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2월29일생 님의 서재입니다.

잊혀진 자의 이야기 2부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2월29일생
작품등록일 :
2023.01.06 17:04
최근연재일 :
2024.01.05 08:00
연재수 :
251 회
조회수 :
9,634
추천수 :
452
글자수 :
1,515,958

작성
23.06.29 08:00
조회
30
추천
2
글자
17쪽

5화 각자의 시간 - 24

DUMMY

서지터의 공격은 막힘이 없었다. 말 그대로 방패든 검이든 서지터의 바스타드 소드와 맞붙는 즉시 깔끔하게 잘려 나간 것도 모자라 그들이 입고 있던 철판 갑옷마저 베어버렸다. 치명타를 입은 셋은 그 자리에서 즉사해버렸고, 남은 한 명만이 3분의 1이 잘려 나간 양손검을 들고 서지터와 대치하고 있었다.


“대, 대체 뭐 하는 자식이냐!”


“오늘만큼은 현상금 사냥꾼. 저 자식 모가지 따야 하니까 빨리 끝내자.”


“죽어엇!”


- 스걱!


“커헉!”


남은 적 역시 양손검이 깔끔하게 잘리며 목이 깊이 베여버렸다. 서지터는 무언가를 베었다는 느낌조차 없었다. 마치 허공을 가르는 느낌이었다. 몇 번 휘두르지 않았던 검에 그 어떤 방어구도 소용이 없었다.


어리둥절하고 황당한 건 자신의 방앞에서 지켜보던 그렉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사자인 서지터가 가장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이상한 느낌 덕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 터벅터벅.


지칠 대로 지친 서지터는 비틀거리며 천천히 그렉에게로 걸어갔다.


“이 미친 자식! 아끼는 내 수하들을 전부!”


그렉도 검을 들고 있긴 했지만 방금 목격한 것 때문이었는지 달아나지도 덤비지도 못한 채 온몸을 떨고 있었다. 반면 서지터는 미세한 왼손에서의 떨림이 사라지자 검을 든 손을 올려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하아, 졸려 죽겠다. 야! 뭐 하나 물어보자.”


그렉은 뒷걸음질을 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 가냐? 물어볼 게 있다니까?”


“이 자식아! 죽고 싶지 않으면 나가 싸워!”


베셀로프가 죽었다고 보고한 자는 이미 서지터의 무시무시함을 보고 그렉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 옆에 납작 엎드려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러다 그렉에게 걸려 강제로 사신 같은 서지터 앞에 내던져질 위기였다.


“그, 그렉님! 살려주십시오!”


“내 질문에 기억을 잘 더듬어봐. 제대로 대답하면 살려서 데려갈게.”


서지터가 방문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섰다. 달아날 곳은 없었다. 탈출구는 피를 뒤집어쓴 서지터가 막고 있었고, 창문 하나는 두꺼운 철창으로 뗄 수조차 없었다. 노예로 사 온 처녀들을 방으로 데려가 범할 때 달아나는 걸 막기 위한 철창이었지만 지금은 그렉이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어진 꼴이었다.


그렉은 발악이라도 하듯 소리를 질렀다.


“미친 자식! 네 말을 어떻게 믿지? 내 수하들을 전부 죽여놓은 놈 말인데!”


“시끄럽고. 다 죽이진 않았으니까 너무 걱정은 하지 마. 질문을 할 테니까 잘 기억해봐? 4~5년 전쯤에 여기로 팔려 온 아가씨 중에 이름은 이멜다라고 한쪽 다리를 저는 여자 있었냐?”


“고, 고작 노예년 하나 찾겠다고 이 짓을 벌인 거냐!”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던 그렉은 번뜩 서지터가 말한 이멜다가 떠올랐다. 그의 말처럼 4년 전에 검고 긴 머리에 한쪽 다리를 저는 여인이 이곳으로 팔려 온 적이 있었다. 출중한 외모에 비해 불편한 다리 때문에 싸게 사 와 기뻐했던 기억이었다.


“말 함부로 하지 마라. 죽여버리기 전에.”


잠이 쏟아져 반쯤 감긴 서지터의 눈이 다시 살기를 내뿜으며 번뜩이자 그렉은 말을 더듬거리며 말했다.


“미, 미, 미친 자식! 기, 기억나지!”


- 탓.


그렉은 곧장 유일하게 남은 수하를 서지터 쪽으로 떠밀어 버리고는 책장 쪽으로 달려가 거래 장부를 꺼내 들었다.


“크하핫! 당장 검을 버리고 무릎 꿇어!”


“뭐하냐?”


그렉은 거래 장부를 벽난로 앞에 들고 오히려 서지터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이 장부 안에 있지. 그년이 어디로 팔려 갔는지 말이야.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당장 태워버리겠어!”


“너 같은 쓰레기들은 끝까지 살 기회를 줘도 어쩜 그 모양이냐?”


“빨리 검을 버려! 넌 저 미친놈 무장 해제시키고 무릎 꿇려! 뭐해!”


그렉의 부하는 덜덜 떨며 서지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거래 장부로 조금이나마 유리한 상황이라 여겨진 모양이다.


“오늘 사람 많이 죽였다. 살고 싶으면 그냥 무기 내려놓고 나가. 저놈이랑 결판 지을 일이니까.”


중간에 낀 그렉의 부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렉과 서지터를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몇 차례 둘을 번갈아 보던 부하는 드디어 결심이 섰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그, 그렉님. 죄송합니다.”


그렉의 부하는 무기를 바닥에 버리자 문 앞에 버티고 서 있던 서지터가 길을 내주었다.


“으아아아아!”


결국 그렉이 괴성을 질렀다. 거래 장부로도 협박이 통하지 않자 더는 갈 곳이 없는 막다른 길이라 여겨져 냅다 벽난로에 장부를 내던지고 서지터에게 달려들었다. 지칠 대로 지쳐있으니 승산이 있다고 여겨진 것인지, 아니면 자포자기 심정으로 덤빈 것인지 서지터로선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기회를 주었고, 그 기회를 날려버린 건 그렉 자신이었다.


- 카항! 촤아악!


“하아, 진짜 말 좀 듣지.”


그렉의 머리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서지터는 서둘러 벽난로로 뛰어가 불이 붙은 거래 장부를 꺼냈다.


“아, 뜨뜨뜨, 뜨거!”


간신히 장부를 꺼낸 서지터는 발로 불을 끄면서 울상을 지었다. 이 장부에 이멜다의 흔적이 있다는 그렉의 말이 사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또 한 번 그녀를 찾을 기회가 날아갔으리라는 촉이 강하게 들었다.


“후우우! 돌겠네.”


서지터는 이미 3분의 1 정도 타버린 장부와 그렉의 목을 챙겨 끔찍한 살육의 현장을 빠져나갔다. 이 난리를 친 가장 주된 이유인 루퍼트의 동생 미셸을 데리고 가기 위해서 말이다.


#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밤을 꼬박 새운 루퍼트는 곧바로 떠날 준비를 마치고 서지터와 미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중이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너무 오래 걸리는데. 내가 가봐야 하는 거 아냐?”


루퍼트는 발을 동동 구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존재였더라면 서지터와 함께 싸워 동생을 구해냈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걱정만 하며 기다리기만 하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 끼이익.


루퍼트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사이 방문이 열리자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외쳤다.


“형!”


“아, 시끄러워.”


눈앞에는 온몸이 피로 뒤집어쓴 서지터의 모습이라 루퍼트는 화들짝 놀라버렸다.


“네 동생 미셸 맞지?”


“오빠!”


괴물 같은 몰골의 서지터의 손에 이끌려 방에 들어온 소녀가 루퍼트에게 달려가 안겼다.


“미셸! 괜찮아? 다친 곳은?”


“흐아아앙!”


미셸은 오빠를 만났다는 안도감에 울음을 터뜨렸고, 서지터는 루퍼트의 말에 실소를 터뜨렸다.


“허허, 야! 밤새도록 싸우고 온 사람은 나거든? 형한테 먼저 다친 곳이 없는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냐?”


“죄, 죄송해요. 형! 괜찮으신 거죠?”


“시끄러! 이미 삐쳤어.”


서지터는 피가 흥건하고 묵직한 보자기를 바닥에 던져놓고 곧장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울지마. 미셸. 오빠가 미안해. 더 빨리 구해주지 못해서. 흐흑.”


“너, 너무 무서웠어. 흐아앙.”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남매는 부둥켜안고 재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둘은 서지터가 간단하게 씻고 나올 때까지 하염없이 울었다.


“저기요? 두 사람? 그만 울지?”


“형! 흐흑. 이렇게 목숨까지 걸어주실 줄은······.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루퍼트는 급기야 서지터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 통곡하며 감사하다는 말을 연신 내뱉었다.


“준비는 다 했지?”


“흐흑. 네.”


“그만 울고 일어나 인마. 일단 여관 아닌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날이 밝으면 잠깐 용병 길드에 들렀다가 바로 떠날 거야. 그사이 너는 잠깐 할 일도 있어.”


“네? 바로 레토론을 벗어나는 거 아닌가요?”


“그렉 모가지 딴 현상금은 받아 가야지. 그리고 루퍼트 너는 날 밝으면 바로 말 한 필 사와. 대충 씻기는 했어도 지금 내 꼴로는 말 사러 갔다간 난리 날 거 같다.”


“저, 정말 그렉을 죽이신 겁니까?”


서지터가 무서웠는지 루퍼트의 등 뒤로 숨은 미셸이 오빠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 건 아까 싸운 걸 잠시 봐서 느끼긴 했지만 진짜 그렉의 목을 가져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혹시 살아남은 부하 놈들이 쳐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얼른 나가자.”


서지터는 짐을 챙겨 마구간으로 향했다. 윈드테일에 짐과 미셸을 태워 용병 길드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서지터는 날이 밝을 때까지 골목 구석에 쭈그려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남매는 그동안 못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지? 아프거나 다친 곳은?”


“괜찮아. 오빠는?”


“나도 괜찮아. 여기 서지터 형이 많이 도와줬어.”


“돈도 없을 텐데 어떻게 이리 강한 분한테 부탁한 거야.”


“아냐. 형도 여동생이 있다고 그냥 도와주셨어.”


“흐흑, 무서웠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렉의 목을 들고 가게에서 내 이름을 마구 불렀어.”


미셸의 입장에선 서지터가 공포 그 자체였다. 새벽에 난리가 나 밖을 내다보니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악귀 같은 사내가 그렉의 머리를 들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댔으니까 말이다.


“어이, 남매님들. 다 들리거든?”


졸고 있던 서지터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한 마디 툭 내뱉자 미셸은 다시 오빠의 뒤로 숨어버렸다.


“아그극! 추워서 더 못 자겠다. 역시 노숙은 나하고 안 맞아.”


눈부신 아침 햇살에 서지터는 결국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


“여기 돈 줄 테니까 얼른 가서 말 한 필 구해와.”


남매가 말을 사러 가기 위해 사라지자 서지터는 그렉의 머리가 담긴 보자기를 들고 용병 길드로 향했다. 밤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하는 접수원은 피곤한 몸으로 청소를 하고 있다가 서지터가 들어오자 화들짝 놀라버렸다.


“어이구! 놀라라. 피범벅을 하고 들어와서 얼마나 놀란 줄 아슈?”


“뭘 그리 놀라요. 피범벅인 용병 처음 보는 것처럼.”


“어, 흠! 그래,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민망한 접수원이 용건을 묻자 서지터는 탁자 위에 피로 흥건한 보자기를 올려놓았다. 대강 무엇인지 느낌이 오긴 했지만, 보자기를 풀어 본 접수원은 깜짝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어허억!”


“여기 머리 주인공이신 그렉이란 놈 수배 전단지. 비교해 봐요. 맞는지 틀리는지.”


“마, 맞아. 그, 그렉. 어떻게 그렉의 머리가 저기에?”


“합법적으로다가 쳐들어가서 가져왔죠. 무고한 사람들 다치게 하지도 않았고 그렉 부하들만 죽이거나 다치게만 했으니 문제 될 거 없을 거고. 어제 내가 왔을 때 있던 용병들도 현상금 사냥꾼이라고 방해하긴 했지만 죽이진 않았고. 자! 그럼 이제 돈.”


“어? 어! 줘, 줘야지.”


접수원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자의 목을 하루 만에 가져왔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웠다. 분명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용병이라 느껴졌으니 이른 아침부터 잠이 확 깨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서둘러 금고에서 200골드를 챙겨 서지터 앞에 내밀며 말했다.


“정말 혼자 가서 그렉의 부하들까지 다 쓸어버린 건가?”


“그건 문제 될 거 없다면서요.”


“그, 그렇긴 한데······. 혹시라도 추후 우리가 조사해서 문제가 되는 게 파악되면 자격이 박탈될 수도 있지.”


“어디 보자.”


서지터는 천장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딱히 현상금 사냥꾼의 규정을 어길만한 건 없었는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입을 열었다.


“좀 전에도 말했지만, 딱히 없는 거 같은데요?”


“그래, 알았네. 여기 보상금 받게.”


접수원은 떨리는 손으로 두둑한 돈주머니를 서지터에게 건네주었다.


“그럼 볼일은 끝났으니 저는 가보겠습니다. 하아암!”


피곤한지 크게 하품을 하며 용병 길드 밖으로 나섰다. 대수롭지 않은 서지터의 행동에 접수원은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지난 새벽 일은 현상금 사냥꾼 바닥에서 두고두고 회자가 될 꽤 큰 사건이기도 했다.


#

아침 일찍 레토론을 빠져나온 세 사람은 서둘러 남매의 고향으로 방향을 잡았다. 말을 타고도 며칠이 걸리는 고된 거리였지만 다시 만난 남매는 매 순간순간이 즐겁고 행복했다.


3일 차가 되는 날, 작은 마을에 묵게 된 세 사람은 피로를 풀며 휴식을 취했다. 특히나 미셸은 그동안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쳤는지 줄곧 잠을 자며 시간을 보냈고, 루퍼트는 그런 동생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한편 서지터는 그렉이 불태운 거래 장부의 멀쩡한 부분을 꼼꼼하게 살펴보며 이멜다의 이름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혹시라도 타지 않은 부분에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에서 말이다.


“후우, 걔는 왜 이걸 벽난로에다 집어 던져서 사람 짜증 나게 하냐. 없어. 여기도 없어.”


“형, 죄송해요. 저라도 같이 갔더라면 거래 장부라도 무사히 건졌을 수도 있는데.”


“뭐라는 거야? 네가 따라왔으면 그렉 낯짝 보기도 전에 죽었을걸?”


“그래도······.”


“사실 나도 오래간만에 죽을 뻔하긴 했지.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오싹해.”


서지터는 1대5로 싸우던 순간을 떠올렸다. 다섯의 실력은 특출날 정도로 뛰어나진 않았지만, 유기적인 움직임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물론 체력 안배 역시 제대로 하지 않은 점이 위기를 자초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 당시 느꼈던 이상하고 생소한 검의 떨림이 계속 생각이 났다.


“으음, 그때 그건 대체 뭐였을까?”


“뭐가요?”


“아냐. 있어. 그런 게.”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다시 거래 장부의 페이지를 넘겨 훑어보았다. 그때였다. 장부의 오른쪽 낱장에 그토록 찾던 이멜다의 이름이 적힌 것을 보았다.


“어! 어?”


“형, 왜요?”


“찾았다!”


“정말요? 진짜 다행이에요. 이제 그분 찾으러 가면······.”


“아아악!”


서지터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잠을 자고 있던 미셸도 깜짝 놀라 잠에서 깨 무슨 일인지 루퍼트에게 물었다.


“오빠, 무슨 일이야?”


“그, 그게 말이야.”


“아아아악! 망할!”


- 퍽!


급기야 서지터는 거래 장부를 집어 들고 벽에다 내던져버렸다. 이름을 찾았다면서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이 의아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형, 무슨 일이에요.”


“없어. 없다고.”


“뭐가요.”


“날짜랑 이름까지는 있는데 어디로 갔는지 타버려서 없다고. 하아아.”


장부에는 정확히 이렇게 적혀있었다.


「헤르가르트력 912년 11월 20일. 이멜다 에거트. 18세. 330골드에.」


“왜 하필 딱 거기서 타버린 거냐고. 진짜 돌겠다.”


서지터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못 해 먹겠어. 나 집에 갈래.”


“혀, 형. 괜찮아요. 찾을 수 있어요. 기운 내요.”


“아냐. 이 정도면 그냥 찾지 말라는 하늘의 뜻인 거야. 진짜 울고 싶다.”


울기 직전이었다. 그런 서지터의 모습이 딱했는지 함께 이동하는 내내 그를 무서워하며 말조차 걸지 않던 미셸이 먼저 말을 걸었다.


“저기······. 제가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정도의 큰 금액이라면 아마도 바가지를 씌워서 개인한테 팔았을 거예요.”


미셸의 말에 눈가가 촉촉해졌던 서지터의 눈빛에서 불꽃이 튀었다.


“정말? 진짜?”


“거기에 있는 동안 그런 경우 몇 번 보긴 했는데 정확한 건 아니고······.”


희망찬 미셸의 답변이었지만 즉시 현실을 깨달아버렸다.


“하아아, 개인한테 팔렸다면 이름이 온전하게 남아있더라도 찾기가 힘들 거 아냐. 망했어. 망했다고.”


아무것도 건진 것이 없었다. 조금만 더 빨리 거래 장부를 챙겼더라면 자그마한 기대는 해볼 수 있었을 테지만 그 고생을 하며 결국에는 원점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이멜다를 찾지 못했어도 그나마 좋은 일을 한 셈 치고 서지터는 두 남매를 고향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극진하게 음식 대접한다며 루퍼트가 들떠있었다. 하지만 서지터는 마을 입구에서 멈춰 남매를 불렀다.


“얘들아. 나 여기서 그만 돌아갈게.”


“형! 왜요. 미셸이 음식 솜씨가 좋아요. 식사도 하시고 며칠 푹 쉬었다 돌아가세요.”


“됐어. 먹은 셈 칠게. 그리고 이거 받아.”


- 툭.


서지터는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루퍼트에게 던져주었다. 그렉을 잡고 받은 보상금이었다.


“형, 이건?”


“너희 거야.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돈인데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새 출발 하는 데 써.”


“아니에요! 도움만 받고 전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왜 한 게 없어. 어떻게 해서든 동생 찾으려고 애썼잖아. 지금처럼 우애 있게 잘 지내고 인연이 닿으면 또 만나자.”


루퍼트와 미셸은 울음이 터져 나왔다.


“흐흑! 형, 정말 고마워요.”


“감사해요. 지옥 같은 곳에서 구해주셔서.”


“자! 그럼 나는 돌아갈게. 행복해라?”


서지터는 말머리를 돌리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잠깐의 작은 인연이었지만 뜻깊은 일을 했다는 것에 뿌듯했다.


‘나도 에스나가 보고 싶네.’


오늘따라 유독 동생 에스나가 보고 싶어지는 하루였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피드백과 충고, 오타 지적 부탁드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잊혀진 자의 이야기 2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35 6화 누군가의 의지 - 6 23.07.19 25 2 13쪽
134 6화 누군가의 의지 - 5 23.07.18 28 2 13쪽
133 6화 누군가의 의지 - 4 23.07.17 30 2 12쪽
132 6화 누군가의 의지 - 3 23.07.14 28 2 12쪽
131 6화 누군가의 의지 - 2 23.07.13 27 2 15쪽
130 6화 누군가의 의지 - 1 23.07.12 30 2 12쪽
129 5화 각자의 시간 - 32 23.07.11 27 2 12쪽
128 5화 각자의 시간 - 31 23.07.10 30 2 12쪽
127 5화 각자의 시간 - 30 23.07.07 39 2 13쪽
126 5화 각자의 시간 - 29 23.07.06 39 2 12쪽
125 5화 각자의 시간 - 28 23.07.05 40 2 12쪽
124 5화 각자의 시간 - 27 23.07.04 30 2 13쪽
123 5화 각자의 시간 - 26 23.07.03 43 2 13쪽
122 5화 각자의 시간 - 25 23.06.30 35 2 13쪽
» 5화 각자의 시간 - 24 23.06.29 31 2 17쪽
120 5화 각자의 시간 - 23 23.06.28 37 2 13쪽
119 5화 각자의 시간 - 22 23.06.27 40 2 12쪽
118 5화 각자의 시간 - 21 23.06.26 33 2 12쪽
117 5화 각자의 시간 - 20 23.06.23 45 2 13쪽
116 5화 각자의 시간 - 19 23.06.22 33 2 13쪽
115 5화 각자의 시간 - 18 23.06.21 32 2 14쪽
114 5화 각자의 시간 - 17 23.06.20 36 2 13쪽
113 5화 각자의 시간 - 16 23.06.19 34 2 13쪽
112 5화 각자의 시간 - 15 23.06.16 38 2 12쪽
111 5화 각자의 시간 - 14 23.06.15 44 1 12쪽
110 5화 각자의 시간 - 13 23.06.14 36 2 13쪽
109 5화 각자의 시간 - 12 23.06.13 36 2 13쪽
108 5화 각자의 시간 - 11 23.06.12 38 2 13쪽
107 5화 각자의 시간 - 10 23.06.09 31 2 14쪽
106 5화 각자의 시간 - 9 23.06.08 36 2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