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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삼일(三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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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09.22 18:39
최근연재일 :
2023.11.03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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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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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3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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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21)

DUMMY

유대치는 마루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어젯밤처럼 치솟는 불길이 보이지는 않았다. 겨울밤답지 않은 바람에 구름이 바쁘게 달을 스칠 뿐이었다.

창덕궁과 창경궁, 동궐 위의 하늘도 어둠과 바람 외에 어떤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김옥균과 박영효를 내가 더 강하게 붙잡고 말렸어야 했나?’


저녁 때 들른 약재상이 어가 행렬이 환궁했음을 알려주었다.

유대치는 그 소식을 듣고 저녁 밥상 위에 수저를 내려놓았다. 꽉 막힌 속으로 밥과 찬이 넘어갈 리가 없었다.

어떻게 된 영문이길래 하루만에 궁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유대치는 개화당의 행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김옥균과 박영효가 거사 계획을 말할 때 유대치는 분명히 반대했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자네들의 의기가 충천하고 일본군이 잘 훈련돼 있다고 하나 청군과 사대파의 위력을 지금은 이기기 어렵다며 만류했었다.


그러나 한 곳에 몰입된 젊은이의 정신은 다른 의견에게 쉽게 틈을 내주지 않는 법이었다.

유대치는 자신이 걱정 많은 늙은이로 치부되더라도 개화당이 위험한 계획을 미루도록 하고 싶었으나 역부족이었다.


지금 차갑게 몰아치는 겨울바람처럼 개화당은 위기에 직면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는지, 여전히 자신감에 찬 채 시야가 좁아져 있는 것인지, 돌아가는 상황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유대치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이 밤에 깨어있는 자는 누구인가? 원세개인가, 중전인가, 김옥균인가······.’


어둡고 불안한 밤이 몇 번이나 거듭돼야 개화와 독립의 아침을 맞을 수 있을지, 아니 바로 몇 시간 후의 일출이나마 조용히 맞이할 수 있을지, 이 순간의 유대치는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시각은 축시를 지나 인시(03~05시)에 접어들어 있었다. 창덕궁 관물헌 월방 안의 등잔은 하나만 켜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정령의 문구를 수정하던 승지 신기선과 박영교가 잠시 눈을 붙이겠다고 그들 앞의 등잔을 불어 끄자, 박영효 앞 책상의 등잔불만 남아 흔들리고 있었다.


박영효는 등을 기대고 눈을 감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전후영사로 경계 책임을 맡고 있지 않았더라도 그는 긴장을 풀고 몸을 누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왕가의 사위라는 작위에 연연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나선 거사였다.

집을 팔아 자금을 마련했고, 스스로 조련했던 군사들을 남몰래 조직했으며, 장안의 왈패들까지 끌어들여 당을 키웠다.

직접 칼을 들고 몰아붙여서 정적들을 저승으로 보내기까지 했다. 정변에 모든 것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박영효였다.


그 덕에 일본 공사관 병력의 지원을 얻어냈고, 새 내각을 구성해 발표하고 개혁의 정령까지 완성시켰다. 형식으로는 나라를 장악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국정을 실제로 좌우하기까지는 얼마가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김윤식과 김홍집 같은 명망 있는 인사들은 합류하지 않았고, 들려오는 첩보로 볼 때 청군은 호시탐탐 공격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런 판국에 잠들이 온단 말인가?’


다급한 심정은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새우잠을 자고 있는 동지들까지 원망하게 했다.

김옥균의 심부름꾼 아이의 보고가 있은 후에 열린 회의에서도 동지들은 뾰족한 수를 내지 못했다. 박영효는 강화도나 제물포로 이어하는 안을 다시 말했지만, 동지들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기상하자마자 식전부터 모든 총포를 비롯한 무기를 점검하고 수리해서 무장을 갖춘다.

영관 이하 모든 병사들에게 임전 태세를 주문하고 각오를 다지게 한다.

경계를 확실히 하고 도성 안 적의 동태를 정찰한다.

청군의 기세에 밀리지 않고 원세개가 함부로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오늘 선인문에서의 행패를 준엄하게 항의하는 서한을 보낸다.’


지극히 당연한 결론만 이끌어낸 회의였다.

그렇게 해서 청군을 막아낸다면 다행이지만 전세가 불리할 경우 어떻게 할지 대책을 만들지 못했다.

일차적으로 청군에게 밀린다면 임금과 함께 피난해서 장기전을 불사해야 한다는 박영효의 강경책은 실행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개각 명단은 균형을 갖춰 발표할 수 있고, 개혁의 정령에는 아름다운 이상을 담을 수 있었다. 하지만 빼앗은 정권을 지켜내는 것은 좋은 말로 될 일이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때는 냉정한 판단이 필수였다.

하지만 박영효의 눈에 김옥균도 다케조에도 냉철한 전략에 따라 움직이고 있지 않았다.


‘우리 뜻을 거부한다면 왕을 죽일 각오까지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적들이 완강하게 나오면 그만 무르자고 하고 물러날 건가?

미안하다하고 되돌릴 수 있는 장난이 아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전쟁이란 말이다!’



박영효를 답답하게 만들면서 김옥균은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쾌활한 모습으로 걱정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김옥균이었지만 실은 잠든 게 아니었다.

방어전략을 위한 대책회의가 끝난 다음부터 그는 귀신들을 만나고 있었다.


지난 밤 우정국의 민영익부터 이 날 아침 경우궁의 유재현까지 개화당의 칼에 쓰러진 일곱 명이 틈만 나면 떠오르다가, 이틀째 밤 시급한 사무가 마무리되자 눈앞에서 들끓기 시작했다.


김옥균은 귀신 따위를 믿지 않았다. 살면서 헛것을 본 적도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 자기 눈 앞에 죽은 이들의 얼굴이 어른거리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었다. 바쁘고 긴장된 일에 쫓길 때는 잊혀졌다가 마음을 놓을 만하면 떠오르던 얼굴들이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어두운 방에 누운 다음부터는 쉴 틈 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갑작스런 번개처럼 튀어나와서 선뜩 선뜩 놀라게 만들던 영상들이 연속으로 밀려오자 김옥균은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을 받았다.


불안과 긴장이 만들어낸 망령된 생각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타일러 봐도 도무지 끔찍한 얼굴들은 튀어나오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 중차대한 시간을 헛되게 보내면 안 되는데, 깊은 잠으로 쉬는 게 백 배 나은데······’

한탄은 할 수 있었지만 다른 생각은 되지 않았다.


잠을 자다 가위에 눌려 몸과 마음을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의식이 깨어 있음에도 그 의식을 통제하지 못하고 송곳 같은 긴장에 눌리고 있었다.

갑갑함을 이기려고 뒤척이다가는 더 큰 불안이 올 것만 같아서 그는 꼼짝 않고 누운 채 생각했다.


‘나보다 더 험한 꼴을 본 이들도 있는데······ 직접 손에 피를 묻힌 이도 있는데······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직접 칼을 휘둘렀던 윤경순과 김봉균 등 개화당의 장사들은 관물헌 건너편 중희당의 큰 방에서 잠에 떨어져 있었다.

살육을 실행했던 이들이 코를 골고 있는 까닭이 완력이 세고 주먹다툼에도 이골이 난 왈패들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윤경순과 김봉균이라고 해서 칼로 사람을 해치는 일이 익숙할 리 없었다.


너무도 극단적인 경험을 했기 때문일까, 두 사람은 자기들 손에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장면도 떠올리지 않고 있었다.

두 시간 전 방바닥에 눕기 직전까지 두 사람의 정신은 너무도 또렷했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생생한 각성 상태가 지난밤부터 하루 종일 지속됐었다.

정말 정신에 줄이 달려 있어서 끊어지기 직전까지 보이지 않는 존재가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극도의 긴장 속에서 눈앞에 보이는 사물과 상황에 초집중 상태를 유지한 것이다. 그렇게 대단한 몰두로 참혹한 기억들을 아예 지워버리고 있다가, 긴장이 풀리는 순간 곯아떨어졌다.

어느 날 어느 시간에 끔찍한 죄업이 귀신으로 목을 졸라올지 모르지만 윤경순과 김봉균은 지금 이 순간만은 김옥균과 다르게 일말의 상념도 없이 칠흑 같은 잠의 늪에 잠겨 있었다.



귀신들을 겪으면서도 굳어버린 것처럼 꼼짝 없이 누워 있던 김옥균이 조용히 눈을 뜨고 박영효를 보았다.

박영효는 꼿꼿이 앉아서 자기 앞의 등잔불을 노려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차고 있던 환도도 오른손 바로 아래 내려놓고 있었다. 두 눈을 부릅뜬 박영효의 기세는 잠은커녕 동이 틀 때까지 눈도 깜빡하지 않을 것 같았다.


‘영효는 귀신들이 보이지 않는가? 영효는 정녕 거사의 다음 순서만 생각하고 있는가?’


다른 이들의 정신은 어떠한지 알고 싶었다. 이 큰 방 안에 누운 사람들이 모두 진짜 잠든 것인지, 아니면 눈 감은 채 죽은 이들의 원혼을 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날이 밝고 이야기할 짬이 난다 하더라도, 약해진 마음을 끄집어내는 화젯거리는 국가대사 앞에서 금물이었다.


누군가 허약해진 속내까지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얼마나 복된 일일지, 아쉬워하는 김옥균의 눈 앞에 얼굴 하나가 나타나 박영효의 모습과 겹쳐졌다.

피를 뒤집어쓴 민태호의 얼굴이 박영효 앞을 흐릿하게 가리고 있었다.

민태호는 눈과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 김옥균을 똑바로 보고 있었는데, 김옥균은 입을 벌리지 않는 민태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자네가 영익이의 벗이라지. 나이 어린 영익이를 돌보아 주게. 자네가 영익이의 벗이라지. 나이 어린 영익이를 돌보아 주게.’


김옥균은 이성적인 지식인이었다. 들려온다고 느낀 목소리는 귓구멍으로 들어온 게 아니란 걸 알았다.

고막을 울리는 소리가 아니라 자기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소리란 걸 알았다. 눈 앞에 보인다고 생각하는 민태호의 형상도 자기 머릿속의 죄스러움이 만들어낸 것임을 알고 있었다.

자꾸 반복해서 이런 형상과 소리를 떠올리다가는 언젠가는 그것들에게 사로잡힌다는 경각심도 있었다. 이러다가 진짜 귀신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두려움이 일었다.


‘그 두려움마저 버려야 돼. 정신이 나갈까 걱정하는 것이 정신을 나가게 하는 지름길이야. 다른 것을 생각하고 다른 계산을 따져 봐야 돼.’


하지만 다른 것들이 나서 주질 않았다.

머리가 잘 도는 사람이라서 무얼 조심해야 할지 경계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정작 중요한 것, 어두운 일 대신 밝은 일을 떠올릴 온기가 김옥균 속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면 안 돼. 이런 생각은 안 돼······. 자네 이러면 안 되네, 고균.

어린 영익이를 돌보아야지. 이렇게 망령된 생각으로 맴돌면 안 되네.

어린 영익이의 벗이잖나, 고균.’


다시 떠오른 민태호가 피를 흘리면서 웃었다.

김옥균은 소리를 지를 뻔했다. 망상이 그를 놀리고 있었다.

꼼짝 않고 참아내기가 힘들었다. 악을악을 쓰면서 궁궐 방바닥을 뒹굴 것만 같았다.

눈을 감아 버리자 민태호의 영상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차마 말을 하지 못하는 김옥균은 빠드득 이를 갈았다.


‘날이 밝아서 일에 쫓기다 보면 헛생각의 형상들이 사라져줄까, 그렇지 않다면 나는 언제까지 그들을 짊어지고 다녀야 할까?’


눈과 생각을 까맣게 덮어주지 못하는 어둠은 김옥균을 둘러싸고 희부옇게 떠있었다.

이대로라면 몇 시간이 지나 해가 중천에 솟는다 해도 하늘은 푸르게 빛나지 않고 침침하게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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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사흗날(2) 23.10.24 7 2 12쪽
49 사흗날(1) 23.10.23 8 2 12쪽
» 이튿날(21) 23.10.23 7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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