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삼일(三日)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09.22 18:39
최근연재일 :
2023.11.03 22:10
연재수 :
69 회
조회수 :
1,092
추천수 :
227
글자수 :
344,383

작성
23.11.03 21:10
조회
8
추천
2
글자
13쪽

다음날(3)

DUMMY

김옥균의 일갈이 있은 후 개화당을 무시하는 발언은 없었다.

제물포로 탈출해서 우편선 치토세마루(千歲丸천세환)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일본인들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공사관 직원들은 바쁘게 서류를 분류했고, 군인들은 총검을 점검하고 군장을 쌌다. 그리고 조선 개화당 아홉 명은 상투를 잘랐다.


머리를 자르지 않고 위로 묶어 상투를 틀고 망건과 갓을 쓰고 다니는 것은 시간과 물자를 낭비하는 허례허식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정령을 발표하면서 하위 항목에 단발을 실시한다는 계획도 포함시켰었다.

하지만 일본인 틈에 섞여 도망치면서 조선인임을 숨기기 위해 상투를 잘라내는 것은 씁쓸한 일이었다.


김옥균은 칼로 끊어낸 실타래 같은 머리 다발을 내려다 보았다.

지금의 단발은 불필요한 망념을 끊어내는 비장한 결심의 표현이나 산뜻한 새 출발을 드러내는 모습이 될 수 없었다. 그는 말없이 어깨에 붙은 머리카락을 털어냈다.


공사관 직원이 낡은 양복을 가져다 줬다. 입고 있던 조선 관복을 벗고 일본인이 물려준 양복으로 변장을 마쳤다.

거울 앞에 서서 바뀐 모습을 확인하는데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멸문지화를 각오하고 혁명에 나선 우리가 죽음이 두려워 여기 숨었는 줄 아시오? 지나로부터 조선을 독립시켜서 아시아 삼국의 평화를 이루려고 수모를 견디고 있는 게요.’


내가 했던 말은 진심이었던가, 스스로를 의심할 때 거울에 비친 사내의 모습이 바뀌었다.

단발을 한 김옥균의 얼굴이 아니라 상투를 틀고 있는 민태호의 얼굴이 보였다. 이미 죽은 자가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 말했다.


‘정말 독립을 위해 수모를 견디는 게야? 죽음이 두려워 숨은 게 아니야?’


김옥균은 급하게 돌아섰다. 거울을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오후 두 시에 탈출이 시작됐다.

먼저 공사관을 둘러싼 도성 백성들의 머리 위로 위협사격이 있었다. 총성으로 길이 열리자 일본군은 두 줄로 길게 늘어서서 출발했다.

총을 든 일본군이 양쪽에서 호위하는 가운데 다케조에를 비롯한 공사관원들과 대피했던 일본 상인들 틈에 조선 개화당도 섞여 있었다.


속보로 이동하는 탈출 행렬에는 도성 백성들의 욕설과 고함이 끊임없이 뒤따랐다. 백성들은 김옥균과 박영효, 그리고 죽은 홍영식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김옥균과 박영효는 역적놈들을 내놓으라는 고함 속에서 자기 이름을 확인하면서, 계속 걸었다.

때때로 욕설로는 성이 안 차서 돌을 집어 던지는 백성들이 있었고, 일본군이 대응해서 총을 쏘는 일이 반복됐다.


서대문이라고 더 많이 불리는 돈의문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역도들의 변란으로 인해 서대문은 낮에도 닫혀 있었다. 무라카미가 보낸 선발대가 문을 열기 위해 총을 겨누며 접근했다.

서대문을 파수하는 군사들은 총으로 무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활과 창으로는 소총을 가진 일본군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은 파수병들도 잘 알았다.


문루에 올라서 경계를 서던 군사들은 도성 담을 타고 달아났고, 문 앞에 서 있던 군사는 도망치다가 위협사격에 얼어붙어서 붙잡혔다.

포로가 된 파수병과 일본군 선발대가 함께 문을 열기까지 일본군과 개화당은 서대문 앞길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왜놈들이 달아난다!”

“역적들이 왜놈 틈에 숨었다!”

“이쪽이요! 이쪽! 성문 앞길에 왜놈들이 몰려왔소!”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서 있는 동안 대열 좌우로 백성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분노와 경계의 눈초리로 일본군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삽시간에 수를 불려가고 있었다.


- 조선놈들은 하는 일이 없나? 개떼처럼 몰려다니며 짖어대네.


수염이 텁수룩해진 일본군 고참 병사가 투덜거리면서 김옥균 쪽으로 눈을 흘겼다.


- 저 종자들은 먹고 놀고 싸움질하는 것밖에 못해요. 그런 것들을 도와준다고······


어린 병사가 고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는 말하면서 소총에 탄환을 장전하고 있었다.

김옥균은 어금니에 힘을 줬다. 차라리 눈을 감고 싶지만 그래서는 살아서 나갈 수가 없었다. 똑바로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주시하면서 감정 없이 움직여야 한다고 다짐했다.


일본군 행렬의 양옆과 뒤쪽까지 삼면을 에워싸고 백성들은 외쳐대기 시작했다. 아녀자와 어린애까지 모두 합하면 삼백 명은 족히 될 것 같아 보였다.


“죽여라!”

“왜놈들을 내보내지 마라!”

“야 이 쳐죽일 호로자식놈들아! 빠가야로 새끼들아!”

“왜놈당 김옥균 박영효가 어떤 개새끼냐! 썩 대가리 내밀지 못할까!”


금방 돌멩이와 기왓장이 날아들었다. 미리 던질 것들을 주워들고 온 백성들이었다.

첫 번째 돌멩이가 날자마자 삼면에서 팔매 세례가 쏟아졌다. 어린애와 노인까지도 팔매질에 열을 내고 있었다.

김옥균은 좌우로 고개를 저으면서 날아오는 것들을 확인했다.


‘다른 생각은 말자. 내 몸을 지켜야 된다. 날아오는 것들을 주시해야 된다.’


어깨에 팔에 들고 있는 총에, 돌을 맞은 개화당과 일본군이 속출했다. 지휘관 무라카미는 간단하게 명령을 내렸다.


“사격!”


공포탄이나 위협 사격 같은 것은 없었다. 탕탕탕타탕, 단 일 초도 지체하지 않고 일본군들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집게 손가락을 건 채로 방아쇠를 당기기만 기다리던 일본군들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었다.


하늘을 날던 돌멩이가 사라지고 아수라장의 비명이 들렸다.

일본군을 둘러쌌던 도성 백성들은 넘어지고 도망치고 피를 뿜어내고 울부짖었다. 혼비백산해서 달아나다가 총상에 피를 흘리는 팔다리를 보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고, 얼굴이 무너진 제 식구를 보면서 겁에 질려 울었다.


몇몇 병사는 멀리 달아나는 이의 등을 조준해서 총탄을 날렸다. 심신이 지친 무라카미 대위는 다른 명령을 덧붙이지 않고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먼 거리의 등짝을 명중시킨 병사는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김옥균은 똑똑히 주시했다. 김옥균이 구해내겠다고 맹세했던 백성들이 김옥균을 지키는 자들의 총에 맞아 쓰러지고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저 그냥, 움직이고 넘어지고 일어나고 달리는 형상들을 지켜보았다.


끼이이익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무거운 문이 열렸다. 와아 열렸다, 일본군들이 기세 좋게 함성을 올렸다.


“구보로 전진!”


무라카미의 간결한 명령에 일본군들이 빠르게 달려나갔다.

병사들 틈의 개화당들도 당연히 빨리 달렸다. 김옥균도 앞에 선 병사의 뒤통수를 주시하면서 힘껏 팔다리를 놀렸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유혁로, 변수, 이규완, 정난교, 신응희.

갑신년 개화당의 정변을 주도했던 아홉 사람은 피난하는 일본인들을 따라가 12월 8일 제물포 항에서 일본 우편선 치토세마루(千歲丸천세환)에 승선했다.


제물포로 추격해온 조선 정부측에서는 이들 아홉 명을 인도해줄 것을 요구했다.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그 요구에 응해 아홉 사람을 내보내려 했으나, 우편선 선장이 버티고 거부함으로써 그들은 배에 남을 수 있었다.

12월 11일 제물포를 출발한 치토세마루는 이틀 뒤에 나가사키 항에 도착했고 개화당 아홉 사람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눈을 뜨니 퀴퀴한 오줌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신이는 다 썩어가는 냄새나는 가마니 위에 누워 있었다. 굵은 나무로 엮은 창살이 눈에 들어왔다. 감옥 안이었다.


신이는 흐릿한 정신을 가다듬어 기억을 되짚어 봤다.

진홍을 도우러 다방골 운영각으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개화당 이서방과 같이 있는 것을 보았던 누군가가 역적놈이라고 외쳤었다. 그리고 뒤통수에 뭘 맞았다.


‘아마 돌멩이였을 거야.’

여태 얼얼한 뒤통수를 더듬어 보니 피가 엉겨붙어 있었다. 그리고도 여기저기 매를 맞은 것 같았다. 허벅지와 어깨가 심하게 쑤셨다.


조금씩 팔을 돌리고 다리를 움직여 봤다. 통증이 심했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가 보다 생각하며 감옥 안을 살펴봤다. 신이가 있는 방에는 세 사람이 더 있었다. 목에 칼을 쓴 채로 졸고 있는 사내가 둘, 또 한 사내는 한쪽 눈이 안 보일 정도로 붓고 멍들어 있었고 이마가 깨져서 피로 물든 채 쓰러져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신이는 자신의 호흡을 세면서 쓰러진 사내를 주시했다. 스물을 셀 때까지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깨도 들썩이지 않았고 콧망울도 제자리 그대로였다.

저 사람이 숨을 쉬지 않는다고 말해줘야 하나, 망설이는 중에 신이의 눈꺼풀이 가라앉았다. 감옥 바닥이 좌우로 흔들리며 가라앉는 것 같다고 느끼면서 신이의 정신은 다시 혼미해졌다.


‘아마 운영각으로 들어가기 한 달 전쯤이었을 거야.’ 비몽사몽 간에 신이는 유대치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회상하고 있었다.


- 선생님. 새절에 따라갔을 때 스님 얘기를 들었는데 사람이 한 번 죽어서 없어지는 게 아니라 윤회란 걸 한대요.

그러면 어디선가 우리 아버지도 아기로 다시 태어날까요? 그 아기를 제가 만날 수 있을까요?


‘선생님은 웃으셨을 거야. 나는 엉뚱한 걸 여쭌 것 같아서 죄송했는데 웃으면서 이야기하셨을 거야.’


- 어떤 일이나 태도가 거듭되다가 습관으로 굳어진 것, 어떤 일을 할 때 아쉬움이나 불안이 찌꺼기처럼 들러붙은 것, 자꾸 지나간 일을 돌이켜서 굳어져 남은 기억, 이것들을 업(業)이라고 한다.


‘업······ 알쏭달쏭한 말이었지. 그래도 선생님은 잘 설명해 주려고 애쓰셨어.’


- 그런 업들이 눈에 안 보이지만 허공 중에 숨어 있다고 생각해 봐라. 그러면 알기가 쉬워진다. 그 업들은 가만 있는 게 아니고 사람에게 옮겨 붙는다.

그 업들이 생겨난 곳과 생겨난 때, 조건이 비슷하게 태어나는 아이에게 전해져 옮는다.


- 귀신이 씐다는 거랑 다른 얘기지요?

- 다르다. 먼저 살았던 사람을 나중 사람이 닮는다고 여겨라. 윤회한다는 건 네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이 다시 나와서 세상을 다시 사는 게 아니다.

네가 아이를 낳아 기르게 되면 그 아이는 얼마쯤 네 아버지의 업을 이어받게 될 거다. 그리고 그 아이는 살면서 자기가 털어내지 못한 업도 더해갈 것이다. 그런 걸 윤회라고 생각해야 된다.


‘선생님이 해 주신 얘기랑 아버지가 자주 하던 얘기가······ 말이 아주 다른데도 왠지 비슷한 것 같았어.’


- 아버지가 자주 그런 얘길 했어요. 제가 이쁜 각시랑 자식 낳아서 기르고 살면 아버지 소원 다 이룬 거라고요.


‘선생님은 다시 조용히 웃으셨지.’


- 그래. 훗날 네가 아이를 착하게 키우면 그 아이 마음이 할아버지 그러니까 네 아버지를 닮게 될 것이다.

- 그런데요. 새절 스님이 업이란 걸 쌓지 말고 해탈하란 얘기도 하던데요. 그럼 조상의 버릇이나 조상이 겪은 기분 같은 걸 지워버리라는 건가요?


‘하하하. 그때는 선생님이 소리 내어 웃으셨어. 그리고 또 설명하셨지.’


- 내가 책을 좀 뒤적이고 스님들 얘기도 자주 들었지만 때를 묻히고 사는 속인일 뿐이다. 부처님의 깊은 이치를 설명할 사람이 못 된다. 그저 오래 살아 늙어가는 사내의 생각으로는 말이다.

그때 그때 사람들 사는 세상에 도움이 되게 열심히 사는 것이 제일인 것 같다. 그리고······, 고균이 그러더라. 완전히 태우는 거라고.

- 예?

- 완전연소 完全燃燒, 어떤 일을 할 때 아무런 미련이 남지 않게 온전히 힘과 정성을 온전히 다해 모두 불태우는 것. 업을 남기지 않는 비결이랬지.


‘모두 불태운다. 고균 아저씨한테 어울리는 말 같았어. 말은 고균 아저씨의 재주니까.’


- 말에 멋이 있다. 그게 고균의 장점이지.


‘맞아요. 멋이 있어요. 고균 아저씨도 대치 선생님도 진홍 누이도 멋있는 사람들이에요.’


- 죽은 척해라. 입 다물고 가만 있어.


‘예? 대치 선생님이 왜 이러시지? 왜 이상한 얘길 하시지?’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삼일(三日)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오후 9시 10분, 10시 10분에 업로드합니다. 23.10.09 8 0 -
공지 하루 두 편씩 업로드 23.10.02 10 0 -
공지 연재 시각은 주 6회(월~토) 오후 9시 10분입니다. 23.09.22 31 0 -
69 다음날(4)-최종화 23.11.03 15 3 12쪽
» 다음날(3) 23.11.03 9 2 13쪽
67 다음날(2) 23.11.03 7 2 12쪽
66 다음날(1) 23.11.03 7 2 12쪽
65 사흗날(17) 23.11.01 8 2 12쪽
64 사흗날(16) 23.11.01 6 2 12쪽
63 사흗날(15) 23.10.31 7 2 12쪽
62 사흗날(14) 23.10.31 9 2 12쪽
61 사흗날(13) 23.10.30 7 2 12쪽
60 사흗날(12) 23.10.30 8 2 11쪽
59 사흗날(11) 23.10.28 8 2 11쪽
58 사흗날(10) 23.10.28 8 2 12쪽
57 사흗날(9) 23.10.27 8 2 12쪽
56 사흗날(8) 23.10.27 6 2 11쪽
55 사흗날(7) 23.10.26 7 2 12쪽
54 사흗날(6) 23.10.26 6 2 12쪽
53 사흗날(5) 23.10.25 10 2 13쪽
52 사흗날(4) 23.10.25 9 2 12쪽
51 사흗날(3) 23.10.24 10 2 12쪽
50 사흗날(2) 23.10.24 7 2 12쪽
49 사흗날(1) 23.10.23 8 2 12쪽
48 이튿날(21) 23.10.23 7 2 12쪽
47 이튿날(20) 23.10.21 8 2 12쪽
46 이튿날(19) 23.10.21 8 2 12쪽
45 이튿날(18) 23.10.20 8 2 12쪽
44 이튿날(17) 23.10.20 9 3 13쪽
43 이튿날(16) 23.10.19 7 2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