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1주년(7)
보통이라면 우리보다 뒤에 있는 "저격수"들이 문짝을 향해 공격할 사거리는 나오지 않지만, 유일하게 그걸 가능하게 하는 스킬이 있다.
역시 궁극기뿐이다. 이름은 [노블 아이], 총의 기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장전 속도를 빠르게 하고 일부 시전 시간이 있는 스킬들을 빠르게 사용하게 만드는 버프 스킬이다.
거기에 모든 스킬의 최대 사거리를 늘림으로써 "저격수"의 묘미를 맛보게 해준다. 당연히 데미지도 같이 세진다.
보스를 잡을 때 단번에 데미지를 우겨넣기에 용이한 스킬인데, 이 공략대는 아낀다는 게 없는 모양이다.
푸왕!!
적들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으나 열심히 "저격수" 분대는 문을 두드리고 있다. 우리가 치고 있는 게 아니라서 문의 HP가 얼마나 달았는지 알 방도가 없다.
("삼십사퍼!")
("[호문쿨루스] 준비!")
인게임에 보이스 채팅이 있다지만 따로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브리핑을 듣는 듯하다. 실제 전장처럼 했으면 이 시대에 무전기란 것도 없으니 막막했겠다. 지금의 화력으로 보건대 문을 부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그나저나 [호문쿨루스]를 준비하라는 신호가 왔는데, 지금이 내가 도와줘야 하는 시기인가? 괜히 부탁을 받아버리니 마음 고생을 하게 된다.
("[호문쿨루스], 갑니다!")
내게 부탁을 헀던 그 사람이 외치면서 시전을 완료한다. 언제 캐스팅을 시작했는지 신경을 차마 못 쓰고 있었다.
"연금술사"란 직업이 "소환사"의 탈을 쓰고 있진 않아도 [호문쿨루스]만큼은 "소환사"와 비슷하다. 플레이어가 아닌 독자적인 AI를 가진 아군 오브젝트가 전장에 나타나서 도와준다는 점은 "소환사"를 모방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호문쿨루스]는 "소환사"의 소환수와는 엄연히 다르다.
소환을 시키는 건 맞아도 그게 독자적인 AI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HP를 지닌 오브젝트로 소환되는 건 맞아도 일반적인 공격형 스킬들처럼 루틴을 수행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전장에 나타나는 것에 불과하다.
이 스킬의 특이한 점은 스킬 버튼 추가 입력으로 루틴을 단축시킬 수 있다. 본래 [호문쿨루스]의 루틴이 비정상적으로 긴 편이긴 하다. 팔방으로 연기를 방사하는 시간만 최대 20초다. 그대로 20초를 쬐면 센 스킬인 것은 맞다.
하지만, HP가 있어서 일반 필드가 아닌 곳에서는 끝까지 살아있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
보통은 그래서 소환하자마자 추가 입력으로 마지막 폭발을 빨리 보는 편이다.
그래도 이 상황에서는 [호문쿨루스]가 방사하는 연기의 둔화 기능은 무시할 수 없다. 어차피 데미지도 들어가지 않는 상황에서 둔화+HP를 지닌 오브젝트로 어그로를 끄는 것이 훨씬 편하다. "소환사"의 소환수들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변수를 지니고 있어 차마 기용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런 설명이 필요한 이유는 있다. 저런 특성을 따졌을 때 [새장 속의 불새]를 사용할 위치를 특정할 수 있다.
"쓸게요."
20초 동안 [호문쿨루스]가 지속되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해주면 된다. 적과 [호문쿨루스] 간의 연결점을 끊으면 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바로 [호문쿨루스]를 [새장 속의 불새]에 가두면 된다.
("굿!")
짧고 굵은 칭찬을 듣게 된다. 한 사람은 나에게 부탁했던 "연금술사"다.
제 아무리 [호문쿨루스]와의 연결점이 끊겼다고 해도 멍청한 적의 지능은 어떻게든 [새장] 속의 오브젝트를 노려보고 있다. 사냥개부터 대궁을 쏘아대는 적들까지 닿지 않는 [호문쿨루스]를 향해 힘껏 공격을 퍼붓는다. 겉으로는 [새장]에 틈이 있어 보여도 시스템은 안과 밖의 경계를 명확하게 하고 있다.
그 전에 [새장]이 무적이다. [호문쿨루스]는 HP가 있는데 몇 번 때리면 부서질 디자인의 [새장]은 지속 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부서지지 않는다. 내가 추가 입력을 하면 바로 해제되긴 하나 그럴 일은 없다.
혹시나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새장]의 툴팁을 보면 '적들이 살아있는 한 새장은 파괴되지 않는다'고 적혀 있으나 안에 적이 없어도 파괴되지 않으니 설정 붕괴는 아니다. 유의하길 바란다.
이럼에도 이 집단은 "OCM(불)"을 기용하지 않은 건가? 아니면 모집에 실패한 건가. "연금술사" 분의 혜안 덕분에 이런 도움도 줄 수 있는 것이다.
("3분의 2!")
방금은 34%라 말했으면서, 이번에는 분수다. 통신병을 한 명만 맡은 게 아니라 채팅방 안에 여러 명이 섞여있다는 게 신빙성 있는 추리다.
[호문쿨루스]가 버텨만 준다면 그 뒤는 저 적들을 따돌리는 일뿐이겠다. [호문쿨루스]가 마지막 발산 패턴까지 합한다면 21초, [새장]의 지속 시간은 정확히 20초이고 조금 뒤에 설치했으니 같이 없어질 것이다.
("우회!!")
("우회!!!")
("우회!!")
그리고 제일 가장자리에 있던 "연금술사"가,
("가죠.")
"네."
("네.")
우리에게 가자고 전달한다. 듣고 있어서 알아들은 상태였는데도 말해준다.
그가 집단의 대표로는 안 보여서 잠시 용병으로 기용 당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그래도 살짝 우쭐대고 싶은 욕망이 차오른 걸 보면 난 만족한 셈이다.
쿠과광!!
한 눈을 판 사이에 [새장]이 사라짐과 동시에 [호문쿨루스]가 자폭을 이행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마당에 튕겨져 나온 몬스터들만이 폭발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허수아비는 사라진 이상 적들은 우리를 향해 달려온다. 그 사이를 뚫기보다 우회를 선택한 우리의 대열을 기준으로는 우측에서 쫓아오는 모습이다.
이전보다는 숨통이 트이는 대열이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갑갑했던 것과 달리 좌측은 빈 공간이기 때문에 긴장감을 별로 안 든다.
("분대 합류 완료.")
갑자기 뒤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려온다. 잊고 있었던 "저격수" 3명과 "사제" 1명의 분대다. 아예 버리는 전력은 아니었던 것이다.
꼬리는 우리 차지였던 것을 얼떨결에 내가 이들의 몸통 부위 속에서 뛰어다니고 있다. 제대로 한 패가 되어버렸다.
"루카"와 함께 하는 첫 시도가 버스 탑승이 되어버린 지는 이들의 뒤를 쫓아갔을 때부터니 반박할 말은 없다.
그런데, 분대가 합류했단 말은 문이 부서졌다는 뜻이지 않나?
("문이 멀쩡한데?")
"루카"도 이 점이 이상해서 나에게 묻는다.
아차. 나는 아니겠다. 자신의 말을 듣는 모든 이에게 묻는 것이겠다.
("가서 부숴요.")
("그렇군요.")
정확한 이유는 생략해도 납득을 한다. 그들만의 계획이 있을 것이니 달리기만 열심히 한다.
가까워지니 문에 금이 간 게 보인다. 거의 얼마 안 남기고 때렸다는 게 훤히 보인다. 일반 공격 한 대만 때려도 박살이 날 비주얼이라 뛰어다니는 신발의 흙 바람에 무너질까봐 겁이 난다.
문까지 도달하는 일은 쉽다. 좌측을 견제하지 않아도 된다는 행복감은 이 필드에서 유일무이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이런 전략을 나중에 한 번 더 목격할 수 있을까. 이러다가 금단 증상에 걸릴 것이다.
("입장합니다.")
후 불면 조각조각 날 문을 향해 선두에 있는 "광전사"가 돌진한다. 워낙 돌진 스킬이 많아서 어떤 스킬인지 분간이 잘 안 간다. 이펙트로는 큰 스킬을 아닌 걸로 판명 난다.
파사삭, 키양! 투우우···
문이 무너져내린 후에 포탈이 열리는 효과음이 들린다. 문 크기에 버금가는 포탈이 문이 있던 장소에 등장한다.
포탈이 눈앞에 있으니 적이 있든 없든 알 바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적들이 포탈을 타고 들어올 수 있을 건 아니니까 이제 두려울 게 없다고 생각한다.
쿵!
바닥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살짝 화면이 흔들린다. 지진을 목격한 표현으로 쓰이는 기법이라 당황한다.
보통 이런 지진을 표현한 건 플레이어의 소행이 아니라 적들이나 시스템의 소행인 경우가 전부다. 한 번이라도 플레이어가 이런 걸 일으킨다는 예외는 여태 없었다.
쿵!
포탈에서 거대한 발이 나온다.
("알아서 들어가!")
그 말을 듣자마자, 그리고 듣기도 전에 모두가 가능한 이동 스킬을 써서 포탈로 향한다.
거인의 발이 나온다 한들 들어갈 수는 있다. 실제로 포탈에 닿자마자 다들 입자화가 되어 소멸된다.
이래서 문을 바로 부수지 않은 것이었다. 함부로 원거리에서 부쉈다가는 문지기가 나와서 우리를 가로막을 테니 일부러 HP를 조절했다는 치밀한 계획이다.
그러나 이동 스킬이 없는 걸 어떡하나. 솔직히 말해서 이 중 3분의 1은 다 이동 스킬이 없는 직업이다. 일단 "OCM(불)", "OCM(물)", "연금술사"만 해도 5명은 그 집합 안에 들어간다.
이러다간 거인의 발에 짓눌려서 리타이어가 되······
쿵!
······ㄹ 리는 없다.
저 거대한 개체는 포탈에서 나오려고 아예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
적어도 우리가 달려오는 쪽으로 발을 굴릴 생각은 전혀 않아 보이는데, 일부러 맞지 않는 이상 밟힐 일은 없다.
("2페다, 2페.")
이동 스킬을 쓰든 그냥 달리든 어느 쪽이나 상관이 없다.
1초라도 포탈에 더 빨리 도착하는 것뿐인 상황이라 나와 "루카"는 안심하고 포탈로 들어간다.
슉
들어갈지 의사조차 물어보지 않고 로딩의 세계로 강제로 보내버린다.
슈욱
로딩이 완료되자 허공에 소환되어 잠시 바닥으로 꺼지는 체공 시간을 가진다. 굳이 낙법을 하지 않아도 무릎이 닳을 일 없는 캐릭터는 바로 선 상태가 된다.
("개인 행동으로 하되 명령이 떨어지면 즉각 대응해라. 레이드와 똑같을 거라 방심하지 말고!")
같은 포탈을 타서 떨어진 위치가 비슷하다 보니 저런 훈계를 같이 듣게 된다. 막 내려오는 인원도 있는 데에도 알려주고 있다는 건 다른 프로그램을 쓰고 있다는 게 확연해진다. 인게임에서도 버거워 보이는데 얼마나 집단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건지 내가 방관자라 안심이다.
그들이 뭐라고 하든 일단 외부인인 나는 이 전장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아무래도 이미 전장에 대해서 파악했을 것이라 나와 "루카"는 문외한이라 이번에 잘 봐두려고 한다.
아직 "근원"의 존재는 나타나지 않은 듯해서 조금씩 걸어간다.
("여유가 있는 것 같아.")
"대비를 할 게 있긴 할까."
("···레이드 보스방과는 다른 느낌이지 않아?")
"너도 그렇지?"
("응.")
보스방은 "나그랜샤"도 피해갈 수 없었던 느낌이 하나 있다.
무조건 사각형의 형태로 짜여져 있다는 것이다.
전통이다. 그리고 개발하는 입장에서도 편한 맵이기도 하다.
보스의 패턴을 만들 때 괜히 맵을 곡선이 많게 만든다면 그것대로 히트박스에 관한 자문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플레이어든 보스든 동작하는 데에 지장이 없어야지 불미스러운 일은 방지할 수 있어 서로 편한 길임을 확실하다.
참신함과 무난함의 호불호는 저편에서의 일이다. 내가 편을 들자면 무난함에 찬성한다.
"근원"의 근거지는 참신함에 편을 든 거다.
일단 사각형 구조가 아닌 것에서 꼬이기도 했으나, 단순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보스가 나오는 장소 치고는 개미굴과 흡사해서 그렇다.
이리저리 점프해서 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 발판 사이를 오갈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는 개미굴이다. 네 변의 모서리만 벽으로 인식해서 잘 도망쳐야 했던 구조는 절대 아니다.
차라리 보스가 아니라 잡몹을 처리하는 구역이라고 하면 믿을 것 같다.
"석회 동굴이 이런 느낌일까."
("이대로 물이 차오르면 숨쉴 곳은 있을까.")
"무서운 말을 하지 마."
실제로 그럴 것 같아서 두렵다. 이 정도 밀실이면 그런 패턴이···
잠시 말을 삼간다.
"···저희도 도와야 하나요?"
("따로 놀다가는 전멸해요.")
아까 도와준 것으로 친분이 쌓인 게 맞다. 그래도 우리가 도구는 아니지 않나, 라는 마음가짐이나···
"···같이 가죠."
("서로 좋은 거죠?")
("다다익선이란 말이 있잖아요.")
이렇게 된 이상 비즈니스로 이 사태가 끝날 때까지 꿀을 빠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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