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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죽고 나니 마왕이 되어 있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Testable
그림/삽화
Zig
작품등록일 :
2019.02.24 00:11
최근연재일 :
2024.06.22 21:55
연재수 :
308 회
조회수 :
137,555
추천수 :
3,292
글자수 :
1,713,963

작성
19.08.29 00:16
조회
554
추천
12
글자
10쪽

그들의 이야기

DUMMY

“레이븐.”


남자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아, 백작님.”


저녁노을의 붉은 빛이 흘러들어오는 창을 등지고 있던 짧은 은발의 메이드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저택의 주인이자 그녀의 고용주인 중년 남자에게 인사를 했다.


예법도 복장도 완벽하지만 그녀의 정체가 메이드와는 한없이 떨어져 있다는 건 서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아가씨는 조금 전에 잠들었습니다, 백작님.”

“알고 있다. 그렇게나 내 딸이 걱정됐던 겐가, 계속 로자리아의 옆을 지키고...”

“최근에는 밤잠을 자주 설쳤으니까요.”


레이븐은 쑥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침대 위에서 곤히 잠든 백작가의 영애가 내는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최근에는 백작이 왕성으로 불려가는 일이 잦아 영애를 달래는 건 전부 레이븐의 몫이다.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됐는데도 자네는 변하지 않는군.”

“장소가 바뀌어도 네이아르 가에 속박되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거주지를 옳긴 건 내 의향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네이아르 백작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들은 원래 살던 저택이 아닌, 왕도의 저택으로 이사한지 오래였다. 저택에 속박당한 레이븐은 밖에 나갈 수 없었지만 그건 계약을 일시적으로 해제함으로써 해결했다. 새로운 저택에 다시 발이 묶인 레이븐은 이전처럼 자유를 상실한 채였다.


“하나 물어봐도 되겠나?”

“제가 대답할 수 있는 범위라면.”

“왕도까지 오는 도중에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그리 하지 않았나.”

“또 그 소리십니까.”


레이븐은 로자리아를 보며 지었던 미소를 지웠다. 대신 나타난 건 굳은 의지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가씨를 지키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정말, 아버님이 자네에 대해서 하던 이야기들이 전부 거짓말 같군.”


전장에서 살해당한 이들의 혼이 우연히 한데 합쳐 만들어진 원령. 마주치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는 살육의 화신으로 불리던 그녀의 변모가 언제 일어났는지 네이아르 백작은 몰랐다.


그저 어렴풋이 느끼는 건 어느 새인가 딸과 단둘이 두어도 전혀 불안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침공의 사후처리 문제로 왕성에 들렸다 왔네.”


백작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베르돌트 시 바깥으로는 이 알트레아 왕국에 생존자가 없다고 말씀하시더군. 군을 포함해서도 그렇다.”

“제국군은 성공적으로 쳐낸 겁니까?”

“정확히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들리는 소문으로는 모종의 마법이 사용됐다고 하네. 그 부근에는 아직도 치워야 할 제국군의 시체가 널려있어. 국군이 재기불가능이 된 상태에서 대군을 상대로 어떻게 그런 걸 해냈는지...”


레이븐은 놀라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년이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백작님.”

“꽤 쉽게 받아들이는군...? 자네는 분명 그와 둘이서 대면한 적이 있었지.”

“조심하십시오. 그건 아무리 좋게 보아도 인간이 아닙니다.”


레이븐이 딱딱하게 말했다.


“그건 분명 이 세계에 파멸을 불러올 존재. 옛 신화에서나 나올법한 괴물과 비슷한 것입니다. 저희가 아직 살아남은 이유는 단지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나도, 자네도 그에게 협력할 수밖에 없어... 겉뿐 만이라고는 하지만 치안과 질서가 어느 정도 유지되던 과거의 왕국은 어디까지나 쿠테타와 제국의 침공이 일어나기 전일세. 지금의 정세는 개판이야. 하다못해 국왕까지 그의 손아귀에 완전히 잡혀있지.”


아무 의자나 잡아다 앉은 백작의 표정은 무너져 있었다.


“더 무서운 것은 그의 도움 없이 알트레아 왕국은 재건될 수 없다는 생각이라네. 제국 덕분에 제대로 국경을 지키지도 못한 판국인 지금, 류셀 블레이크의 도움 없이는 한 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됐지. 내 딸을 구해줬다고 생각한 영웅은 어느새 내 딸을 볼모로 잡아 나를 이용하는 폭군이 되어버렸다는 걸세.”

“그가 괴물인 것은 확실하지만 저희에게까지 폭군일 필요는 없습니다, 백작님.”


네이아르 백작은 무슨 소리인가 싶어 레이븐을 보았다.


“그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 행동을 계속하면, 즉 배신만 하지 않으면 네이아르 가는 무너지지 않고 계속 서있을 수 있습니다.”

“그건 그의 의향을 올바르게 읽어야 가능한 행동이라는 걸 알고 얘기하는 겐가?”

“물론입니다.”

“레이븐.”


백작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자네는 그가 다음 취할 수가 무엇일거라고 생각하나?”

“제국에 사람을 보내겠죠. 지금은 상대가 절대로 강압적인 태도를 취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그걸 어떻게든 이용하려 할 겁니다.”

“자신의 나라에 침공한 적에게 손을 먼저 내밀 거라고?”

“그에게 인간의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는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백작님. 왕국의 절반이 사라졌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을 테죠.”


꽤 박정한 평가를 한 레이븐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지 이용할 겁니다. 그는 그런 부류의 존재라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확신했습니다. 단순한 부나 권력의 축적이라면 벌써 달성했을 테지만 그의 최종적인 목표는 그런 게 아닙니다.”

“그건 그가 자네처럼 인외의 존재이기에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뜻인가?”

“조금 다릅니다.”


레이븐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제가 상상하는 것만으로 몸이 저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가 이루려 하는 최종 목표는 저희들이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죠.”

“...”


백작은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저택에 있었을 뿐인 메이드가 얼마나 현 정세에 해박한지 깨달은 것이다. 지오돌프의 정권이 뒤집어진 순간부터 꿍꿍이를 알 수 없는 소년과 그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국왕 덕분에 끙끙대야 했던 자신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것은 그가 실행에 옮기는 것을 고민하고 있던 행동에 힘을 실어주었다.


“레이븐, 자네의 생각은 맞네. 회의를 엿들은 게 아닌지 의심될 정도야.”


백작은 일단 그렇게 운을 뗐다.


“왕성은 제국으로 사절을 보내기로 했지. 서로 크나큰 피해를 입었으니 내부 회의에서는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흘려버리자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네. 따질건 제대로 따지겠다고 했지만 교섭이 너무 빨리 진행되는 것도 사실이지. 그리고... 제국에 보낼 사절은 일단 나로 결정됐다네.”


저택의 주인이 장기간 나라를 떠나는 건 그만큼 일이 중대하다는 뜻. 레이븐은 차분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나라고 해서 하나뿐인 딸을 두고 적국에 가고 싶지 않지만 명령은 명령일세. 꽤 오랜 기간 동안 왕국을 비우게 될지도 몰라. 그렇다면 믿고 로자리아를 맡길 수 있는 건 자네밖에 없어.”

“안심하십시오. 일부러 부탁을 하시지 않아도 따님의 안전은 책임지겠습니다.”


든든한 대답을 듣고 백작은 안심했다.


“백작가 영애의 보호자가 집에만 묶어있으면 여러모로 불편하겠지. 이건... 작은 보답이라고 해도 좋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열쇠를 꺼냈다. 무척 오래된 것처럼 군데군데 녹이 슬어있는 물건을 보고 레이븐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건...”

“역시 한눈에 알아보았군.”


백작은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처럼 대대로 물려받은 가보를 쓰다듬었다.


“이 네이아르 가문이 자네에게 강제로 사슬을 달았을 때 계약의 매개체로 썼던 열쇠지. 이것 때문에 자네는 메이드인 척을 하며 오랜 세월을 속박당해 살아왔지 않은가.”

“어째서, 그런 것을 제게 보여주시는 겁니까.”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 무뚝뚝한 대답이 나왔지만 백작은 신경 쓰지 않았다.


“최근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나도 많은 생각을 해봤네. 그리고 내린 결론은 하나였어. 내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로자리아를 돌봐줄 수 있는 자는 역시 자네밖에 없다고.”


레이븐은 치마 앞단을 꽉 쥐었다.


“과분한 평가입니다. 저는 결국 사람 흉내를 내는 원령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아가씨가 걷는 길을 같이 걸을 자격은 없습니다.”


백작은 레이븐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넘겼다.


“언젠가부터 자네가 의무가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딸을 보살피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네. 그 아이도 친언니처럼 따르게 되었고. 네이아르 가의 남은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딸을 믿고 맡길 수 있는 건 레이븐, 그대뿐이다.”

“진심... 이시군요.”

“거짓을 말해서 뭐하겠나. 내게는 그럴 여유가 이제 없어. 메이드에게 백작가의 당주 대리 자리를 넘길 생각도 했다면 믿어주겠나? 내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의지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밖에 없어.”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레이븐은 백작이 작은 망치를 꺼내드는 걸 지켜보았다.


“그런 자네에게 더 이상 이런 낡은 저주는 필요 없지 않겠나.”


캉.


테이블에 놓인 열쇠에 망치가 내려쳐지고, 세월의 흐름을 견디지 못해 노후해있었던 그것은 둘로 조각났다.


그와 동시에 레이븐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떼어낼 수 없었던, 자신의 발목에 걸려있던 무형의 사슬이 없어진 걸 느꼈다.


네이아르 가문의 인간의 명에 절대적으로 따르고 해를 끼칠 수 없다는 주박도 풀렸다. 하지만 홀가분한 느낌 사이에는 신뢰라는 새로운 의무가 생겨있었다.


“이제 이 이름뿐인 가문에 매여 있던 시절은 끝났네, 레이븐. 메이드를 연기해야 할 필요도 없을 테지. 그러니 이건 사용인에게 내리는 명령이 아니고 하나의 아버지로서의 부탁일세.”


백작은 드문드문 하얗게 센 머리를 숙였다.


“출발하기 전에 딸의 얼굴을 직접 볼 용기가 없는 걸 용서해주게. 로자리아를 잘 부탁하네, 레이븐.”


갑작스레 되찾은 자유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레이븐은 금방 네이아르 가의 메이드로써 짓던 평소의 표정을 되찾았다.


“물론입니다, 백작님. 무사히 다녀오시기를 빌겠습니다.”


그 목소리에 자신을 강제로 속박해두고 있었던 인간의 핏줄에 대한 원망은 놀랍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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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잠입 +1 19.12.29 310 9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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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어딘가 수상한 나들이 계획 +1 19.12.18 303 8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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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천재 드워프 소녀 +1 19.12.11 330 7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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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섬광의 리우 에스타 +1 19.12.05 335 9 12쪽
90 첫 번째 마무리 +1 19.12.01 330 10 10쪽
89 뜻밖의 개입 +2 19.11.28 386 10 11쪽
88 인간 대 지옥개 +1 19.11.24 342 9 10쪽
87 난투 +2 19.11.21 332 10 9쪽
86 임박하는 갈등 +1 19.11.17 342 11 10쪽
85 왕국의 사절 +1 19.11.14 339 9 12쪽
84 천천히 흘러가는 밤 +1 19.11.10 334 10 10쪽
83 사소한 충돌 +2 19.11.07 349 11 11쪽
82 엘프와 술 +1 19.11.03 384 1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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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포로의 결정 +1 19.10.27 384 1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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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바르포르도 +1 19.10.20 388 13 10쪽
77 승전국의 대위 +1 19.10.17 406 10 10쪽
76 자격의 증명 +1 19.10.13 482 1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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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해제 +1 19.09.15 446 12 7쪽
67 장로회의 +1 19.09.12 467 10 9쪽
66 항구도시 프냐르 +1 19.09.09 482 11 11쪽
65 짧은 여정의 출발 +1 19.09.08 511 11 9쪽
64 하이엘프 +1 19.09.04 553 12 9쪽
63 사전 준비 +3 19.09.01 543 1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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