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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삼일(三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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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09.22 18:39
최근연재일 :
2023.11.03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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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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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4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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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사흗날(2)

DUMMY

“내가 이 서찰을 동궐에 전해야겠네.”

“예, 제가 가기 어려워서 전달을 부탁드리려고 가져 왔습니다.”


서찰을 이대로 전해도 되나, 유대치는 잠깐 생각했다.

글쓴이의 필적이 드러나는 서찰 원본을 개화당 여럿이 함께 있는 창덕궁으로 보내기는 꺼림칙했다.


“내가 이 언문 편지를 그대로 옮겨 적고, 봉서 겉장과 간략한 한문 설명을 덧붙인 다음 가지고 가야겠어.”


진홍도 만약을 위해 정보원의 신분을 감추려는 유대치의 뜻을 알아챘다.


“제가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들고 온 원래 편지는 필사한 다음에 없애는 게 낫겠습니다.”


유대치는 여전히 흐느끼고 있는 계향을 보면서 다른 용건을 말했다.


“운영각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가까운 데 일가붙이가 있는 아이들은 어제 오후에 며칠 다녀오라고 내보냈고, 지금은 둘만 남아 있습니다. 행랑아범과 찬모, 저까지 더하면 다섯이지요.”


유대치와 진홍은 정변이 위기에 처하면 자신들과 딸린 식구들도 위험해질 수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유사시에 피난할 수 있는 대책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둘만 남아 있는 아이도 일단 주변의 다른 청루에 말을 넣어 놓았습니다. 사세가 위태로워 보이면 그쪽으로 보낼까 합니다.”

“다른 아이들은 그렇다 치고 정작 안주인인 자네는 어쩌려는 건가?”

“여차해서 저 혼자 움직이게 되면 외려 홀가분합니다. 저까지 심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유대치는 진홍이 말만 듣는다면 강요를 해서라도 도성 밖으로 내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진홍이 스스로 뜻을 정하면 꺾기 힘들다는 것을 유대치는 잘 알았다.


“계향이도 말이야···”


어깨를 들썩이면서도 계향이 고개를 들어서 유대치를 봤다.


“지금 몸이 좀 힘들더라도 세마꾼을 찾아서 마석에 있다는 친척집으로 보내는 게 나을 것 같네.”

“선생님, 저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울음을 그치지 못하면서도 계향은 신세지는 것을 미안해 했다. 부담을 덜어주려고 진홍이 나섰다.


“아니다. 말 빌리는 삯은 내가 드릴 테니 너는 걱정 말고 갔다가 조용한 때에 오면 된다.”

“언니, 그럴 거 없어요. 내일쯤이면 나아질 거예요. 한나절 걸음에 마석에 당도할 수 있어요.”


잠시 오늘 도성을 나가네 안 나가네 실랑이가 벌어졌다.

계향이 유대치와 진홍의 강권을 못 이기고 수락하자, 이번에는 세마 비용을 놓고 유대치와 진홍이 서로 부담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진홍이 유대치의 뜻을 따르는 척하다가 툇마루 끝에 엽전 꾸러미를 던져놓고 달아났다.


진홍의 고집에 혀를 차며 유대치는 약방 심부름꾼을 불렀다.

진홍이 남기고 간 돈에 자기 돈을 보태서 마부를 불러오게 시킨 후 유대치는 자기 방으로 가서 붓을 들었다.


그는 언문 편지를 베껴 적은 다음에 원본을 불태웠다.

그리고 김옥균에게 직접 전달하라며 보내는 자신의 이름을 적은 겉봉과, 이 글은 청군 장수와 가까운 이에게 얻은 믿을 만한 정보라는 한문 설명을 덧붙였다.

준비를 마치고 창덕궁을 향해 나서기 전에, 그도 집안 식구들을 불러서 언제라도 집을 비우고 몸을 피할 수 있게 준비를 하라고 단단히 일렀다.


우정총국 앞에 불이 타오르고 두 번의 밤이 지난 아침, 개화당은 여전히 국왕과 함께 있지만 그들을 둘러싼 불안감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애초의 계획과 달리 어가가 궁궐로 돌아왔다는 것이 알려진 순간, 개화당을 아는 많은 이들이 총성과 죽음을 예감했다.

얼마나 많은 이가 또 목숨을 잃어야 하는가, 운영각으로 돌아가는 진홍도 창덕궁으로 향하는 유대치도 떨쳐낼 수 없는 의문이었다.



수도 없이 드나들었던 창덕궁이 낯설게만 보였다.

궁궐의 우두머리인 임금의 수족 노릇을 하는 자신도 이 궁궐의 일부라고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이 아침에는 돈화문에서 관물헌까지 수직을 서고 있는 군사들이 적군으로 보였다.


심상훈은 삼국시대 이야기 속의 박제상을 떠올렸다.

박제상이 고구려와 왜국에 가서 왕자들을 구할 때처럼, 자신도 볼모로 잡힌 왕을 도우러 남의 궁궐에 들어선 것 같았다.


관물헌 앞마당에 들어설 때, 선인문 쪽 방비 태세를 확인하고 돌아오는 김옥균을 만났다.

심각한 표정이던 김옥균은 심상훈을 보고 얼굴이 확 밝아졌다.

만나면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할지 지난 밤 내내 되뇌고 온 심상훈이지만 반가워하는 김옥균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심대감, 어서 오시오.”

“지난 밤엔 편히 주무셨는지요?”

“환궁하고 정령 반포 준비하고 마음이 바빠서 좀 설쳤소이다. 그래 운양공은 만나 봤소?”

“뵈었지요. 댁으로 찾아가니 몸살이 심하셔서 거동을 못하고 계셨습니다.”


김윤식이 아프다는 얘기에 김옥균은 조금 안심하는 눈치였다.

진짜로 아파서 입궐을 ‘못’한 것이기를 김옥균은 바랄 거라고 심상훈은 생각했다.


“이런, 편찮으셨구만. 조보는 보셨답니까?”


‘김윤식은 자신이 예조판서에 임명된 것을 알고 있었는가, 입궐해서 개화당과 같이 새 조정에 참여할 생각이 있다던가’를 묻는 질문이었다.


“보셨다 하셨습니다. 입궐해서 주상전하를 뵈어야 하는데 송구스럽다 하셨습니다. 이삼 일 내로 몸을 추스르고 입궐하실 수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다행이구려. 운양공께서 묘당에 나오시면 큰 힘이 될 겁니다.”


김옥균의 밝은 표정에 맞춰서 심상훈은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김옥균이 자신의 말을 믿어주니 웃음을 꾸미는 게 어렵지 않았다. 물론 김윤식이 이삼 일 내로 개화당 내각에 합류한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지난밤에 김윤식을 만나기는 했지만, 김윤식은 심상훈에게 청군이 진입하는 것은 피할 수 없게 됐으니 일단 입궐하면 김옥균을 안심시키라고 했었다.


“나는 금호문 쪽까지 돌아보고 와야 되오. 조금 이따 관물헌에서 조반 같이 합시다.”



김옥균과 헤어진 후 심상훈은 주상의 수라상을 준비하고 있는 내소주방으로 갔다.

왕과 왕비 가까운 곳에는 일본당의 감시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었다.

심상훈은 자신이 직접 왕과 왕비를 만나 청군의 진입과 그에 따른 탈출 경로를 알릴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수라상을 들고 들어가는 상궁을 이용해서 서신을 전달하려고 계획한 것이다.


내소주방 앞에 개화당의 장사나 전후영 군사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음식을 준비하는 주방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심상훈은 오래 된 향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담장에 붙어 섰다. 신경 써서 두리번거린다면 눈에 띄겠지만 무심코 내소주방을 드나드는 이는 못 볼 만한 위치였다.


‘아침 수라 준비가 끝날 때까지 서찰을 맡길 만한 궁녀를 만나야 하는데······.’


초조한 심상훈의 눈에 수라상을 점검하러 온 대령상궁이 소주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제조상궁 바로 아래, 궁녀의 이인자로 국왕과 왕비를 가까이서 보필하는 대령상궁은 정변이 일어난 뒤에도 바뀌지 않았다.

‘개화당과 가까운 궁녀라 안 바뀐 걸까?’

궁궐 내밀한 곳에서 일하는 지밀상궁들에 대해서는 심상훈도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심상훈은 애써 대령상궁과 관련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저 상궁을, 저 상궁을 본 적은 있는데······.’

심상훈의 기억으로는 대령상궁이 유재현과 또 중전과 가까이 있는 모습을 본 것 같았다.


‘내 기억이 정확한 것인가? 달리 방도가 없으니 부담스러운 물건을 빨리 떠넘기려고 하는 게 아닐까?’

자기 기억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심상훈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으니, 계획이 완벽하지 않다 한들 어쩔 수가 없었다.


‘주상과 중전을 모셔온 상궁이라면 작금의 상황을 양전께서 원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 것이다. 주상과 중전을 위한다면 나의 부탁을 함부로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대령상궁 게 있는가?”


결심을 한 심상훈은 내소주방 문 앞에서 목청을 돋웠다.

불안한 이틀밤을 보낸 임금께서 입맛을 잃지 않도록 아침상에 주의를 당부하고 있던 대령상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낯익은 대신이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경기관찰사 심상훈이네.”


대령상궁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예. 뵌 적이 있습니다. 어인 일로?”


심상훈은 걱정스런 마음을 진정시키고 소매 속에 감춘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어제 집에 돌아가서 옷칠한 밥상의 색과 같은 짙은 갈색 천을 찾아 아내에게 작은 주머니를 만들게 했었다. 그 주머니에 서찰을 담아 밥그릇이나 국그릇 밑에 받쳐 놓으면 눈에 잘 띄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나름의 고민 끝에 나온 계책이었다.


“이 속에 있는 것은 글이네. 주상전하께 조용히 바치려는 글.”


대령상궁은 순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내시감 유재현의 죽음을 직접 목격했던 대령상궁이었다.

하지만 심상훈 입장에서는 여기서 계획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신하가 임금께 글을 올리는 건 잘못이 아니네. 글이 전하를 해칠 수는 없네.”


심상훈의 말에는 글을 몰래 올리려는 자기가 잘못이 아니라, 몰래 전달해야 할 상황을 만든 일본당이 잘못이란 뜻이 담겨 있었다.


“그렇지요.”


다행이었다. 심상훈은 대령상궁과 뜻이 통했다고 생각했다.

원세개의 편지가 담긴 주머니를 건네면서 심상훈은 그녀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경험 많은 궁녀의 눈빛은 차분했다. 이 여자라면 침착하게 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심상훈은 생각했다.


“주상전하께 남모르게 보여드려야 하네. 만에 하나 주상께 드리기 전에 문제가 생기면 경기도 관찰사가 강권해서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라고 하게.

전하께 드렸는데 보신 연후에 이 글이 마음에 안 드시면 그땐 경기관찰사 심상훈이 벌을 받으면 되는 것이네.”


심상훈은 갑자기 위험한 일을 맡게 된 여인을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여인이 두려움을 덜어야 일이 쉬울 것이고, 어려운 일을 떠맡긴 자신도 덜 미안해질 것 같았다.

대령상궁은 너그러운 승낙으로 오히려 심상훈을 안심시켜 주었다.


“알겠습니다. 수라상 올릴 때 조심스럽게 전해지도록 하겠습니다.”



정전으로 삼은 관물헌의 큰 방 앞에는 서재필이 버티고 서 있었다.

소주방 상궁들이 수라상을 들고 들어갈 때 서재필은 상궁 한 명 한 명을 살펴보고 상 위의 음식들도 둘러보았다.


수라상을 뒤따라 들어가는 대령상궁은 등에 식은땀이 돋는 것 같았다.

혹시라도 소주방 상궁 중 하나가 대령상궁이 수라상에 음식 아닌 것을 더 올려놓았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그리고 임금님의 국그릇 아래 오늘따라 왜 갈색 천 같은 게 깔려 있는지, 서재필이 눈 여겨 보고 묻지 않기만을 바랐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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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사흗날(4) 23.10.25 11 2 12쪽
51 사흗날(3) 23.10.24 10 2 12쪽
» 사흗날(2) 23.10.24 8 2 12쪽
49 사흗날(1) 23.10.23 9 2 12쪽
48 이튿날(21) 23.10.23 8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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