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협상
[제목 : 아직도 쇼케이스에 나온 건 경험한 사람이 없음?]
[제목 : 멘태셰에 있었던 게 설마 끝임??]
[제목 : 아 빨리 정보 풀라고 ㅡㅡ]
[제목 : 이제 정답지 좀 내놓을 때 안 됐나?]
[제목 : 오늘자 사냥터 효율 정리]
[제목 : ???:이래도 안 접어?]
어느 정도 커뮤니티에는 독이 퍼지고 있다. 솔직히 썩다 못한 망령들이 스스로 독이 되어 배회하고 있는 것에 가깝다. 이런 점들을 보면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잘하는 짓이라 생각은 들지 않아도, 반성의 기미는 없다.
그리고 썩다 못하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기말고사가 끝나도 학교에 묶여 있어야 하는 상황은 반갑지가 않다.
뭐, 예정된 대로 아빠를 쩔해주기 위해서 '라티온'을 켜는 편이라서 당장 집에 가도 할 일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여전히 사후 관리라는 명목 하에서 여전히 고생 중인 아빠라(이전보다는 훨씬 덜 고생하더라도) 6시 가까이 되어서 퇴근하는 건 나와 똑같다. 어쨌든 서로의 스케쥴이 일치하는 한 억울한 면은 없다.
나는 그러한 제한 때문에 학기 중이라는 상황에 제약되는 면이 적은 편이나, "루카"는 그렇지 않다.
저녁 때라고 해도 영업 중에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마인드는, 한마디로 장사가 성하지는 않다는 말이면서 우리가 학교를 나와야 한다는 점 때문에 저녁을 빌리는 거지, 아니었으면 낮이 최선이었겠다.
"크리스마스 전까지 완성될 것 같아."
그렇다고 진행 상황을 알린다.
"얼마나 완성됐어?"
"비밀."
괜히 궁금해진다. 주제 자체가 비밀이라 한들 %로 말해줄 수도 있지 않는지 궁금하다. 그걸 발설하는 것 자체가 걱정이라고 하면, 딱히 걱정할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의문이다.
크리스마스 전까지, 라는 말은 바로 이브에 완성이 되어도 약속은 지키는 것이니 혹시 그런 변수를 노리는 건지 생각해 봄 직하다. 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여도 "루카"에게 메리트가 없는지라 생각을 고쳐먹는 게 맞는 수순이겠다.
"근데."
"왜?"
"루카"가 물어본다.
"사진, 찍을 거야?"
별로 그런 취미는 아니라는 걸 "루카"도 잘 알 텐데, 하기야 그건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남에게 보여주는 걸 목적으로 하는 작품이니만큼 사진으로라도 찍지 않으면 남는 건 없어지니 여기서는 내가 소극적으로 대하는 게 더욱 의미가 없을 수 있다. 크리스마스까지 기나긴 여정을 떠났는데 남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 슬프겠다.
그래도 내 취미가 그쪽은 아니니까, 참 어떻게 나서야 될지 막막하다.
그리고 말이다.
"사진보다, 어디서 할 거야?"
"어디서?"
"그 가게에서 할 거야?"
"···정하지 않았지?"
"안 정했지."
"큰일이네."
"큰일이지."
큰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게 그래도 1주일 넘게 남은 시점이라 다행이다.
그래봤자 D-8이다.
사전에 어딜 돈을 주고 빌리려고 해도 안 되는 날짜다. 물론 돈을 주고서까지 성대한 파티를 열 각오는 없다. 설령 인맥을 빌린다고 해도 이맘때에는 크리스마스 계획 같은 건 이미 짜놓았을 테다.
그런가 하면 우리 집은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계획이 없는 게 계획이 아닌가 싶다.
일상이다.
매년 이랬으니 오히려 무언가 계획이 있는 게 어색할 것 같다. 그냥 우리와는 상관없는 휴일 정도다. 아직까지 학생이란 신분을 벗질 못했으니 크리스마스란 방학 이후에 생기는 별 볼 일 없는 휴일이다. 일부 플랫폼에서는 크리스마스 세일이라면서 비싼 게임을 사게 되는 적기로 볼 수 있겠는데, 그렇게 보면 이젠 '라티온' 유저가 된 나에게 다른 게임이 들어오지는 않겠다.
"작년에는 크리스마스에 뭐했어?"
"게임을 했겠지."
"나도 그랬던 것 같아."
절망적인 대화의 진로다.
"완성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가게에서 입는 것밖에 없을까?"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하기는 싫지 않아?"
"잘 만들면 뭐든 좋을 거라 생각해."
이 말 속에는 어폐가 있다.
잘 만들었다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루카"의 눈높이겠다.
다시 말해서 못 만들었다고 인식하면 보여줄 상대는 나밖에 없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니, 그렇게 자신감이 없진 않았으면 한다.
"눈이다."
"눈?"
창문을 보는 순간 눈이라 알아차리긴 힘들었다.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처럼 지상에 쌓이기 위해서 행군을 하고 있진 않다. 날씨 자체가 이미 흐렸으며, 그게 비가 아니라 눈일 뿐이다. 그만큼 기온이 낮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밖은 춥겠지?"
"밖에서 하는 건 좀 그렇지."
"실내가 나을 것 같아."
"그래야지."
결국 정해진 건 실내라는 것밖에 없는 건가.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개인적으로 내 집이나 "루카"의 집은 제대로 된 교류도 없고 접점도 없어서 감히 초대하거나 불러들이는 것도 좀 그렇다. 정녕 두 가정 모두 무계획이라고 한다면 마음은 편할 텐데, 차라리 그보다는 제 3의 장소가 나오는 게 더 마음이 편할 것 같다.
"그것도 그런데···."
"그런데?"
"······뭘 먹을지도 고민해야겠지."
"그건 장소가 정해지면 괜찮을 것 같아."
"그렇겠지?"
아슬아슬하게 넘긴다.
내가 말한 건 변명이고, 실제로는 이스터 에그를 어떻게 공략할지 생각하는 중이었다. "고즐 왕성"에서 어떤 게 이스터 에그인지 찾더라도 토벌대가 문제다.
아빠를 키우는 게 우선시 되는 상황에서 1명은 확보, 나까지 포함해서 2명은 됐지만, 나머지 4명을 어떻게 구상하는지가 문제다. "루카"를 일원으로 데리고 가는 걸 고려하면 3명이라고 기정사실을 두어도 괜찮지만-
"다른 생각 중이지?"
"어떻게 알았어?"
"익숙해졌어."
"익숙해졌다니."
뭔가 노하우가 있나 보다. 이제는 엄마뿐만 아니라 "루카"에게도 간파될 정도면 나에게 치명적인 약점이라도 있는 것이 분명하다.
"뭘 생각했어?"
묵비권을 행사할 수 없는 강압적인 태도는 아니다. 그러나 "루카"를 계획에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언젠가는 했어야 하는 수순인 설명 단계를 지금 끝내려고 한다. 간단히 이스터 에그를 해결하러 가기 위해 동참하라는 설명은 불가능하고, 자초지종을 어떻게든 가미해야지 제대로 된 이해를 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흥미진진해."
그 감상은 5어절로 정리된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떻게든, 하고 싶어."
꽤 욕심이 큰 듯하다. 코스프레 건도, 이스터 에그 건도 해결하고 싶은 심보가 공감된다. 욕망의 상한선은 자기가 정하는 것이지 정해져 있지 않다.
"언제 할 거야?"
이는 내 계획이라서 내가 정하는 게 타당하다. 다름이 아니라 주모자이면서 주동자이기에 원정에 참여할 나머지 5명을 통솔해야 하는 의무를 가져야만 한다.
그래봤자 그 5명이 제대로 정해진 것도 아닌지라 섣불리 언제 하리란 계획은 없다. 더군다나 "고즐 왕성"의 이스터 에그에 돌입할 수 있는 방법도 알아낸 게 아닌 시작이 반이라는 격언이 무색할 정도로 진행된 게 없는 공허한 상태다.
"육하원칙을 제대로 말할 상황은 아니라서."
"비밀 유지는 얼마나 갈 것 같아?"
"내가 알면 편하게 있을 텐데."
"크리스마스까지 갈 수 있을까?"
"···."
아예 "루카"는 크리스마스에 하자는 생각을 굳힌 것 같다.
그렇다고 하면 도대체 크리스마스에는 얼마나 많은 게 걸려 있는 건가.
"루카"도 그렇고,
"여운하"도 그렇고,
아빠도 그렇고,
하지만, 이스터 에그 건의 경우에는 외부적인 요인들을 조심해야 한다. 내가 원한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다. 도전한다고 해서 꼭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으며 실패를 항상 사고의 한자락에 두어야 한다.
그나저나 집을 꾸미는 일은 어떻게 해야하지? 이제 1주일 넘게 지나긴 해도, 이대로 가다가는 집을 산 의미를 보지도 못하고 월세를 내게 생긴 상황이다.
"루카"의 건도 참 어렵고 말이다.
이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크리스마스 계획은 너무나 난해한 공식이 아닌가.
현실과 게임 속 세계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계획이 있긴 한가?
"마권."
"마권?"
얼떨결에 말했는데, 과연 일리있어 보인다.
"오늘 안에 담판을 지어볼게."
일단 학교를 무대로 하는 이야기는 여기에서 종료된다.
제대로 된 협상은 잠자기 전 침대에서 이뤄진다.
"제가 아주 멋진 제안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스바라시이 제안이라고?")
갑자기 일본어를 하는 건 저리 신경을 끄도록 한다.
"크리스마스에 어떻게 계획하고 있는지 물어보는 게 먼저겠지."
("크리스마스?)"
약간 허를 찔린 듯이 말한다.
("혹시 솔로라고 동정하는 건가?")
아, 그 쪽으로 허가 찔린 건가.
"기만하려고 전화한 거 아니다."
("그러면?")
"아직도 사람들이 이스터 에그를 못 밀고 있어서 안달인 상황인 건 알고 있나?"
("대~충, 채팅들을 보면 파악이 가능하지. 그런데~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설마~~")
"그게 맞는데?"
("미친놈이네. 그걸 어떻게 안 건데? 그리고 정보 독점이라고? 지독하다.")
공리주의적으로 공표해야 유저 측이나 개발사 측이나 애가 안 탈 수 있겠어도 그 점을 지적하진 않는다.
그도 그렇겠지. 이건 좋은 협상 카드다.
최초라는 타이틀은 스트리머라면 얼마나 군침이 돌까.
("그걸 크리스마스에 성대하게 공개하겠다는, 그런 건가?")
"그것도 그렇지만, 깨야지."
("몇 트에?")
"원트에."
("공략은 알아?")
"알아가야지."
("진짜 터무니없이 미친놈이잖아?")
"이상적으로 봤을 때, 방송에서 최초 공개를 하고 바로 클리어를 하면 좋지 않겠어?"
("환상향이잖아.")
"확률은 있지."
그리고 미처 말을 못한 게 있다.
"참, 꼭 방송일 필요는 없고 녹화로 해도 상관없지."
("그 날 방송을 켤지 안 켤지 딱히 내가 정한 바가 없어서 그렇게 해도 되겠지만, 그러는 편이 원트보다는 편하겠지. ······어쩔 수 없네. 휴방인 척하면서 이런 프로젝트가 있었다면서 깜짝 게시나 하자. 스바리시이하네.")
"도대체 그 스바라시는 뭐냐."
("멋지다는 뉘앙스로 해석해.")
써먹을 상식은 못 되겠지만 기억은 하겠다.
("콘텐츠도 만들어 주고, 제안이라기에는 나만 이득인 것 같은데?")
"그래서 네가 해줄 것도 있지."
("뭔데?")
이게 제안과 비교해서 동질의 교환 요건이 될지는 미지수다. 다만, 뻔뻔하게 밀어붙인다.
"집을 빌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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