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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치킨 님의 서재입니다.

조선 독각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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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치킨
작품등록일 :
2015.03.16 23:36
최근연재일 :
2015.04.21 23:00
연재수 :
3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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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5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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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25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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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1. 사과나무 (12)

DUMMY

그러고보니 배가 꼬르륵 꼬르륵 천둥소리를 내기에 청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꿈에도 그게 하루 내도록 본인이 잠에 빠져있어서인줄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어그적 어그적 부엌으로 나서는 청호의 처진 어깨를 보며 흑주가 신경질난 얼굴로 속삭인다.


“어쩌자는 거냐?”

“아직 어린아이잖느냐, 흑주. 이 힘은 그냥 모르는 채로 덮어두자.”

“그게 예삿 힘인 것처럼 얘기하지만 금차 너는...!”

“알아.”

“...”

“아니까 하는 말이다. 도깨비왕의 힘을 물려받았건 아니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그래봐야 그 자리는 이제 우리가 관여할 왕좌가 아니다. 괜히 청호가 알아서 좋을 게 없어. 입소문이라도 나서 전국의 도깨비가 복수한답시고 찾아오기라도 하면 니가 보호라도 해주려고?”


일리가 있었다. 그런 귀찮은 짓을 할 수는 없지. 납득하는 흑주의 귀에, 드르륵 열리는 부엌문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맡았다. 소고기무국의 냄새. 흑주의 눈이 절로 금차에게로 가 꽂힌다. 그렇게 현명한 척 흑주를 말리던 금차의 표정은 조선 최고의 바보도깨비가 되어 군침을 흘려대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청호가 차려오자마자 눈 깜빡할 새에 밥알 몇톨 남기고 위장으로 다 쓸어넣은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청호가 묵묵히 다시 차려오겠다고 자리를 뜰 때에 흑주가 그럴 필요없다고 말린다.


“손을 대접하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배웠습니다.”

“나는 딱히 네 손님도 아니니 예를 갖출 필요는 없다.”

“금차의 친구 아니십니까? 그럼 제 손님이지요.”


생각보다 고집이 센 청호는 구태여 소고기무국이 아닌 다른 게 먹고 싶으시냐고 흑주에게 물어보기까지 했다.


“아니, 됐어. 인간의 음식을 즐기는 건 금차정도지.”

“그럼 대체 도깨비는 뭘 먹고 삽니까?”

“사람의 정.”


금차의 확언에 흑주가 사례가 걸려 켁켁댄다. 청호가 금차와 흑주의 얼굴을 차례대로 들어다보며 그게 농담인지 진담인지를 가려내려하는데, 그 전에 우선 흑주가 손을 내저으며 부정한다.


“아니아니, 어찌됐든 나는 안먹겠다. 니 속이나 달래거라.”

“아닙니다. 급히 가볼 곳이 있어서요. 두 분 오랜만에 만나신 것 같은데 깊이 얘기나누시지요.”


상을 치우더니 마고자를 껴입은 청호가 향하는 곳이야 묻지 않아도 뻔했다. 상황파악이 덜 된 흑주가, 뭐 어디 그 여식한테 가는 거냐고 한연을 언급하는데, 금차가 흑주를 툭 치며 고개를 젓는다.




어두운 소우의 움막 안을 밝히던 호롱불이 화력이 약해졌는지 흔들거리다가 곧 두어개 꺼졌다. 조용히 말을 이어가는 청호가 자신의 눈과 마주치지도 못한 채 바닥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을, 소우는 고맙게 생각했다. 청호와 시선을 마주한채로 이야기를 듣는다면 소우는 분명 표정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소우는 별 말 없이 감정을 누를 수 있었다.


“그랬구나.”


그 한마디만으로. 슬금 시선을 다시 소우의 얼굴 쪽으로 옮긴 청호의 눈에 소우는 씁쓸하면서도 탄식을 머금은 얼굴로, 탁자 위에 흩뿌려진 쌀알들을 손가락으로 토독 토독 두드려보고 있다. 두모의 목소리, 말투 하나 잊은 적이 없었지만 잊은 척 하고 살기는 쉬웠다. 실제로 두모와 보금자리를 이루고 살던 다리 밑으로는 그 이후로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는데다, 이젠 얼굴도 서로 보기 힘든 아이들에게서 울음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었으니, 그냥 저냥 살아남을 생각만으로 바쁜 척 하기는 소우의 생각보다도, 훨씬 쉬웠다. 그래도 문득문득, 비가 하얌없이 오는 날이나 소리없이 눈살이 지붕을 두드리는 날에는, 두모가 꽁꽁 얼은 손으로 따왔던 산열매의 내음같은 것이 뇌리를 스치곤 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형 답네.”


피 한방울 안 섞였을지라도 가족이 아니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가족일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서로를 여겨주던, 두모의 꾀재재하게 웃는 얼굴이 눈 앞을 가득 채운다. 소리없이 목을 몇 번 큼큼대며 가다듬는 소우의 옆을, 청호는 잠자코 지킨다. 밤이 깊다.




좌판대감의 마당에서는 열 구가 넘는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몇은 장기나 눈알이 없고, 몇은 멀쩡해보여도 칼집이 무자비하게 나있었다. 한성부에서는 좌판대감의 직위를 박탈하고 원혼이 깃들었을 대감의 거처를 소각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좌판대감은 전재산을 내놓아 자신의 목숨을 다시 사들이려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며칠후에 좌판대감의 머리가 성문 앞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지나가던 모든 시민들이 쓰레기를 집어던져 얼굴이 더러워진 것도 있었지만, 애초에 험악한 얼굴이어서 생명을 잃고 눈을 감고 있어도 찌푸린 낯이 악귀처럼 보였음이다. 어쩌면 한연의 어머니가 그 날 좌판대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구태여 사과나무 아래에서 눈을 감은 것은 그녀가 이미 김동수의 정체를 알고 한연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지도 모른다고, 청호는 조용히 생각했다. 정갈한 필체로 그럼 건강히 지내십시오, 라 적혀있는 별순검 정필진의 서신을 반으로 접어 서랍에 챙겨넣는다. 그 옆으로 여즉 자리를 잡고 있는 조선 독각귀전에게 시선을 한 번 주었다가 다시 거둔다. 이제 다시 공부에 매진할 차례였다. 다시 서랍속의 어둠에 갇혀버리는 독각귀전이 미세히 빛을 발한다는 것을, 그 속의 종이 한 쪽 안으로 먹물이 미세히 번져 적히는 것을, 그리하여 청호는 발견하지 못한다. 한 글자 한 글자 종이 위로 글씨를 새기던 먹물은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들어낸다.


도깨비 흑주.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은 없으나 사이가 나빠질수록 정이 들 수 있다.




한연은 그 이후로 몇 번을 사과가 열릴 때마다 바구니 가득 채워 가져왔다. 이렇게 다 주면 너는 무얼 먹느냐고 청호가 거절을 함에도 소용이 없었다. 흑주는 혹여 한연이 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청호가 마친 걸 아는 게 아닐까 생각하다가 얼굴을 붉힌 채로 청초하게 앉은 한연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한 번 저었다. 연정이다, 연정이야. 어머니의 임종을 함께 지켜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볍던 감정과 고맙던 마음이 한 순간에 연정으로 바뀌었던 건, 그게 청호의 진심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한연이 깍은 사과 한 조각을 입으로 집어넣은 금차가 그 맛에 감탄하는 옆으로, 저도 한 조각 물려는 청호의 손을 쳐내며, 그 조각을 흑주도 입에 넣어 본다. 달콤한 과즙과 사과나무의 정기가 금방 도깨비의 피가 되어 흐른다. 나쁘지 않아 몇 조각을 더 먹었더니 배가 부르다. 금차는 몇 조각은 무슨 몇 알을 더 베어먹었다. 흑주가 연신 청호의 손을 막아내어, 청호는 끝끝내 입 한 번 대어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한연에게 고맙다 인사한 뒤 다시 책장을 잡았다. 사과의 영양소가 뇌에서 공부에 도움이 되는 세포를 모두 죽여버린다고 금차를 보면 얼마나 바보가 되는 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흑주의 그럴 듯한 거짓말에 청호가 넘어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뭐라고 한 거냐고 금차와 흑주가 투닥대는 와중에도 청호의 눈은 쉴새없이 책을 읽어내려갔다. 무서우리만치 빠른 속도였다. 과거시험이 임박했다.




3년마다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는 식년시에 몇 번을 낙방하여 십년 넘는 세월을 보낸다는 양반집 자제도 있다는데, 청호는 몇 개월 되지도 않은 기간동안 그 많은 목록의 책을 독파했다. 그의 집중력은 놀라울 정도여서, 흑주가 이토록 오래 머무르는 것에 궁금증을 느낄 법도 하건만, 부엌으로 가 쌀을 씻을 때에도, 뒷간에 가 볼일을 볼 때에도 책에 코를 박고 있느라 주변의 것에는 일체 신경을 안썼던 것이다. 이때쯤에는 한연도 도련님의 공부에 방해가 되면 안된다며 스스로 방문을 자제했을 정도였다. 그 정도 책을 읽었으면 이제 충분한 거 아닌가 금차는 생각했지만, 청호의 뜻이 단호해보여 좀 쉬라는 제안조차 하지 않았다. 청호는 산나물로 몇 번 끼니를 떼울 뿐 제대로 된 밥을 챙겨먹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금차와 흑주의 끼니는 꼬박꼬박 거하게 챙겨주었다. 그 만큼의 양을 본인도 챙겨먹은 날은 딱 하루 뿐이었다. 평소보다 두 배는 많아보이는 밥이 그릇 위로 탑처럼 쌓여있자 놀란 금차가 거꾸로, 청호에게 어디 아프냐고 물었던 날이었다. 청호가 대답했다.


“내일입니다.”

“내일? 무엇이?”

“과거시험이요.”


밥을 먹는 건지 흙을 퍼먹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찌푸린 표정으로 밥을 퍼먹는 청호의 손길은 의무적이기까지 했다. 밥그릇이 바닥을 보일 즈음에는 나머지 한 쪽 손으로 받치고 있던 책꺼풀을, 청호가 탁 덮어버리곤 외쳤다.


“다 되었소이다.”


그 자신만만한 표정은 과거시험장에서조차 한 풀 꺽이지 않은 채로 이어졌다. 사실 책을 외우기만 해서 되는 시험일 것 같으면 응시자들 모두가 허송세월을 보낼 것을 각오하고 몇 년을 투자하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시험이란 이 자가 과연 나라를 위해서 쓸 만한 머리를 가지고 있는 자인지, 그렇다면 그 두뇌로 어떤 융통성있는 판단과 제안을 할 수 있는 지를 판가름하는 장이였으므로, 아무리 어린 청호가 그 많은 책을 완벽히 암기하여 그 책의 지은이보다도 훨씬 책에 대해 완벽히 이해를 하고 있다한 들, 쉬이 답하기에는 어려운 문제들이 줄을 이었던 것이다. 청호가 붓을 들고 망설인다. 허투루 오답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는 구름 따라 해가 지체없이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얼굴에 그늘을 드리워주는 갓이 곧 쓸모없어질 지도 몰랐다. 서둘러야했다. 3년을 지체할 수는 없다. 정신을 맑게 하고 보니 문제들이 쉬이 읽힌다. 어릴 적 아버지가 청호를 무릎에 앉히고 풀어놓던 아버지의 경험들이 새록새록 떠오른 것이 그때였다. 왜나라에서는 조선의 한복을 한가득 실어가면 좋아하고, 한나라에서는 호랑이의 거죽을 가져가면 반긴다. 몽골에서는 조선의 꽃신을 좋아하며, 여진에서는 조선의 한문으로 쓰여진 책자를 이국적이라며 좋아한다. 현재 국정에 걸맞는 외교방법에 대해 술하시오. 라는 질문에 그 이야기들을 풀어적어놓았더니 가득 찼다. 다음 문제도, 그 다음 문제도, 청호의 지식과 아버지의 이야기들이 합쳐지자 식은 죽 먹기였다. 문득, 청호는 아버지가 제 옆에서 붓을 잡고 있는 청호의 손을 감싸 붓의 놀림을 다시 가르쳐주며, 답을 한 자 한 자 함께 쓰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옆을 보았으나 적막 속에서 모든 응시원이 텅 빈 한지만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몇 일 후에는 청호가 마고자를 차려입고 금차에게도 흑주에게도 제 겉옷을 하나씩 빌려주어 대동한 채로 성문 앞으로 향했다. 멀리서부터 바글바글 성문 앞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응시자들 틈을 비집고 들어간, 아마도 그 중에서 가장 어리고 키가 작을 청호가 손가락으로 벽보를 한 자 한 자 훑는다.


김아무개. 서아무개. 장아무개. 윤아무개... 그리고.


청호의 손가락이 멈춘다.


지청호.


이 날이 바로 청호가 이름대신 지 역관(譯官)으로 불리우기 시작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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