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
태도나 대본을 봐서 안 건 아니다.
순전히 이아인과의 대화에서 얻어낸 추리 중 하나에 불과하다.
"싸우지 않으려고 한다고?"
"그건 아니야. 다른 뜻이잖아, 그건. 내 말은 싸우려고 하지만, 싸울 의지가 없다는 거야."
"···맞긴 해."
구도상으로는 싸우려고 한다지만, 이아인의 의지를 보고 느낀 거다.
나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알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걸 신예린에 대입해도 맞아떨이지는 논리였다.
녹음 중에 그다지 트러블이 없었던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서로에 대해서 불만이 없어서 수정할 부분 없이 그대로 진행했었다.
바라보고 있던 이아인은 아마 혀를 찼었을 수도 있다.
"어떻게든 좋다는 거지?"
"굳이 해야 하나 싶기도 해."
"도전을 거부하겠다는 말이냐?"
"그럼, 어떻게 할까."
어김없이 동아리장에게 선택권을 양도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한 번 받아들여 봐."
"그럴까?"
"보나마나 그 대본도 우리가 했을 때랑 비슷한 타입일 거 아니야?"
열심히 했다고 해도 방향성이 다른 게 없으면 시도나 노력이 아니다.
이쯤에서 그 말이나 하련다.
"나는 했으면 좋겠지만, 어디까지나 내 의지로 네가 움직이리라고 바라지는 않고, 뭐가 됐든 총수는 너잖아."
'동아리장'을 '총수'로 치환한 게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같은 말을 반복하기는 싫고, 꼼수다. 그렇다고 이 차이에 의미가 담겨 있지는 않다.
조금은 직위가 높아졌다고 할 수는 있겠다.
"내가 결정권자라고 하면, 역시 하고 싶지는 않네."
"그래."
"이래도 괜찮다고?"
"결정을 안 하고 있었잖아."
"나름 했었다고 생각했는데?"
"했다면 나한테 말고 걔한테 말해."
"······그건 하고 싶지 않네."
생각보다 마찰의 요소가 크지 않다고 봤지만, 그렇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생각보다 감정적이다.
"별로 합당한 이유는 아니네."
"나도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수밖에 없지."
"지금 이성적이지 않다는 거지?"
"모순되잖아. 싸우고 싶은데 의지는 없고, 그렇다고 이기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고, 남들이 어떻게 답을 제시하겠냐."
"······."
"그리고 오늘 수요일이라고."
이 이상은 내가 접근할 권한이 없다.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겠다. 이미 전부터 내 손을 떠난 상태였지만, 그래도 정처없이 겉돌고 있던 갈등이 제대로 주인의 손을 찾아간다.
아침의 대화는 거의 종결이 난 상태에서 잠시 "루카"는 어떠한지 본다. 듣기는 들었을 테지만 일부러 듣지 않은 척 아무도 없는 교탁만 응시하고 의자에 앉아 있다. 라이트노벨도 읽지 않고 있어서 어떻게 봐도 엿듣고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듣고 있었기에 더욱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은 셈이다. 내가 돌아보자 다른 화제로 입을 연다.
"이번 레이드, 공략이 된 것 같아."
"그래?"
아쉽지만 나는 그토록 아쉽지 않다. 왠지 그럴 것 같았다는 생각이 먼저 들기에 그러려니 한다.
지금 '라티온'은 우선순위에 있지 않다.
부르지 않아도 알선은 이루어진다.
오지 않는다는 경우도 생각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딱히 피할 마음이 전혀 없는 이아인이 도망치는 일은 없을 테고, 신예린도 자신이 동아리의 대표이니 한 교실에 모일 수밖에 없다.
"···."
"···."
시선이 마주치기는 해도 말은 없다. 냉정한 상태로 대치만 한다.
그러나 이 대치에서 가장 눈여겨 봐야 할 건 역시 신예린이다. 이아인은 아무 말은 안 해도 부담이 없다. 어차피 토요일만 바라보고 지내고 있을 사람이 오늘 말이 없다고 해서 의미심장한 건 없다.
노트북으로 게임을 켤 동안, 더 나아가서 세이브 파일을 불러서 화면을 띄우는 동안에도 신예린은 말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상황이나, 이제 각자의 의사를 알아버린 시점에서 신예린이 걱정되기 시작한다.
내가 뭘 할 수 없다는 게 답답하다. 어쩌면 유출 건하고도 공통점이 있는 상황이다. 능력이나 신분이 나를 옥죄는 게 아니라 그럴 자격 자체가 없어서 손을 댈 수가 없다. 사건에 파고들었지만 관계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나라는 소재가 싸움 속에 있었긴 했는데, 그건 구실에 불과하고 신예린과 이아인의 대결 구도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이 싸움의 끝에 무엇이 남는지 알 수 있을 리가. 허울 좋은 소리로 우정은 싸우면서 싹 트기 시작한다고 말하기에도 조금 어렵다.
이아인의 입장을 정리하자면 어떻게든 태도를 변화시킬 여지는 있다. 아예 기를 못 쓰게 죽여버릴 수도 있고, 하는 걸로 봐서 봐줄 의향도 있다는 게 대본에서 드러난 상태다.
"일단 얘는 상식인이 아니니까 그렇다 치자."
"어떻게 저기서 폭발시킬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네."
"성격이 어떤지 보여줬으니 납득은 되네."
"비주얼 노벨 치고는 이펙트를 화려하게 만들긴 했단 말이지."
"넌 까가 아니었나."
"억까는 아니야."
한참 이아인과 얘기하고 있어도 신예린은 묵묵부답이다. 분명히 옆에 있는데 이렇게 존재감이 없는 건 흔치 않다.
지난 주보다 더 무기력한 상태다. 아침에 그런 말을 한 게 원인이었던가. 내가 보는 시선이라면 그렇긴 한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떤 말썽이 오갔을 수도 있는 것이니 굳이 내 탓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렵다.
내면은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니까.
"그나저나 어디까지 진행한 거야."
"한 30분만 더하면 진도를 맞출 수 있겠네."
"그럼 그냥 스포일러를 받을 테니까 스킵한다."
"그 30분을 요약하면 병원에서 꽁냥거리는 거밖에 없는데?"
"복선 같은 건?"
"있긴 한데 일러스트로 나와."
"거기에서 백 로그를 보면 된다는 거네."
"무슨 스토리 전개만으로 최소 플레이 타임 10시간을 잡아먹겠어? 서비스 신이 다량 첨가되어 있으니까 그렇지."
"몇 번 말하는 거지만, 넌 비주얼 노벨에 진심이야."
"진심으로 싫어하는 거라고 말했는데?"
"싫어하는 것보다는 걱정하는 거에 가까워 보이거든."
"장르 자체가 가진 한계를 나열할 뿐이지 걱정하는 건 아니지. 그런 한계를 없애고 싶었으면 장르 자체를 바꾸는 게 좋았다는 생각은 전혀 철회할 생각이 없어."
그나마 이 타이밍이라고 생각되는데, 신예린은 화면만 보고 있다. 조금은 반박할 여지가 있는데도 내가 일부러 말을 하지 않고 기회를 양도하나, 그다지 대답하기 싫어하는 듯하다.
내가 말해버린다.
"솔직히 게임값은 거의 다 성우 고용비 아니냐."
"우리나라 성우 사업이 확장이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생각해."
"상식이 아니니 모르죠."
"알 것 같기도 해서 물어봤지."
"몰라."
"기껏 용을 써도 우리가 어린이집에 있었을 때지."
"꽤 됐네."
"이미 다른 나라는 왕성했었다고. 그래서 그만큼 인재들이 팔려나간 거였었지. 만화 사업이 그렇게 확장되지 않았었으니까. 영화나 이런 데에 성우가 기용된다고 해도 네임드만 초청받는 식이었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성우계가 발전한 것에 비해서,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로 발전함에 따라서 양산이 되지."
"예."
"누가 선두주자였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고, 장점만 답습하게 된단 말이지."
"질 좋은 상품이 나오면 좋겠지, 만···이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이것도 나름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iton)이라 보거든. 정작 그 선두주자가 밀려나는 건 아닌데, 더 이상 발전하지 않고 똑같은 길만 걸으려는 태도가 말이지."
이거 신예린을 자극하는 말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비슷한 주제로 톡에서만 떠들었지만, 나보고 신신당부 했으면 그 사이에 변심을 했는지 제대로 눈앞에서 이런 발언을 한다.
"그냥 온전히 답습하는 거면 괜찮다고 봐. 그렇지만 양산에도 도가 있단 말이야. 점점 질의 수준이 떨어지지. 어디까지 못 만들어도 팔릴지 간을 보는 거란 말이야. 노력과 품질 중에서 안 그래도 노력이 빠졌는데 이제 품질까지 하향 평준화를 시킨다는 거지."
"성우의 질이 떨어진다는 이야기인가?"
"아니, 이건 다른 얘기였지."
"···딴 길로 샌 거였나."
"미안."
"성우 얘기로 돌아가면?"
"어쨌든 옛날에 비해 고급 인력이었던 성우가 이제는 양산이 되다 보니 성우 비용이라 말하기도 어렵지. 성우를 전면으로 내세워서 성덕들을 끌어들이는 마케팅 전략을 쓰지도 않은 작품에 믿고 플레이해서 듣는다는 할 순 없잖아."
"그 분들한테는 유감스럽게도 그렇겠지. 이 게임비가 성우값은 아니라는 것에 신빙성을 달아주는 의견이네, 그럼."
"연기를 잘한 게 커리어에는 도움이 되더라도 당장 이 게임에서 떼 돈을 벌게 해주지는 않지."
"가령 우리여도 말이지."
"맞아."
그래서, 신예린의 답변은 오늘 안에 들을 수 있긴 한 건가.
비도 오지 않고 커튼도 일부만 쳐놓은 밝은 교실에서 혼자만 그림자가 드리운 게 매우 무섭다. 아, 혼자는 아니다. 노트북을 함께 하고 있는 우리도 그림자가 드리운 건 마찬가지다. 빛이 있으면 화면을 보기가 버거우니.
"그런데, 이런 게임을 리뷰하기가 진짜 힘들긴 하네."
뜬금없이 이아인이 이제 그런 말을 한다. 신세 한탄을 녹음을 앞둔 본론 단계에서 말하기에는 늦은 감이 있다.
"어떤 점에서?"
"스토리가 있긴 해도 텍스트가 얼마 안 되는 게임인 RPG나 이런 것들은, 스포일러가 치명적일 수도 있거나 시놉시스에 불과한 게 있지."
"이건 스토리 밖에 없네."
"도대체 어디까지 선을 지켜야 하나···."
"그건 나도 모르겠네······."
늘 이럴 때마다 "길다람쥐"가 떠오르긴 하는데, 이번에는 무례한 걸 자각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게임의 스토리를 알아야 대화가 통하니까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
알아서 하라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톡
그래서 신예린의 행동은 살짝 위대해 보인다. 어떻게 해도 알아서 하라는 주장 그 이상이 아니었던 터라 이제야 움직이는 게 헐뜯을 부분은 아니다.
이아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잠깐 나가서 말할 게 있어."
"···그러자."
나는 동행하지 않는다. 둘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기에 이런 구도가 마음에 든다.
게임이나 속행한다. 일일이 클릭해서 텍스트를 넘기는 일보다 오토 모드로 진행한다. 개인적으로는 지겨워서 탈이다. 컨트롤러에서 손을 떼고 오토 모드만 해도 충분히 읽을 시간이 되니 괜찮다. 이렇게 보니 음성과 텍스트가 출력되는 속도가 같은 장점이 드러난다. 하마터면 이런 점들을 못 볼 뻔했다. 스킵을 안 하는 이유는 읽지 않은 것도 있지만 역시 녹화 중이기에 혹시나 쓸 장면이 있으면 재녹화를 하기는 싫으니까.
···많이 걸리진 않을까 생각한 시간이 10분이 지난다. 아무 생각 없이 화면만 보고 있었는데 선택지가 나온다. 이미 열람한 선택지는 녹색으로 표시되는데, 녹색 표시가 있는 걸 보니 신예린이 진짜 예습을 한 게 맞는 듯하다. 저게 녹화에 거슬리는지 판단은 나중에 하면 되겠고, 못 본 선택지나 클릭하련다.
덜컥-
드디어 결판이 났나?
"왜 너 혼자냐?"
"···혼자니까요?"
이유를 장황하게 말하긴 어려운데, 내 이유보다 저쪽, "여운하"가 이곳에 온 이유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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