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삼일(三日)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09.22 18:39
최근연재일 :
2023.11.03 22:10
연재수 :
69 회
조회수 :
1,093
추천수 :
227
글자수 :
344,383

작성
23.10.27 21:10
조회
6
추천
2
글자
11쪽

사흗날(8)

DUMMY

신이가 살짝 고개를 숙여 목례하자 정찰병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조금 긴장한 눈치였다.


배웅을 나선 이서방까지 세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진선문 앞에서 보초 교대를 하고 돌아오는 두 명의 병졸이 키 큰 정찰병을 알아 봤다.


“종수! 궐밖에 정찰 가는가?”

“그래 됐네.”

“귀한 아들 돌잔치 챙기지 말고 곧장 환궁해야 돼!”

“니놈 보기 싫어서 안 돌아올랜다.”

“안 오더라두 내 색시 만나러 가지는 말어라. 내 청나라 놈들한테 일러바칠 테다.”


실없는 소리로 긴장을 덜어주고 병졸들은 엇갈려 헤어졌다. 정찰병 옆에서 걷던 이서방이 물었다.


“집에 아들이 돌이요?”

“예. 저는 아들 많은 집에서 자라서 마지막 놈이라고 끝 ‘종’자 이름을 받았는데, 제 아들은 뒤늦게 하나 봐서 이제 막 걸음마 배우지요.”

“눈에 밟힐 텐데 언제 집에 가게 될지 모르겠네······.”

“얼른 시국이 조용해져야지요.”


신이와 종수가 금호문을 나서면서 이서방과 헤어졌다. 이서방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가는 신이를 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너는 어느 쪽으로 가니?”

“태평방으로 가니까 일단 이 길로 똑바로 가면 돼요.”

“그래. 종거리까지는 같이 가면 되겠구나.”


그들은 남 보기에 그저 같이 일하러 다니는 나이 차가 있는 형제 같았다.

두 사람은 발은 재게 놀렸지만 두런두런 계속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었다. 남들에게 무심히 거리를 지나는 사람으로 보이려는 의도도 있었으나 특별한 상황에서 만난 인연 때문에 서로를 가깝게 느끼고 있었다.


신이가 원래 종살이하던 처지였는데 면천되고 한양에서 아버지와 지붕 고치는 일을 했었다고 밝히자 종수는 신기해 하면서 웃었다.


“야, 대단한데! 나도 장가들기 전까지 지붕 고치는 데를 쫓아다녔는데. 인연이구나!”

“그러면 나나 우리 아버지를 만났을 수도 있겠네요.”


그렇겠다면서 종수는 자신이 일했던 장소들을 되짚고 있었다.

두 사람은 네거리로 다가가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운현궁, 왼쪽으로 가면 태묘(종묘) 담벼락이 나오는 길이었다.


“교동의 무슨 참판집에선가 내가 처음 지붕에 올라가······”


‘픽’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종수가 말을 멈추길래 신이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봤다. 종수는 오른쪽 옆구리를 쥐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붉은 색이 번져 보였다.

‘픽’ 종수의 목에 짧은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쇠뇌(노弩, 석궁과 유사함)다!’


신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굽혔다.

종수는 이미 눈을 부릅뜬 채 쓰러지고 있었다. 땅바닥에 엎드리니 넘어진 종수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눈을 감지 못하고 목에서 피를 뿜는 종수는 이미 산 사람 같지 않았다.


‘픽’ 또 화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신이는 종수의 얼굴 위로 살짝 고개를 들어 날아온 쪽을 봤다. 운현궁 쪽 골목에서 청군 군복이 보였다.

신이는 반대편으로 몸을 굴렸다. 그리고 거의 네 발로 기듯이 허리를 굽힌 채 달리기 시작했다.


골목에서 뛰쳐 나오는 청나라 말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신이는 있는 힘껏 달려서 앞에 보이는 기와집 담장으로 솟구쳐 올랐다. 가슴이 담장 위 기와에 닿자 신이는 정신 없이 다리를 끌어올렸다.

청군의 고함 소리와 함께 ‘픽, 픽’ 연달아 바람소리가 났다.

오른발을 담장 위로 올린 다음 그대로 반대편으로 신이가 몸을 떨구자 화살 세 개가 연달아 담장에 날아와 박혔다.


쿵! 기와집 마당에 어깨로 떨어지자 무를 다듬고 있던 계집종이 비명을 질렀다.

신이는 아픈 줄도 모르고 일어나서 다시 달렸다. 마당 반대쪽으로 뛰어가 매화나무에 매달린 다음 담장 위로 올라가 달렸다.

기와 하나 떨구지 않고 숨도 안 쉬고 달려서 신이는 담장 끝에서 뒷길로 뛰어내렸다.


‘청나라 놈들이 바깥 소식이 궁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다. 이미 놈들이 궁궐을 포위했나보다.’


신이가 내려선 길은 청군이 있던 운현궁 쪽 길과는 거리도 있고 많은 집들이 골목을 만들며 가로막고 있어서 쫓아오기 어려운 곳이었다.

더 이상은 추격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 신이는 입을 벌려 크게 심호흡을 했다.


정신없이 달리고 기어오르고 뛰어내리느라 가쁜 숨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담장에서 바닥으로 떨어질 때 부딪친 어깨와 옆구리에도 통증이 있었다.

신이는 제자리에서 팔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다행이라 여길 때 목에 화살이 박힌 채 눈을 뜨고 죽은 종수가 생각났다. 방금 전까지 지붕 고치는 일꾼을 만났다고 반가워하고 걸음마 하는 아들 생각에 미소 짓던 사람이 시체가 됐다.

살고 죽는 엄청난 차이가 너무나 짧은 시간에 생겨났다. 좀처럼 거친 숨이 잦아들지 않아서 신이는 입을 크게 벌리고 하아 하아 깊은 숨 쉬기를 반복했다.



신이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종거리로 접어들었을 때, 북장문을 통과한 두 정찰병은 좁은 오솔길을 통해 응봉을 오르기 시작했다.

신이가 보고한 것에 따르면 북장문보다 동쪽 성균관 방향에 청군이 다가오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곧장 북동쪽 산으로 통하는 길을 택하면 나가자마자 청군과 맞닥뜨릴 수도 있었다. 두 정찰병은 일부러 높은 쪽으로 돌아서 적군의 위치를 파악할 요량이었다.


겨울이라 나무들이 헐벗었지만 궁궐 뒷산은 함부로 벌목할 수 없는 곳이라서 빽빽한 나무들 틈에 몸을 숨길 만했다. 두 사람은 나무와 나무 사이로 낙엽을 밟는 발소리도 조심하면서 동쪽 방향을 향해 산을 올라갔다.

작은 능선 하나를 넘어서 내리막이 나오는 지점에서 선배 정찰병이 젊은 병사에게 말했다.


“여기서 한 번 확인해 보고 움직이자.”

“예.”

“저 쪽이 북관묘에서 넘어오는 길인데 보일 듯 말 듯하네.”


제법 잎이 무성해 몸을 가릴 만하고 가지가 옆으로 퍼져 오르기 편한 소나무가 곁에 있었다. 선배 정찰병이 후배에게 눈짓을 했다.


“올라가 볼까요?”

“그래.”


후배가 가볍게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옆으로 비스듬히 뻗은 어른 허벅지만한 가지에 발을 딛고 서서 동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북관묘 쪽, 산길에 사람이 있어요. 여럿이네, 줄줄이···”


팍, 뭔가 날아와 꽂혔다. 후배가 나무를 붙잡고 있던 왼손 옷소매를 화살이 꿰뚫고 소나무 줄기에 박혔다.


“어, 이거··· 어디서 왔지···?”


깊이 박힌 화살은 쉽게 빠지지 않았다.

후배가 놀라서 왼팔을 흔들 때 나무 아래 선배도 당황하고 있었다. 팔을 들어서 후배의 바지라도 잡고 당겨주려고 할 때 다시 퍽, 꽂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아··· 어떡하지······?”


배에 화살이 깊이 박혀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은 북관묘가 있는 동쪽이 아니었다. 두 정찰병보다 높은 북쪽 산기슭에 궁수가 미리 숨어 있었다.

선배 정찰병은 후배의 다리 쪽으로 팔을 뻗다 말고 주저앉아 몸을 움츠렸다. 그때 또 한 발의 화살이 날아와 후배의 겨드랑이 아래 박혔다.


응봉 산기슭에서 각궁을 겨누고 있는 것은 청군이 아니라 조선군 좌영 군사들이었다.

두 시간 전부터 매복하고 있던 그들은 이제 나무 위의 사내가 아니라 그 아래 움츠린 사내를 맞히려고 나무 사이의 흰 옷색깔을 찾아 이리 저리 겨냥을 옮겨 대고 있었다.


선배 정찰병은 산비탈을 기기 시작했다. 북쪽 높은 지점에 궁수가 있고, 동쪽에서는 군부대가 접근하고 있다.

남쪽으로 내려가 궁궐로 가거나 서쪽 계동 방향으로 도망가는 길밖에 없었다. 선배 정찰병은 적들이 여기까지 왔다면 궁궐도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다.

적들이 총 대신 활을 쏘는 것은 그들의 유리한 위치를 드러내지 않겠다는 표시였다.


‘내가 궁궐로 돌아가게 내버려둘 리가 없어. 포위 매복하고 있다는 걸 내가 보고하면 안 되니까. 기를 쓰고 죽이려고 할 거야.’


게다가 궁수들은 자신이 올라왔던 경로를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궁궐에 알리지 않으면······’


궁 안의 사람들이 장차 위험해질 게 뻔했다.

하지만 궁궐로 돌아가는 걸 택하면 당장 자기가 위험해질 터였다. 정찰병의 뇌리에 식구들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서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정신없이 기기 시작했을 때, 화살에 꿰뚫린 옷소매가 찢어지면서 소나무에 매달렸던 시체가 땅으로 쿵 떨어졌다.



쿵, 쿵, 쿵, 쿵.

남쪽을 향하고 있는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과 창덕궁과 연결된 창경궁의 동쪽을 향한 선인문, 조용하던 두 대문 앞에 무거운 발자국 소리들이 울리기 시작했다.

궁궐 문 앞에서 수직을 서던 조선 군사들의 심장 소리도 쿵쿵쿵 점점 크고 불안해졌다.


창경궁 맞은편 경모궁 옆 오조유의 군영에서, 태묘 서쪽 담장 옆길에서 청나라 군사들이 두 개의 대문 앞으로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무 구호도 외치지 않고 나팔도 북도 울리지 않았다. 그저 열을 지어 조용히 걸어와서 대문 앞에 한 줄 두 줄 세 줄 겹겹이 횡대로 도열하기 시작했다.


알파벳 S처럼 몸을 구부린 용을 수놓은 깃발들이 병사들의 투구 위에서 세차게 휘날렸다.

돈화문 앞에 원세개가 거느린 육백 명, 선인문 앞에는 오조유가 인솔한 삼백 명의 병력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궁궐문을 막아섰다. 이들 외에 이백의 청군이 성균관과 북관묘 근처에 배치돼, 동궐 북산으로 진입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또 다른 청군 장수 장광전이 이끄는 사백 명 가량의 청군은 예비대로 동궐에서 떨어진 곳에 대기하고 있었다.


두 대문에서 각각 관물헌을 향해 전령들이 온힘을 다해 달려갔다.

창을 든 채 청나라 군대를 마주보고 선 군사들은 다리가 후들거려서 오금이 접힐 지경이었다.


돈화문에 세 명, 선인문에 두 명 소총을 어깨에 멘 군사들은 한 손으로 총 멜빵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총을 풀어서 겨눠야 하나, 물러나서 궁궐문을 걸어잠가야 하나,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모르는 채 그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양쪽 문에서 달려온 군사가 관물헌 앞에 도달할 즈음, 양쪽 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자기 심장 소리를 귀로 들을 지경일 때였다.

조용히 버티고 서 있는 청나라 군대 뒤쪽으로 다시 수많은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발자국들은 조용히 걸어오지 않았다.

충군(忠君)과 존명(尊命)을 외치는 함성이 울렸다. 조선말, 조선 사람이었다.


청군과 연합한 좌우영 군사들의 목소리를 들은 양쪽 대문 수비병들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세상이 우리 편이 아니라는 냉혹한 충격의 소리였다.

오후 두 시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삼일(三日)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오후 9시 10분, 10시 10분에 업로드합니다. 23.10.09 8 0 -
공지 하루 두 편씩 업로드 23.10.02 10 0 -
공지 연재 시각은 주 6회(월~토) 오후 9시 10분입니다. 23.09.22 31 0 -
69 다음날(4)-최종화 23.11.03 15 3 12쪽
68 다음날(3) 23.11.03 9 2 13쪽
67 다음날(2) 23.11.03 7 2 12쪽
66 다음날(1) 23.11.03 7 2 12쪽
65 사흗날(17) 23.11.01 8 2 12쪽
64 사흗날(16) 23.11.01 6 2 12쪽
63 사흗날(15) 23.10.31 7 2 12쪽
62 사흗날(14) 23.10.31 9 2 12쪽
61 사흗날(13) 23.10.30 7 2 12쪽
60 사흗날(12) 23.10.30 8 2 11쪽
59 사흗날(11) 23.10.28 8 2 11쪽
58 사흗날(10) 23.10.28 8 2 12쪽
57 사흗날(9) 23.10.27 8 2 12쪽
» 사흗날(8) 23.10.27 7 2 11쪽
55 사흗날(7) 23.10.26 7 2 12쪽
54 사흗날(6) 23.10.26 6 2 12쪽
53 사흗날(5) 23.10.25 10 2 13쪽
52 사흗날(4) 23.10.25 9 2 12쪽
51 사흗날(3) 23.10.24 10 2 12쪽
50 사흗날(2) 23.10.24 7 2 12쪽
49 사흗날(1) 23.10.23 8 2 12쪽
48 이튿날(21) 23.10.23 7 2 12쪽
47 이튿날(20) 23.10.21 8 2 12쪽
46 이튿날(19) 23.10.21 8 2 12쪽
45 이튿날(18) 23.10.20 8 2 12쪽
44 이튿날(17) 23.10.20 9 3 13쪽
43 이튿날(16) 23.10.19 7 2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