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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클리에의 서재

마샬 에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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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클리에
작품등록일 :
2018.11.27 18:56
최근연재일 :
2019.01.18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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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3,284

작성
18.12.12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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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후계자들의 밤 (6)

DUMMY

"놈들의 패거리가 죽인 기사 다섯 중에 누가 있었는지 안다면, 감히 지금과 같은 행동은 하지 못했을거다."


미하일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에일린은 무어라 쏘아붙이려 했으나, 할버드를 치켜드는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미하일은 무기를 뽑아드는 란테와 밀란을 무시하고 할버드를 있는 힘껏 집어덨졌다.


"무슨 짓을..."


할버드가 쉬익-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날아가더니 강 건너의 도적들 무리 앞으로 날아가 꽂혔다. 가까이 있던 도적 몇 명은 꿰뚫리기라도 한 듯 가슴을 움켜쥐고 넘어지기도 했다.


"마스터 뷜란트가 만든 걸작 중 하나다. 돈으로 가치를 측정하기 힘든 물건이지만 어떻게 사용할지는 네놈들 마음이다."


가장 놀란 것은 에일린이었다. 에일린이 커진 눈을 깜빡거리는 사이 미하일이 말에 올라탔다. 란테와 밀란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무기를 거뒀다.


"이런 인간적인 면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군요."

"놈들이 제국 정책의 피해자일 수는 있지만, 가장 쉽고 더러운 길을 선택한 쓰레기들임에는 변함이 없다. 언젠가 이 멍청한 행동을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다."


일행은 미하일의 뒤를 따라나섰다. 시작은 스물 다섯이었으나 지금은 열 넷으로 줄어 어딘가 쓸쓸한 느낌이었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며 병사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사이 우울한 분위기는 더해졌다. 부상이 깊지는 않았지만 출혈이 심했던 리텔은 겨우 부축을 받아 란테와 함께 말에 올라타더니, 혼절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녀가 온전한 정신으로 깨어난 것은 반나절 뒤 작은 마을의 여관에서였다.


"걱정을 끼쳐드렸네요 아가씨. 아직 어지럽긴 하지만, 이제 괜찮아요. 그러니까 울 것 같은 표정 짓지 말아요."

"의사 이야기로는 평생 후유증이 남을 지도 모른대. 미안해. 내가 부주의했던거야. 내가 그때 도적들을 지나치지 않았더라면... 정말 미안해 리텔."

"칼을 맞은 것이 아가씨였다면, 저는 더 큰 후유증을 안고 살았을거에요."


리텔이 왼팔로 에일린을 끌어 안으며 말했다. 에일린은 리텔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동안 서럽게 눈물을 쏟아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평생동안 내가 돌봐줄게."

"맙소사.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백작영애의 시중을 받다니, 신분상승 했다고 좋아해야되는거에요? 시집은 안가요?"

"안 가."

"아가씨 말고 저요!"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가 나도록 에일린의 이마를 때린 리텔은 시원하게 웃었다.


"란테가 이번 일에 많은 책임을 느끼고 있어.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은 했지만."

"그게 기사의 명예라고 생각하는 거겠죠. 그래서 더 멋있는 사람이지만."


의외의 반응에 에일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란테에게 특별한 감정이라도 있는거야?"

"무슨 소리에요? 그는 기사고 저는 하녀에요."

"무슨 소리야? 란테는 남자고 너는 여자야."


리텔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고, 에일린은 같은 표정을 흉내내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 이건 무슨 복수에요? 됐으니까 가서 그가 원하는 대로 엄하게 혼내주고 오세요. 저는 조금 자야겠어요. 아까부터 어깨가 욱신욱신 하거든요. 어서요!"


에일린은 떠밀리듯 방에서 쫓겨나는 와중에도 좀처럼 볼 수 없는 리텔의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놓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여관의 홀에서 란테는 중무장을 한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병사들은 모두 밖에서 야영을 준비하고 있었고, 밀란은 뻣뻣한 자세로 란테의 뒤에서 그를 설득중이었다.


"병사들을 잃은것도, 리텔을 다치게 내버려 둔 것도 지휘관인 내 책임이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지 못했다."

"그래도 이건 너무 지나친 행동입니다."

"지나친 것은 그들의 희생이 용납할만한 것이라고 치부하는 것이다."

"그말대로입니다."


에일린이 계단을 따라 천천히 걸어내려왔다. 란테는 고개를 숙였고 밀란은 머뭇거리다가 차렷 자세를 취했다.


"과거 정복전쟁의 선두에 선 보르프 장군은, 부하들을 아낀 나머지 아군의 희생이 큰 전투마다 자신을 질책하며 손가락 마디를 잘라냈습니다.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는 그 이전에도 불패의 부대였지만, 부하들은 그를 위해 더욱 분기하여 이후 전투에서 앞도적인 승리를 취했죠. 보르프 장군이 그랜드 마샬의 칭호를 얻기 이전의 일입니다."


에일린이 란테의 앞에 섰다. 마차를 잃어 말을 타기 편한 복장으로 갈아 입었지만 밀란의 눈에는 여전히 고고한 기품이 서려 보였다.


"전부 란테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희생당한 병사들은 소임을 다 했을 뿐입니다. 그래도 죄책감을 느끼는 건가요?"

"제가 자처했던 아가씨의 경호에 소홀함이 있었던 점. 함께 해준 부하들을 돌보지 못한 점. 자책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긴 말은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란테에게도, 저에게도 괴로운 처벌이 필요하겠군요."


에일린이 몸을 숙여 란테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아가씨의 뜻대로."


란테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 시간부로 클레어 제3기사단장 란테의 작위를 박탈합니다. 그에 따른 권리와 책임은 모두 기사 밀란에게 이임하고, 란테를 일반 호위병으로 강등합니다."


"아가씨!"


밀란이 주먹을 쥐며 소리치는 것을 란테가 한 팔을 들어 제지했다.


"밀란. 오만함을 거둬라. 죽은 자들은 너를 용서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직한 목소리에 밀란은 입술을 깨물며 물러났지만, 주먹을 쥔 손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에일린은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란테. 배속 부대를 지정하지 않겠습니다. 호위병으로서 그대가 지켜야 할 것을 지키세요."


란테는 에일린이 떠난 뒤, 한참동안 굳은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란테의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리텔이었다. 부상도 잊은채 에일린의 객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리텔은 말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친게 아니냐, 머리에 화살을 맞은게 아니냐 하는 말로 신분을 초월한 독설을 퍼부어댔다. 에일린은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고 그런 그녀를 데리고 나간 것은 란테였다.

란테는 이후 한쪽 팔이 불편한 리텔을 위해 수발을 들며 그녀의 곁을 지켰다. 리텔은 극구 사양했지만, 란테는 한 마디로 일축했다.


"나는 이제 기사가 아니오."


그는 의외로 덤덤하게 말했다. 병사들 사이에서 그들과 같이 생활을 했지만, 병사들은 이전보다 더욱 그를 극진하게 대우했다. 이 사실을 가장 안타까워 하는 사람은 밀란이었다.


"대장. 영지에 돌아가면 백작님께 정식으로 복직을 요청하겠습니다."

"과거의 동료로서, 그리고 선배로서 부탁하건데 제발 그만두게. 대장이라는 호칭도 빼고."

"기사단에서 누구보다 존경받는 당신이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을 참을 수 없습니다. 아가씨의 철없는 결정이 기사단의 기둥을 흔들도록 둘 수 없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란테는 마을에 머무는 동안 여관에서 숙박을 했을 테지만, 지금은 낮에 리텔의 간호를 하고 밤에 마을 어귀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다. 마른 가지를 집어 던지며 모닥불이 타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이전과 비교해 훨씬 홀가분해 보였다.


"철없는 결정? 이보게, 아가씨가 누군가. 보프르 대원수의 오른팔 파울 클레어 백작의 손녀이자, 루츠발드 클레어 백작님의 장녀일세. 파격적인 조치는 있어도 까닭없는 결정은 없다네."


란테가 잔가지를 모닥불에 모두 던져 넣고 몸을 일으키더니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받아보게. 반 쯤은 진심을 담아서."


란테의 검이 빠른 곡선을 그리며 밀란의 어깨를 노렸다. 밀란은 황급히 창을 들어 검격을 받아냈지만, 뒤로 다섯 걸음이나 밀려났다. 란테는 멈추지 않고 밀란의 창 간격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간격도 간격이었으나 기사단 안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묵직한 공격을 자랑하는 란테의 검에 반격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검격을 막아내는 손이 저릿해질 정도로 시간이 지났을때 밀란이 크게 창을 휘둘러 란테를 밀어냈다. 란테는 창이 아슬아슬하게 비켜나갈 정도만 물러나서 그 공격을 피했다.


"보십시오. 대장은 아직 현역에서 물러나기에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밀란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고, 란테는 고개를 저었다.


"미하일경과 비교한다면 어떤가?"


밀란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제국에서 손꼽히는 기사답게 밀란의 회심의 공격을 간단히 막아낸 것 뿐만 아니라, 말을 베어버렸던 무서울 정도로 빠르고 무거운 창술. 상상으로도 단 일격조차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밀란. 나는 어렸을 적에 최고의 기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네. 존경받는 기사가 아니라, 존재만으로도 두려움을 줄 수 있는 최강의 기사 말일세. 자네 올해 나이가 몇인가?"

"스물 넷입니다."

"자네는 내 검격을 모두 받아낼 정도로 성장했는데도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이 많지. 하지만 나를 보게. 내 나이가 벌써 서른 아홉이네. 꿈을 꾸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지."


란테가 씁쓸한 듯 말했다. 매섭게 공격을 퍼부어대던 그의 호흡은, 떨어져 있는 란테에게 들릴 수 있을 정도로 거칠어져 있었다.


"클레어에서 프레드릭 경을 제외하면, 대장의 검술을 따라갈만한 기사는 없습니다.

"이번에 아가씨의 호위를 자청한 것은 이번 임무를 끝으로 은퇴를 할 생각에서였지. 그때 마침 미하일경이 나타난거야."

"그는 제국에서도 내로라하는 기사가 아닙니까?"

"그래. 그래서 더욱 내 꿈을 접을 때가 왔다는 것을 실감했네. 내가 목표로 했던 자리는 이미 젊은 천재들의 자리가 되었지. 프레드릭이었다면? 미하일경이었다면? 어제의 전투에서 그 많은 사상자를 냈을까? 아니야. 그들이라면 호흡 한 번에 도적 열명을 죽이고, 술 한병 비울 시간도 되기 전에 병사들과 함께 쓸어버렸겠지. 밀란, 열정 만큼 몸이 따라 주지 않는 서러움을 아는가?"


남자는 서른을 기점으로 신체의 노쇠가 서서히 이루어진다. 몸을 사용하는 강도가 높은 기사의 경우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란테가 지금의 경지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노병은 묻힐 땅을 스스로 찾아야 하는 법일세."


란테는 그렇게 말한 뒤 막사쪽으로 걸음을 옳겼다. 그는 더 이상 기사가 아니었지만, 그의 모습은 누구보다 크고 당당하게 느껴졌다.


'란테. 당신은 클레어 최고의 기사였습니다.'


밀란은 창을 곧게 세우고 멀어지는 그의 뒤에서 최대한 경의를 담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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