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막 직전
후웅, 후웅, 쾅- 끼이이이익 치양-
썩 나쁜 패턴만 반복하는 빌어먹을 보스 축에 속하지는 않아 보인다. 나름 스타일리쉬하게 창을 크게 두 번 휘두르고 돌진하면서 창을 꽂은 채 관성에 의해 긁히는 소리가 난다. 따에서 창을 빼내면서 반동을 이용해 360도 주변을 긋는다.
묘사가 길어서 그렇지 템포는 빠르다. 내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떠올릴 때는 이미 다음 패턴에 들어가 있다.
팅 팅팅팅
아까 안 된다고 말했지만 아직까지 포기하지 않은 모습이다.
"무적 상태라니까요."
("껍질을 까야 하는 것일 수도 있지.")
"그런 불합리한 패턴을 없으리라 생각되는데요."
신빙성 있는 가정이긴 해도 '라티온'이라서 기각될 수밖에 없다. 튕겨내는 효과음 자체는 다른 보스 및 네임드 전투에서도 무적 상태일 때 주로 나는 알림음이고, 일정 히트 수 이상을 가격해야 타격이 가능해진다는 조건은 '라티온'에서 밸런스 문제로 넣지 않았을 것이며, 심지어 이스터 에그에서 꼭 그럴 필요는 없겠다.
슝슝슝, 쉬익 탕! 쿠구구구구
세 번을 좌-우-중간 순으로 찌르고 270도 가량 크게 휘두르고는 위에서 땅으로 내리친다. 창에서부터 이펙트 기둥이 솟아나와 주변으로 다섯 번 번진다. 정통으로 맞았으면 최소 6대는 맞았으이란 예상이다.
여전히 움직임이 멎을 생각이 없다. 아까 밸런스 운운한 것을 고려해 보면 이건 정상적인 보스 몬스터가 아닌 수준이다.
최소한 때리기는 허용한다는 식으로 중간마다 멈춰 있어야 하는데, 비정하게 다음 패턴으로 연계하는 경우는 캐스팅을 쓰는 직업들은 죽어나가라는 식이다.
팅, 팅, 팅
[0]
[0]
[0]
피하면서도 [화염 대지]를 통해서 여전히 무적 상태인 걸 확인한다. 들어온 지 1분 동안 패턴 파훼만 계속하면서 기회를 엿보는 데에도 이렇다.
데미지로 잡는 게 아니라면 육성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귀찮군.")
한 대도 안 맞아주니 섭섭한 나머지 사람다운 심정을 내뱉는다.
그러고서는 모습을 감춘다.
("피할 수 있을까?")
씨익
눈 깜빡하는 사이에 주변이 파랗고 하얀 선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 허공에 그려져 있는 참격 이펙트를 보고 단번에 알아차린다.
"선이 없는 곳으로 피하세요."
("왠지 그럴 것 같긴 한데-")
나는 도망쳤지만,
차앙-
이펙트가 번쩍이면서 쇳소리가 귀를 덮친다.
("아.")
[그랜드캐논님이 행동불능이 되셨습니다.]
알기로는 HP가 가득 차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선이 겹친 곳에서 맞아서 저런 건지 보스의 공격력이 무서운 건지 맞아보지 않아서 모른다.
"어차피 살릴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버려야지.")
기왕 이렇게 된 김에 패턴을 맞아보도록 한다.
마침 타겟이 한 명뿐이니 나에게로 온다.
팅팅팅
그러고 보면 나도 "절대적 포악 - 4세트 옵션" 때문에 바로 맞지는 못한다. 미리 3대는 맞고 간다.
쉬익
[HP: 52124/77567]
25443 데미지, 77567과 비교해서 어느 정도 비율인지 가늠이 안 된다. 30퍼는 조금 넘는다. 그러나 정확한 몇 %의 수치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수치다.
일반적인 보스와는 다르다고 보는 게 맞다. 아까 아빠다 한 대를 맞고 죽은 걸 보면서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체력 비례 데미지가 아니라 절대 수치 데미지라니. 한시라도 빨리 장비를 파밍하는 게 옳다는 걸 증명한다.
그나저나 아무리 "마법사"라고 한들 피해 감소 옵션도 착용한 내가 30% 넘는 데미지를 받는다는 건 꽤냐 아프다는 소리다. 평범한 장비로는 넘보기 힘들 것 같다.
"폭권사"를 신규 직업으로 내놓고 "폭권사"를 필수로 하는 이스터 에그를 내놓고는 이제는 방어력을 어느 정도 갖추라는 말은 크나큰 시련이다.
그 다음으로 이곳을 어떻게 탈출 할 수 있는지 여부도 밝힌 바가 없기에 막막한 상황이다.
("아니면 미친 듯이 실수를 안 하고 피하면 답이 보일 수도 있겠지.")
"가능하겠어요?"
("장담은 못해.")
"그러면 파밍을 하러 가야죠."
따로 탈출 버튼은 없다. 이렇게 된 이상 편히 죽는 게 낫다.
빨리 인벤토리를 열어서 장비를 벗기 시작한다. 상의부터 시작해서 죽기까지 있는 대로 벗는다.
[행동불능이 되셨습니다./파티원이 10초 안에 살려주지 않으면 최근에 있었던 마을로 귀환합니다./10]
장갑을 벗는 데에서 끝난다. 다시 착용하기까지 대략 10초의 쿨타임이 존재하니 마을에서 착용할 수 있겠다.
("탈출 버튼이 없네?")
"네."
("다시 [차원 추월]로 탈출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래 보이기도 하죠."
10분 동안 버티라는 말이라고 하면 그것대로 귀찮긴 하겠는데, 과연 아니리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우리가 본 패턴들이 전부라고 말하기도 뭐하다. 계속해서 평타 비슷한 패턴도 변화무쌍으로 쓰는 모습을 보면 제대로 피하기 게임을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체크 포인트를 찍었던 마을은 "고즐"이다. 죽어서 이곳에 부활한 건 전에 "근원" 토벌에 실패했을 때가 떠오른다. 그러고 보면 나는 캐릭터가 죽는 경험을 드물게 겪는 것 같다. 그리고 항상 죽는 것도 고레벨 마을에서가 아니라 뜬금 없는 곳에서 일어나기 마련이다. 예기치 못한 일에 자주 휘말리는 체질인가.
"첫 트는 무리였네요."
("쿨타임이 돌아오진 않네. 이게 입장권이란 소리겠지?")
[차원 추월] 이야기인 것 같다.
"그럴 거예요."
("이런 난이도면 여러 명이 도전하는 것보다 믿음직한 두 명이 번갈아 가면서 피하는 게 낫지 않나?")
"아직 패턴을 다 확인한 건 아니죠. 그래도 그게 전부라면 그럴 듯해 보이네요."
("크리스마스에 할 법하진 않잖아?")
"아빠의 말대로죠."
다인 플레이를 권장하지 않는 콘텐츠라면 크리스마스라는 무대에서 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이 계획이 무산이 되는 건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 조금 더 일정을 촉박하게 하는 편이 나아보인다. 최소한 아빠가 몇 대를 맞아도 버티는 방어력과 체력을 가지도록 세팅을 갖추는 게 급선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음 단계에 이스터 에그에 크리스마스의 미래를 맡기는 게 최선이다.
"이렇게 워밍 업을 했으니 레벨 업을 하러 가셔야죠."
("얼른 190레벨을 찍고 싶다.")
"키우는 입장도 마찬가지에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계획은 촉박해진다. 결말까지 가까워지기는커녕 백보 후퇴한 상황이다.
잠시 시간 배경을 많이 건너뛴다. 완전히 무의미한 시간들이라고는 말을 못하지만, 아무래도 나에게 있어서는 필요 없는 시간들이었기에 그렇다.
모두가 어떻게 준비하는지 설명할 길은 없다. 전지전능한 눈으로 세계를 지켜보는 것도 아닌 내 할 일이 바쁜지라 그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누군가 알려주기라도 한다면 재현을 해서 서술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다.
그런다고 기뻐할 사람은 몇몇 없을 것이다. 준비 기간에 있었던 준비 과정을 일일이 밝힌다면 그것대로 시큰둥한 전개도 없다. 무미건조한 일이 되는 건 나도 역시 싫기 때문에 여기서는 결단력 있는 중략이 어울린다고 본다.
그래서 때는 바야흐로 방학식 직전으로 넘어간다.
"의상은 완성되었어."
"그러면 입는 일만 남았네?"
"어디서 입을까?"
계획해야 할 거리가 더 늘어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절로 생각이 나겠거니 속 편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게 패착이다.
변명을 하기 이전에 얼마나 바쁠 수밖에 없는 상황인지 파악했으면 더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편한 곳에서?"
"내가 결정해도 돼?"
"입는 것은 너잖아?"
"그러면, 내 마음대로 할게."
"그래."
"그리고 좀 잘게."
자세만 봐도 자려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말하고 자버린다. 오늘 수업이 있는 것도 아니라지만, 평소에 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긴장감에 피로가 쌓여있었던 모양이다. 기어코 일을 마쳤으니 느슨해진 정신줄이 "루카"를 잠으로 이끈 것 같다.
이 이상 행복한 시간을 방해할 수 없어 나는 묵묵히 커뮤니티를 살피려고 폰을 꺼내든다.
"방학식에 폰을 뺏기는 일만큼 슬픈 일은 없겠지."
"융통성이 있으면 그러지 않겠죠. 그리고 오늘만큼은 그 융통성이 공식적으로 허락되는 자리죠. 저만 폰을 안 낸 건 아니죠."
"그 말대로 나도 폰이 있거든."
"항상 있었잖아요."
"그렇다고 해."
"그렇다고 하죠."
내친김에 하나 "여운하"에게 물어본다.
"오늘은 일찍 끝나니 남친 분은 안 오시나요."
"날카롭네. 그러나 큰 파티는 크리스마스에 열리니까 별 거 안 해. 이제 질문을 끝났니?"
"돌발성 질문이었죠."
"크리스마스 파티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지?"
"그거야 순탄하죠."
전혀 그렇지 않지만.
"빈말은 아니지?"
"굳이 말해서 집 꾸미기는 아직까지 실패 단계죠."
"의외네."
"제 입장에서는 당연하다고 보는 상황이죠."
전혀 견적을 못 내겠다. 과연 어떤 비율이어야 나만 만족하는 선이 아닌 디자인이 될지 이론을 배운 적도 없다. 예술에 이론이란 게 없다고는 하는데, 아예 문외한이라면 이론으로라도 배우고 싶은 심정이다.
"같이 할래?"
이상한 상황은 아니다. 사람이 잔다고 말했다고 해서 곧 1분 만에 잠에 들 수 있지는 않다. 피곤할 뿐이지 멀쩡하게 정신은 깨어있는 "루카"가 권유한다.
뭔가 미묘하다. 원래 그러려고 산 집이 맞는 것 같으면서도 뒤늦게 일이 성사되니 이미 열정은 식고 없어진 상황이다.
그럼에도 권유를 했다면 거절을 할 순 없다.
"지금이라도 무언가 들여놓지 않으면 부동산만 사들인 꼴이니까."
"그거, 가격이 상승해?"
"비유만 그렇고 갖고 있으면 세금으로 인벤토리를 축 내는 저주야."
"어떻게든 쓰지 않으면 손해구나."
"꾸미는 것도 비용이라도 월세보다는 적으니."
"여운하"가 개입한다.
"그거 월세가 드냐?"
"네."
한참 '라티온'을 같이 하고 있을 터인데도 안 하는 콘텐츠에 대해서는 모를 만도 하다. 콘텐츠가 많아질수록 알지 못하는 영역이란 늘어나는 법이다. 설령 스트리머라고 해서 '라티온'의 콘텐츠의 신이 되는 것은 "김귤" 같은 스트리머가 아니면 굳이 이루지 않아도 되는 희망사항이다.
"그런데, 비밀리에 진행하던 프로젝트는 어떻게 되었지?"
"이스터 에그 건은 좀 말이 많을 겁니다."
그동안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라 말해야 될 게 조금 있다.
미리 말하자면, 진전이 조금 있던 수준이 아니라 아예 그 창술사 파트를 넘겨버렸다. 그 정도로 성장했으니 크리스마스는 기대를 해도 좋다.
"오늘 오랜만에 '라티온'에 들어가는구나."
"루카" 스스로가 알 법도 한 사실이나 자각을 못했던 모양이다. 이제야 깨달은 비밀처럼 놀란 기색을 보인다.
"컨트롤을 잊어먹었으면 어떡하지."
"버튼만 눌러도 기억이 날 걸?"
"그런가요?"
"내가 장담하는 거니 믿어도 돼."
믿지 않을 리는 없다. 그래도 불안감은 "루카"도 이스터 에그 공략전에 참여할 인원이란 점에서 느끼는 부담감 때문이다. 이제 막 복귀하고 나서 큰일에 연루된다는 것 자체가 무서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느낀 부담감은 따로 있다.
("네가 "루카"구나?")
("저··· 안녕하세요.")
무려 "루카"와 아빠가 만나는 첫 시간인 게 부담이다.
그것도 게임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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