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점
심정을 이해한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나는 경험한 적이 없는 걸로 이해를 한다는 건 헛소리다. 제 아무리 사전지식이 있더라고 미지의 영역을 그냥 이해한다는 건 역시 불가능하다.
무표정이긴 해도, 행동은 질투, 일 거다, 아마도. 내가 질투를 받을 일은 잘 없다. 성격이 그렇다는 것 이상으로 마땅한 상황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질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루카"가 나 말고 다른 이성과 대화하는 장면이라도 나와야 하지만, 결코 나올 수 없는 전제 조건이라서 불가능이다.
"왜?"
진정 질투라고 하면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오답일 수 있으나, 보편적인 방식 말고 내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궁금해서."
그건 맞긴 할 거다. 말동무라고는 나 말고는 없으니까 어쩌면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을 수도 있다. 그 이전까지는 지켜보면서 궁금했겠다.
말 뒤에 뼈가 있는지는 두고 지켜볼 일이다.
"이거에 대해서 견해를 말해줄 수 있어?"
라노벨을 책상 밑에 넣어두고 "루카"가 다가온다. 내 폰의 행방을 신예린에게 다시 돌아가고 "루카"를 향해 해당 상황을 자세히 설명한다. '라티온'으로 게임 지식이 늘어났다고 해도 "루카"에게는 아직 매니악한 측면은 거의 보이지 않기에 하나의 실험대로 작용하기도 하는가 싶다. 리뷰를 보는 시청자 중에 게임계와 거리가 먼 사람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으니까.
"그래도 성장하는 재미는 있는 거 아니야?"
"재미가 있어도 수치만 조절되는 거라면 효용 기한이 길 수는 없지. 색다른 재미를 줄 수 없다면 반복해서 플레이하라는 로그라이트의 취지와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렇게 되는구나."
그러다가 "루카"가 말한다.
"그래도, 이런 게임으로 로그라이트를 처음 접하면 괜찮다는 생각도 들어."
"처음 접할 때는, 이런 게임으로 괜찮을 수 있겠는데, 어쩌면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도 게임성이 그다지 좋지 못하면 장르에 대해 편견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조금 더 나은 게임을 권장하는 거지."
"아직 출시 안 된 게임이면, 가능성은 있지 않아?"
"PV를 바꿔서 내는 경향도 있긴 한데, 이런 상황에서 바꿀 일은 거의 없지. 어느 정도 보완 패치만 하다가 최종 버전이라면서 방치하는 경우가 많아서 PV를 다시 뽑는다면, 아마 화끈하게 DLC를 내놓는 경우일 텐데, 회사 자체가 인디 규모라서 그럴 일도 없어 보이니까."
"아하."
납득은 계속 하는데, 말을 끝이 안 난다.
"안 좋은 게임은 아니라 보이는데."
"그건··· 맞아. 안 좋은 게임은 아니야. 평범한 게임이지."
굉장히 당황해 하는 게 느껴진다. "루카"가 아니라 신예린한테서. "루카"는 이런 데에 있어서 그럴 일은 없다. 당당하고 솔직하다. 모든 말이 진담이다.
"그래픽은 마음에 들어."
"그건 호불호의 영역이라 말할 수 없긴 한데, 나도 마음에 들긴 해."
"유명한 게임이야?"
"인디니까 홍보 효과를 기대할 순 없었을 테고, 실제로도 유명하진 않은 상태지."
"이런 게임들이 너무 많은 거지?"
"30년 전부터는 게임은 일반인의 영역으로 들어갔으니 흔하고 흔하지."
"30년 전부터 발전을 꾸준히 하면 게임 만드는 것도 힘들긴 하겠다."
엄밀히 말하면 게임만은 아니다. "루카"가 하려는 그림 그리는 일도 똑같다. 하물며 우리가 하려는 게임 만드는 일도 아닌 게임 리뷰도 똑같다.
"힘들지···."
"발전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발전했는데 수준이 못 미치니까 그러는 거지?""
"그거야. 그런 것 같네. 왠지 그래서 찝찝하더라."
"근데, 난 어디까지가 발전이 된 영역인지 몰라."
"그 점도 참고해야겠네."
이렇게 보니 질투가 아니었고 정말 호기심이었던 같기도 하다. 꼭 질투가 필요한 건 아니다만, 그렇게 단정 지었던 내가 망상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러니까 또 하렘이란 키워드가 생각 난다. 아니, 그 상황은 아니잖아. 그나저나 사랑이 극단적으로 발전하면 하렘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는 건가, 그게 갑자기 궁금하다. 애초에 그건 발전인가, 옆그레이드인가. 진정 사랑보다는 바람 피우기의 영역이라고 보는데.
내가 만약 "루카"가 다른 이성과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으로는 파악이 되지 않는다. 꼭 반응을 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도 들고.
그 주, 수요일.
"드디어 결전의 때가 왔군."
"예."
"반응이 시큰둥하네."
"예."
결전의 때라고 해도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난 결전의 때라고 보는데 말이지."
"예."
"예."
"···왜 그래?"
"뭐··· 저희는 아무렇지도 않아서요."
"이하동문입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스케쥴을 정한 건 당신이고, 저희는 그냥 따르는 것뿐입니다?"
"절친인데 이러기냐."
우리 동아리의 본격적인 활동이 개시되는 주이기도 한데, 신예린한테는 특히나 마음 아픈 주일 수도 있다.
"장르별로 선정하는데 공포 게임이 들어갈 수 없는 것이고, 미리 맞으면 덜 아프다고 본인 입으로 얘기했지 않나?"
"적극 동의한다."
이아인의 당찬 발언에 협조한다.
솔직히 위에 있었던 일은 이러한 배경지식이 있다면 재밌을 수 있었다. 순서가 뒤바뀌어서 안타까운 일이다. 이렇게 저렇게 대체제를 찾으려고 애썼던 것도 전부 오늘을 피하기 위해서였으니, 오히려 칭찬한다면 그렇게 가져온 게임들을 막상 리뷰하기에 부적절하다며 평가한 게 직업 정신은 있다는 면에서다. 그것 말고는 없다. 하찮은 노림수였고, 본인도 불가피하다는 걸 깨달았다.
"날 속였던 거야?"
"속였던 적은 없는데, 우릴 너무 과소평가했던 거 아니야?"
"선호진, 널 믿었는데···."
"제가 언제 공포게임을 못한다고 한 적이 있었나요."
공포게임을 그렇게 많이 한 적은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공포 분위기에 익숙하기보다는 점프 스케어에 익숙한 것뿐이다. 그건 공포게임이 아니라도 어디선간 볼 법한 연출이니까. 그래서 나도 오싹한 분위기에는 오싹해 한다. 놀라지 않을 뿐이지.
"하나 지적하자면, 점프 스케어가 무서워서 공포게임이 싫다는 경우라면 그냥 마음 놓고 받아들여."
"그래, 못하면 못하는 대로 맞아야지."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닌데."
"아니었어?"
난 그나마 체념하라고 말한 거지 놀리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게 그건가?
"아!"
"왜?"
번득인 듯하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건가. 변명의 여지라도 있는 건가.
"교실이니까 방음이 잘 안 될 거 아니야?"
"그렇지."
"내가 공포게임을 하다가 소리 지르면 다른 동아리에 민폐가 될 거니까, 그게 걸림돌이지 않겠어?"
"그러네."
납득이 간다. 다른 동아리를 위해서 신예린에게 비명을 지르라고 할 수도 없다. 애써 소음을 방지하기 위해서 지금도 미리 TV의 소리를 줄이고 있는 중인데, 게임 소리보다 사람의 목소리가 크다면 소용없는 일이겠다.
"내가 플레이하는 건 역시 무리겠지?"
"아니, 방법이 있는데?"
이아인이 당차게 말하자 신예린의 입이 오므라든다.
나도 궁금해진다.
"뭔데?"
"바로 준비할 수도 있지. 육성이 문제라면, 육성은 못 내게 하면 되잖아? 입을 막으면 되지?"
"설마 재갈을 물리자고?"
"그렇지."
"좋네."
"어떻게 그렇게 죽이 잘 맞아?"
기겁하는 신예린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겠다. 그런데, 준비 단계에 있어 번거로움이 있었긴 했다. 실제로 재갈을 만들 재료를 어디서 공수할지 문제였다. 곧 해결되긴 했다. 신예린이 숨겨 두고 있었던 손수건과 더불어서 나나 이아인도 운 좋게 들고 다녔기에 세 개를 이어 묶어서 신예린의 입에 물리게 했다. 진정 고문 현장에서 쓰일 재갈과는 다르지만, 말하지도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상황은 아니기에 이것대로 기능적으로는 충분했다.
"갑시다."
"으응, 응."
그렇게 공포게임은 진행된다. 혼자서 다 진행하라고 무책임하게 하지는 않을 거다. 본래 그럴 작정이었다. 그나마 배려해서 1번 타자로 진행하게 해주는 건데, 보통 공포게임은 초장부터 플레이어를 죽여버리려고 달려들지 않기 때문이다. 괜히 후반부에 맡겨서 공포는 공포대로 느끼고, 컨트롤이 심각하게 하향을 당해서 죽음을 반복시키는 것보다는 낫다고 우리는 판단한 거다.
"가세요."
이아인이 독촉해도 움직이지 않는다.
아마 튜토리얼일 것이다. 튜토리얼이라고 알려주지 않는데 뉴 게임을 하는 즉시 공간 안에 방치한다면 그럴 것이다. 막연하게 살인마나 귀신을 피하는 공포게임이 아니라는 건 사전에 판명 났다. 제대로 스테이지마다의 퍼즐을 풀고 스토리를 진행해 나가는 방식이라 튜토리얼이라고 해서 스토리가 없진 않을 거다.
그래서 당장 어두운 공간보다는 밝은 공간에서 시작된다. 주인공의 가정이라 생각되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가득한 거실에서 TV를 보는 장면이다.
그런데도 움직이지 않는다.
"으으응."
재갈 물린 입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저 말을 기점으로 움직이게 된다.
당장 빠르게 지나가는 자막을 해석할 수준은 안 된다. 대략적으로 핵심 단어가 무엇이고 하는 정도만 안다. 그래서 내 수준에서 해석을 하자면, 여자 친구인 것 같은 인물이 따로 있는 것 같은데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해서 기다리는 모습이다. 그 이상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다. 더 불러올 다른 인물들이 있는 건지 알 수는 없다.
이미 파티가 준비된 것 같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 뒤로 곧바로 상호 작용을 하는 법을 알려준다. 버튼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만, 추가 조작은 다양하다. VR 컨트롤러로 하는 게임인 만큼 여러모로 신경을 쓴 것 같다.
그렇다. VR이다.
둘에게는 많이 익숙하지 않은 환경이라 더욱 신예린이 저항했던 것도 있겠다. 하지만, 자기가 말해놓고 어떡하냐. 익숙하지 않은 영역이기에 리뷰어로서 탐나기도 하는 게임이라 그랬겠지만, 아무튼 정했으면 각오는 했어야지.
트리를 장식하거나 화장실을 이용하면서 수도꼭지를 돌리는 등의 상세한 조작들을 알려준다. 한편으로는 신예린에게 걱정이 되는 요소겠다. 이러한 것들을 게임 내에서 어떻게 활용할 건데 이렇게나 알려주는 건가. 이것도 고려해야 할 요소겠다. 그게 아니면서 튜토리얼에 괜히 등장하는 것도 이상하기에.
이런저런 파티 준비를 다 마친 후에 주인공은 2층으로 올라간다. 작은 반지 상자, 제대로 프로포즈를 하려는 목적인 것 같다. 딱히 독백을 안 해도 장면만으로 유추할 수 있다.
터컥
"으응-!!!"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느낌으로는 현관문이 닫힌 소리다. 딱히 조작하지 않아도 미심쩍은 주인공은 재빨리 상자를 주머니에 넣고 뒤를 돌아본다. 어차피 2층이라서 현관의 사건을 알 리는 없을 테다.
저게 살인마가 낸 소리라면 어떻게 잘도 2층으로 올라갔을 때 들어올 수 있었을까. 나중에 게임에서 밝혀지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내려 가."
"으응."
용케 말을 잘 따른다. 솔직히 알고 있을 거다. 곧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거. 알면서도 간다.
1층으로 내려온다. 제대로 내려오진 않는다. 계단에서 버틴다. 일단 1층의 전체적인 이상 증세를 파악한다. 그런다고 공포게임인 이상 벗어날 방법을 제시해주지는 않겠지만.
"바닥에 발을 붙여."
"일단 거실로 가 봐."
말을 그대로 따른다. 크리스마스가 트리가 있는 곳을 포함해서 1층은 사실 이미 불이 다 켜진 상태다. 따로 불이 꺼진 곳은 없어서 굳이 어디로 가야 살인마 같은 걸 만나는 일은 없다는 눈치다.
그렇기에 나를 비롯해 신예린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다. 거실에 있으면 당장 이벤트가 일어나진 않을 거라는 상식이다.
그게 안일함이었다.
사악-
"으응-!!!!!!"
순식간에 화면에 검은 양손이 튀어나와 가려버린다. 아무래도 입과 코를 막은 듯한 연출이다. 어느 시점부터 조작 불가가 되어서 컷신으로 보여주기보다 화끈하게 납치 비스무리한 전개로 이어짐에 나는 고평가하고 싶다. 괜히 무슨 연출이 나온다는 징조를 보여주면 점프 스케어도 맛이 안 살아나기에 말이다.
살인마의 얼굴도 안 보여주고, 튜토리얼의 마지막에 딱 어울린다.
"시작은 좋은데?"
"나도."
"으으으으으으···."
저렇게 겁에 질려도 그게 효과가 있다는 뜻이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좋은 게임을 찾은 것이다.
조금만 더 분발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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