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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삼일(三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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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09.22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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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3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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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흗날(1)

DUMMY

사흗날

(1884년 12월 6일 - 음력 10월 19일)



두세 시간 옅은 잠에 뒤척이다가 깨어난 홍영식의 눈에 책상 앞에 앉은 박영효가 보였다. 박영효는 막 글쓰기를 마치고 붓을 내려놓고 있었다.

홍영식이 몸을 일으킬 때 박영효는 종이를 들어 자신이 쓴 글을 검토했다.


‘지나 놈들이 우리나라를 제 아랫것 보듯 함부로 대한 것은 어제오늘이 아니다.

하지만 궁궐 문을 열어라 닫아라 참견한 것은 초유의 일이다.

원세개는 우리의 거사를 가볍게 보지 않는다. 놈은 우리 진영을 들여다 보면서 응수타진(應手打診)을 하고 있다.’


바둑을 둘 때 상대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 반응을 살피는 전술이 응수타진이다.

청나라 사관이 선인문 앞에 와서 문을 잠그지 말라고 한 것은 개화당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 알아보기 위한 수라고 박영효는 판단했다. 관물헌의 넓은 방 안에서 홀로 등잔불을 켜놓고 오래 좌정한 끝에 나온 생각이었다.


선인문에서 온 보고를 듣고 즉시 칼을 집어 들었던 박영효가 노여움을 가라앉히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경계를 강화하는 대책회의를 마쳤을 때까지만 해도 네놈들을 쓸어버릴 테니 당장 군영을 나오라는 격문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박영효는 열정과 혈기 못지않게 계산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젊은이였다.


자기 앞의 등잔만 남기고 월방 안의 불이 모두 꺼진 뒤에야 그는 상대방의 의도와 거기에 맞는 대응방법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원세개가 알고 싶은 것은 국왕과 개화당과 일본 공사가 얼마나 결속돼 있는지, 방어태세와 자신감은 어떠한지, 전면전을 준비하는지 회피하려는지의 여부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드러낼 것은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자신감과 어디를 파고들어도 틈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단결된 자세였다.


‘너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덤비면 맞서 싸울 거다. 우리를 다치게 하려면 너희도 그만큼 다칠 각오를 해라. 우리는 모두 똑같은 생각으로 너희에게 맞설 거다.’


박영효가 생각한 서찰의 요지였다.

가장 주의할 점은 용기를 드러내되 과도하지 않게 함으로써 두려운 자의 허세로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대되 장황하게 짖어대지 않는다.’



홍영식이 눈을 부비며 박영효에게 다가왔다.

박영효는 읽던 글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무엇이 적혀 있는지 알아 본 홍영식이 종이를 집어서 등잔 가까이로 옮겨 들었다.


‘청나라 군사들이 조선 궁궐 수문장에게 문을 잠그지 말라고 말한 것은 양국의 우호관계를 해치는 큰 실책이다.

지금 우리 조정은 대군주의 밝으신 다스림에 따라 한뜻으로 움직이고 있다. 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우리 조정 스스로 의뢰할 것이다.

만에 하나 앞으로 망령된 행동이 반복된다면 정중한 서찰이 아니라, 혈전을 불사하는 조선 장졸의 분노를 만나게 될 것이다.’


“어떻소?”


골똘히 글을 들여다보는 홍영식에게 박영효가 물었다.


“내가 넋 놓고 있는 동안 금릉위가 고민하셨구려. 좋은 문안이외다.”


홍영식은 찬사를 건넸지만 할 말이 남은 것 같았다. 박영효가 보기에는 지금 글 그대로 수정 없이 보내도 된다는 흔쾌한 인정은 아니었다.


“좌상 대감 보시기에는 어디를 좀 더 다듬어야 하겠소?”

“내 걱정이 과한지 모르겠으나 혈전을 불사한다는 표현이 조금 걸리오.”

“나도 격해 보이는 글이 오히려 불안함을 드러낼 수도 있음을 경계하긴 했습니다.”


두런거리는 음성을 듣고 일어난 김옥균도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홍영식이 원세개에게 보내는 글이라면서 서찰을 김옥균에게 건넸다.


김옥균은 말과 글에 능했고 말과 글이 중요함을 알았다. 정치적 의견을 담은 글은 문구 하나하나의 의미를 따지게 되는 것도 당연히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글이 중요한 판국이 아니라는 생각이 김옥균을 지배했다.

불안에 시달리며 남모르게 밤을 새운 탓은 아니었다. 표를 내지 않았지만, 청나라 장수에게 보내는 서찰의 무게가 가볍게 느껴질 정도로 정세가 심각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누구 명의로 보내는 게 적절하겠소?”


김옥균이 두 사람에게 물었다. 박영효가 홍영식을 보면서 말했다.


“병조판서가 부재중이니 좌상 명의로 하는 게 격에 맞지 않나 싶소만······.”


홍영식은 박영효의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김옥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좌상과 초안을 잡은 금릉위의 뜻대로 쓰시면 되겠소. 내가 보기엔 별 무리가 없는 글 같소.”


결국 자네들이 알아서 하라는 얘기였다.

김옥균이 말과 글을 다루는 일에서 물러서는 일은 흔치 않았지만, 마음이 바쁜 박영효와 홍영식은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홍영식이 우려했던 부분의 문구를 골라보았다.

‘두려움을 모른다’, ‘죽음을 마다않는다’,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비슷한 뜻이지만 단단하되 과하지 않은 말을 찾다가 ‘싸움을 두려워 않는 조선 장졸들’로 결정을 봤다.


‘만에 하나 앞으로 망령된 행동이 반복된다면 정중한 서찰이 아니라, 싸움을 두려워 않는 조선 장졸들의 분노를 만나게 될 것이다.’


서찰은 곧 하도감의 원세개 군영으로 보내졌다.

원세개가 서찰에 적힌 경고에 부담을 느낄지는 박영효도 홍영식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운영각에 남아 있는 사람은 다섯 명뿐이었다.

기생들은 도성 안팎에 아는 사람이 없는 두 명만 남기고 운영각을 떠나 있었다. 그 둘 외에 진홍과 주방일을 맡아 하는 중년 여인 원주댁, 행랑아범인 중늙은이 양서방이 휑한 집안을 지키고 있었다.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것은 막 동이 트는 이른 아침이었다.

야행성인 젊은 기생 둘은 골아 떨어져 있었지만, 걱정이 많은 진홍과 나이가 많은 두 남녀는 깨어 있었다.


사위가 고요했기 때문에 안채의 진홍도 대문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쌀쌀한 날씨 탓에 밭은 기침을 하며 마당으로 나선 양서방이 대문 틈으로 기척을 한 사람을 확인했다. 조그마한 아낙네가 몸을 웅크리고 대문 앞에 서 있었다.


파주댁은 홍련이가 살고 있는 오조유의 집에 드난살이를 하면서 살림을 돕는 아낙이었다. 전부터 종종 홍련이의 심부름으로 운영각을 드나들곤 했던 파주댁이 진홍 앞에서 무명 천으로 된 주머니를 꺼냈다.


엇저녁에 명례방 오조유 집에 일하러 갔던 파주댁은 홍련을 찾아가 보라는 전갈을 하인들에게 전해 들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하도감의 청군 장교 가족들이 모인 집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파주댁은 어떤 경로로 어디에서 편지를 받아왔는지 먼저 진홍에게 말한 다음 편지를 싼 무명 천을 건넸다.

편지를 받은 진홍은 찬모 원주댁을 불러서 이른 아침부터 바쁜 걸음을 한 파주댁에게 조반상을 챙겨주게 했다.


혼자 남은 방에서 진홍은 편지를 펼쳤다.

홍련이 가지런히 적은 언문이 눈에 들어왔다.


‘청군 진영에 조선 대감들이 드나든다. 김, 심 대감이 청 장수들과 회의를 했다.

심대감이 큰 도움이 된다고 들었다. 궁 안 소식이 새 나온다고 한다.

청군은 싸울 준비가 됐다 한다. 목참판 집에 있는 민 씨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한다.’


진홍은 읽자마자 편지를 다시 접으면서 일어났다. 속히 김옥균에게 알려야 할 소식이었다.

진홍은 유대치의 약방을 향해 급하게 집을 나섰다.

궁궐 문을 지키는 군사에게 아녀자가 물건을 전달하는 일은 너무 눈에 두드러지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계향이 보고 싶었다.

편지를 전하러 유대치 집에 가기로 작정하자 어제 봤을 때까지 의식이 없었던 계향이 어찌 됐는지 확인하고픈 마음이 더욱 절실해졌다.



진홍의 가죽신 한 짝은 마당에 다른 한 짝은 댓돌 위에, 편지를 담은 무명 주머니는 유대치의 약방 툇마루에 떨어져 있었다.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진홍은 계향이 깨어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정말요, 정말 깨어났어요? 괜찮은 거예요?’

질문들을 쏟아내며 진홍은 마당으로 뛰어들어 외쳤다.


“계향아, 계향아!”


앞뒤 안 가리고 목이 터져라 지르는 고함을 들은 환자는 네 발로 기다시피 방 안에서 뛰쳐나왔다.

툇마루에 오르기 전에 방문이 덜커덕 열리면서 계향의 얼굴이 보이자 진홍은 눈물이 터졌다.


“아이고, 얘 계향아!”

“언니!”


신발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툇마루로 뛰어 오른 진홍이 팔을 벌리자, 역시 달려 나온 계향이 쓰러져 안겼다.

방 안에서 진홍의 외침을 들은 순간부터 울음을 터뜨린 계향은 진홍 품에서 아예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언니······ 내가, 내가······ 언니 미리견 저고리가 욕심이 나서······ 내가 말도 안 하고 잘못했는데······ 새벽에 그놈들이······”


꺽꺽 울음이 치밀어서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하면서 계향은 미안함과 두려움과 서러움을 모두 뒤섞어 믿고 지내던 이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아니야. 내가 미안하다. 그놈들이 난 줄 알고 너를 잡아갔다고 들었다. 나 때문에 네가 큰 고생을 했다. 미안하다. 계향아.”


진홍은 조심스럽게 붕대를 감은 계향의 뒷머리를 만져 보았다.

새로 감은 붕대에 피 흘린 흔적은 없었지만 다친 부분이 혹으로 도드라져 있었다.

계향이 뒤통수를 강타당해서 죽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이 나자 진홍은 울음이 더욱 북받쳤다.


“큰일 날 뻔했다. 정말 천만다행이다. 계향아. 어떻게 이런······.”

“언니······.”


계향은 뭐라 말도 못하고 꺼이꺼이 통곡할 뿐이었다.

계향을 안은 진홍이 통곡의 흔들림에 함께 떨릴 때였다. 떠올리기 싫은 장면이 그려졌다.

툭툭 바닥을 구르던 사람의 머리가 멈췄다. 하늘을 바라보는 것처럼 눈꺼풀이 열린 두 눈이 보였다.


계집아이는 왜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 두 눈을 마주봤을까?

진홍은 기억 속 죽음의 영상들이 퍼뜩 떠올라 가슴이 철렁했다.

가족의 죽음을 목격한 후에도 여러 번 주변 사람들의 죽음이나 재난을 겪었다.

하지만 충격이 익숙해지거나 누그러지지는 않았다. 잊혀지는 척 누적돼온 고통이 강도를 더해 가며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통곡하는 계향을 끌어안은 진홍도 파들파들 떨면서 울었다. 계향처럼 엉엉 소리내 통곡하지는 않았지만 억지로 참으려는 통증에서 신음이 새나오는 것처럼 힘들게 울었다.

그러면서 진홍은 이를 악물었다.

남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자들에 대한 분노 역시 줄어들지 않았다. 진홍은 복수의 상상으로 증오를 달래며 버틸 뿐이었다.


울고 있는 두 여인의 방으로 들어오다가 유대치는 마루에서 무명 주머니를 주웠다.

진홍과 계향이 함께 우는 것을 툇마루에서 들여다보면서 어쩔 줄 모르던 유대치는 무명 주머니 속이 궁금해졌다.

진홍의 눈물은 쉬이 멈출 것 같지 않았다. 기다렸다가 양해를 구하려던 유대치는 말 없이 진홍이 떨군 물건을 확인해 보았다. 아녀자가 언문으로 쓴 짤막한 편지글이 나왔다.

간단한 내용이 아니었다.


“진홍아.”


통곡하는 계향을 끌어 안고 울면서도 진홍은 유대치의 음성을 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면서도 돌아앉아 고개를 숙였다.


“이 서찰은······.”

“오조유 주변에 있는 제 지인이 조금 전에 보내온 것입니다.”


진홍의 이야기를 듣자 유대치는 손에 쥔 편지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


작가의말

이틀 + 날 = 이튿날 

술(‘밥 한 술 떠라’할 때의 ‘술’) + 가락(‘엿가락, 국수 한 가락’ 등 길게 이어진 것) = 숟가락


위의 예처럼 사흘 + 날 = 사흗날


‘이틀날, 사흘날’이 아니라 ‘이튿날, 사흗날’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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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사흗날(13) 23.10.30 7 2 12쪽
60 사흗날(12) 23.10.30 8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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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사흗날(7) 23.10.26 7 2 12쪽
54 사흗날(6) 23.10.26 6 2 12쪽
53 사흗날(5) 23.10.25 10 2 13쪽
52 사흗날(4) 23.10.25 9 2 12쪽
51 사흗날(3) 23.10.24 10 2 12쪽
50 사흗날(2) 23.10.24 7 2 12쪽
» 사흗날(1) 23.10.23 9 2 12쪽
48 이튿날(21) 23.10.23 7 2 12쪽
47 이튿날(20) 23.10.21 8 2 12쪽
46 이튿날(19) 23.10.21 8 2 12쪽
45 이튿날(18) 23.10.20 8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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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이튿날(16) 23.10.19 7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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