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필더 님의 서재입니다.

테르센트 연대기 ~ 붉은 거인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퓨전

필더
작품등록일 :
2015.04.20 11:32
최근연재일 :
2016.01.18 02:00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5,705
추천수 :
37
글자수 :
143,055

작성
15.04.20 12:31
조회
266
추천
3
글자
23쪽

3화. 나보 수비전

DUMMY

알피엑시 대륙의 서쪽을 차지하고 있는 "토뷔스 평야"는 테르센트에서도 손에 꼽는 곡창지대였다. 이 땅은 풍요로운 식량 덕분에 오래전부터 인구가 밀집되어 있었는데, 로드리제로스 시절에는 수 천 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여들며 번영기를 누렸다. 하지만 티프소의 세 차례 침공이 이 지역을 강타한 다음 상황은 180도 바뀌어버렸다.


평야는 도시라 부를만한 것이 남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었고, 살아 남은 사람들은 이 땅을 떠났다. 한참 동안이나 토뷔스에는 백 가구도 안되는 작은 마을만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다.


멸망했던 대지에 다시 사람들이 모여든 것은 10년 전이었다. 토뷔스 평야의 부흥을 이끈 사람은 농사꾼 출신의 지도자 자비엘 제로니모였는데, 그는 다른 사람들은 감히 시도하지 않은 방법으로 땅을 되살렸다. 자신들을 황폐하게 만든 티프소를 배제하는 대신 그들의 농업기술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체계적인 생산과 비료기술의 도입으로 토뷔스 지역에서는 막대한 이익이 창출되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자리잡지 못했던 유목민들을 무한대에 가깝게 받아들여 토뷔스는 이제 다시 한 번의 경제적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들은 선량했고, 의지가 있었다. 다만 그들은 이 평화의 시기를 너무 신뢰하였고, 그 잘못된 믿음은 재앙이 되어 나타났다.


2년 전 다리오 왕이 즉위했을 때부터 그의 정치를 비판하던 자비엘은 1028년 첫번째 주, 다리오 왕의 사촌 동생인 발라 모다스가 거병했다는 소식을 듣자 진심으로 기뻐했다.


"다리오는 폭군이요, 발라는 성군이다. 정의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와 뜻을 같이 할 것이 아닌가?"


근처의 대부분의 상단이 다리오 왕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공식적으로 그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하지 못한 것은 그에게 불운이었다.


"자비엘, 그 농사꾼 늙은이가 사리분별을 못할 정도로 나이를 처 먹었구나!"


다리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길길이 날뛰며 소리질렀다.


"당장 서부 상단에 연락하여 그 놈의 목을 베라고 명해라!"


다리오가 그렇게 말하기를 기다리고만 있던 근처의 상단들은 즉시 용병을 고용하여 적극적으로 토뷔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애초 이 넓은 곡창지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상단들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들은 앞다투어 토뷔스의 마차를 습격했는데, 이중에 가장 본격적으로 움직인 것은 브이젠 상단이었다.


"단순히 교역로만 공격할 게 아니라, 토뷔스의 땅을 얻으면 될 것 아닌가?"


상단장 위센 브이젠은 즉시 사업의 상당수를 매각하여 큰 돈을 만든다음, 대륙에서도 악명높은 용병부대인 켄츄게이트를 고용했다. 용병단의 대장 인피던은 정중히 상단사람들에게 본인들의 머스킷티어가 얼마나 강한가를 설명하고 토뷔스를 얻게 될거라 자신했다. 위센은 토뷔스가 들어온다는 말에 입이 귀에 걸려서는 말했다.


"좋소! 그 땅만 나에게 주면 되오! 그 외의 것은 마음대로 하시오!"


"그렇다면 이 전쟁을 저에게 일임해주시겠습니까?"


"물론이오! 그대에게 모든 것을 맡기겠소!"


인피던은 이 말을 기다려왔다는 것처럼 즉시 전군을 출격시켰다. 이 용병들은 목장이 끝없이 이어져있는 토뷔스를 향해 진격하여 첫번째 도시인 메렌스에 이르렀다. 도시의 수비를 담당하던 좁 후아나는 켄츄게이트 용병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자신과 가족의 재산을 건드리지 않는 조건으로 항복해버렸다.


"싸우지 않고 항복을 하다니, 재미없는 놈이군."


인피던은 진심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부하들에게 약탈을 허용했다.


"모든 것을 뺏어라! 저항하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라!"


그의 부하들은 이 명령을 제대로 수행했다.




단 하루 사이에 죽은 사람이 5천명이 넘었다. 아름다운 농업도시였던 메렌스는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토뷔스를 공격하려고 했던 주변의 상단에서도 브이젠 상단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위센조차도 이 정도의 피비린내는 기가 막힌 일이었기에 즉시 전령을 보내 인피던에게 약탈을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인피던은 코웃음을 쳤다.


"물론 우리는 용병이고, 돈을 받고 싸우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에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기는 건 아니야. 상인나으리에게 전해라. 땅은 주겠다고. 나는 지금 매우 기분이 좋거든. 한번 더 날 방해하면... 너도 이렇게 만들어주지."


그는 쪼개진 아이의 시신의 절단면을 맨발로 질근질근 밟으며 소리내어 웃었다. 브이젠 상단은 이 용병부대에 대해 통제력을 잃었고, 켄츄게이트는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자비엘 제로니모는 스스로 병력을 모으면서도 사방으로 원군을 요청했는데, 지독한 잔인함에 질린 다른 상단들은 선뜻 나서질 못했다. 그나마 풋남 상단은 그들을 돕기로 하고 의무대를 뽑아 보냈지만, 전쟁을 앞둔 토뷔스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원군의 요청은 가장 멀리 있던 피아조 상단에게도 도착했다.




"자비엘 아저씨라면 아는 사이야."라고 예리엘이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잠시 간격을 둔 다음, "굉장히 순박한 아저씨였어."라고 묘한 평가를 했다.


"순박하다니?"


게랄드가 하품을 꾹 참으며 물었다.


"평생 법없이 살만한 분이었지. 상인이라기 보다는 농부야."


예리엘은 대답했지만 게랄드는 듣는 둥 마는 둥했다. 최근 상단의 업무가 급증했고, 거기에 공부를 겸행하고 있는데다 긴급회의가 오전 3시에 열린 것까지 모두 잠을 이기는데에는 유용하지 못했다. 야간반은 말짱히 깨어있었지만, 주간에 일했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수마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상황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예리엘은 자는 사람까지 모두 깨워 소집한 것이다. 파자마 차림으로 간부막사에 온 마렌과 셰르는 큰 배게와 담요를 가지고 와서 의자에 둘둘 감고 맘편이 자고 있었다. 게랄드는 연신 눈을 비비며 예리엘에게 집중하려 했지만, 상단 생활로 오랜 시간 규칙적인 삶을 산 그에게는 이 상황에 굉장히 힘들었다. 아미는 아예 회의장에 나타나지도 않음으로 예리엘의 분노를 최대치까지 끌어올렸다.


"저기, 중대한 상황인데, 이렇게 자고 있으면..."


보다못한 레인이 핀잔을 주었지만 아무도 반응이 없자 예리엘은 이마 비슷한 곳에서 빠직, 하는 소리를 내더니 밖으로 나갔다.


"... 폭풍이 불겠네요."


늦은 밤인데도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레인은 조용히 책과 서류를 들고 일어나서 구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예리엘은 물을 담은 양동이를 들고 들어왔다. 잠시후 물을 담은 바가지가 회의장 안을 날아다녔다.




"... 어쨌든 풋남 상단이 위험하면 도우러 가야지."


게랄드가 상의를 잡아 당겨 비틀면서 말했다. 물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으... 이불이 젖었어요."


"으... 배게가 젖었어요."


마렌과 셰르는 들릴랑말랑한 목소리로 칭얼댔다.


"... 직접 와서 깨워주셔서 감사해요..."


아미는 자신의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차가운 물망울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예리엘은 곤히 자고 있는 아미의 머리에 양동이를 들이부었던 것이다.


"즉시 준비하라구! 마렌과 셰르는 상단을 잘 지키고 있어! 회계장부 제대로 써놓고! 아미와 리바이어던은 병력이동을 준비해요! 게랄드! 근처 상단으로는 즉시 길을 내달라는 공문을 보내! 빨리빨리 움직여요!"


예리엘이 여전히 이마에 세 줄의 주름을 잡은 채로 큰 소리로 외쳤다.


피아조 상단의 능력은 신속함으로는 다른 집단과 비교할 바가 되지 못했다. 3시부터 겨우 2시간만에 장기간 출정준비를 끝마쳤고, 준비를 마치자마자 즉시 부대를 나누어 출격을 했다. 해가 뜨기 전에는 이미 전 부대가 상단 막사를 떠날 수 있을 정도였다.


"훈련된 군대라도 이렇게 빠른 출격은 못할겁니다."


리바이어던이 감탄하여 말했다. 원래 풋남상단 소속이었던 그는 이 곳에서 일하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다. 보통 상단의 운영에 익숙해있던 그에게는 이런 병력의 출격이 가능한 상단은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우린 항상 전투준비를 해두거든요."


"그건 훌륭합니다만, 도적을 대비하기 위해서입니까?"


예리엘은 피식 웃었다.


"그저 적이 많을 뿐이에요."


--------------------


피아조 상단은 출전병력만 1500명으로, 상단 소속 용병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무력집단이었다. 보직에 구애받지 않는 병장기를 원하는대로 사용하게 했는데, 임무에 맞춘 전술을 세우기 보다는 다재다능한 창술가인 예리엘과 아무 무기나 손에 잡히는대로 휘두를 수 있는 게랄드의 무력에 기반하여 높은 사기로 승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두 사람은 개인의 전투능력은 압도적이었지만 전장을 파악하는 책략가의 위치에는 설 겨를이 없었다. 전략적인 면을 지원할 수 있는 레인은 이번 출전에서 아예 빠졌는데, 예리엘은 상단의 2인자라고 부를 수 있는 레인에게 후방을 맡겼다. 애초 병참선을 길게 유지하지 않으면 장거리 원정이 실패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던 것이다.


"인재가 부족해."


출격 이튿날, 점심식사 도중 그녀가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이상하게 싸움 잘하는 사람은 많은데, 머리 쓰는 사람이 없어. 군사적 능력이 있는 참모가 두세명... 최소한 한명만 원정에 동참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게랄드는 잠시 생각하다가 정말 궁금해져서 물어보았다.


"예리엘. 우린 상단인거 알지?"


상단에 군사전문가가 있는 것이 이상하다는 뜻이었지만, 예리엘의 해석은 창조적이었다.


"그렇구나, 게랄드! 좋아. 영입을 해야겠어. 이번 원정이 끝나면... 연봉 1만정도로... 그래. 우린 상단이었어. 없으면 사면 되는거야. 이왕이면 무기도... 티프소의 무기는 비쌀까?"


"..."


게랄드는 예리엘을 관찰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싸겠지."


"아, 정말. 켄츄게이트 용병대라니! 걔네들 다 머스킷티어잖아!"


예리엘은 불만족스럽게 스푼으로 찐 쌀이 담긴 그릇을 찔러댔다.




예리엘의 불만은 어찌보면 타당했다. 전 대륙에서 산발적인 전쟁소식이 들려오는 지금, 패하지 않을 정도의 무력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의 피아조 상단은 너무 약했다. 상단을 관리하는 예리엘의 입장에서는 당장 해결해야할 중대안인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켄츄게이트 용병대는 예리엘이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피아조 상단의 출전 소식을 들은 인피던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속공을 택했다. 그는 얼마전에 항복한 좁 후아나를 선두로 세운다음 자신의 두 동생과 함께 전 병력을 북상시켜 세 방향으로 인구 밀집지역인 나보를 향해 진격했다.


피아조 상단이 오기전에 나보를 점령한 다음 수비전을 펼칠 의도였는데, 만약 사방이 평야인 나보가 점령된다면 피아조 상단에게 있어서는 어떤 방법도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보 근방의 평야는 대부분 논이라 기동병력을 움직이기 곤란했고, 길은 좁은데다 엄폐물이 전혀 없어서 대놓고 총알을 맞아야 했기 때문이다.


켄츄게이트 용병대의 이 전략적 선택이 여기까지 내다본 한수였다면, 토뷔스 농업지구의 반격은 거의 운에 가까웠다. 70대의 노인인 자비엘은 공성전을 할만한 성벽조차 없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 급하게 끌어모은 병사들을 데리고 본인이 직접 출격했다. 인피던의 입장에서는 무모한 저항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 틀린 생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놈들의 지원군이 오고 말텐데요, 형님."


막내인 켄베트로가 자신의 머스킷을 만지작거리며 투덜댔다. 보통사람이라면 목이 아플정도로 올려다봐야할 거구인 켄베트로는 보통의 장총을 양손으로 잡고 권총처럼 쐈다. 정확도가 높지 않은 머스킷은 더더욱 부정확하게 나갔지만 그는 그것을 개의치 않았다. 양손에서 터지는 화약냄새에 흥분하여 마구잡이로 전장을 휘젓고는 했다.


"피아조 상단이라. 싸움 좀 하는 놈들이 모여있다는 소문은 있었지. 상단장이 로드리제로스의 늙은이 아니었나?"


인피던은 불만족스럽게 물었다.


"지금 상단장은 발랄한 여자에요. 만나본 적은 없지만 꽤 유명하죠."


차녀 세타가 대답했다. 그녀는 막내동생과는 다르게 매우 작았다. 사용하는 무기는 거의 그녀의 신장만한 장총이었는데, 개량을 한 이 라이플은 저격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 외에 조심해야할 상대는?"


"그 여자의 애인이 굉장히 강하다고 해요. 손에 잡히는 건 모두 무기로 쓴다더군요."


"호오... 기용도가 높은 무기전문가인가. 어떤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한걸. 내 총은 일격필살(一擊必殺). 한발에 한놈은 무조건 쓰러지지. 이 이상의 무기가 있다면 좋겠는데."


켄베트로가 탐욕스런 얼굴로 큭큭 웃었다.


"놈들은 전략가가 없다고 한다. 마구잡이로 달려오겠지."


"너무 쉽겠군요."


세타는 딱 잘라말하고, "의미없이 죽이는 건 그리 즐겁지 않아요."라고 덧붙였다.


"좋아. 일단 자비엘의 부대를 싹 쓸어버리자. 3방향으로 나눠서 포위하지."


인피던과 켄베트로는 재미있는 게임을 하는 것처럼 킬킬 웃었고, 세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각자의 병력을 이끌고 흩어졌다.




자비엘이 이끄는 5천의 민병대는 평야를 따라 진형을 펼쳤다. 그의 목적은 도시의 수비였기 때문에 먼저 공격한다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도 그도 명색이 세력의 지휘자이기에 예하의 장수들을 모아 머리를 짜냈다.


"적은 개활지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하나 근접전으로 가면 유리하다. 놈들의 주력무기는 사격이니 도시 앞에 나무, 돌을 쌓아 목석책(木石柵)을 만들면 놈들도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과연 그의 말대로 인피던의 일천여명의 머스킷티어가 정면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유효사격거리까지 접근했으나 급하게 쌓아올린 목책 위로 사격을 하지 않고 그대로 부대를 주둔시켜버렸다.


"놈들의 모습이 이상하다. 적이 거리를 벌여 좌우로 들어오면 어찌할 도리가 없이 당하고 만다."


아직 학생이었던 케빈 후안은 상황의 심각함을 깨닫고 황급히 자비엘에게 달려갔다.


"자비엘님, 적들은 좌우에서 우리를 공격할 생각입니다. 이대로 있는 것은 위험합니다!"


"케빈, 넌 아직 어려서 전쟁을 잘 모른다. 적들은 눈앞에 있는데 어찌하여 좌우의 적을 걱정해서 무엇하느냐. 놈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으니, 만일 그들이 움직이면 우리는 그 때에 맞춰 목책을 이동시키면 그만이다."


자비엘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적들이 너무 적습니다. 필히 본진은 다른 곳에 있을 것이고 그들은 우릴 포위하려고 후방으로 이동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거기까지 말을 듣자 자비엘은 우물쭈물하며 고민했으나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은 케빈에게 현 진형을 유지하라는 말만 전하고 돌려보내니 케빈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무의미한 대치에 하루가 지나고 난 다음에 자비엘의 부하였던 마카프 파제가 자신의 책략을 자비엘에게 전했다.


"놈들이 우리의 진형을 보고 겁나 덤비지 못하고 있으니 퇴각을 권유해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제가 가서 말로 달래보겠습니다."


자비엘은 그말에 솔깃하여 마카프에게 귀한 금붙이를 주어 그들에게 보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케빈이 달려와 물었다.


"마카프님은 어디있습니까?"


"그는 지금 우호를 청하기 위해 적에게 떠났다."


"서둘러 돌아오게 하십시오! 이대로면 우리의 작전이 모두 들통납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우호를 청하러 갔는데 어째서 그렇게 되는 것이냐?"


케빈이 늙은 자비엘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기도 전에, 마카프의 말이 터덜터덜 돌아왔다. 마카프는 거기에 묶여 있었는데 몸은 왼쪽에, 머리는 오른쪽에 나뉘어 걸려있었다.


"분명 적들은 우리의 전력을 물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도시사람들 모두를 데리고 도망치는 겁니다."


자비엘은 탄식하며 말했다.


"우리가 이 곳을 만들기 위해 피땀을 흘렸고, 이 곳의 사람들의 부모들의 무덤이 이곳에 있는데 어찌 땅을 버리고 갈 수 있겠느냐."


이에 케빈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서둘러 마을을 떠나라고 전한 다음 본인은 선두에 섰다.


"나는 오늘 이곳에서 죽겠구나..."


그가 그렇게 중얼거릴 때에 포향이 터졌다. 도시의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적이 진격을 시작한 것이다.


서쪽으로 진격한 켄베트로 군은 굉장한 속도로 접근했는데, 사정거리에 목표가 이르렀음에도 돌격을 반복했다. 반대로 동쪽의 세타 군은 아슬아슬한 사정거리까지만 이동하여 사격을 준비했다. 서쪽으로부터의 적습에 당황한 자비엘의 군대는 동쪽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고, 세타 대의 좋은 표적이 되어버렸다.


"물러서지 마라! 밀집해라! 밀집해!"


케빈은 이를 악물고 병사들을 끌어모으고 자비엘을 지키기 위해 이미 난전이 되어버린 전장을 달렸지만, 자비엘은 가장 먼저 도망치다가 세타가 직접 쏜 저격에 숨이 끊어져 있었다. 게다가 인피던의 본진마저 공격을 시작했는데, 하루를 쉰 덕분에 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쏘는 족족히 병사들이 쓰러졌다.


이제는 목석책도 아무런 엄폐물이 되지 못했다. 대장을 잃은 토뷔스의 병사들은 급하게 마을로 도망치려 했으나, 워낙 적의 공세가 거세어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케빈은 선두에서 검을 뽑아들고 지휘했으나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는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끝가지 포기하지도 않았다. 그 덕분에 그는 적의 이상징후를 포착했다.




"대장! 후방을 보십시오! 적입니다!"


지휘에 열중이었던 세타는 이 소식에 고개를 갸웃했다.


"후방?"


원래부터 피아조 상단의 원군을 고려한 이 진형은 완벽했다. 지원군의 최단루트는 마을을 통과하는 것이기 때문에 적이 마을로 들어온다해도 사격의 한가운데로 오는 것 밖에는 되지 못했다. 원거리에서는 용병대가 압도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에 적의 지원군도 좋은 표적이 될 뿐이라고 믿고 있던 세타에게 이 소식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후방이라니, 어떻게 그쪽에서 올수가..! 전원 진형을 바꿔! 반대쪽을 방비하라!"


세타의 긴급한 명령에 용병대는 뒤로 돌아 총구를 겨누었다. 그런 그들의 바로 앞에는 예리엘의 부대가 있었다.




"우리가 출격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거야. 그럼 우리는 다른 길로 가야해."


게랄드가 예리엘에게 설명했지만 그녀는 끄덕이지 못했다.


"그냥 최대한 빨리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위험한 상황일 수도 있잖아."


"그럼 둘로 나뉘는 것이 좋겠어. 정면에서만 가면 이길 수 없어."


"그럼?"


"난 소부대로 마을쪽에서 합류하여 사람을 구할게. 예리엘은 별동대를 이끌어줘."


"뭐야, 겁먹은거야?"


예리엘이 뾰루퉁해서 묻자 게랄드는 뜨끔했다. 겁먹은 것은 아니지만 예리엘이 포화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염려해서 낸 궁여지책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더 좋은 작전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것밖에 생각이 안나."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하자."


예리엘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게랄드의 이 작전은 절반만큼의 효과를 거두었다. 예리엘은 말을 달려 세타를 향해 돌진했다. 세타는 급한대로 총을 들어 예리엘을 노렸지만, 총구의 방향을 읽은 예리엘은 말에서 뛰어 내린 다음 달려들어 창을 휘둘렀다. 세타는 황급히 피했지만 그녀가 애용하던 총은 그대로 반토막이 났다.


적들이 머스켓을 들고 덤벼들었지만 근거리에서는 예리엘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예리엘의 창이 찌르고 빠지는데 그 모습은 로드리제로스의 전통 창술식을 그대로 그려놓은 것과 같이 아름다울 정도였다. 한치의 실수도 없는 그녀의 창술에 질려버린 세타는 퇴각명령도 내리지 못하고 도주했고, 동쪽으로 진격하던 용병단은 반수 이상이 괴멸당하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반면 이미 난전이 시작된 켄베트로군은 혼전속에 뛰어든 새로운 세력에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너희가 피아조 상단 놈들이냐!"


켄베트로가 두 자루의 총을 들고 패기있게 외쳤다. 앞장선 게랄드는 말에서 내린 다음 제일 가까이 있는 무기를 집었는데, 떨어져 있는 머스킷 두자루가 그것이었다.


"네 녀석들을 박살내러 왔다."


"그거 재미있군, 네가 바로 모든 무기를 쓴다는 웨폰마스터 게랄드인가!"


"... 누구야 그건."


게랄드는 머스킷을 어색하게 들고 혼잣말처럼 물었지만 켄베트로는 듣지 못했다.


"좋아! 누가 더 잘 쏘는지 승부다! 먼저 쏴라!"


게랄드는 아무말 하지 않고 몸을 뒤로 젖혔다가, 그대로 들고 있던 머스켓을 던졌다. 50보 거리에서 거대한 낫처럼 날아든 머스켓은 벤베트로의 복부에 정확하게 피격되었고, 그는 몸을 뒤집으며 날아가버렸다.


놀란 부하들이 그에게 총구를 겨누고 덤벼들었다. 게랄드는 남은 손으로 머스켓을 쥐고 적들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맞은 적은 일격에 어딘가 부러지거나 정신을 잃었으니 그야말로 일격필살(一格必殺)이라 할 법했다.


하지만 이 혼전은 결국은 피아조 상단에게는 불리했다. 그의 예상대로 사기가 꺾여버린 민병대는 아군이라기 보다 방해물에 불과했고, 겨우 500의 병력으로는 상대와 대등하게 맞서는 것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게랄드는 그 어려움을 타파할 정도의 무력이 있었다. 적진에 뛰어들어 난전을 벌이는 순간 켄츄게이트 용병단의 머스킷은 그 강점을 잃었다. 그의 등장으로 토뷔스의 병사들은 살 길이 열린 것이다.


"아군이 왔다! 반격하라!"


케빈은 적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목숨을 건 반격을 시작했고, 정신을 못차리는 켄베트로를 데리고 좌군은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예리엘은 그들을 쫓기보다는 부상자를 구하는데 주력했다. 인피던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으나 내색하지 않고 유연하게 병사들을 물렸다. 무사히 본진을 추스리자마자 그는 전장에서 포획한 포로 십여명을 토막내어놓고 그 위에 주저 앉아 겁먹은 두 동생들을 노려보았다.


"죄송해요 오라버니, 우회하여 기습을 올 줄 몰랐어요."


"형님, 그 놈은... 정말 강합니다. 다음에는 꼭..."


"감히 나에게... 용서하지 못해... 그래... 그 놈들도 모두 죽여야겠어...그래... 곧 놈들이 올거야. 놈들도 이렇게 만들어 주지... 피투성이로..."


인피던은 피투성이가 된 바닥을 손으로 쓸며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세타는 그런 자신의 오라비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작가의말

후세 역사학자들은 발라 모다스의 출병이 트리거가 되어 켄츄게이트 용병단이 움직이게 된 것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후세의 역자학자들은 피아조 상단이 움직인 것에 더욱 주목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테르센트 연대기 ~ 붉은 거인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3 22화. 그와 그녀의 잔혹했던 이야기 -3 16.01.18 212 1 12쪽
22 21화. 그와 그녀의 잔혹했던 이야기 -2 16.01.14 125 0 19쪽
21 20화. 그와 그녀의 잔혹했던 이야기 -1 16.01.14 211 0 8쪽
20 19화. 전야 16.01.14 237 0 10쪽
19 18화. 선지자 15.10.16 203 0 12쪽
18 17화. 알리시아 영지의 마녀 15.08.21 273 1 13쪽
17 16화. 마후라나 15.08.17 280 1 14쪽
16 언젠가의 이야기 15.08.12 219 2 22쪽
15 15화. 해피엔딩 15.07.22 199 2 12쪽
14 14화. 검과 탄환 15.07.20 249 1 11쪽
13 13화. 게랄드의 함정 15.07.16 275 3 9쪽
12 12화. 볼페레 15.07.15 339 2 9쪽
11 11화. 고집불통의 두 사람 15.06.29 241 3 12쪽
10 10화. 스스하 수비전 -2 15.06.22 263 2 22쪽
9 9화. 게랄드의 교섭, 그리고 동맹 15.06.17 221 3 7쪽
8 8화. 스스하 수비전 -1 15.06.01 257 2 7쪽
7 7화. 광마 도적단 15.05.08 254 2 28쪽
6 6화. 파키스 공략전 15.04.27 276 2 16쪽
5 5장. 후퇴 15.04.24 247 2 12쪽
4 4화. 복수만을 위하여 15.04.20 245 2 8쪽
» 3화. 나보 수비전 15.04.20 267 3 23쪽
2 2화. 소녀와 소년 15.04.20 311 1 8쪽
1 1화. 게랄드와 예리엘 15.04.20 302 2 2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