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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더 님의 서재입니다.

테르센트 연대기 ~ 붉은 거인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퓨전

필더
작품등록일 :
2015.04.20 11:32
최근연재일 :
2016.01.18 02:00
연재수 :
2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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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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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글자수 :
143,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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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20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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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1화. 게랄드와 예리엘

DUMMY

알피엑시 대륙은 로드리제로스의 패망 이후 산산조각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0년 전, 티프소와의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로드리제로스는 말 그대로 지도에서 사라져 버렸다. 살아남은 백성들은 흩어졌고, 원치않는 유목생활을 시작했다.


상업의 중심지이자 군사도시의 상징이었던 로드리제로스의 수도성인 하야스탄은 이젠 떠도는 여행자들이 등을 기대고 쉬어갈 수 있는 폐허 정도의 가치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 알피엑시 대륙에서 유독 티프소에 대한 적대감이 높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력을 이루는 무리들은 하나같이 티프소를 증오했고, 실제로 티프소 거주지역인 발페아케이르를 향해 테러활동을 벌이는 무리도 있었다.


하지만 티프소의 광업기술과 제련기술은 아무리 적이라 해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티프소의 엄청난 수준의 과학을 기반으로 한 공업력은 테르센트가 가진 기술력으로는 결코 따라갈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알피엑시 대륙의 거주민들은 몇 개의 상단에 한하여 “중립”위치에 서는 것을 용납했고, 필요한 물품을 사고 팔수 있는 불문율을 정하여 그들을 용서했다.


티프소인들은 "제2시대"의 정착 초기 남반구의 발페아케이르에 도시를 짓는데 전력을 다했지만, 비교적 최근 일부의 사람들이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 최북단 마시므 군도에 모여들었다.


마시므 군도에 모인 티프소인들은 3년만에 "북광산 연합"을 조직한 다음 본격적인 광업과 공업을 발달시켰다. 테르센트인들에게는 이들과 교역하기 위한 상단이 필요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마시므 북광산 연합과 교역하는 상단 중에 가장 세력이 큰 것은 지츠게라 피아조를 수장으로 하는 피아조 상단이었다.


이제는 노인이 되어버린 지츠게라 피아조는 젊은 시절 로드리제로스의 가츠루츠대에서 선두에 섰던 상장이었기 때문에 과거 로드리제로스의 영광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지츠게라는 그런 영광을 교묘히 이용하여 상단의 세력을 넓혀갔고, 이들의 세력은 곡류를 강철과 교환하며 상당한 이익을 올렸다. 이익은 이익을 불렀다. 지츠게라는 이제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상단장이 되었다.


이 때쯤 태어난 것이 예리엘 피아조였다. 내심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아들을 바라던 지츠게라는 크게 실망했고, 자신의 죽은 후 뒤를 이을 양자를 들이기로 결심했다.




지츠게라는 어린 예리엘을 데리고 노예상인을 찾았다. 노예상인은 유목민의 아이 중 사지가 멀쩡한 사내아이를 몇 명 보였는데, 하나같이 병약해보였기에 그는 크게 실망하였다.


그런 그의 눈에 바닥에서 혼자 앉아있는 작은 아이가 들어왔다. 붉은 머리칼을 가진 그 소년은 지츠게라의 시선을 느끼고 힐끗 바라봤지만 다시 고개를 숙이고 나무 막대로 바닥을 치며 놀았다.


“이 아이는?”


지츠게라가 노예상인에게 물었다.


“이 아이는 안팝니다. 티프소의 아이거든요.”


“티프소의 아이는 어떻게 되는가?”


“돌아다니다가 도적떼를 만나면 바칩니다. 도적들은 티프소의 아이라면 즉시 받아서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고 우리를 보내주지요. 저 아이의 어미가 있었고, 형제는 5명이 있었는데 다 죽고, 저 애 하나 남았습니다.”


노예상인의 말에 지츠게라는 사내아이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예리엘은 그 아이에게 다가섰다.


“넌 이름이 뭐야?”


소년은 세상에서 처음 음악을 들은 짐승처럼 놀라움, 두려움, 그리고 호기심을 담아 소녀를 바라보았다.


“난 예리엘이야.”


“...”


“넌 이름이 뭐야?”


소녀가 두 번째 묻자 소년은 머뭇머뭇 대답했다.


“게랄드.”


“이상한 이름이네.”


예리엘은 베시시 웃었지만 게랄드는 우물쭈물거릴뿐 웃지 않았다. 지츠게라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티프소인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상단의 인물들은 두 반응 밖에 보이지 않는다. 두려움, 그렇지 않으면 맹렬한 증오. 하지만 어린 예리엘은 미소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일평생 티프소를 원망하며 살아온 지츠게라에게는 매우 재미있는 일이었다. 지츠게라는 붉은 머리의 소년 곁으로 다가가 한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운 다음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고나서 그는 노예상인에게 “이 녀석으로 하겠어.”라고 담담히 말했다.


“짐꾼으로 쓰실겁니까?”


“아니. 내 아들로 한다.”


“무... 무슨 농담을...”


노예상인은 정색했지만 지츠게라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평생을 티프소와 싸워왔으니 죽기 전 쯤에는 변덕을 부려도 괜찮지 않겠는가!”


상단의 모든 사람은 아연실색했지만, 예리엘은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게랄드의 손을 잡아 끌었다.


--------------------


그로부터 4년 후, 지츠게라는 말에서 떨어져 명운을 달리했다. 티프소 상선을 마중나갔다가 티프소의 경축일 폭죽소리에 놀란 말이 날뛰었던 것이다. 지츠게라가 죽자마자 상단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게랄드가 원흉이라고 외쳤다.


“저주받았다고!”


“저 아이를 죽여야해!”


“티프소의 아이를 죽여라!”


이 성난 사람들을 가로막은 것은 다름이 아닌 예리엘이었다. 당시 13세였던 이 작은 아이가 양팔을 벌리고 두려운 기색 없이 게랄드의 앞에 서자, 분노했던 이들은 할 말을 잃었다.


“이 아이는 내 형제야. 아빤 형제를 위해 목숨을 걸라고 했어. 당신들은 지금 날 죽일 생각이야?”


상단의 노인들은 예리엘을 설득했으나 그녀는 완고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상단은 몇 개로 나뉘었다. 티프소의 아이에 대한 증오도 있었지만 그 이상의 문제는 지츠게라가 없어진 상단은 결속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상단의 장로 중 한 명이었던 사이몬 풋남은 예리엘에게 물었다.


“나도 나가서 새로운 상단을 차릴 생각이다. 너도 같이 가는 것이 어떠하냐? 너라면 내 양녀로 삼아 후계자로 둘수 있다.”


친절한 호의에도 예리엘은 미소조차 짓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난 피아조 상단의 차녀에요. 아빠의 유산을 지켜낼 거에요.”


그녀의 완고함에 결국 사이몬은 두 손을 들었지만 덧붙이는 말을 잊지않았다.


“무슨 일이 있다면 언제든 와라. 도와주마.”




졸지에 게랄드는 열 네 살의 나이로 상단의 주인이 되어버렸다. 남은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이들조차도 지츠게라와의 의리로 남은 것에 불과했다.


어린 게랄드와 예리엘에게 상단의 주인이라는 이름은 너무 무거웠다. 게다가 게랄드가 티프소인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상단들 사이에서도 피아조 상단과의 거래를 끊었다.


그렇게 견디기 어려운 십 년이 지났다. 게랄드에게도 예리엘에게도 믿을 수 있는 것은 서로 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를 악물고 상단을 꾸려나갔다. 그 얼마 남지 않았던 상단사람들도 또다시 흩어져 나갔다.


더 이상 상단이라 부를 수 없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던 어느 여름, 한 무리의 용병들이 그들을 찾았다.


“여기 대장이 누구냐?”


앞장선 사람 좋아보이는 중년이 짐을 나르고 있던 예리엘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예리엘은 슬쩍 바라보고,


“티프소인이네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오호... 왜 그렇게 생각하지?”


짧은 턱수염을 문지르며 다시 묻자 예리엘은 키득 웃었다.


“테르센트인이라면 살의를 띠고 왔을테니까요.”


그녀의 대답에 그는 손바닥을 치고 웃었다.


“맞다. 난 아리스토틀 슈노라고 한다. 나는 테르센트 인이지만 여기 이들은 모두 티프소인이거나 혼혈이야. 여기... 이 둘은 내 딸이다. 혼혈이지.”


아리스토틀은 그의 발치에 유목민의 망토를 쓴 두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보는 것처럼 우린... 일을 찾으러 왔다. 여기 대장이 티프소인이라는 소문을 들어서 말이야.”


예리엘은 그들을 슥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을 불러드릴게요.”


10분도 지나기 전에 예리엘은 용병무리 앞에 붉은 머리의 청년을 데려왔다. 그는 사자의 갈기같은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고, 건장한 근육이 가죽옷 밖으로 울퉁불퉁 튀어나와있었다.


“이... 소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는 아리스토틀. 게랄드는 호쾌하게 웃었다.


“우리 상단에 온 손님들은 항상 그런 반응이더군요.”


“아... 그렇군. 실례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용병이라고 했죠?”


“음. 그래.”


“유능한가요?”


“뭐... 평균 정도는 하는 것 같은데.”


게랄드는 다시 한 번 크게 웃고 그의 어깨를 두세번 두들겼다.


“그거 좋군요. 좋아요. 같이 일하죠.”


“응?”


“왜 그러시죠?”


“아니, 그... 너무 적당하다고 해야하나... 괜찮나?”


“예. 아니면 테스트라도 바라고 있으신가요?”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그를 향해 진지하게 물어보는 게랄드.


“아니, 그건... 그보다 이유를 알고 싶은데.”


“이유?”


“우릴 이렇게 쉽게 받아주는 이유말이야. 혹시 티프소인이라서 그런건가?”


“핫하하하, 그런 멍청한 이유일 리가 없잖아요.”


“으.. 으음.. 멍청...?”


게랄드는 여전히 당당하게 대답했다.


“예리엘이 받아주라고 해서입니다.”


“... 어?”


게랄드는 토끼눈이 되버린 아리스토틀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예리엘의 눈은 정확하거든요.”


“...”


“그리고...”


젊은 상단의 주인은 입만 벌리고 여전히 말을 하지 못하는 그를 위해 한마디 덧붙였다.


“다 같은 사람이잖아요. 돕고 살도록 하죠.”


붉은 사자머리의 청년은 씨익 웃었다.




이 사건은 매우 큰 파급효과가 있었다.


첫째로 망하기 직전이었던, 아니 이미 망한 피아조 상단이 질적으로, 양적으로 크게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티프소인, 혹은 외면받는 테르센트인들이 상단에 모여들었고, 이들의 노동력은 성실하게 활용되었다.


둘째로, 마시므 북광산 연합과의 직접적인 연줄이 생겼다. 광산연합에 비해 피아조 상단은 정말 작은 세력이었지만, 티프소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공격받던 그들에게 티프소인의 상단은 틀림없이 환영받을만한 단체였다.


셋째로 주변 상단이 피아조 상단을 더욱 싫어하게 되었다. 5년간 크고 작은 분쟁이 있었고, 개중 일부는 전투라 부를 정도로 치열했다. 하지만 피아조 상단은 의외일 정도로 강했다. 새로 들어온 인물들을 포함하여 용병출신이 꽤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게랄드와 예리엘이라는 두 사람의 터무니 없는 전투능력 덕분이었다. 예리엘은 지츠게라에게 로드리제로스의 검술과 창술을 배운 적이 있었는데, 그 것을 모두 소화해내어 자신이 개량할 정도로 전투 센스가 좋았다.


거기에 거의 2미터에 가까운 장신으로 성장한 게랄드는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무기로 쓸 수 있을 정도로 완력이 좋았는데, 예리엘에게 전투 교육을 받기 시작한 이후 자신의 힘을 가장 효과적으로 쓰는 법을 빠르게 터득해간 것이다.




어느 날은 게랄드와 예리엘 단 둘이 북광산연합에 씨종을 급히 배달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그 소식을 미리 알고 기다리던 용병들이 길을 끊고 기습했는데 등 뒤에서 날아온 창을 공중에서 낚아챈 게랄드는 말 위에서 그대로 뛰어내려 예리엘을 뒤로 하고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그는 창을 쉼없이 휘둘렀고, 쉰 명을 그 자리에서 창에 꿰어 죽여버렸다. 도망치고 남은 오십여명은 이 붉은 거인에게 질려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빌었는데 게랄드가 한 말이 가관이었다.


“지금은 바빠서 못 죽이니 다녀오는 길에 죽이겠다.”


당연히 이들은 도망쳐서 이 사실을 크게 부풀려서 전하였고, 그 후로는 노골적으로 공격해오는 적은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게랄드의 무운에 반하여 피아조 상단에서 일하기를 희망하는 인재들이 모일 정도였다. 피아조 상단의 급성장은 바로 이 시기였다. 모든 분야의 인재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인재는 인재를 모았다.


게랄드와 예리엘은 아예 면접실을 만들어서 지키고 앉아있어야 할 정도로 이 시기의 피아조 상단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북적댔다. 그 중에는 레인 알리시아라는 여성이 었다.


“알리시아?”


취업희망자를 처음 만난 게랄드는 그녀의 성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릴 수 밖에 없었다. 알리시아 백작은 알피엑시 대륙에서 유명한 명문 귀족이었던 것이다.


“어째서 귀족의 아가씨가 상단에 들어오려고 하는거죠?”


상당히 비싸보이는 가죽갑옷에 어울리지 않는 아름답고 윤기있는 긴 검은 머리칼을 훑어보며 그녀에게 묻자, 레인은 즉시 대답했다.


“가출하려구요. 여기는 누구든 받아준다고 알고 있었는데요.”


“누가 봐도 딱 아가씨인 당신을 찾으러 오는 알리시아 백작의 군대와 맞서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만.”


게랄드가 담담히 대꾸하자 레인이 되물었다.


“누가 봐도 딱 아가씨로 보이나요?”


“그야, 그런 예쁜 머리카락을 가진 상인은 드물지요. 우리는 꽤나 거친 일을 하기 때문에 아가씨가 일할만한 곳은...”


그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레인은 단검을 뽑아 자신의 머리카락을 석뚝 잘라버렸다.


“이제 괜찮죠?”


짧은 단발머리가 되어버린 레인이 자신의 머리칼을 툭툭 털고나서 묻자 게랄드는 대답을 못하고 곁에 있던 예리엘을 바라보았다.


“게랄드. 머리카락은 여자의 목숨이야. 우린 이제 저 아가씨의 목숨을 지켜줘야해.”


예리엘의 단언에 레인은 활짝 웃었고, 게랄드는 머리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레인은 피아조 상단의 행정업무을 한단계 진화시키고, 상인으로써의 자질을 내보였다. 그녀는 금새 피아조 상단의 참모가 되었다.



피아조 상단은 다른 상단을 먼저 공격해가는 일은 없었지만, 급속도로 성장하는 이 무력집단은 주변의 상단들에게 충분히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자연스레 근처의 상단들도 각자 용병을 고용하기 시작하자 알피엑시 대륙의 상인들 사이에서는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퍼지기 시작했다.


"전투가 벌어지면 걱정은 그때하면 되는거야. 우리는 상인이니까, 자신의 일에만 열중하면 돼."


예리엘은 남들이 뭐라하건 자신의 페이스를 잃지 않았다. 게랄드는 그런 예리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을 몸으로 증명하려는 듯 더욱 열심히 일할 뿐이었다.



피아조 상단의 아침은 언제나 같다. 일단 예리엘은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근처를 순방한다. 피아조 상단 본사는 도시 한 중앙에 위치해 있지만, 선착장과 물류창고는 꽤나 외각에 있기 때문에 순서대로 점검을 해야한다.


양쪽 다 항상 경비를 세워놓는데 예리엘의 명령에 따라 대장급 용병들도 경비소에서 대기해야 한다. 그만큼 상단으로서 물건과 수송수단을 중요시 여긴다는 뜻이지만 몇몇 대장급들은 직급에 맞는 일이 아니라며 불평했다.


하지만 예리엘은 완고했다.


“직접 본보기를 보일 자신이 없다면 대장직은 그만둬야 할 걸요.”


결국 투덜거리는 건 투덜거리는 대로 하지만 경비를 제대로 서야했는데, 예리엘은 불시 순찰을 돌뿐만 아니라 불량한 경비에게는 상당한 처벌(보통 임금 삭감이다.)을 했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제대로 지켜내는 수밖에 없었다.


새벽 4시, 예리엘이 떠나고 나면 4시 30분쯤 게랄드가 달려나온다. 이 붉은 거인이 달려나오는 곳은 예리엘의 막사인데, 그렇다고 딱히 두 사람이 연인관계는 아니다.


“그럼 무슨 관계인데 같은 막사에서 자요? 연인이 아니라면 뭔데요?”


레인이 호기심 넘치는 눈동자를 빛내며 묻자 아리스토틀 슈노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개와 주인.”


붉은 거인은 나오자마자 예리엘이 떠난 곳을 뒤쫓아 달려가버린다. 예리엘이 어디로 갔는지 모를 때도 거의 100%에 가깝게 그녀의 뒤를 쫓을 수 있다.


딱 한번 틀렸을 때, 이 거대한 체구의 사내는 어울리지 않게 코감기에 걸려있었기 때문에, 상단사람들 사이에서는 냄새로 추격한다는 추론이 일반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게 말이 돼요? 예리엘씨는 특별한 향수라도 쓰나요? 아니면 샴푸? 무슨 냄새를 쫓아가는거죠?”


레인 알리시아가 심드렁하게 묻자 아리스토틀 슈노가 짧게 대답했다.


“체취.”




결국 동행하게 되는 두 사람은 도시 안팎을 돌고, 5시가 넘어야 본사로 돌아온다. 이 때는 이미 본사의 모든 사람들은 일을 시작한 이후인데 야간 근무자들은 자러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도대체 우리 상단사람들은 왜 밤에 깨어있어요?”


새롭게 편성된 야간 근무표에 따라 근무 복을 갈아입으면서 윤아미가 레인에게 불만스럽게 물었을 때 레인은 즉답했다.


“그냥요.”


정말 그녀의 의견은 완벽한 사실이었다. 야간 근무는 정말 아무 할 일이 없었다. 당연히 상단은 교역이 중심이니 다른 상단이 깨어있어야 일을 할 것이 있다.


그런데 야간 근무는 그저 깨어서 상단을 지키고 있을 뿐이며, 드물게 밤에 오는 짐마차를 받아주는 일을 할 뿐이었다.


“그냥 자다가 깨서 받으면 안되요?”


아미가 당연한 질문을 했지만 예리엘의 철학은 완고했다.


“언제나 깨어있는 상단, 그것이 우리 피아조 상단이야.”


이렇게 까지 말하니 반문할 것도 마땅히 없었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알아서 납득을 할 뿐.



하지만 진실은 좀 다른데 있었다.

이 상단이 보통 상단과 입단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 문제였다. 누구든 일하고자 하는 사람은 받아주는 것이 피아조 상단의 방침이었다.


그러다 보니 너무나 당연한 문제가 생겨났다. 게랄드와 예리엘, 그리고 아리스토틀은 머리를 모아서 고민했다. 상단에서 할 일은 거의 없는데 일할 사람이 쓸데없이 많았던 것이다.


“아무리 잉여롭게 배치해도 사람이 남는데.”


아리스토틀이 머리를 긁적이며 칠판을 분필로 두드렸다.


“그냥 휴가를 늘릴까?”


게랄드가 지당한 의견을 냈지만 예리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조건 일해야 해. 이 마을에 있는 인간들에 비해 우리 상단 사람들은 너무 거칠어. 휴식기간이 길면 괜히 문제를 일으킬거야.”


아리스토틀은 손바닥을 짝 쳤다.


“그렇다면 농사를 짓던가, 가축을 기르는 건 어떤가?”


“자본이 모자라요. 우리 상단은 사실 꽤 빠듯하기 때문에...”


게랄드의 대답에 아리스토틀은 다시 의견을 냈다.


“그럼 한명은 땅을 파고 한명은 메우는 건?”


예리엘은 결국 엉터리같은 의견을 다 치워버리고 나름의 해답을 찾아냈다.


“2팀으로 나눠서 낮밤 교대로 재우자.”




그리고 이 세 사람은 생각도 못한 효과가 발휘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사건이 몇 가지가 세상에 알려졌는데 그게 모조리 명성을 높이는데 기여한 것이다.


어느 겨울, 상단을 공격하기 위한 도적떼가 마을 외각에서 야밤을 틈타 기습했다. 나름 똑똑한 도둑이었던 갈브래스 로데스는 사람이 잠에서 깬 직후가 제일 둔하다는 것을 알고 5시를 노렸는데, 바로 그 순간이 밤새서 기분이 나쁜 야간팀과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주간팀이 교대하는 순간이었다.


30명에 가까운 도적들은 그야말로 박살이 났고, 갈브래스는 결국 상단에 항복하게 되었다. 피아조 상단의 방범능력이 높다는 것이 증명되는 사건이었으니, 당연히 다른 상인들이 피아조를 향하는 발걸음이 늘어나게 되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또 다른 사건. 풋남 상단소속의 급히 곡식을 수송하던 배가 야간임에도 항해를 하다가 암초에 걸려 가라앉을 위험에 처했다. 선원은 12명이 있었는데 제법 뛰어난 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가장 가까웠던 피아조 상단에 달려들어온 항해사 리바이어던은 급히 상황을 설명하고 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자는 사람을 깨울 필요도 없이 200여명이나 되는 인원이 즉시 출동했다.


이들은 신속하게 배에 밧줄을 걸어 끌어올렸고, 생존자들은 예리엘에게 감사하며 새로운 교역을 약속했다.



이렇게 일이 잘 풀려나가던 1028년 1주. 새로운 1년을 다짐하며 한창 축하연이 벌어지던 피아조 상단에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예리엘은 그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 컵을 떨어뜨렸다.


“발라 모다스가 거병?”


다리오 모다스가 왕이 된 후로 모다스 영지와 연결된 모든 상단은 다리오의 예하와 다름이 없었다. 그를 거역하면 즉시 군대를 보내 책임을 묻기 때문에 선택지가 없기도 했지만, 다리오는 의외로 주변 상단들의 장단을 맞출 줄 알았다. 다만 피아조 상단은 랑시에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다.


“발라 모다스라... 이 상태로 거병이라니, 적이 엄청나겠는걸.”


아리스토틀의 말대로, 발라는 작은 도시에서 모다스 영지 전체와 상단 조합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랑시에의 백성들의 상황은 널리 알려졌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병력을 일으키는 것은 호기 이외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대단한 사람이죠. 저도 만난 적이 있어요.”


아미가 한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촌형 때문에 죽다 살아났죠. 지금은 산 송장수준이라고 해요. 원래는 대단한 무술가였지만...”


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도 않아요. 그 사람, 엄청 똑똑한걸. 몸은 못움직여도 두개골 안쪽의 가치는 엄청 나다구요. 그 재능이 군사적으로 발휘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우리도 하나를 선택해야겠군요.”


예리엘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다음 누구에게랄 것 없이 중얼거렸다.


“다리오의 편에 서느냐, 아니면 발라의 편에 서느냐, 그것도 아니면 중립을 지키느냐.”


게랄드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우린 상단인데, 싸울 필요가 있어? 누가 이기든 우리는 우리 할 일만 하면 돼.”


예리엘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어버렸다.


“하긴 그래. 우린 상인이야. 우리 일을 하자. 무슨 일이 생기면 그 때가서 대처하는 걸로. 모두 동요하지 말고 일해! 알았지?”


그녀는 모두를 바라보며 명랑하게 말했다. 모두들 납득했지만, 레인만은 이 결정에 납득하지 못하는 듯 했다.


‘우리 주변의 상단들이 과연 우리가 중립을 유지하도록 놔둘까?’


그녀는 결국 그 말을 꺼내는 대신 쓰던 손익계산서를 마저 쓰기로 했다.


작가의말

알피엑시 대륙의 로드리제로스는 한 때 리베리아 제국보다도 강력했던 군사국가였습니다. “세 눈의 네스”라고 불리우는 국왕, 네스데라쉬트는 로드리제로스의 마지막 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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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19화. 전야 16.01.14 237 0 10쪽
19 18화. 선지자 15.10.16 203 0 12쪽
18 17화. 알리시아 영지의 마녀 15.08.21 273 1 13쪽
17 16화. 마후라나 15.08.17 280 1 14쪽
16 언젠가의 이야기 15.08.12 219 2 22쪽
15 15화. 해피엔딩 15.07.22 199 2 12쪽
14 14화. 검과 탄환 15.07.20 249 1 11쪽
13 13화. 게랄드의 함정 15.07.16 275 3 9쪽
12 12화. 볼페레 15.07.15 339 2 9쪽
11 11화. 고집불통의 두 사람 15.06.29 240 3 12쪽
10 10화. 스스하 수비전 -2 15.06.22 263 2 22쪽
9 9화. 게랄드의 교섭, 그리고 동맹 15.06.17 221 3 7쪽
8 8화. 스스하 수비전 -1 15.06.01 257 2 7쪽
7 7화. 광마 도적단 15.05.08 254 2 28쪽
6 6화. 파키스 공략전 15.04.27 276 2 16쪽
5 5장. 후퇴 15.04.24 246 2 12쪽
4 4화. 복수만을 위하여 15.04.20 245 2 8쪽
3 3화. 나보 수비전 15.04.20 266 3 23쪽
2 2화. 소녀와 소년 15.04.20 311 1 8쪽
» 1화. 게랄드와 예리엘 15.04.20 302 2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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