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