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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클리에의 서재

마샬 에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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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클리에
작품등록일 :
2018.11.27 18:56
최근연재일 :
2019.01.18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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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10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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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자들의 밤 (5)

DUMMY

"리텔!"


에일린이 소리치며 떨어지듯 말에서 뛰어내렸다. 리텔의 옷은 이미 원래의 색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탁한 붉은색으로 물들어있었고, 그녀의 어깨에는 단검이 박혀 있었다. 도적이 던진 단검에 당한 것이었다. 에일린은 연신 드레스를 더럽혀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리텔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분명 여자는 살려준다고 했다. 안 들은 건 네놈들이야."


단검을 던졌던 도적이 말했다. 그는 밀란을 경계해 가까이 오지는 못했지만, 다리 위의 그녀를 가둬놓은 먹잇감 정도로 생각하는지 이것저것 재보는 듯 했다. 잠시 대치상태로 있던 그가 부하 몇 명에게 돌격명령을 내리자, 용감하게도 도적들은 말을 몰아 일렬로 다리위에 뛰어들었다.


"와라. 일대 일 대결을 백번 해도 너희들에게는 안 진다."


기합과 함께 휘두른 밀란의 창이 도적들의 머리를 날려버렸고, 말들은 난간도 없는 다리 위에서 균형을 잃으며 떨어졌다. 다음을 준비하던 도적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멀리서부터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으나, 그것이 도적들의 것인지 흩어졌던 에일린의 병사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에일린은 전투도 잊은 채, 숨을 헐떡이는 리텔을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병사의 도움으로 겨우 지혈했다. 리텔의 몸이 늘어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코에 귀를 가져다 댄 에일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신을 잃은 듯 했지만 다행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리텔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에일린은 도적들의 대장을 사납게 노려봤다. 정신을 차리니 그들 한 명 한 명의 표정이 읽히는 듯 했다. 어떤 이는 화가 나 있었고, 어떤 이는 겁을 먹고 있었다.


"만약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에일린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흉물스럽게 피에 얼룩진 드레스 차림의 모습은 어찌 보면 섬뜩하기도 했다.


"나는 루시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 중 하나인 루츠발드 P 클레어 백작의 장녀 에일린.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하늘을 가르는 독수리의 문장을 걸고 당신들은 물론 부모, 형제, 친구 모두의 목 줄기를 물어뜯을 때까지 쫓을 것입니다."


에일린은 한 단어 한 단어를 또박또박 발음하며 말했다. 동시에 숲 곳곳에서 함성이 터지며 그림자들이 튀어나와 도적들을 에워쌌다. 숫자는 많지 않았으나, 일사분란한 움직임 만으로도 위협을 주기에 충분했다.


"란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어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가씨. 전원. 위치로."


란테가 유유히 숲을 나오며 손짓했고 병사들은 압박하듯 둥근 모양을 좁혀가며 도적들을 몰아세웠다. 이제 우리 안에 갇힌 먹잇감은 뒤바뀌어 있었다.


"겁먹지 마라. 아직 우리가 더 많다."


용기를 얻은 듯 몇몇 도적들이 발버둥 치다가, 말이 병사의 창에 찔리는 바람에 떨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운 나쁘게도 란테의 가까이 있던 도적은 그가 휘두른 칼에 팔이 날아가며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당황하며 무기도 던져놓은 채 사방으로 달아나려 했다.


"달아나지 마세요. 버려진 당신들의 동료를 붙잡아 어디까지든 추격하겠습니다."


에일린이 내뱉은 말에 도적들이 거짓말처럼 우뚝 멈춰 섰다. 그녀는 협박용으로 한 말에 어떤 강제성이 있어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제길. 두목만 있었어도..."

"얼마나 대단한 두목인지 몰라도 일개 도적이 기사를 어쩌지는 못한다."


체념하듯 단검을 쥔 도적이 중얼거리자 밀란은 코웃음을 쳤다.


"두목은 다르다. 아무르에 너 정도 되는 기사는 널렸고, 두목은 너같이 기사랍시고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놈들만 골라서 죽였다. 물론 일 대 일로!"

"오냐. 대단한 두목 밑에 있는 도적 졸개 실력부터 보고 나서 판단하겠다."


흥분한 밀란이 창을 휘두르려 하자 결국 에일린이 그를 제지했다.


"나의 소중한 친구가 위험한 상황이니 길게 끌지 않겠습니다. 말과 무기를 놔두고 다리를 건너가세요."

"우리를 놓아 준다는 거요?"

"그럼 오십이나 되는 민간인들이 군인의 손에 죽는 모습을 제가 지켜보고 있어야 하나요? 내 친구 리텔이 죽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거에요. 자, 가세요."


도적들은 눈치를 보다가 누군가가 무기를 버리자 하나 둘 씩 따라서 무기를 버리고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이도 있었으나, 밀란이 눈을 매섭게 치켜뜨고 노려보자 냉큼 고개를 숙였다.


"란테. 다리를 끊어버리세요."


란테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다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여러 마리의 말이 지나가도 끄떡없던 굵은 다리의 한쪽이 싹둑 잘려나가자 오히려 다리 너머에서 지켜보던 도적들이 감탄했다. 단숨에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열 번의 칼질도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안되지. 영지의 소중한 재산에 뭐하는 짓이냐."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란테는 검을 내리치려던 팔을 우뚝 멈추고 뒤를 돌아보다가 흠칫 놀랐다.

검은색 플레이트 메일로 중무장한 채 한 손에는 할버드를 쥐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은, 보기 드물게 커다란 덩치의 흑마를 타고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태양을 등지고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의 위압감에 압도되는 듯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도적들의 두목이란 게 네놈이냐?"

"다시 한 번 그따위 말을 하면, 네놈 먼저 죽여 버리겠다."


투구 안의 남자는 굵은 목소리로 밀란을 지나치며 말했다. 밀란이 뒤통수를 맞은 얼굴로 멍하니 있는 동안 흑기사는 에일린의 앞에 섰다.


"귀족 영애의 앞이다. 정체를 밝혀라."


란테가 경계하며 말했다. 흑기사는 란테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할버드를 휘둘렀다. 란테는 공격을 예상한 듯 가볍게 막았지만, 할버드의 무게감은 예상을 훨씬 상회했다. 그는 몇 번이나 뒷걸음질 치다가 물에 빠질 뻔한 몸을 겨우 가누었다.


"누구 마음대로 저 쓰레기들을 놓아 주는 거지?"


커다란 검은 말은 주인이 손을 놓으면 금방이라도 에일린을 짓밟을 듯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었다. 에일린도 지지 않고 마주보며 답했다.


"미하일 J 아무르 남작님."


흑기사가 투구를 벗자 어깨까지 닿는 검은색 곱슬머리가 한번 찰랑거리며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묵직한 일격이 의심될 정도로 가는 턱 선을 가진 고운 얼굴이었지만, 시선만으로 압도될 정도로 눈매 만큼은 매섭게 반짝였다.


"계집 치고는 제법 훌륭한 지휘였다. 내 먹잇감을 대신 몰아넣어 준 것을 감사하지."


그는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에일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흉한 꼴로 아무르의 영지에 방문한 것을 환영한다. 이대로 돌아가든, 성으로 향하든 영지의 일은 알아서 해결할 테니, 이 자리에서 썩 꺼져라."

"저들을 놓아주기로 약속했습니다. 남작께서는 제 명예를 존중하지 않으시겠다는 건가요?"


도적들은 느닷없는 난입에 이쪽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미하일은 다리 너머에서 들릴 리 없는 목소리에 불안해하는 그들을 한번 둘러보다가 마지막에는 시선의 끝이 에일린을 향했다.


"네 명예가 내 영지의 치안보다 눈곱만큼이라도 가치가 있을 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당신이 아무르의 후계자라면, 이 분은 클레어의 후계자요.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시오."


참다못한 밀란이 앞으로 나섰다. 사실 밀란은 조금 전의 일로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이십대 초반의 나이에 이렇다 할 공로도 없이 오로지 검술 실력만을 인정받아 부관의 자리에 오른 그는, 그가 보좌하는 베테랑인 란테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이라고 평가받고 있었다. 그런 자부심을 알 리 없는 미하일의 고압적인 태도는 밀란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종알거리지 말고 검으로 말해라. 손에 든 것은 장식이더냐?"


밀란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얼굴로 창을 세게 쥐었다.


"밀란. 안돼요."


짧은 비명과 함께 에일린이 소리쳤고, 밀란의 말이 투레질을 하며 달렸다. 이미 눈에는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에일린의 바로 옆에서 미하일을 향해 창을 찔러 넣었다. 보통 사람은 눈으로 쫓는 것도 힘들 정도로 빠른 찌르기가 연이어 머리 어깨 복부를 노리며 파고들었다.


"란테. 어서 다리를 끊어요."


에일린이 다급하게 소리치자 란테는 곧장 다리로 향했다.


"우리가 저 자를 막는 사이에 도망치는 것이 좋을 거다."


란테가 도적들에게 말했다. 저 무지막지한 흑기사에게서 그들을 지켜줄 의리는 없지만, 에일린의 말대로 한때는 시민이었던 이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이런 제길. 도적단이 생긴 이래 가장 수치스러운 날이다. 목숨을 동정 받다니."

"아가씨에게 감사해라."


란테가 몇 번 검을 휘두르자 다리 한쪽이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아치형에 중앙 지지대가 없는 다리는 한쪽이 끊어지자 출렁거리며 기울었다. 란테는 뒤로 한참 물러난 뒤 다시 한 번 힘껏 검을 휘둘렀고, 다리가 물보라를 크게 일으키며 흐르는 물속으로 잠겼다. 다리 사이에는 말이 도약해도 건널 수 없을 만큼의 공간이 생겼다.


"방위선 안쪽에서 안주하는 놈들 실력이 그렇지."


미하일은 밀란의 맹공을 가볍게 막아내고 있었다. 할버드의 넓은 면으로 창을 막아내던 그는 급기야 한 손으로 창 자루를 잡아 당겼다. 몸이 딸려갈 뻔 했던 밀란은 말에서 떨어지는 것을 피하고 겨우 중심을 잡았다. 창은 이미 상대에게 빼앗긴 뒤였다.


맨손의 밀란에게 할버드가 크게 원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겨우 몸을 숙여 피한 그에게 두 번째는 없다는 듯 할버드의 차가운 날은 밀란이 타고 있는 말을 거침없이 베어버렸다. 철퍽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피가 튀는 것과 동시에 낙마한 밀란은 첫 번째 날아드는 할버드를 몸을 굴려 피했다.


"팔 하나쯤 가져가도 불만 없겠지?"


밀란은 기사가 된 이후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그는 거대한 낫을 들고 사람의 목숨을 거둬간다는 유령의 얼굴을 본 것처럼 굳은 채 할버드의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봤다.


"뭐하는 짓이냐."


미하일의 앞에 에일린이 두 팔을 벌려 가슴을 내밀고 섰다. 할버드는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머리 위에서 멈춰 있었다.


"다리는 이미 끊어졌습니다. 무의미한 싸움을 멈춰주세요. 약혼자를 베어버렸다는 오명을 쓰고 싶지는 않으시겠죠?"


무표정하던 미하일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저 쓰레기들을 며칠 더 살게 해줬다고 해서 좋아할 것 없다. 지금 추격한다고 말도 없는 놈들을 못 잡을 것도 없지. 그리고..."


미하일은 다른 한손에 쥐고 있던 밀란의 창을 내리 찍었다. 창날이 그녀의 발등 앞에 손가락 반 마디의 거리를 두고 꽂혔다.


"내 앞에서 두 번 다시 약혼 운운하지 마라."


그는 약혼에 횟수에 제한이 없는 제국법에 따라, 형제인 마르코와 함께 이중 약혼의 당사자였다. 혼인 의사가 없음에도 아버지의 명에 따라 약혼을 치른 뒤에 약혼의 약자만 들어도 불같이 화를 내던 그는, 약혼식 이야기를 나누던 시종들을 두드려 패서 뼈를 부러트렸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들이 아무르의 주민이 아니면 되는 건가요?"


에일린은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후작 가문의 적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도, 자신의 가문이 이런 대접을 받을 만큼 결코 만만한 위치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약혼 당시의 첫 인상이나 지금이나 그의 태도는 모욕적이라고 할 만 했다. 에일린은 아랫배에 힘을 주고 힘껏 소리 쳤다.


"들으세요. 당신들의 과오를 씻고 싶다면, 가족들과 함께 제 이름을 내세워 클레어 영지의 집사 호밀을 찾아 가세요. 당신들이 안주할 땅을 드리겠습니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소리는 다리를 건너 도적들에게 충분히 들릴 만큼 넓게 펴졌다. 강 건너에서 도적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보다 더 놀란 란테와 밀란의 눈이 커졌다.


"그들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아무르를 벗어나면 클레어의 '주민'이 될 거에요. 이의 있으신가요?”


에일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작가의말

누추한 저의 글 공간에 귀중한 시간을 내 주시는 독자 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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