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불장난3
민식은 검암역 앞에서 승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퇴근 후 서둘러 택시를 타고 검암 역 앞에 내렸다. 그녀가 어제처럼 공항철도를 탔다면 하차시간은 9시 40분 정도 될 것이다. 지금 시각은 9시 20분, 20분 정도 여유가 있다. 출입구는 한 곳이라 놓칠 일은 없을 것이다.
‘어제 같은 실수가 없어야 하는데.....’
비가 갠 하늘은 청명했다.
9시 43분.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검암역에서 하차한 승객들은 다 내린 것 같았다. 내린 승객이 10명 남짓. 오늘이 마지막 야간 근무라 조원들과 아침을 먹고 늦게 올 수도 있었다. 어떡하든 그녀를 만나야 했다.
역사 내로 들어가 다음 올 열차 시간을 확인했다. 곧 도착할 예정이었다. 민식이 역사를 나와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곧 열차가 도착하고 하나둘 승객이 역사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내리는 승객들을 일일이 확인했지만, 그녀는 없었다. 오늘 못 만난다면 내일이고 모레고 기다릴 작정이었다.
12시 쯤 이승희가 이어폰을 끼고 검암역 입구로 나왔다. 민식은 얼마간 거리를 두고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가 고가도로 밑 횡단보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스키니진에 타이트한 티셔츠 차림이었다. 굽이 낮은 구두 위로 드러난 발목이 가늘다. 어깨엔 하얀색 가방이 걸쳐져 있었다. 몸매 관리를 하는지 예전보다 날씬해진 거 같다고 민식이 생각했다.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자 그녀는 다시 길을 걷는다.
그녀를 따라 왼쪽으로 향하자 일방통행 길이 나타났다. 행인이 한 명도 안 보였다. 왼편은 녹지대로 철조망이 길 따라 이어졌다. 매실나무 군락과 군데군데 텃밭이 보였다. 오른편엔 삼사 층 높이의 다세대 주택이 나란히 있었다. 그녀가 맨 끝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민식이 뚜벅뚜벅 승희에게 걸어간다. 그녀가 이어폰을 빼고 뒤를 돌아본다. 놀라는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민식이 다가올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햇살을 받은 얼굴엔 기미가 도드라졌고, 역광에 눈을 찡그리자 잔주름이 잡혔다. 민식이 가까이서 그녀를 마주했다. 민식이 화장기 없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도 많이 늙었구나.’
그녀는 민식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차분한 표정이었다.
“이 선배, 얘기 좀 해요.”
민식이 우두커니 서서 말했다.
“날 미행한 거니?”
민식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고민식 씨와는 별로 할 얘기 없는데.”
그녀는 순간 쌩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선배, 조용한 데 가서 얘기 좀 해요.”
민식이 앞장서자 그녀가 못 미더운 듯 따라간다.
“여기서 얘기해. 피곤하니까.”
그녀가 가리킨 곳은 편의점 앞 파라솔이었다. 그녀가 가방을 파라솔 탁자 위에 내려놓고 플라스틱 의자에 철퍼덕 앉았다. 민식은 편의점에서 카페라테 2병을 샀다. 그리고 그녀 앞에 앉았다.
“얘기 해봐.”
승희가 팔짱을 끼고 쌀쌀맞게 얘기했다.
“제가 선배에게 섭섭하게 한 거라도 있나요?”
“없는데, 왜?”
여전히 말은 짧았고 쌀쌀했다.
“그럼 저한테 왜 그러는 거예요?”
민식은 핸드폰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나를 다른 조에 보내려고 무진장 애를 썼더라고요. 아니에요?”
“나, 그런 적 없거든. 괜한 사람 잡지 마.”
“위원장한테 들었어요. 선배가 주도했다고.”
“후훗!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어디 삼자대면 한 번 해볼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할 건데요?
그녀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순간 핸드폰을 가방에서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했다.
“위원장님, 고민식 씨, 내가 다른 조로 보내 달라고 당신한테 말한 적 있어요? 뜬금없이 고민식이 찾아와서는 이런 얘길 하는데.”
순간 민식이 승희의 핸드폰을 낚아채 화면을 보았다. 화면엔 통화 내용조차 없었다. 민식은 너무나 황당했다.
“계속 나와 장난 할 거예요? 선배.”
민식이 성을 내자 그녀는 싱긋 웃으며 앞에 놓인 카페라테 유리병의 뚜껑을 따고 한 모금 마신다.
“아침에 반주 한잔했더니 어지럽네. 우리도 가끔 일 끝나고 한 잔씩 했었는데....... 처음 민식 씨 입사했을 때 내가 얼마나 신경 썼는지 모를 거야. 호호, 벌써 7년이나 됐네. 어머, 그러고 보니 공항 밥 먹은 지 나도 10년이 넘었네. 세월 참 빠르다. 그치?”
그녀의 쌀쌀맞던 표정이 금세 바뀌면서 딴전을 피웠다.
“그땐 민식 씨, 잘도 따르고 곧잘 팀원들과도 잘 어울렸는데.”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근데, 지금 무슨 꼴이야. 비조합원이라 왕따 당하고.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줄 잘 서라고.”
민식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당신을 다른 조로 돌리는 것도 이쪽에서 당신을 길들이기 위함이지. 나뿐만 아니라 우리 조원들 대부분이 민식 씨 보길 원치 않아. 그런 낌새조차 모르고 있다니. 민식 씨도 큰 문제야.”
민식이 이것은 엄연한 월권이며, 모함이라 소리쳤지만, 그녀에겐 안 들리는 듯 보였다. 그녀의 큰 눈은 졸린 아니 몽롱한 눈으로 녹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앞에 놓인 카페라테를 천천히 마셨다.
“요즘도 자기 생각 조금은 나. 그렇게 냉정하게 떠나다니. 후훗.”
이승희는 오래전 일을 입에 올렸다. 그것은 민식에게 있어 딱 한 번의 실수였다.
“그것 때문에 날 모함한 거예요? 그 하룻밤 불장난 때문에.”
민식의 말에 승희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당신에겐 하룻밤 불장난일 수 있겠지만 나에겐 몇 년간의 아픔이었어.”
‘몇 년 전 얘길....... 역시 그거였군.’
진실을 마주한다는 것엔 용기가 필요하다. 심증은 있었지만, 그녀를 마주 보고 확인하고 싶었다. 그 하룻밤이라니. 그 후 민식은 그녀를 철저히 피해 다녔다.
‘씁쓸하다......’
민식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며칠 전 공항에서 만난 승객을 떠올렸다.
의연하고 멋진 모습, 흰 머리와 절묘하게 어울리는 흰 수염, 금속 명함집에서 명함을 꺼내 내민 기다랗고 하얀 손.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 아버지의 정을 잠시라도 느끼게 해주었던 노신사.
‘명함이 어디 있더라...... 내 방 휴지통에 잘 간수되어 있겠지.’
사흘 전 다림질을 하면서 바지 뒷주머니에 있는 명함을 꺼내 휴지통에 버린 기억이 났다.
‘마카오 갤럭시 민박’
민식은 연차를 내고 오늘 당장 마카오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