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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삼일(三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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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09.22 18:39
최근연재일 :
2023.11.03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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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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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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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4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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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사흗날(3)

DUMMY

관물헌에 들어선 다음부터 주상 앞에 수라상을 내려놓을 때까지 대령상궁은 가시덤불 속을 걷는 것 같았다.


‘아아 다행이다.’

방바닥에 상이 놓이고 식사에 관심이 없는 표정으로 주상이 수저를 들자 대령상궁은 속으로만 긴 한숨을 쉬었다.


“토란이 잘 익어서 국이 드시기에 좋을 것이옵니다.”

“그래, 수고들 했다.”

“하오나 전하, 국이 아직 뜨거우니 사발을 들고 들이키시면 데실까 염려되옵나이다.”


대령상궁은 평소에 하지 않던 말로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러나 주상이 다시 보니 그녀는 다소곳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주상은 국그릇을 내려다 보았다.

그릇 밑에 갈색 천 같은 것이 보였다. 무언가 대령상궁을 통해 전달되었음을 주상은 직감했다.


“알았다. 주의하마. 지난밤에 잠을 설치다 보니 사람이 앞에 있는 게 불편하구나. 다들 상을 물릴 때까지 나가 있거라.”


임금의 식사 수발을 들어 온 궁녀 몇이 머뭇거리자, 괜찮으니 얼른 어명을 따르라는 대령상궁의 눈짓이 그녀들을 내몰았다.

주상은 상궁들이 방을 나가자 곧바로 국사발 아래 갈색 천을 빼들었다.

작은 주머니 안에는 여러 번 접은 서찰이 들어 있었다. 조선 주둔 청군의 총사령관 원세개의 전언이었다.


‘미시(오후 1시 ~ 3시) 끝무렵에 진입한다.

총포 소리가 들리면 곧바로 움직여라. 창덕궁 동쪽 담장 옆길을 따라 이동한다.

옥류천 옆 취한정을 지나 건무문으로 나온다. 북관묘로 오면 청군이 대기하고 있다.

이 길 말고는 총포가 쏟아져 위험하다. 정해진 길을 지켜 속히 탈출하라.’


두 번 세 번 반복해 읽은 다음 주상은 서찰을 다시 작게 접었다.

급하게 움직이는 주상의 두 손이 떨렸다. 주상은 주머니에 다시 서찰을 넣은 다음 힘주어 빠르게 음식을 씹었다.


이 서찰을 중전에게도 전해야 한다 생각하니 마음이 급했다.

그렇다고 아침을 거를 수도 없었다. 든든히 먹고 힘을 내야 되는 날이었다.

주상은 바쁘게 식사를 하면서 어떻게 서찰을 전달해야 할지 생각했다. 방안이 떠오른 순간 주상은 수저를 놓고 대령상궁을 불렀다. 밥그릇은 깨끗이 비어 있었다.


“대령상궁은 식혜를 가져 오라!”


콕 집어 자신을 지목했다는 것은 임금이 몰래 전달된 글을 발견해 읽고 수긍했다는 표시라고 대령상궁은 짐작했다.

그리고 부리나케 소주방으로 달려가 식혜 쟁반을 들고 왔다.



주상은 입을 떼지 않고 식혜를 들이켜서 한 번에 대접을 비웠다. 그리고는 대령상궁이 들고 온 쟁반에 서찰이 든 갈색 주머니를 깔고 그 위에 식혜 대접을 올려놓았다.

대령상궁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주상이 무엇을 하는지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중전도 식혜를 좋아하는데 오늘은 들었는지 모르겠구나.”


중전에게 서찰을 전달하라는 지시를 대령상궁은 알아 들었다.


“제가 중전마마께 잘 챙겨서 올리겠나이다. 전하.”


임기응변으로 지어낸 말들이 제법 통하고 있었다. 주상은 내친 김에 한 발 더 나아가 보기로 했다.


“일전에 경기 감영에서 올렸던 엿길금으로 만든 식혜가 맛이 좋았는데 오늘 내온 것도 게서 온 것이냐?”


주상 입에서 나온 ‘경기 감영’이란 말을 듣자 대령상궁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자신이 제대로 판단해서 움직였다고 주상이 확인해 주는 말처럼 들렸다.


“예. 그리 알고 있사옵니다. 마침 경기관찰사가 입궐했으니 제가 물어 보겠사옵니다.”


심상훈이 돌아왔다면 청군 측에서 보냈다는 서찰은 확실히 신뢰할 수 있었다.

주상도 특이한 대화가 잘 통한 것에 흡족해 했다. 대령상궁은 식혜 사발을 올린 쟁반을 받쳐 들고 주상 앞에서 물러섰다.



쟁반을 들고 방을 나선 대령상궁이 마루를 내려서 신발을 신을 때였다.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보시오, 대령상궁.”


대령상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서재필의 음성이었다.

대령상궁은 조심스럽게 몸을 반쯤만 돌렸다. 그러면서도 쟁반은 서재필의 반대편 쪽으로 어색하게 들고 있었다.


“지금까지 궁궐의 법도를 잘 지켜 왔겠지만 이제는 잘못된 것이 있소.”


법도가 잘못됐다니, 대령상궁의 가슴이 다시 한 번 내려앉고 있었다.


‘이 사람이 서찰을 본 것인가?

주상께서는 서찰을 좋게 보신 것 같은데, 내가 이것을 들고 도망쳐야 하나? 그럴 수 있을까?’


서재필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떼기까지, 불안한 대령상궁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오늘 새 조정의 정령이 정식으로 반포가 될 것이오만, 어제 어전에서 승인을 얻었소. 이제는 우리 군주께 전하가 아니라 폐하라는 칭호를 드리기로 했소.”

“아···, 예······”


대령상궁은 쟁반을 받쳤던 한쪽 손으로 자기 가슴을 짚었다.


‘이 사람이 장난도 아니고 사람을 이렇게 놀래키나?’

군주의 칭호는 국가의 권위를 위해 중요한 것이지만 이 순간 간이 떨어질 뻔한 여인 입장에서는 들고 있는 비밀 서찰에 비해 너무도 하찮은 것이었다.


“경사스러운 결정입니다. 백성들도 좋아할 것입니다.”


억지 미소와 함께 가식적인 맞장구를 쳐준 대령상궁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계단을 딛던 그녀는 땅을 밟자마자 뛰는 것 같이 잰 걸음으로 마당을 빠져나갔다.



주상에게 서찰을 보이고 나니 대령상궁이 서찰을 중궁전에 전달하는 것은 한결 수월했다.

중전은 주상이 챙겨서 보냈다는 식혜 쟁반을 처음부터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 워낙 다감한 성품의 주상이었지만 이 시국에 안사람 마실 것을 신경 쓰고 있을 리 없었다.


식혜 사발 밑에 예사롭지 않은 주머니가 있는 걸 곧바로 알아 본 중전은 즉시 아랫사람들을 내보내고는 서찰 내용을 꼼꼼하게 암기했다.

그리고는 방 안에 아직 끄지 않았던 등잔불 하나를 당겨 와서 서찰을 빈 대접 위에 놓고 태워버렸다.


대령상궁에게 재가 담긴 쟁반을 건네준 다음 중전은 지체하지 않고 대왕대비의 침소로 향했다.

이른 아침의 방문에 단순한 문안인사가 아님을 알아차리는 눈치 빠른 대왕대비에게 소리 낮추어 탈출 계획을 전한 다음, 중전은 세자를 찾아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세자. 오늘은 하루 종일 어미 곁을 떠나지 마시오.”


아들인 세자는 어머니의 생각을 전부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절대 거역해서는 안 될 분부라고 짐작할 수는 있었다.



관물헌의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주상과 개화당 양쪽은 모두 청군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군을 바라보는 각도는 완전히 반대였다. 주상은 청군 진입을 알리는 첫 번째 총성이 울리면 어떻게 궁궐을 빠져나갈지를 생각하고 있었고, 개화당은 청군의 진입을 어떻게 막아내야 할지가 고심거리였다.


방어를 위한 회의를 시작하려고 관물헌 월방에 들어오자마자 김옥균은 자신을 찾는 급한 목소리를 들었다.

궁궐 밖과의 연락을 맡아 바쁘게 뛰어다니는 이서방, 이점돌이었다.


“고균 나으리! 급보입니다!”


곧바로 방을 나온 김옥균에게 이서방은 서찰이 담긴 무명 주머니를 내밀었다.


“대치 어르신이 방금 돈화문에 와서 주시고 가셨습니다.”


김옥균은 서명을 보기 전에 유대치의 글씨라는 것을 알아 봤다.

그리고 유대치가 필사한 언문 편지를 보고는 진홍이 캐온 정보가 분명할 거라고 짐작했다.

김옥균이 보기에 편지의 내용은 심각했다.


‘청군 진영에 조선 대감들이 드나들고, 김 ․ 심 대감이 청 장수들과 회의를 했으며 심대감이 큰 도움이 된다.

궁 안 소식이 새 나오고 있고 청군은 싸울 준비가 돼 있다. 민영익은 살아 있다.’


김옥균은 편지를 읽은 후 고개를 들어 개화당 동지들을 봤다. 모두 김옥균을 주시하고 있었고, 김옥균의 표정에 따라 다들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굳은 얼굴 중의 한 명은 언문 편지에 ‘심대감’으로 언급된 심상훈이었다.

심상훈은 방 안에서 가장 긴장한 사람이었으며 긴장한 티를 감추려고 가장 애쓰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김옥균은 ‘심대감이 도움이 된다, 궁궐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는 부분을 읽으면서도 심대감이 심상훈이고 그가 궁궐 안팎을 오가는 간자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단순한 추리가 될 일이었다. 궁궐을 드나든 사람 중에 개화당 사정을 알 만한 사람은 심상훈이고, 그런 심상훈 즉 심대감이 청군과 사대당을 돕는다면 확실히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심대감은 연로한 친청파 우의정 심순택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중요한 가능성을 못 보게 하고 있었다.

김옥균만 심상훈의 혐의를 놓친 건 아니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생각으로 김옥균은 동지들이 심각성을 인식하도록 편지를 돌려 읽게 했다. 심상훈에 이르기까지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편지를 읽었다.

간이 콩알만해진 심상훈을 제외하면 누구도 궁궐의 정보를 빼돌리는 게 경기도관찰사 심상훈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개화당의 대부분은 새나갔다는 궁궐 소식은 쫓겨난 내시들에게서 나온 거라고 추측을 했다.


‘김대감과 심대감은 김홍집과 심순택인 게야. 도움이 된다는 심대감 역시 심순택을 다시 말한 거라고 우겨야 돼.

혹시라도 의심하는 이가 있으면··· 내가 청나라 편이라면 애써 빠져나간 적진에 왜 돌아오겠냐며 되려 화를 내야 돼.’


심상훈은 쿵쿵 울리는 자기 심장 박동이 남들에게도 들릴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끼면서, 유사시에 변명할 말을 정리하려고 머리를 쥐어짰다.

그러면서도 남모르게 방 안에 있는 이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에게는 천만다행이게도 ‘심대감’을 심상훈일 거라 의심하는 이는 없어 보였다.


대령상궁에게 서찰 주머니를 넘긴 지 한 시간도 안 돼서 심상훈은 훨씬 더 초조한 순간을 견디고 있었다.

안팎으로 경계를 강화하고 전투 준비 태세를 하나하나 점검해야 한다는 얘기로 안건이 전환될 때, 심상훈은 맥이 빠져서 그 자리에 쓰러지는 줄 알았다. 겨울 아침에 흐른 식은땀을 그는 남모르게 닦아냈다.


청군이 전투 준비가 돼 있고 궁궐에서 정보가 샌다는 소식으로 개화당에게 닥친 충격이 끝나지 않았다.

아군의 준비 태세를 점검할 차례가 됐을 때, 박영효가 들고 온 소총이 개화당을 더욱 긴장하게 했다. 박영효는 둘러앉은 이들 가운데로 나서며 가져 온 소총을 잘 보이도록 들어 올렸다.


“이것은 영국제인 스나이더 소총이요. 우리 전후영 군사들의 소총 대부분이 스나이더요. 일본 공사관 병력도 같은 총을 쓰고 있소.

노리쇠를 뒤로 당겨서 탄환을 넣고, 다시 노리쇠를 밀고 돌려서 닫은 후 방아쇠를 당겨 격발시키게 돼 있소. 그런데,”


박영효는 직접 노리쇠를 잡아당겨 보였다. 끼긱, 답답한 소리만 내면서 노리쇠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손보지 않아서 녹슨 총이 못쓸 지경이 돼 있소.”


박영효는 총을 돌려들고 총구를 들여다 보았다.


“노리쇠만 굳어버린 게 아니오. 이 총구도 두터운 녹으로 총탄이 통과하지 못할 지경이오.”


동지들의 굳은 표정을 잠시 확인한 다음 박영효가 총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런 게 한두 정이면 다행이겠소만 대다수가 이 모양이외다. 전후영 군사가 천 명 가까이 되는데 지금 멀쩡히 격발할 수 있는 소총은 채 오십이 안 될 것이오.”


정말 그 지경인가, 혹시 빠뜨린 총기는 없는가, 참담한 현실을 믿지 못하는 말들이 곳곳에서 나왔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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