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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클리에의 서재

마샬 에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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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클리에
작품등록일 :
2018.11.27 18:56
최근연재일 :
2019.01.18 17:25
연재수 :
14 회
조회수 :
282
추천수 :
1
글자수 :
63,284

작성
18.12.03 11:31
조회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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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7쪽

후계자들의 밤 (2)

DUMMY

마르코가 다녀간 후 한동안은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테오는 최근들어 마을로 놀러가는 일이 잦았는데,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비밀이라고만 대답했다. 에일린은 누나로서 걱정이 되는 마음에 미행을 붙여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제법 밝아진 모습을 봐서 나쁜 일에 얽힌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누나한테도 말 못할 비밀이 어디있어?"


에일린의 투정에 리텔은 단호하게도 과잉보호라고 말했다. 아버지 루츠발드 클레어 백작은 귀족회의로 오랫동안 떠나 있었고, 그가 영지로 돌아온 것은 대략 3주 뒤의 일이었다. 백작은 이전부터 서재에 틀어박혀 있는 일이 많았는데, 귀족회의에서 돌아온 뒤에는 더욱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애초에 특별히 자식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자상한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식사도 함께 하지 않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결국 에일린은 회의 내용이 궁금해져서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


"아버지."


백작은 두꺼운 책을 펼쳐놓고 있었다. 뒤로 빗어넘긴 긴 머리에 잘 다듬어진 콧수염은 어디선가 본 듯한 한 폭의 초상화 같았다. 크고 마른 체격은 최근에 더욱 야윈 것 같아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백작은 에일린이 들어온 것도 모른채 무표정한 얼굴로 책장을 넘기고 있었으나, 에일린은 그가 책을 보고있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가 에일린을 눈치챈 것은 백작의 맞은 편에 홍차를 내려놓은 다음이었다.


"노크도 없이 들어오다니, 레이디가 할 행동이 아니구나."

"몇 번이나 했는걸요? 요즘 무슨 생각을 하시느라 그렇게 집중하고 계신가요?"


에일린은 허리에 프릴이 예쁘게 장식된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백작의 시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간혹 딸에게서 죽은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처럼 쓸쓸한 시선을 보여줬다. 실제로 아내를 닮은 푸른 눈동자와 찰랑거리는 곱슬의 긴 금발 머리는 백작의 아픈 기억을 상기시킬 정도로 닮아 있었다.


"언제나 나를 놀라게 만드는구나."

"많이 놀라셨나요? 죄송해요."

"아니. 그것 때문이 아니다. 앉거라."


에일린은 백작의 앞에 다소곳하게 앉아 아버지가 차를 다 마실 때까지 기다리다가, 문득 테이블에 놓인 책을 보고 놀란 듯 물었다.


"병법서군요."

"그래. 너도 어렸을 때에는 좋아했지."


백작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클레어 가문은 대대로 병법가의 집안이었고, 제국이 정복전쟁으로 대륙을 휩쓸었을 당시 받은 훈장도 무수히 많았다. 그래서인지 에일린은 여성 귀족들이 좋아할만한 치장보다 역사와 병법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었다.


"지금도 좋아해요. 하지만 다 큰 처녀가 대놓고 읽을 만한 책은 아니라서요."

"너도 이제 열여덟이니, 신부가 될 준비를 해야겠지."

"저는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에일린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조금 이르기는 해도 또래 여자들이 혼기에 접어드는 나이였는데, 그녀에게 결혼은 현실감이 없는 단어일 뿐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신랑 후보들이 마음에 들지 않더냐?"

"그런 건 아니에요. 단지... 그분들의 인생을 망치면서까지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후작가와 맺은 거래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저는 모르겠어요. 아버지라면 다른 방법도 있지 않았나요?"

"오해하고 있구나. 나는 후작가과 거래를 했을 뿐이고, 혼담은 그쪽에서 먼저 제시한 일이다."

"아무르 후작님께서?"

"그 편이 서로를 더 돈독하게 만들어 주는 일이고, 너를 후작가에 보내지 않아도 좋으니 잘된 일 아니더냐?"


후작가에서 손해보는 조건의 혼담을 제시한 것은 놀랄만한 일이었으나 변한 것은 없었다. 마르코의 말대로 순위 다툼에서 밀려난 것이 원인이라고 한다면 더더욱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아직 이성에 대한 감정에 어떠한 확신도 없다는 것이었다.


"너도 아직 어리구나 귀족간의 결혼에 소녀 같은 감정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해서 결혼하신 게 아닌가요?

"감정만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어디 있더냐?"


백작이 다그치며 말했다. 그 말대로 힘이 없으면 가진 것도 빼앗기는 것이 귀족 사회였고, 그는 선대의 전쟁 이후 약해진 영지의 재정을 바로잡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는 무관심속에 병으로 죽어갔다. 그것이 에일린이 본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남매는 죽은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며 아버지에게 방치되어 자랐다. 영주의 가족으로서 많은 축복을 받았을지언정 정작 중요한 부모의 사랑을 느껴본 적 없는 것이 내내 마음을 공허하게 만들었다.

분명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아끼고 자랑스러워했지만 자식으로서의 내리사랑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보잘 것 없고 영리하지 못한 자식이었으면 어땠을까? 테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그가 지키려는 것이 백작이라는 이름인지, 가족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일주일 뒤 아무르에서 후계자들의 파티가 있어요."


에일린은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운다고 들어줄 아버지도 아니었다. 그래서 꾹 참았다.


"가기 싫다는 말은 하지 말거라. 사교모임은 빈껍데기처럼 보이지만, 귀족에게는 껍데기도 필요한 법이다."

"테오도 함께 갈 거에요."

"그럴 필요 없다."


백작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아들의 이야기만 나오면 언제나 그랬고, 에일린은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왜죠? 테오는 후계자가 아니라서요?"


에일린은 작은 주먹을 꽉 쥐고 소리쳤다.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차라리 당당하게 얘기하세요. 약해빠진 아들은 필요 없으니, 독살 맞은 딸을 후계자로 키워서 써먹겠다고. 후작의 아들도 볼모로 잡아놓고 아버지 명예는 더욱 드높아 지겠죠. 그래. 봐라! 내가 루시안 최고의 귀족이다!"

"버릇없는 것."


백작이 에일린의 뺨을 때렸다. 그리 강하게 친 것은 아니지만 손지검은 처음인 만큼 그녀에게는 적잖이 충격적인 일이었다.


"아시죠? 테오의 성장이 또래 아이들보다 느리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한걸. 다 아버지 때문이에요. 테오는 제가 지킬거에요. 제가 그 아이의 누이이자 어머니에요."


에일린은 결국 참았던 눈물을 한 방울 흘리고 떨리는 몸을 애써 가다듬으며 말했다.

백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작가의말

누추한 저의 글 공간에 귀중한 시간을 내 주시는 독자 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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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샬 에일린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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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Countess (6) 19.01.18 17 0 11쪽
13 Countess (5) 19.01.11 23 0 7쪽
12 Countess (4) 19.01.10 17 0 8쪽
11 Countess (3) 19.01.08 13 0 9쪽
10 Countess (2) 19.01.07 13 0 8쪽
9 Countess (1) 18.12.19 10 0 16쪽
8 후계자들의 밤 (8) 18.12.13 31 0 10쪽
7 후계자들의 밤 (7) 18.12.13 11 0 13쪽
6 후계자들의 밤 (6) 18.12.12 14 0 11쪽
5 후계자들의 밤 (5) 18.12.10 13 0 12쪽
4 후계자들의 밤 (4) 18.12.06 17 0 9쪽
3 후계자들의 밤 (3) 18.12.03 17 0 10쪽
» 후계자들의 밤 (2) 18.12.03 21 0 7쪽
1 후계자들의 밤 (1) +2 18.11.27 65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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