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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더 님의 서재입니다.

테르센트 연대기 ~ 네 개의 영혼, 한 개의 몸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퓨전

필더
작품등록일 :
2015.04.20 11:44
최근연재일 :
2015.10.21 00:48
연재수 :
1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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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글자수 :
99,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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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8.28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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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11화. 그리고 첫번째 싸움

DUMMY

8주 6일. 아침 식사는 메르데나씨의 특제 소스를 발라 구은 제비구이였다. 아이들이 덫을 쳐놓았는데, 이런 저런 짐승들이 걸렸다고 한다. 그 중에 나에게 돌아온 것은 매콤한 제비구이인데, 이게 뭐랄까, 엄청나게 맛있어서 1인분으로 할당된 세마리를 먹었는데도 식욕이 멈출 줄을 몰라서, 남는 음식이라고 담아준 토마토 샐러드를 먹었는데, 이것 또한 정말로 평소에 먹던 음식과 레벨이 다른 천상의 맛이었고, 그 비결은 바로 메르데나씨가 쌉쌀한 약초를 이용해 만든 소스가...


'언제까지 먹는 것 이야기만 하려고 하시는 건가요?'


페티마씨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나에게 뭐라고 한다.


'현실 도피 중이군, 이 녀석.'


아마데오가 날 비웃었다.


'어른이 그러면 못써요~'


카르멘도 혀를 차며 나를 타일렀다.


하지만 내부 주민들이 나를 좀 이해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뿐이다. 갑작스럽게 우리 영지의 인구가 몇 배로 늘었고, 그 늘어난 인구의 몇 배의 적이 다가오고 있으니 이 현실은 그냥 받아들일 만한 것이라 할 수 없지 않을까.




사건의 전말을 대충 논하면 이런 거다.


우리가 교전에서 승리한 지 사흘 후, 엄청난 무리의 사람들이 제2 자유시로 몰려왔다. 무기를 들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보다 그들은 한없이 민간인에 가까웠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잔뜩 경계하고 내가 앞서 나가자, 가장 앞에 선 사람이 날 끌어안고 외쳤다.


"오오, 말릭! 당신을 다시 만난 것은 신의 뜻이요! 신께 감사를!"


전에 만났을 때보다 30배는 초췌해진 가탄씨가 내 뺨에 까끌까끌한 턱수염이 방해되는 키스를 퍼붓는 동안 난 참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오갔다.


'이 사람이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은 안하셨어요.'


'이 녀석의 키스는 여전히 기분나쁘군, 하는 생각을 했었지.'


'가탄씨 불쌍해요~'


"말릭, 우리 역시 상단의 계책에 넘어가고 말았소. 부디 자비롭게 용서해주시길 바라오. 그대를 위험에 빠뜨린 것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오."


"아뇨, 그건 괜찮습니다. 그보다..."


"오오, 용서해주다니! 신이시여, 당신의 가호가 이 사람과 함께하기를!"


"그보다..."


"말릭, 당신은 정말로 신의 사자, 아니, 신의 아들임이 틀림없소! 당신과 같은 사람을 만나게 해주신 신께 지금부터 감사기도를..."


"아뇨, 그건 이따가 올리고, 지금 이 사람들은 다 뭐죠?"


말릭씨가 큰 소리로 외치는 동안. 폭풍우에 떠내려 온것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할머니와 일곱 아이들을 필두로, 거의 천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우리의 도시 입구를 지나치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이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교전 수칙을 잘 지켜서 먼저 쏘지는 않아주었다.


"들어주시오, 말릭. 우리 동티프소 연합은 계급사회인데, 이들은 그중에서 가장 낮은 계급인 수드라, 라고 불린다오."


가탄씨는 눈물을 글썽이며 긴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중간중간마다 난민들의 울음소리나 신음소리가 신경쓰여서 집중 할 수 없었고, 굶주린 사내아이들이 우리가 키우는 닭들을 시선으로 튀겨먹을 것 같은 상황에 빠질 때쯤에는 가탄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도 않고 있었다.


'수드라의 사람들은 말릭씨를 숭상하게 된 것 같네요.'


날 대신해서 열심히 귀기울이던 페티마씨가 요약해주었다.


'이들도 전쟁에 이용당했던 것 같네요. 동티프소 연합의 상단들에 의해서요. 수드라 계급은 저도 들어본 적이 있어요. 동티프소 연합을 구성하는 계층중에 최하층인데, 가난하면 수드라가 된다고 해요. 티프소 제1 시대 때부터 이어져온 종교의 일종이죠.'


응? 가난으로 계급이 정해지는 것이 가능한가?


'동티프소 연합은 경제를 힘으로 보거든요. 수드라가 되면 사실상 돈을 벌 방법이 없으니, 영원히 하층민으로 살아야 하는 거죠. 이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억압하는 자들과 맞서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 것 같아요.'


그건 참 딱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다 도망쳐오면 그것도 나름 문제인데.


"말릭, 나의 형제여. 당신을 위해 우리는 무엇이든 할 것이오."


그럼 얼른 짐싸서 다시 돌아가줬으면 좋겠다.


"부디 우리를 죽음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아주시오."


가탄씨는 연극조의 말투로 멋드러지게 말씀하셨다. 그때 에텔이 내 옷깃을 꾹꾹 잡아당긴다음 내 귀에 속삭여 주었던 것이다.


"카르멘, 새들이 그러는데, 티프소의 군인들이 아주 많이 오고 있어. 숲의 곳곳에 티프소의 군인들 밖에 없다고 해. 삼 천 명도 넘는대."




자아, 그래서 내 상태가 이런 것이다. 겨우 며칠만에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이럴 때일 수록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해요~ 자아, 심호흡을 해보세요~'


카르멘의 말대로 난 심호흡을 하기 위해 숨을 들이마셨지만, 그래도 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난 에텔에게 소곤소곤 물었다.


"적들이 어디에 있지?"


에텔은 하늘을 나는 새들을 빤히 바라보다가, "저 쪽 산 너머에."라고 절망적인 대답을 안겨주었다. 그녀가 가리킨 산은 겨우 1시간 거리로, 방어진을 짤 시간조차 없었다. 이제는 누가 봐도 대규모 전투가 되어버린 것이다. 안싸우고 싶지만, 동티프소 연합이 우릴 그렇게 간단히 포기해줄 것 같지는 않다.


"저기, 가탄씨. 일단 전투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이끌고 온 사람들 중에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형제여. 우리들은 우리 모두를 지키기 위해 신의 이름을 걸고 싸울 것입니다."


그는 호언장담하며 난민들 사이에서 젊은이들에게 뭔가 열심히 외쳐댔다. 잠시후 굉장히 의욕없어보이는 젊은이들이 걸어나왔고, 그는 신에게 감사기도를 끝없이 읊어대며 새로운 부대가 편성된 것에 감사했다. 숫자는 200명 정도로, 숫자만큼은 우리 아이들보다 많긴 하지만, 사기도 바닥을 치고 있고, 무기도 구형 라이플, 심지어 일부는 무기조차 안들고 있다.


'이제 우리 모두 저 세상에서 만나요~'


카르멘, 불길한 소리는 하지 말자.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구. 적의 수는 대략 3천이고, 지금 산을 우회해서 오는 중이다. 우리는 350명이나 있으니까 아직 10배차이는 아니잖아.


'지나치게 긍정적이네요.'


페티마씨가 제대로 된 딴죽을 걸어준다. 메르데나씨는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새로 들어온 사람들에게 우호적으로 식량을 배급하고 있다. 저 사람도 현실도피를 하는 중인건가. 왠지 아낌없이 나눠주는게 당장 잘 먹고 함께 죽자는 기분인거 같다.


'잘 들어라, 애송아. 우리가 해야할 일은 현실도피가 아니야. 적을 모조리 격파하는 거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우린 겨우 350명...


'남은 난민들의 수를 잊지마. 우린 천여명의 민간인도 있어.'


무기를 쥐어준다 해도 저기 드러누워서 호흡만 간신히 이어가는 것 처럼 보이는 할머니나, 메르데나씨에게 과자를 하나 받고 좋아하는 4살짜리 꼬마가 싸울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데. 게다가 무기도 없잖아.'


"진정해라, 애송아. 우린 이길 수 있어. 넌 항상 리더로써 그렇게 믿어야 한다.'


아마데오는 늘 그렇듯이 진득하게 잘난 척을 했다. 이길 수 있다 믿는 것만으로 이길 수 있다면 나도 얼마든지 믿겠지만, 현실은 믿음으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믿지 않으면 시작조차 되지 않아. 일단 믿어라. 나머지는 최선을 다하는 것 뿐이지.'


아마데오는 드물게 상식적인 조언을 하며 낄낄거렸다. 그리고는 그는 지금부터의 방침을 나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난 아마데오의 작전을 들은 다음, "그게 가능한건가?"라든가, "그거 안 될 것 같은데."라든가를 중얼거리며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는 가탄씨의 어깨를 톡톡 쳐서 날 보게 만들었다.


"가탄씨, 일단 이기는 법이 있습니다."


"오오! 말릭, 당신은 정말 신의 천사로군요. 이곳으로 와서 정말 다행입니다. 이 모든 것이 신의..."


"다만, 지금 추격해 오는 적을 격퇴려면 여러분들이 절 믿어주셔야 합니다."


난 그의 말을 얼른 자르고, "믿어주실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물론입니다, 말릭.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이지요."


가탄씨는 날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 만성 피로에 시달리는 남자의 얼굴은 제법 신뢰를 준다. 어느 쪽이냐하면, 이 남자는 아무리 속아도 타인을 속일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


'그럼 단순히 바보잖아요~?'


뭐, 그런 식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뒤통수를 맞을 일이 없다는 건 아무튼 좋게 해석할 수도 있잖아.


난 그에게 작전 설명을 시작했다. 머릿속은 어느 때보다도 맑다. 점점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도 든다. 설명을 들은 가탄씨는 다시 신의 이름을 부르며 날 칭송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지시를 따르겠다는 뜻이겠지.


'해봐라, 애송아. 너의 첫번째 전쟁이다.'


아마데오는 왠지 평소와 다르게 즐거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주었다.




모든 작전은 아마데오가 세워준 그대로 였다. 내가 한 일은 그의 지시에 따라 민간인들을 보내고, 아이들을 뽑아 각 지역에 담당자를 정하고, 병력을 이동시킨 것 뿐으로, 전쟁에 한하여 이 할아버지는 엄청나게 빨리 머리를 굴리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내리는 지시는 상대방의 움직임까지 읽고 내리고 있는 것이니, 이 전쟁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민간인들은 전투는 커녕 서있는 것만으로도 빈혈을 일으키며 쓰러질만큼 상황이 안좋은데, 이렇게 전장에 마구 투입해도 괜찮은건가?


'우리의 아이들은 좋은 지휘관이 될테니까 상관없어. 지휘관이 훌륭하면 그 아래의 병사들은 어떻게든 돌아간다. 날 믿어라.'


믿는다해도 말이지, 무슨 구식 군인같은 발언이람. 아마데오의 전략은 좋게말하면 기만 전술이고, 나쁘게 말하면 "져도 내 책임 아님!"에 가깝다.


눈 앞에 보이는 이름 없는 산을...


'익사이팅 헤븐즈 마운틴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산 꼭대기의 구름이 천사의 날개 같지 않나요~?'


익사이팅 헤븐즈 마운틴을 기점으로 적들은 좌우로 병력을 나누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가 한 일은 그중에 한쪽을 완벽하게 냅두고...


'냅둔게 아니야, 애송아. 분명히 막을 병력을 배치했다.'


민간인을 병력취급해봐야 그게 정말 가능할지 어쩔지... 사람들을 보내서 숲의 한복판에서 교전을 유발하게 하였다. 그들은 노인이나 병든 사람이나, 심지어 아이도 있었는데, 무기라고 쥐어준 것이 크고 작은 쇳조각이다. 그걸로 뭘 할 수 있는거지?


'두드려서 소리를 낼 수 있지.'


소리라니... 음파로 공격하는 건가?


'그럴리가 없잖아, 멍청아.'


아마데오가 날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이해해 달라구. 나무로 벙커를 급조하고, 그 뒤에서 쇳소리만 내면서 대기하는 걸로 적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에 난 머리가 그리 좋지 않다.


'그냥 쇳소리가 아냐, 애송아. 정글림에서는 소리가 공명하지. 적들이 그 소리를 듣고도 전진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할 거다. 중간 중간에 사격도 섞을테고 말이야.'


정말 그렇게 된다면 다행이지만... 솔직히 나라고 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아마데오의 의견을 뚝심있게 믿는 수밖에.


'그래도 이쪽에는 제대로 된 전력이 모였네요.'


페티마씨가 용기를 주려는 듯이 이야기한다.


그래도 상대는 천 오백에, 우리는 350명이지만.


'다섯배도 안되네요~ 차이가 확 줄었네요~'


카르멘이 언젠가의 내 긍정과 동일한 레벨의 긍정성을 보여주었다.


'가탄과 그의 부하들은 정면에서 적과 맞서고, 우리는 6개 분대로 나누어 적의 측후방을 노린다. 각각의 대장은 알시아, 피델, 헥터...'


아마데오가 하는 말을 나는 축음기처럼 모두에게 전했다. 가탄씨는 하늘을 향해 종교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하고 몇번이나 들었던 말을 반복했다. 그래, 신이 있다면 제발 그 축복을 나눠줬으면 좋겠다.


'정신 차려라, 애송아. 너에게 필요한건 신의 축복이 아니라 너 자신의 행동력이다. 이 작전은 네 놈이 없으면 실패할 수 밖에 없어.'


알고 있다고, 그정도 쯤은. 한마디로 적진으로 뛰어들어서 날뛰라는 거잖아?


'바보냐, 네놈은. 그러면 크로스포인트에 들어가게 되잖아. 아군과 적군이 쏜 총알을 모두 맞을 셈이냐?'


그럼 난 뭘 하면 되지?


'전장은 정글림이다. 적들이 아무리 많아도 기척과 시야가 차단되지. 네가 할 일은 아군의 분대의 이동경로 보호, 그리고 가급적 적의 수를 줄이는 것이다. 적에게 발각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말이지.'


그게 가능할까? 적들 몰래 움직이는 거야 그렇다 쳐도, 총성까지는 감출 수가 없을텐데.


'굳이 총을 쏠 필요는 없겠지. 리베리아제 장검같은게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 맨손으로 시작하자. 상황을 봐서 적의 무기를 빼앗도록 하지. 저 에텔이란 아이는 널 따라다니게 해라. 도움이 될 거다.'


에텔은 까만 눈동자를 두리번 거리다가 날 보고 생긋 웃는다. 분명히 에텔은 동물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이 숲은 동물의 천지이고... 그 말은...


'적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거지.'


하트비트 레이더 같은 역할이로군.


'자아, 움직여. 네 녀석이 제일 앞장서야한다.'


아마데오는 왠지 신나보인다. 전생에 전쟁광이었을지도 모른다. 에텔은 지나가던 산새를 불러서 잠시 지지배배거리는 소리를 듣다가, 근접한 적 3개 분대의 정보를 알려주었다. 난 아이들을 교전지역으로 이동시키고, 내가 맡은 바 임무를 다하기 위해 숲속으로 들어갔다.


어제의 전리품인 군복을 입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단은 위장복도 되고, 티프소인들에게 혼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아마데오가 추천한 이유지만, 그것과는 다르게 왠지 모를 친숙함이 든다. 자연스럽게 군모를 꾹 눌러쓰자 아주 편안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분명 난 전에 군인이었구나.


'전부터 그렇다고 이야기했지 않냐.'


그래도 듣는 것과 실제 느끼는 건 다르니까. 군인이라면 어떤 일을 한거지?


'말했듯이, 넌 별거 아닌 군인이었다. 그 뿐이야.'


아마데오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래, 내가 어떤 사람인 것은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해야할 일이 있으니까.


"저쪽에서 오고 있어, 카르멘."


에텔이 바닥을 기어다니는 개미와 대화를 나누더니... 개미와도 말이 통하나?!... 아무튼 그렇게 말했다.


나무 그늘에 에텔과 함께 몸을 숨기고 기척을 죽인 체로 적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정글림 사이에 길을 만들며 다가오는 한 무리는 한 소대... 대략 12명이 움직이고 있다. 무전기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동티프소 연합은 개인 무기계통은 제법 그럴싸하지만, 통신장비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


'아니, 차라리 우리가 유리하다. 우리는 동물들이 정보를 전해주니까.'


아마데오가 노린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난 나뭇가지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이동하는 적의 측면으로 다가갔다. 그 다음 필요한 시간은 1초 이하. 풀숲 앞을 지나는 적의 입과 목을 동시에 잡아 숲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 목을 비트는 것 역시 1초 이하. 말 그대로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나의 손에 준 힘은 극소. 계란을 깨뜨리는 정도의 힘조차도 넣지 않았다. 사람의 목숨이란 건 이렇게 덧없는 거였나. 난 두리번 거리며 동료를 찾고 있는 다음 적을 보고 몸을 최대한 숙였다. 소총을 들고 엉뚱한 덤불을 겨누고 있는 그의 등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툭, 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이 사람은 정말 죽은걸까? 인형을 분해하는 기분이 든다.


'애송아, 칼을 써라.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거다.'


아마데오의 말대로 나는 적의 허리춤에 있던 단검을 들었다. 티프소제 단검은 소리 없이 뽑혔다. 날카롭기 그지 없다. 이걸로 폐를 찌르면 비명조차 지를 수 없겠지. 난 분대원을 찾는 적들에게 다가갔다. 정글림은 나의 모습을 감춰준다.


에텔은 원숭이에게 적의 위치를 물어보고 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행동력. 적에게 다가가서 뒤에서 끌어안고 목을 베어내고 피가 흩뿌려지는 것을 본다.


적에게 다가가서 입을 막으면서 폐를 찌르고 단검을 돌려잡고 목을 벤다. 비명을 지르려는 적을 향해 단검을 던져서 이마를 꿰뚫고, 사격을 하려는 적에게 다가가서 강하게 후려쳐서 목을 꺾어버린다.


반격은 없다. 꿈을 꾸는 것 같다. 붕 떠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정신차려라. 뭘 멋대로 폭주하고 있는게냐?'


난 적들에게 어떻게 비춰질까. 검을 휘둘러 효과적으로 사람을 죽이고, 목을 비틀고 적의 뒤로 다가가서 울고 있는 적의 머리를 잘라내고 폐를 찌르고 심장을 관통하고 에텔이 설명해준 곳으로 가고 검을 거꾸로 들고 머리를 자르고 적을 발견하고 적의 등 뒤로 소리죽여 다가가고 소리죽여 웃고 목을 베고 피의 향기를 맡고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웃고 적의 머리를 베어내고 그만둬요, 말릭씨 사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아이들이 전투를 시작한 모양.


'그만 두세요!'


난 다음 적의 위치를 듣고 적의 목을 그만두라고요, 말릭씨, 자신을 잃으면 안돼요, 적의 목을 베어내고 베어내고 베어내고 피의 맛이 난다 목을 비틀고, 날 향해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고 날 겨눈 총구를 붙잡아 옆의 적에게 겨누어 방아쇠를 당기고 크, 이거 멋지잖아 나 엄청나게 강해 집중하는 거다 적을 죽이는 것에만.


'그만둬라, 말릭!'


벽력같은 목소리에 난 눈을 번쩍 떴다. 아니, 눈은 분명히 뜨고 있었지만, 아무튼 눈을 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방금은 아마데오의 목소리였나?


'그래. 내 목소리였겠지.'


아마데오는 투덜거리고 있었다. 왠지 페티마씨의 흐느끼는 소리도 들리는 것같다. 뭐지? 왜 울고 있지?


'그건, 말릭 오빠가 대답을 하지 않아서에요~'


카르멘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다. 난 고개를 갸웃할 수 밖에 없다. 내가 대답을 안했다는 것이 무슨 뜻이지?


'뭐, 됐어. 아무튼 주위를 살펴라, 애송아.'


난 아마데오의 말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옆에서 날 올려다보고 있는 에텔. 작은 아이는 날 보더니 생긋 웃는다. 이건 평소와 같다. 에텔은 특히나 잘 웃는 편이지.


'그거 말고, 다른 걸 봐.'


시야가 점점 확장된다. 어림잡아 30명쯤 되는 사람들이 죽어있다. 아니, 시야 안에 들어있는 사람만 그정도이고, 숲 여기저기에는 훨씬 많은 사람이 죽어있을 것이다.


'산의 서쪽 전투는 끝났다. 이제 아이들을 모아라, 말릭.'


아마데오는 나에게 지시했다. 난 내 손을 바라보았다. 손은 붉다. 나의 피는 아니겠지. 내 몸은 생채기 하나 없다. 내가 죽인 기억이 또렷히 머리에 남아있는데도, 왠지 그 모든 것이 나의 기억이 아닌 것 같다. 전투가 끝났다는 것은 서쪽의 적들을 모두 쫓아냈다는 뜻인가?


'아니.'


아마데오는 단언했다.


'모두 죽었다.'


아아, 그렇군.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럴거라 예상했던 일이기도 하다. 숫자의 열세를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내가 부족한 병력을 커버하는 것. 한 명의 병사가 전쟁을 바꿀수는 없다는 말이 있다. 개인전술은 아무리 강력해도 전략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의 존재는 그런 상식 밖의 것이다. 분명히 날 향해 날아오는 총알을 본 기억이 난다. 날 보고 괴물이라 외치는 병사들의 소리가 귓가에 남아있다. 난 수백의 병사들을 내 손으로 죽인 것이다. 중간에 페티마씨의 외침도 섞여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녀는 날 말리려고 한 것 같다.


'말리려고 했어요.'


완전히 울먹이는, 어찌보면 토라진 목소리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가슴을 후벼판다. 인간으로써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하는 감성이 깨져나가는 것 같다. 내가 죽인 사람들에게도 모두 가족이 있었을 것이다. 각자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애송아, 네 감성 포인트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싸우지 않았다면 모두가 죽었다. 모두를 살리기 위해 사람을 몇 천명을 죽이는 것 정도의 각오는 하고 있어라. 이건 전쟁이야. 그 정도는 각오가 되어 있을 터이다.'


에텔은 내 옷깃을 꾹꾹 잡아당긴 다음, 나에게 속삭이듯 "카르멘, 저쪽에 적이 더 있어."라고 말했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은 산의 동쪽. 적은 이제 겨우 절반만 해치웠을 뿐이다. 민간인들이 시간을 벌고 있지만,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


'뭐, 이정도만 해도 적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준 거겠지. 민간인들을 후퇴시켜라. 적들도 양공이 실패한 이상 물러날 거야.'


아마데오는 의외의 말을 한다. 당연히 모조리 없애버리라든가 이야기 할 줄 알았는데.


'네 놈 컨디션이 안좋아지는 중이라서, 더는 안하는 편이 좋아.'


내 컨디션이 안좋아지는 중인가? 난 전혀 모르겠는데.


'네가 영혼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말이야, 육체는 한정되어있는 힘밖에 낼 수 없어. 무리하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영업정지다.'


난 아마데오가 말한대로 했다. 민간인 부대를 퇴각시킨 다음 아이들 분대로 경비를 서게하고, 난 마을로 돌아갔다. 메르데나씨는 얼른 달려와 나의 무사를 확인하고 바나나잎으로 내 얼굴과 손을 닦아주었다.


가탄씨는 날 칭송하며 마을을 위한 충성을 다짐했다. 그의 부대는 숲에서 용감히 싸운 모양이다. 몇 명은 죽고, 몇 명은 다쳤지만 대부분 무사한 듯하다. 그리고 물을 떠서 세수를 하려고 하는 순간, 내가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사람의 살점이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피를 머리부터 뒤집어 쓰고 있었다. 구역질이 났다. 머리가 핑핑 돈다.


페티마씨가 무언가 말을 하고 있다. 진심으로 염려하고 있는 것 같다.


아마데오는 평소보다 훨씬 따뜻한 목소리로 빈정대고 있다.


카르멘은 평소와 같이 웃고 있다.


에텔이 날 부축해주는 것을 느낀다.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다. 난 몇 번 녹슨 기계같은 소리를 내고, 의식이 급속도로 날아가버렸다.


'말릭씨, 미안해요, 미안해요...'


페티마씨가 사과하는 목소리가 가장 마지막에 들렸다. 그건 조금, 뭐랄까. 안도가 되었다.


'사랑이군요~ 둘째는 딸이면 좋겠다~'


'나약한 녀석. 본성은 어쩔 수 없군.'


다시 깨어나면 모두 잊을 수 있을까? 무리겠지. 이제 겨우 첫번째 싸움을 시작한 거니까.


작가의말

티프소의 농작물 중 토마토는 옥수수와 더불어 가장 마지막까지 남았던 작물입니다. 티프소를 떠나기 직전까지도 유전학자들은 토마토가 인류를 책임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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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센트 연대기 ~ 네 개의 영혼, 한 개의 몸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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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4화. 하이데바라드를 점령하는 가장 쉬운 방법 -3 +1 15.10.21 166 1 17쪽
13 13화. 하이데바라드를 점령하는 가장 쉬운 방법 -2 15.10.19 193 0 16쪽
12 12화. 하이데바라드를 점령하는 가장 쉬운 방법 -1 15.09.11 145 0 8쪽
» 11화. 그리고 첫번째 싸움 15.08.28 96 1 23쪽
10 10화. 첫번째 교전 15.08.26 118 1 9쪽
9 9화. 새로운 무기를 -2 15.07.22 224 1 13쪽
8 8화. 새로운 무기를 -1 15.05.22 230 1 12쪽
7 7화. 미끼가 사는 방법 -2 15.05.06 149 1 17쪽
6 6화. 미끼가 사는 방법 -1 15.05.06 163 1 20쪽
5 5화. 원조 15.05.01 182 1 16쪽
4 4화. 새로운 가족 15.04.20 258 1 17쪽
3 3화. 정착자와 해적 15.04.20 348 1 22쪽
2 2화. 그리고 출항 15.04.20 192 1 10쪽
1 1화. 네 개의 영혼과 한 개의 몸 15.04.20 227 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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